'민주화 선언문'(1983.8.15) 을 자세하게 읽기
1. 1980년대 학생운동과 대학가 좌파 학문들, 그리고 '6.15 선언'은, '민주화 선언문'의 숨은 의미를 완벽하게 드러내는 좋은 자료들.
이 글을 읽을 때의 원칙은 이렇다. 일단 쓰여진 바를 중시하고, 쓰여진 바에서 판단할 수 있는 이성적 추론 수준에 머물 계획이 있다. 단, 글에서 쓰여진 내용이 비진의 의사표시라 파악될 때에는, 왜 특정한 부분이 비진의 의사표시인가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를 자세하게 적어볼 생각이다.
해석의 한 시도임을 인정하며, 이것으로서의 해석의 완결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원주의적 성격을 허락해야 하는 느슨한 상황을 악용하는 좌파적 정치의 반대 논거쯤은, 이 글은 너끈히 쓰여진 자체에서 무찌를 기초를 갖춘다고 본다.
그럼으로써, 일반 국민과 현시대를 살아가는 다수 지식인들은, 한국의 좌파적 정치에 대하여 '중요 부분의 착오'를 하고 있지 않는가를 드러내 볼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글이 쓰여진 자체로만의 해석으로 머물도록 요구하는 좌파들에 전략에 속아서, 전모를 알았다면 결단코 지지하지 않았었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옹호나 우호적인 입장을 취해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국민의 지지가 시장적 상황에서의 <상징적 에너지의 지불>로 표현할 수 있다면, 민주화 개념 자체의 문제가 소수의 좌파를 제외한 다수에게는 외면을 살만큼의 의미로, 과거에 지불했던 것들을 국민들에게는 취소할 수 있는 권리가 형성된다는 점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결론으로는 사이 사이에 표현된 바와 상관없이, 중심골격의 규범으로서 제시된 바를 객관적으로 인정할 때,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는 바를 제시할 것이다. 물론, 중심골격의 규범을 숨기며, '비진의의사표시'나 '이중의 고의'를 통한 자체의 표피적인 것을 과장하는 방식을 옹호한다면, 나의 결론을 부정할 권리가 있다.
2. 글의 중심 : '민주화운동은 민족의 해방투쟁? 민족의 독립?' 이 선언문은 부제에서 표현된 명제를 해독할 수 없다면, 나머지 전체 문장들을 달달 암송하고 있다 하더라도, 아예 모르는 것과 같다고 판정할 수밖에 없다.
"민주화투쟁은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한 투쟁이다"란 부제의 정확한 이해는, 여태까지는 참고 자료의 제한으로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의 좌파들이 준 커다란 선물(?) 덕택에 이 명제 정도는 너끈히 해독하고도 남을 충분한 자료가 대중들에 공개되었다. 이 명제의 해독이 완료되면, '비진의의사표시'로 파악될 문장과 대중들의 마음을 기만하기 위한 '이중의 고의'부분이 어디인가가 명료하게 드러난다.
글의 부제만을 놓고 판정할 때, 1980년대 학생운동에서 가장 강한 세력인 민족해방계열의 의미를 지칭하는 것 같고, 그리고 [해방전후사의 인식]에서의 대한민국 건국의 완전 부정론을 지칭하는 듯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차원으로는 글에서 지칭하는 바의 '민주'의 의미는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서초동에 소재한 국립중앙도서관 2층의 북한자료실에 있는 1993년에 출간된 북한 자료([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밝히신 조국통일사상과 빛나는 구현], 평양사회과학 출판사, 1993.)는, 1983년 선언문의 의미를 밝혀주기에 좋은 가치를 갖는다. 북한 정치 권력이 북한 주민에 대하여 내세우는 언어라는 특수성은, 1983년 선언문의 의미를 보여주는 좋은 근거점을 준다. 1983년 선언문은 한국의 1980년대 학생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1993년의 이 글은 (어찌된 일인지) 한국 대학가의 통일을 앞세우는 학생운동세력의 이념을 충실히 해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1) 1980년대 학생운동기에 대학생활을 보낸 이들에겐, 1983년의 민주화 선언문은 학생운동권의 정치론과 상관성이 짙다고 파악될 것이다. 그리고, 학생운동권 주체사상파들의 정치론을 이해하려면, 북한의 주체사상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계승(스탈린주의를 포함하는)물로 이해해야 한다.
-인용문 시작- 북한은 '하나의 조선'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전국적 범위(전 한반도)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의 완수'의 국가목표도 고수하고 있다. 한국을 해방하여 통일을 완수함으로써 한국으로부터 오는 체제 위협을 제거하겠다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북한은 총체적 국력에서 한국에 비해 열세임을 잘 안다. 그러나 북하은 한국사회가 다원주의 가치관을 앞세우는 느슨한 민주사회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한국내에서의 정치 투쟁에 직접 참여하여 승리함으로써 남반부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북한 사회를 엄격히 통제함으로써 남한의 개입을 막고 대신 한국 내외 정치 투쟁에 적극 참여하여 한국 내부 붕괴를 이룰 때까지 기다리면 승리한다고 믿고 있다. 북한은 전쟁 위협을 끊임없이 가함으로써 대북강경책을 쓸 수 없도록 유도하고 남한내의 정치 갈등, 계층 갈등을 이용하여 '통일전선전략'을 꾸준히 전개하면 승리의 기회가 온다고 믿고 있으며 그런 방식으로 '강한 한국'을 제거함으로써 북한의 체제 위협을 제거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이상우, [북한정치입문; 김정일정권의 특성과 작동원리], 나남출판, 2000. 224쪽.) -인용문 끝-
민족해방론은 원래 일국사회주의 공산당의 민족이론과 깊은 관계성을 가진다. 민족해방론은 특정한 방식의 공산당의 작동방식을 이해해야만 한다. 국내에서 말해지는 친북좌파적이라 사료되고 추정되고 간주되고 소문이 나는 대부분의 논리들은, 인용할 북한 자료에서의 이 부분이 제외된 상황으로 드러나는 편이다. 송두율의 저작이 명백하게 가시적으로 북한공산당을 향한 충성심을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이론의 논리 구조로서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점은 이러한 점에서의 좋은 예일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전대협 한총련은 나쁘고, 안 드러내는 이들은 안전하다는 차원의 논리는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송두율 사례로 통해서 볼 때, 기존의 제도권 문화에는 얼마든지 아래와 같은 중요부분을 숨기면서, 이론적 중심골격으로 정치지향성을 보이는 이들이 존재한다고 봐야 된다.
