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삼아 예전에 번역했었던 내용을 올려봅니다. 출처는 아래에 나와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금군의 침공 재개
1139년, 전쟁 상태에 있던 금과 송(남송) 사이에 강화가 이루어졌다. 그 조건은 송에게 유리한 것으로서, 금은 괴뢰 국가인 제(齊)를 폐지하고, 동경인 개봉부(開封府), 서경인 하남부(河南府), 남경인 귀덕부(歸德府) 등의 옛 도읍을 포함한 광대한 하남 땅을 송에게 반환한다는 것이었다.
금의 주전파를 대표하는 도원수 완안올출(完顔兀朮, 이하 올출)은 이러한 강화 안에 강력히 반대하였고, 강화파를 숙청하여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런 뒤 1140년 5월 3일 올출은 대군을 기주(祁州, 하북성 안국)의 원수부에 집결시켰고, 이하의 4개 루트로 나뉘어 재정복에 나섰다.
①섭아패근(聶兒孛堇)은 산동으로 진출한다.
②우도원수 완안고(完顔杲)는 섬서로 들어가, 장안(長安), 봉상(鳳翔) 등을 재정복한다.
③표기대장군 겸 지익주 이성(李成)은 낙양(洛陽)으로 진출한다.
④올출이 이끄는 주력은 개봉을 탈환한다.
올출의 군대의 선봉을 맡은 지동평부 공언주(孔彦舟)는 송의 강력한 수비군이 도착하기 전에 개봉을 공격하였고, 13일에 송의 동경유수 맹경(孟庚)은 금에 투항하였다. 14일에 남경유수 노윤적(路允迪)도 귀덕부를 바치고 투항하였으며, 금의 권무정군절도사 왕백룡(王伯龍)은 남쪽으로 진격하여 진주(陳州)를 공략하였다.
2. 순창(順昌) 방어
금의 대공세가 개시되었을 무렵, 송의 개봉 수비군은 아직 순창부(順昌府, 안위성 부양) 부근까지밖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군대는 동경부유수 유기(劉錡)가 이끄는 약 2만 명의 시위마군사군(옛 팔자군[八字軍])으로, 군대는 개봉에 주둔하고 그 가족들은 순창에 둘 예정으로 가족을 동반하여 이동 중이었다. 이 군대는 전군(통제 조준[趙樽]), 후군(통제 허청[許淸]), 좌군(통제 두기[杜杞]), 우군(통제 초문통[焦文通]), 중군(통제 하휘[賀輝]), 유혁군(통제 종언[鐘彦]), 선봉군(통제 한직[韓直])의 7개 군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 때의 순창 지부는 진규(陳規)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문관이면서도 덕안부(德安府, 호북성 안륙) 방위전에서 공적을 세웠던, 이론과 실천 모두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이 시대에 있어서 도시 방위전의 최고의 전문가였던 것이다. 순창은 후방 지역이었지만, 진규는 부임하자마자 식량과 방어 병기를 비축하고 성벽을 벽돌로 보강하는 등, 방어전 준비를 착착 해나갔다. 또한 유민들을 불러들여 방위군을 편성하고 있었다.
금군의 재침공을 알게 된 유기는 막료들과 함께 배를 버리고 순창으로 앞서 가서, 15일에 진규의 마중을 받았다. 그 곳에서 개봉이 함락되었다는 사실을 들은 유기는, 강남으로 도주할 것인가 아니면 순창을 지킬 것인가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진규가 「미곡 수만 곡(斛, 斛은 10말을 가리킴[역자 註])이 비축되어 있다」라고 보고하자, 유기는 순창을 지킬 결심을 하였다.
이 때 선봉군, 유혁군의 2군과 군인 가족들, 치중(輜重, 보급부대)이 후방에 있었기 때문에, 유기는 기병을 파견하여 행군을 재촉하였다. 그 날 저녁 무렵, 금의 기병이 인접한 진주에 진출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유기 휘하의 장수들은 강남으로의 철수를 원하였지만 유기는 그들을 설득하였고, 후군 통제 허청의 찬성에 따라 배에 구멍을 내어 가라앉힘으로써 돌아갈 뜻이 없음을 표시하였다.