-인용문 시작-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은 전례없이 복잡한 사회력사적 운동인 조국통일투쟁의 성과적 발전과 그 승리를 확고히 담보하는 과학적 원칙이다.
조국 통일 3대 원칙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주적으로 조국을 통일하는 것이다.
자주적으로 조국을 통일한다는 것은 조선 인민자신이 주인이 되어 나라의 통일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자주적으로 조국을 통일한다는 것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에 간섭을 받음이 없이 조선인민 자신의 의사와 요구에 맞게 조선 인민 자체의 힘에 의하여 조국 통일을 이룩한다는 것을 말한다. (평양사회과학출판사, 앞의 책, 40쪽.) -인용문 끝-
-인용문 시작- 조선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다. 민족의 위대성은 단순히 민족이 걸어온 력사의 유구성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하여 민족이라는 사회적 집단의 크기나 그가 차지하고 있는 령토의 넓이에 의하여 좌우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민족의 위대성은 인간이 력사를 창조하고 자기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기본 단위로서 민족의 위대성이다. 따라서 그것은 바로 력사의 자주적인 주체, 혁명적 주체로서의 위대성이다.
력사의 자주적 주체, 혁명적 주체는 로동계급의 수령과 당에 의하여 형성 발전되며 령도된다. 민족이 얼마나 진보적인 사상으로 무장하고 어떤 수준의 조직적 결속을 이룩하여 어느 정도의 자주적 생명력을 지닌 사회정치적 생명체를 형성하는가, 그리하여 자기운명을 어떻게 자주적으로 개척하여 나가는 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혁명적 주체에서 의식을 이루는 수령과 그 중추적 역할을 하는 로동계급과 당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러므로 민족의 위대성은 결국 민족을 이끄는 로동계급의 수령의 위대성이며 로동계급의 당의 위대성이다. (앞의 책, 43쪽) -인용문 끝-
-인용문 시작- 조선 민족의 위대성은 바로 우리 민족의 태양이시며 인류해방의 구성이신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의 위대성이며 우리 인민의 모든 승리의 조직자이며 향도자인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의 위대성이다. 그것은 또한 위대한 수령님과 우리당의 무리에 철통같이 통일단결되어 있는 우리 인민의 일심단결의 위대성이다. -인용문 끝-(앞의 책, 45쪽)
민족공조. 우리 민족끼리. 등 여러 표현이 필요하다 해도, 북한의 통일관은 북한공산당의 한반도 내에 전일적 지배성의 강화란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북한 공산당 지도자의 지도와 그 추종자 문제로 요약된다.
한국의 학계와 문화계에서 좌파적 통일관을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좌파적 통일관에서 '민족'이 '북한공산당'이고, '북한공산당'의 지도력을 믿는 추종자들의 문제임을 드러내지 않고, 한국 우파의 민족이론과 대중사회에서 '착오'를 의도적으로 유발하게 만든다.
아래의 인용문은 '북한공산당'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대학생들에게 의도적으로 판단착오를 유발하게 한 부분이다. 최근에 공무원 노조에서 '자주성'어휘를 표현하는 이들이 뻔뻔하게 버틸 수 있었던 배경은, 판단 착오를 일으킨 대학생들의 엄청난 숫자를 배경으로 한다. 북한의 '자주성'이 근대 계몽주의의 '자아관'과 얼마나 다른 것인가에 대한, 반복적 주기적 홍보와 계몽이 '전직 주사파'출신의 자유주의 운동가들에 의해서 심도있게 드러나야만 한다고 본다. 그러할 때, 더 이상 뻔뻔한 이들이 뻔뻔해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 본다.
-인용문 시작- 인간은 왜 다른 동물과 다르게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지게 되는가? 이 세가지 속성은 사회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발전되는 사람의 속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답이다.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인 사회 구성원으로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가 가지는 속성, 사회가 부여하는 속성을 구성원으로 가지게 되므로 사회적 존재인 인간만이 자주성, 창의성, 의식성을 갖게 된다고 주체사상에서 설명하고 있다. 결국 주체사상에서 말하는 인간중심주의란 개개인을 세계의 주인 내지는 역사발전의 주역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고 집단으로서의 인간을 주인, 주역으로 본다는 생각이다. 주체사상과 인간중심주의는 인간개조 사업을 통하여 공산주의적 인간으로 다듬어져서 다른 사람들과 집단주의적 사회관계를 맺게 된 인간집단 중심주의라고 이해하면 된다.
주체사상이 인간의속성으로 제시하고 있는 세 가지에 대한 설명은 특이하다. 자주성이란 개인의 전체의 요구에 자발적으로 부응하는 것을 말하고, 창조성이란 집단의 목적의식과 맞도록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고, 의식성이란 개인의 목적, 발전 방향등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주체사상에서는 나아가서 이러한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역사발전의 주인이 되어야 전체는 바른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동분자들은 전체가 아닌 자기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역사발전에 참여시켜서는 안된다. (중략) 결국 한마디로 수령의 뜻을 따르는 당이 지도할 때 인민은 역사의 주인이 된다는 이야기다. (이상우, 앞의 책, 127-128쪽.) -인용문 끝-
친북좌파들은 한결같이 '자주성'을 근대 계몽주의의 홀로선 인간관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북한 정치 사상 속의 자주성의 실제 의미는 북한공산당에 종속되는 종속적 인간관을 말한다. 친북좌파들의 '자주성'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착오를 범한 이들은, 참으로 '중요 부분의 착오'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자주 민주 통일은 북한공산당이 중심이 되어서 북한공산당을 위해서 돌아가는 통일이 실제 의미인 셈이다. 그러나, 이것을 근대 계몽주의 차원의 홀로됨이나 문자 그대로 읽는 식이 된다면 모호한 지평으로 의미가 흩어져 버린다. 이러한 모호성을 붙잡고 있는 대중들을 배경으로, 대중들에 중요부분의 착오를 유발한 사기성의 발각을 두려워하는 좌파들의 '구시대적 색깔론'이란 언사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차원을 이해한다면, 기성세대 우파가 좌파를 직접 공격하지 않는 자의적 공식으로 획일화하고, 반론을 할만한 젊은 세대 기반의 지식인 문화를 전멸 시키며 '문약'타령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억울할 수 있는 부분인가가 이해된다.)
이러한 정치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에 대한 기본 이해가 필요하다. 레닌은 극소수의 사상적 정치적 동지들을 이끌고 농민들의 순박성과 판단착오를 적절히 활용하여, 기존 체제를 무너뜨린 이다. 기성세대 우파들은 좌파의 특성을 '분배'와 '평등'이라고 보았는데, 그것은 철저하게 맞지 않고 틀렸다. 은행갱단부터 위폐범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방법을 가리지 않은 레닌이 정치적 물꼬를 잡고서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했던 방식을 이해해야 한다. 볼코고노프의 연구에 의하면, 레닌은 독일 공산당의 지원에 의하여 움직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비유하여, 대머리 이완용을 생각하면 된다.) 좌파 연구자 E.H.카아는 마르크스주의에 비교적 충실했던 것이 스탈린보다는 레닌이라는 점을 과장하여 높이 평가하고, 스탈린의 문제로 소련이 문제라는 식의 평가를 보이기도 한다. 레닌의 체제는 평등 체제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사상적 정치적 동지들을 엘리트주의로 포함했다. 그리고, 그의 분배는 분배라기보다는 '당근'의 의미가 적절했다. 레닌주의 체제의 본질은 권력을 잡기 위해서 물불을 안 가리고, 권력을 잡고나서는 권력을 잡기까지의 정치가 뭐니 뭐니해도 제일이라는 식의 논리가 된다. 학생운동권들과 좌파문화의 '정치학교' '정치학습' 따위의 언어는 이런 맥락 위에 있다.
권력을 잡고나서 자기 마음대로 폭정하기 위해서 불평등구조를 만들고, 그것의 온전화를 위한 당근 시혜를, 분배와 평등구조라고 말하는 것은 '파리가 새'라고 하는 것보다 심한 궤변일 것이다.
레닌과 스탈린의 체제는 윌슨 중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대립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확장하는 만큼, 소련공산체제는 자신들의 공산당을 안정하기 위해서 주변 약소국가들을 이용했다. 이러한 약소국가들에 지원금을 부여하여 자유민주세계의 공세를 막고자 했던 방식이, 소련공산당의 민족해방정책이었다. 약소국가에 가해진 논리는 그러하다. 자유민주세계에 종속되는 억압을 넘어서, 공산당 지배의 해방세계를 보라는 방식일 것이다.
우매한 농민을 기만하여 권력을 휘어잡은 레닌의 체제를 이어받은 스탈린이 주변 약소국가를 이용하여, 공산당의 기반을 지켰던 문제는 북한공산당에도 그대로 비슷한 문제로 다가오게 된다.
소련공산당을 쳐다보는 소련 주변의 약소국가들에, 자유세계의 억압에 들지 말고 공산당의 지배하의 해방을 보라는 차원이 '민족해방'의 사실상의 의미였듯이, 한국 대학가의 통일론이 갖는 '민족해방'의 실체도 대한민국 내부에 대하여 미국과 일본등의 세력에 끼지 말고, 북한공산권력의 지배하에 들어서라는 식의 논리가 아닐 수 없다.
공산정치철학논리상 이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 데, '민족'에 대하여 북한공산당의 민족관이 아니라 우파의 민족관 비슷한 것인양 착오를 일으키게 하면,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다원주의 원칙상 단죄적으로 파헤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진다. 유일한 처방은 전직 주사파 출신 자유주의자들이 전국의 순진한 대학생들에 찾아다니며 정확한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민족해방이 왜 민족의 독립인가? 이것은 자유민주주의 세계속으로의 연결을 '질곡'이라고 보는 공산주의자의 선입견이 먼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봐야 적절하다.
2) 민족해방정치가 민주화로 불려지는 이유.