유기는 진규와 협의하여 방어 부서를 정하였고, 허청이 동문을, 두기가 북문을, 하휘가 서문을, 종언이 남문을 지키도록 하였으며, 척후(斥候, 정찰대)를 파견하여 정보를 모았고, 이 지역 주민들로부터 첩자와 향도(嚮導, 길 안내자)를 모집하였다. 주민들 중 남자들은 성벽을 지키도록 하였고, 여자들은 무기를 수리하거나 보급을 맡도록 하였다.
성벽을 강화하기 위해 성 밖에 버려져 있던 제(齊)의 공성거(攻城車)에서 바퀴와 차축을 떼어내어 성벽 위에 설치하였고, 민가의 문을 떼어내어 차축 위를 덮었다. 성 밖에는 수천 호의 민가들이 있었지만, 주민들을 성 안으로 피난시킨 뒤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런 다음 성벽 주위에 양마환(洋馬桓)을 건설하고, 벽에는 구멍을 내어 문으로 삼았다. 이러한 준비는 약 6일 정도 걸려서 끝나게 되었다.
이 때 금군이 풀어 놓은 기병 정찰대는 이미 영하(潁河)를 건너 성 아래에 육박해 있었다.
3. 제 1차 순창 공방전
25일, 금구의 선봉 부대가 순창을 포위하였다. 유기는 미리 성 아래에 복병을 배치하였기에, 금의 천호(千戶), 아흑(阿黑)을 포로로 잡았다. 이들의 자백으로부터 「(소무대장군) 한상(韓常) 장군이 순창으로부터 약 17Km 떨어진 백사와(白沙渦)에서 숙영하고 있다」는 정보를 획득하였다. 유기는 1,000명의 병사를 파견하여 금의 진영을 습격한 뒤 전투를 벌여 금군을 다수 쓰러뜨렸다.
29일, 금의 삼로통제 겸 자부원수 아로보(阿魯補), 원수좌감군 돌합속(突合速)이 이끄는 3만 명의 군대가 도착하여 순창성에 도달하였다. 유기는 허창과 함께 양마환을 차폐물(遮蔽物)로 삼아 포진하였다. 금군은 화살을 연사하여 성을 공격하였지만, 화살은 양마환의 벽에 막히거나 혹은 벽을 넘어 헛되어 성벽에 맞았기 때문에, 송군에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유기는 성벽 위와 양마환의 문으로부터 파적궁(破敵弓), 신비궁(神臂弓), 강노를 맹렬히 쏘아댔기에, 금군은 병력을 조금 뒤로 물렸다. 양마환 안에 포진해 있던 송군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하여 금의 철기병 수천 기를 격파하였고, 다수의 금군 병사들을 영하로 몰아 익사시켰다.
순창이 포위된 지 4일이 경과하고 증원 부대가 속속 도착하면서, 금군은 순창으로부터 약 11Km 떨어져 있는 동쪽 마을로 진지를 옮겼다. 진규는 계속하여 패배한 적군이 기발한 책략을 고안해 내어 방어측을 곤란하게 할 것이기 때문에, 기습 부대를 파견하여 금의 숙영지를 습격하여 밤낮으로 한시도 쉬지 못하게 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따라 유기는 휘하의 용장 염윤(閻允)이 이끄는 지원병 500명을 파견하여, 동쪽 마을의 숙영지를 야습하도록 하였다. 그날 밤, 날씨가 흐려지면서 뇌우가 몰아쳤다. 벼락이 떨어져 환해질 때마다 북방 민족으로서 변발을 한 이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고, 금군은 숙영지를 약 8Km나 후퇴시켰다.
유기는 다시 100명의 지원자를 모집하여, 금의 숙영지를 야습하도록 하였다. 이들에게는 신호용으로 각자 피리를 가지고 가도록 하였다. 벼락이 떨어져 환해졌을 때는 공격하고 다시 어두워졌을 때는 몸을 숨겼기 때문에, 금군은 대혼란에 빠졌다. 100명이 신호용으로 불어대는 피리 소리에 금군은 더욱 혼란스러워하였고, 밤이 새도록 같은 편끼리 죽이는 것을 계속한 결과 시체가 겹겹이 쌓여 들판에 가득하였고, 금군은 다시금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제 2차 순창 공방전
개봉에 있으면서 선봉 부대의 고전을 알게 된 올출은 공성 병기와 식량을 준비하도록 하였고, 십여 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순창을 향하여 이동을 개시하였다.