-인용문 시작- 조국통일 문제는 그 어떤 계급적 이해관계나 제도상의 대립을 해결하기 위한 문제가 아니며 따라서 통일을 위한 투쟁은 결코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 하는 투쟁이 아니다. 그것은 외세 제국주의 침략 세력을 반대하는 민족해방투쟁이며 매국과 애국사이의 투쟁이다.(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31쪽)
전민족적 통일전선은 근본 성격에 있어서 민족문제, 민족해방문제에 관한 문제인 조국통일을 위한 통일전선이다. 조국통일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통일전선이 조국통일문제의 근본성격에 부합되게 민족적 개념, 민족자주정신에 기초하는 것은 완전히 필연인 것이다.(앞의 책, 132쪽) -인용문 끝-
통일전선전술은 1930년대 공산당의 반파쇼 연합전선전술에 기반한다.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의 문제가 아니란 이유는, 이용가치가 높은 얼뜨기 바보들을 활용할 수 있다면 활용해야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애국'과 '매국'의 기준에서 '국가'는 북한공산당을 기준으로 하는 차원만을 의미한다. 공산주의자들이 바라는 국가를 원하는 것이 애국일 것이고, 아닌 쪽이 매국일 것이다. (좌파들은 이 부분도 명상적인 것인양 여겨지게 하여 '잘못 생각했다'로 다그치며, 얼버무리며 대한민국 기준의 애국논리로서 가능할 수 있다고 한다.)
-인용문 시작-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에서는 민주주의 정권이 수립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군사파쇼정권이 인민들의 머리에 군림하게 되었다.(앞의 책, 170쪽.) -인용문 끝-
대학가 학생운동권들의 운동가에서 '민주정부 수립하자'는 노래를 지겹게 들은 세대들은, 민주정부라는 권력체를 중심으로 레닌주의적 권력정치관을 통해서 자신들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내용까지를 대다수가 나아가지 못한다.
반파시즘 연합전선기 때의 문화는 루카치의 [이성의 파괴]에서 심층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소련의 철학교과서 대부분의 표준이 되었다. 좌파 공산 세력에 포함되지 않는 대부분은 파시즘에 끼워 맞추어진다. 최근에 정치권의 모정치인이 자유민주주의적 사법 판결을 히틀러 이론이라고 빈정 대었는데, 이것은 자유민주주의자의 적으로서가 아니라 좌파 공산정치의 적으로서의 히틀러의 의미에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루카치의 [이성의 파괴]는 한국의 주체사상의 대학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강동일 편, [남한의 주체사상 논쟁], 밝은 줄, 1989. 참조.)
결국, 민주화라는 말은 '무슨 민주'인지를 숨기고 있음이 확인된다. 좌파 공산 문화에서 민주화인가 아닌가는 공산정권 정치 논리에 시녀가 되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판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서방 언론들에 북한을 잘 대변한다는 비판을 듣는 정치일수록, 좌파정치권에서는 '민주'란 표현이 독점적으로 헌사되는 시스템임이 확인된다.
3. 표현적 특성 : 좌파적 목적의식을 어떻게 작동시키며, 국민들에 전통적 가치관과의 혼동을 유발하게 할 수 있는가?
민족해방론이란 이름이 레닌스탈린주의 속에서만 솟아오른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그러나, 꽤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실제로 국민들이 기존 우파 정치의 불만인 요소에 스며드는 군중 심리 이반 책략 부분이 있다. 6.15 선언 이후에 국가안보의 중대한 위기 요소만을 골라서 찾는 소위 '민주화'세력이, 국가안보를 걱정한 적도 있구나 하는 점에서 아래의 인용문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용문 시작- 우리는 이와 같은 원칙위에서 독재권력에 결연히 맞서야 합니다. 현 독재정권은 입으로는 민주를 말하나 뒷전으로는 자신들의 권력의 강화와 영구화를 획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화합을 말하고 속으로는 분열을 음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앞에서는 정의를 말하나 뒤로는 엄청난 불의와 부정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장영자 사건이나 삼보증권 사건, 그리고 권력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의와 부정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폭력에 길들어져 있으며 유신정권 아래서 몸에 벤 잔인성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대형 사건, 사고들의 폭력성이나 잔인성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 정권의 속성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만 존재하고 거짓과 폭력으로 지탱하여 독선과 불의로 자신들의 특수한 이익을 도모합니다. 그들은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도 저지를 수 있는 비이성적 집단이며, 반민족 반민주 집단인 것입니다. 현 정권은 유신체제 하에서 민중을 탄압했던 중추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권력의 장악과 유지에만 그 목적이 있을 뿐 나라의 안보도, 국민의 안전도, 나라의 위신과 민족의 존엄도 그들의 안중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민주화투쟁이 결코 정권투쟁이 아니라 민주구국의 투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도 이같은 현정권의 성격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라와 겨레의 운명과 존엄은 독재정권 아래서 전례없는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의 절정에서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각자 냉철한 반성과 점검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입니다. -인용문 끝-
좌파 공산적 목적의식 속에서 대한민국의 지배세력이 뭐가되든 다 파쇼에 다 독재가 되는 것은 자명하다. 북한공산당과 그 추종세력만 민주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좌파들의 상투적 논리학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은, 정말로 우파들의 정치가 국민에 중대한 불만을 주었던 요소가 있다는 것이겠다.
권영성 교수의 [헌법학원론]은 1987헌법에 대한 학자적 입장에서의 영혼을 바친 헌신의 표현이 담겨 있다. 전혀, 헷갈림없이 군사정부 통치의 통치 방식에 대하여, 법학자의 입장에서 많이 토해내는 부분에서, 진짜 의도하는 바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군사정치는 대중성이 높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그럼으로, 군사정부 통치 방식에 불만을 가진 구제불능의 자유민주주의자의 시선이 어떻고, 공산정치지향과 헷갈릴 요소를 많이 포함하는 차원의 시선이 어떠한가의 명확한 구분이 필요하다.
-인용문 시작- 최근 민주주의를 외치는 정의로운 학생들에 대하여 중형을 선고하고 선량한 학생과 시민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단죄하는 여러분의 마음이 결코 평탄하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여러분의 아픔에 앞서 시대의 아픔과 피고인들의 통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법권의 독립은 모든 유혹과 위협을 극복하고 정의에 따라 판결할 때 비로소 수호되는 것입니다. 정변이 있거나 정권이 바뀌어서도 의연히 흔들림없이 존재하는 사법부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여러분이 정의롭게 사법권을 보위하고 법의 존엄과 정의를 스스로 지킬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인용문 끝-
한국 좌파정치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의 다원주의적 느슨함을 악용하는 정치였다. 그들은 늘 국가파괴자에 대하여도 기본적인 인권이 있을 수 있다는 식의 의견을 많이 제시했다. 그렇다면, 그러한 차원의 서구적 차원의 인권론 부분의 객관화는 제시된 바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없다. 최근 들어서, 국가보안법 사수를 통해서 보편국민의 권리가 지켜 져야 한다는 주장이 우파 내부에서 반복 사용되고 있다.
'100만 학도 타령'으로 상징되는 무권대리. 운동권 선배 문화로 표현되는 강박과 불공정행위. 이것을 통한 장기지속적인 인권 침해 문제는, 기성세대 우파가 문화에 깡그리 무관심한 사무라이가 되려 함으로 자연스럽게 덮어졌다. 따라서, 좌파 공산적 목적의식을 일반 자유주의로 착각하게 하려는 전략은, 자연스럽게 보호된다.
-인용문 시작- 최근 민주주의를 외치는 정의로운 학생들에 대하여 중형을 선고하고 선량한 학생과 시민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단죄하는 여러분의 마음이 결코 평탄하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여러분의 아픔에 앞서 시대의 아픔과 피고인들의 통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법권의 독립은 모든 유혹과 위협을 극복하고 정의에 따라 판결할 때 비로소 수호되는 것입니다. 정변이 있거나 정권이 바뀌어서도 의연히 흔들림없이 존재하는 사법부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여러분이 정의롭게 사법권을 보위하고 법의 존엄과 정의를 스스로 지킬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인용문 끝-
좌파적 목적의식의 실상은 꽤 선명하게 글의 후반에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당시의 대중들은 디테일에 집착하여 여기 부분을 대다수가 못 보았을 것이다. 마치, 서울대 김윤식교수의 통일문학사론이 송두율의 유물사관 기반임에도, 디테일에 집착하여 북진통일 선입견으로 오독한 우파들이 많았듯이. 결국, 먼 서구에 뭔가가 있겠지 하는 식의 착오 유발은,현실적으로 먹힐 수밖에 없었다.
-인용문 시작- 민주주의 만이 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실현만이 갈라진 민족이 함께 합쳐지는 통일로 가는 길입니다. 이산가족의 만남이 슬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환호로 끝나기 위해서는 한국의 민주화를 통해 통일을 앞당기는 길이 있을 뿐입니다. 관제 공산주의자가 만들어져 남편과 아내가, 자식과 아버지가 헤어져야 하는 비극이 지금 이 순간도 속출하고 있습니다. 법정과 감옥에 가보면 그 슬픈 참상이 거기에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민주정부를 수립함으로써만이 농민과 근로자가 소외되고 억압받지 않는 ?의 경제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가진 사람과 없는 사람의 위화감과 분열을 없게 할 수 있습니다. 민주체제 아래서만이 학생들과 노동자와 농민이 인격적 주체로서 자신의 권익을 주장하고 발양할 수 있습니다. -인용문 끝-
-인용문 시작- 국민여러분, 우리들의 부족하였음을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고 여러분의 민주전열에 전우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두 사람은 오로지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국민과 함께 그 뜻을 받들어 민족과 민주제단에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칠 것을 엄숙히 맹세하는 바입니다. 그 성스러운 싸움과 승리의 현장에서 뜨겁게 만납시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워싱턴에서 김대중* 서울에서 김영삼. -인용문 끝-
4. 결론 : 삼김은 하나였던가? 한 명에 이용당한 2명이 있었던가?
1980년대부터 1997년까지의 보수 세력에 착오를 유발하게 했던 중요요소는 김영삼전대통령이었을 것이고, 1997년부터 대략 2002년까지 보수 세력에 착오를 유발하게 했던 중요요소는 김종필자민련 총재였을 것이다.
문민정부 때에 되돌아 생각해볼 때, 한반도기를 가장 먼저 사용한 정부와 좌파 지식인 중용을 통해서 국민의 정신을 좌파 방향으로 만들었던 정부라는 점이 기억된다. 일정 부분의 보수적 처신이 분명히 있지만, 오늘날의 좌파정국의 원형 모델을 씨앗 뿌리듯 터잡게 했던 시대였던 점이 지금의 기억으로는 압도된다.
자민련은 현정부에 반대하는 극렬한 성명을 내면서도, 중심에 접붙이기 과도적 체제 만드는 식의 공산주의 상투적 전략임을 (바보인지) 보지 못하고, 행정수도론에 병적인 집착을 갖는다. 이것은 온건 극우의 이미지와 좌파 내용의 대부분을 100%승인하는 양면 이미지의 김종필 총재의 사고방식의 연장선으로 판정될 수 밖에 없다.
이 선언문이 포함하는 맹아적으로 자리한 요소는 6.15 선언으로 확장되었고, 최근에는 국보법 시비로 절정에 달해있는 듯 하다. 그렇다면, 일반 국민들에겐 선거자금 문제에서 이회창씨가 노대통령에 했던 방식과 동일한 형식으로, 김영삼대통령의 이 선언문은 국가보안법에 걸릴 수 있는 차원이 있음을 시인하는 차원으로 좌파정부의 국가안보 파괴 상태를 동시에 바라보게하는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 우파 정당 내부에 자리한 좌파 색깔의 우파 내부의 분해 시도가 자연스레 종결되는 차원도 있어야 될 것이다.
========================================================== (전문)
--------------------------------------------------- [김대중*김영삼 8*15 공동 선언] -민주화투쟁은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한 투쟁이다.- (1983. 8.15)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는 이민족의 지배와 탄압으로부터 벗어나 해방의 기쁨을 만끽했던 8*15기념일을 서른여덟번째 맞습니다. 과연 해방의 감격과 그 진정한 의미가 오늘에 되살려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국민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해방의 진정한 의미가 오늘에 어떻게 재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뜨거운 호소와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해방 이후 우리가 맞이하였던 8*15 기념일은 한번도 우리 모두의 축제로 되지 못하였습니다. 8*15의 축제와 그 의미가 날이 갈수록 의도적인 퇴색과 축소의 과정을 반복하고 있는 현실이 우리로 하여금 해방의 진정한 의미를 거듭 되새기게 하고 있습니다. 일제하 그 캄캄한 암흑 속에서 우리 민족이 한결같이 소원했던 해방과 독립은 이민족의 굴레로부터 벗어남은 물론, 민족이 모두 함께 탄압과 수탈이 없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민족, 민주 국가 사회의 건설에 진정한 의미와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방 후 국토와 민족의 분단과 분열이라는 아픔과, 동족상잔이라는 비극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8*15가 우리 민족성원 모두의 축제가 되지 못하게 한 빌미가 되고 있습니다.
갈라진 국토의 반쪽 저편에서는 장기공간독재가 민중을 짓누르고 있으며, 끝내는 세습제까지 운위되고 있어 해방된 민족의 자존심과 영예를 부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다른 반쪽 이쪽에서는 민족정기가 간데없이 친일민족반역자들까지 민중 위에 군림하여 자유당 백색독재를 이룩하다가 마침내 4*19학생혁명으로 붕괴되어 비로소 민족정기와 존엄,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위한 민주주의에의 전망이 섰지만 5*16 군사쿠데타로 민주주의에의 희망은 차단되고 같은 민족에 의한 억압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일제 36년의 절반에 해당되는 18년의 장기독재에 이 나라 국민은 신음하여 왔습니다. 1979년의 10*26사태로 오랜 억압의 세월이 가고 민주화의 밝은 날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1980년 6월 17일의 군사쿠데타로 우리 국민은 또다시 동족의 독재정권에 짓밟혀야 했습니다. 저 처참했던 광주의거는 민족분단 후 이민족이 겪은 최대의 수난이었고, 그것이 동족에 의한 것이었다는 데서 유린과 국민탄압의 역사로 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민족의 탄압에 못지 않은 독재권력에 의한 민중탄압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우리 국민은 진정한 해방의 기쁨과 그 의미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를 지배하고 탄압했던 일제는 지금도 이 땅을 활보하고 있으며, 그들의 지지와 지원으로 독재권력의 자기유지를 획책하는 세력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해방의 의미가 의도적으로 축소되고 퇴색되는 원인과 독재권력의 성격과는 이와 같은 함수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치욕의 역사는 일제 36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해방 후 38년동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기본적 인권과 자유,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사회를 우리의 손으로 건설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진정한 해방을 결코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한 투쟁은 지금도 계속 되어야 하고 또한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민주화 투쟁은 바로 민족의 해방을 위한 투쟁 그 자체이며 그것을 완결하는 투쟁입니다.
우리는 독재 권력의 민중에 대한 탄압이 그 질이나 양에 있어 일제 시대보다 더 하다는 얘기를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제가 우리 민족을 탄압하기 위해 동원하였던 법과 제도와 그 수법이 오늘의 독재권력에 의하여 그대로 재현되고 있으니 그 말이 결코 과장이나 거짓이 아닌 것입니다. 권력의 획일성과 국민에 대한 추종의 강요가 그러하며 국민에 대한 기만정책이 또한 그러합니다. 자유와 정의와 진리를 외치는 사람들에 대한 탄압이 그러하며 농민소외정책과 근로자와 노동운동에 대한 억압이 그러합니다. 일제의 민중탄압의 체제와 독재권력의 그것을 비교연구한다면 아마도 그 내용과 수법이 동일한데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민주화투쟁이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한 투쟁의 연장선 위에 있어야 할 까닭이 있습니다. 우리의 민주화 투쟁은 독립과 해방을 위한 투쟁이 민족을 위한, 민족에 의한 전체 민족의 투쟁이어야 했듯이 전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투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민족의 해방과 독립이 우리 민족의 절대적인 목표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민주화 그 자체가 투쟁의 목표요 대안인 것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의 해방과 독립을 위한 투쟁이 자신을 버리고 더 큰 나, 즉 민족과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투쟁이었듯이 우리의 민주화투쟁도 나를 버리고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투쟁이어야 합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나 자신을 버리고, 나의 모든 것, 나의 욕망, 나의 생명까지도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전체 민족이 하나가 되어 투쟁하여야 했듯이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우리는 혼연일체 하나가 되어야 하며, 또한 국내와 해외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독재권력에 의하여 희생당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해야 하며, 그 고통을 기꺼이 떠맡아 지거나 나누어 져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희생과 헌신적인 이해와 긍휼히 여기는 정신을 통하여 올바른 도덕성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민족의 독립과 해방이 어느 누구의 도움보다도 바른 민족 성원 자신의 주체적인 힘으로 쟁취되어야 하듯이 우리의 민주화 투쟁도 오직 우리의 창조적인 민주역량으로 이룩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계의 양심이 우리를 지원할 것이나 그것은 보완적인 것일뿐, 이 나라의 민주화를 이룩하여 인간다운 삶의 터전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 뿐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민주투쟁의 승리의 날에 우리는 민주투쟁에서 숨지거나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사람들을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애국 선열들의 반열에 올려 놓아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이룩될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고, 싸우다 죽어간 모든 사람들의 피나는 고통 위에서 이룩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확고한 신념이 되고 몸에 벤 덕성이 되어야 합니다.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우리는 이와 같은 원칙위에서 독재권력에 결연히 맞서야 합니다. 현 독재정권은 입으로는 민주를 말하나 뒷전으로는 자신들의 권력의 강화와 영구화를 획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화합을 말하고 속으로는 분열을 음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앞에서는 정의를 말하나 뒤로는 엄청난 불의와 부정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장영자 사건이나 삼보증권 사건, 그리고 권력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의와 부정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폭력에 길들어져 있으며 유신정권 아래서 몸에 벤 잔인성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대형 사건, 사고들의 폭력성이나 잔인성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 정권의 속성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만 존재하고 거짓과 폭력으로 지탱하여 독선과 불의로 자신들의 특수한 이익을 도모합니다. 그들은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도 저지를 수 있는 비이성적 집단이며, 반민족 반민주 집단인 것입니다. 현 정권은 유신체제 하에서 민중을 탄압했던 중추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권력의 장악과 유지에만 그 목적이 있을 뿐 나라의 안보도, 국민의 안전도, 나라의 위신과 민족의 존엄도 그들의 안중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민주화투쟁이 결코 정권투쟁이 아니라 민주구국의 투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도 이같은 현정권의 성격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라와 겨레의 운명과 존엄은 독재정권 아래서 전례없는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의 절정에서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각자 냉철한 반성과 점검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입니다.
정치인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국민의 기본권과 자유가 숨쉬는 민주주의를 갈망하여 왔습니까. 진실로 나라와 겨레의 운명을 걱정하고 국민의 아픔을 같이 하고자 한다면 현 정권의 자기 합리화를 위해 분배의 양심을 팔거나 속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떠한 입장,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현 정권이 강요하고 있는 그 규격과 틀로부터 탈출하여 민주화를 향한 시대적 사명과 함께 합류하여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움직일 수 없는 우리들의 신념이요 사명이며, 시대적 요청임을 군사독재 권력의 눈과 귀로 하여금 똑똑히 보고 들을 수 있도록 외쳐야 합니다. 나의 침묵이 독재 권력에의 굴종이 되고, 그것이 자손 만대에 걸쳐 자신의 치욕이 된다는 사실을 똑똑히 기억합시다. 독재적이며 비민주적인 규범, 예컨대 정치풍토 쇄신에 관한 특별조치법 같은 것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그 법은 정의와 양심에 반하는 소급 입법이며 그것이 반민주주의적인 것은 유신독재 아래 고난을 겪었던 수많은 동지들, 즉 애국적 민주인사들이 피규제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증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정의와 양심 편에 서느냐, 아니면 불의와 폭력의 편에 서느냐 하는 준엄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국민과 함께 자랑스러운 역사의 편에 서주시기 바랍니다.
언론인 여러분
여러분은 언제부터인가 관제 언론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여러분은 한 마디 정의의 목소리를 싣지 못하며 사회의 구석구석 들려오는 민중의 신음소리를 취재하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진실을 기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민주주의와 정의와 양심을 외치는 사람들 앞에서 여러분은 주눅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우리를 갈라놓은 것은 독재권력이지 여러분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압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유언론이 그것을 실천하고 지키려는 사람들의 끈질긴 집념과 투쟁과 자유언론에 대한 신앙으로서만 가능합니다. 자유언론을 스스로 실천하고 쟁취했을 때만 여러분은 양심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비록 쓰지는 못하더라도 고통받는 형제들이 있는 곳에 항상 여러분의 모습이 있어 여러분의 취재 수첩으로 뒷날 역사의 증언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법관 여러분
최근 민주주의를 외치는 정의로운 학생들에 대하여 중형을 선고하고 선량한 학생과 시민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단죄하는 여러분의 마음이 결코 평탄하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여러분의 아픔에 앞서 시대의 아픔과 피고인들의 통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법권의 독립은 모든 유혹과 위협을 극복하고 정의에 따라 판결할 때 비로소 수호되는 것입니다. 정변이 있거나 정권이 바뀌어서도 의연히 흔들림없이 존재하는 사법부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여러분이 정의롭게 사법권을 보위하고 법의 존엄과 정의를 스스로 지킬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에 대하여도 우리의 뜻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한국과 미국은 4반세기에 걸친 혈맹이며,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같은 이념과 이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민주체제가 공산체제에 비해 우월한 것은 사회의 다양한 활력과 개인의 창의가 보장되고 국민의 기본적 인권과 자유가 존중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독재적 폭압에 의해 획일성이 강요되어 다양성과 창의가 무시되고 인권과 자유가 유린된다면 우리는 우리 체제의 우월성을 현실적으로 확인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방관계의 한쪽에서 그 국민이 독재의 억압에 짓눌리고 있고, 우방관계의 한쪽 정부가 독재권력을 지원하여 한국 민중의 탄압을 방조하는 결과로 되고 있을지도 모르는 바로 여기에 한미관계의 미묘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미국 정부는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방한이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결과로 되어 국민에 대한 탄압과 독재를 미국이 추인(인용자주-무효인 법률행위를 유효인것처럼 인정하는 민법상 행위)하는 것으로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국에는 소수 부패 특권의 독재권력과 그에 대응하여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절대 다수 민중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한정책이 독재권력의 국민탄압을 양해하는 것으로 되거나, 독재 권력의 유지에 협력자적인 것으로 될 때 지난번 부산 미국문화원 사건과 같은 불행한 사태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한국 민중의 의사가 무시된 전쟁 분위기의 조성이나 핵전쟁의 가능성에 대해 한국 국민은 심각한 염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 만이 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실현만이 갈라진 민족이 함께 합쳐지는 통일로 가는 길입니다. 이산가족의 만남이 슬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환호로 끝나기 위해서는 한국의 민주화를 통해 통일을 앞당기는 길이 있을 뿐입니다. 관제 공산주의자가 만들어져 남편과 아내가, 자식과 아버지가 헤어져야 하는 비극이 지금 이 순간도 속출하고 있습니다. 법정과 감옥에 가보면 그 슬픈 참상이 거기에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민주정부를 수립함으로써만이 농민과 근로자가 소외되고 억압받지 않는 ?의 경제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가진 사람과 없는 사람의 위화감과 분열을 없게 할 수 있습니다. 민주체제 아래서만이 학생들과 노동자와 농민이 인격적 주체로서 자신의 권익을 주장하고 발양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실현시킴으로써만이 나라의 위신과 민족의 존엄을 국제 사회에서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불의하고 부도덕한 정권은 남에게 얕보일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부정과 불의를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쌀도입과 관련된 추문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유신정권 이래 국제 사회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추태로 인하여 한국 국민이 국제 사회에서 얼굴을 들 수 없는 것도 바로 독재정권의 현실적 존재로 인한 것입니다.
민주화로서만이 이 사회에, 지역에 내재하는 모든 불균형과 그릇된 감정을 씻어낼 수 있습니다. 오직 민주화로서만이 정치를 이룩할 수 있고 사랑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민주화로서만 교육의 비인간화가 시정되고 야만적 고문이 영원히 청산될 것입니다. 민주화를 통해서만 자유, 정의, 진리, 양심을 지키는 모든 사람들의 고통이 치유될 수 있으며, 삼켜졌던 말을 되찾아 인간답게 말하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민주화 투쟁의 제일의 과업은 어떠한 법률로 처벌되었던 모든 정치범과 양심범의 석방과 복권, 제적된 학생과 교수의 복합과 복직, 유신시대 이래 언론계에서 타의로 추방된 모든 언론인의 복직과 통폐합된 언론의 원상 회복과 언론 자율성의 회복, 그리고 정치활동 규제에 묶여있는 모든 정치인과 민주시민이 자유스럽게 정치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또한 소위 국가보위 입법회의에서 제정 또는 개정된 반민주적 악법 및 유신체제 이래의 독재적 법률의 철폐와 개정을 이룩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민주화와 동시에 헌법을 국민적 합의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선택하고 구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독재의 서슬에 묶여 있어 오늘의 현실이 암담한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 다수 국민이 뜻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민주화를 향하여 단결하여 투쟁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민주의 정의와 세계와 인류의 양식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역사와 진리가 또한 함께 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제일 두려워해야 할 것은 독재와 억압 그 자체가 아니라 민주화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포기하는 일일 것입니다. 내일에의 꿈이 없는 민족은 가장 불행한 민족입니다. 우리는 확고한 신념으로 민주 조국에의 희망과 튼튼히 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하나되고 그 희망으로 뭉친다면 우리는 마침내 이땅에 모두의 환호 속에 민간정부를 우리의 손으로 세우게 될 것입니다. 억압은 전멸되고, 우리 모두는 새로운 민주주의적 인간상으로 구현될 것이며, 이 나라와 국민은 모든 세계인들의 선망과 찬탄의 표적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민족해방과 독립을 위한 투쟁을 오늘에 다시 계승시키며, 그것을 완성하여야 하는 시대적 사명에 부응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 국민은 이미 이승만정권이나 박정희 정권과 같이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염원을 배반한 독재정권을 결코 용납하지 아니한 민주역량을 가진 국민입니다. 이같이 자랑스런 국민 앞에 우리는 정치인으로서 부끄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1980년 봄 온 국민이 한결같이 열망하던 민주화의 길에서 우리는 당시 야당 정치인들로서 하나로 되는 데 실패함으로써 수백수천의 민주국민이 무참히 살상당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고, 계속 국민의 수난이 연속됨은 물론 민주화의 길을 더욱 멀게 한 사태를 막지 못한데 대한 책임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이제 국민앞에 자책과 참회이 뜻에서, 그리고 온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 앞에서 우리 두 사람은 백의종군 하는 자세로 하나가 되어 손잡고 우리 민족사의 지상과제를 향하여 함께 나아가려 합니다.
국민여러분, 우리들의 부족하였음을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고 여러분의 민주전열에 전우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두 사람은 오로지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국민과 함께 그 뜻을 받들어 민족과 민주제단에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칠 것을 엄숙히 맹세하는 바입니다. 그 성스러운 싸움과 승리의 현장에서 뜨겁게 만납시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워싱턴에서 김대중* 서울에서 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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