유기는 휘하의 제장들을 모아서 앞으로의 작전을 토의하였다. 어떤 장수는 이기고 있는 기세를 틈타 전군을 배에 태워서 남쪽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떠한가 하고 말하였다. 진규는 「조정이 군대를 양성한 지 15년, 이것은 위급할 때에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지금 여러 차례 적군을 격파하였고, 사기도 높아져 가고 있다. 나는 이미 목숨을 걸고 있고, 나아가도 죽고, 물러나도 죽는다면, 나아가서 충의를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열변을 토하였다. 이 말을 들은 유기는 「부공(府公)은 문인인데도 오히려 사수를 맹세하였다. 어찌하여 무인인 그대들이 사수를 맹세하지 않는 건가!」라고 일갈하고, 적군이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기에 퇴각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힘써 설명하였다. 모든 장수들은 유기의 결정에 따를 것을 맹세하였다.
유기와 진규는 정보 공작을 실행하여, 적으로 하여금 순창의 수비대가 약체라고 믿도록 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올출은 공성전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공성거나 투석기 등의 중장비를 버려둔 채 빠르게 진격하여, 6월 9일 순창 부근에 도착하였다.
유기는 경훈(耿訓)을 파견하여 올출에 도전장을 던졌다. 올출은 분노하였지만, 경훈은 단순한 도전이 아니라 영하에 부교 다섯 개를 설치할 테니 그것을 통해 강을 건너와서 결전을 치르자고 제안하였다. 올출은 이 제안이 계략이라는 것도 모른 채 승낙하였다. 10일 아침 유기는 부교 다섯 개를 설치하였고, 금군은 그것을 건너 순창성에 육박하였다.
금군의 포진은 양 날개에 정예 기병을 배치하는 전통적인 것으로서, 올출은 유난히 눈에 띄는 흰 두루마기를 걸치고 갑마(甲馬, 마갑을 씌운 말) 위에 올라탄 채 3,000명의 아병(牙兵, 친위대)을 이끌고 군대를 감독하고 있었다. 이들 아병은 무거운 갑옷을 착용한 중기병으로서, 「철부도(鐵浮圖)」라고 불리는 금의 최정예부대였다.
송 측의 제장들은 한상의 부대를 목표로 할 것을 원하였지만, 유기는 올출과 아병을 제 1의 목표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다. 또한 금군에 편입된 옛 남송 군의 부대로부터, 자신들은 싸울 의사가 없으며, 양 날개의 정예 병사들만을 노려 달라는 제안을 비밀리에 받았다.
계절은 여름이었고, 유기는 이것을 이용하여 송군은 가능한 한 출격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면서, 적을 더위로 지치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고 유기에게 제안하였고, 순창에 비축해 둔 독약을 제공하였다. 유기는 사람들을 파견하여 영하 상류에서 독약을 풀었고, 강기슭의 풀에 독약을 마구 뿌리게 하였다.
금군은 장거리를 빠르게 진격해 왔고 야습에 대비하느라 수면 부족으로 지쳐 있었으며, 몸을 숨길만한 곳도 없는 여름 날씨 속에 방치되었기에, 많은 병사들이 목이 말라 강물을 마셔댔다. 강물을 마신 병사들이나 풀을 뜯은 말들은 차례차례 독으로 인해 쓰러져갔다.
전투는 오전 8시 무렵에 시작되었지만, 유기는 병사들을 출격하지 않았고, 오후 2~3시 무렵 더위가 최고조에 달하는 시각을 노려 먼저 서문으로부터 수백 명을 출격시켰고, 다음으로 남문으로부터 수천 명을 출격시켰다. 돌격할 때에는 함성은 지르지 않고 날카로운 도끼를 휘두르며 적의 중기병 안으로 파고들어갔다. 송군은 거마목(拒馬木)을 사용하여, 전투 중에도 간단한 식사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면서 싸웠다. 전투는 오후 4시 무렵까지 계속되어, 금군은 그 정예 병력을 많이 잃고 5,000명의 전사자를 낸 채 퇴각하였으며, 금의 병사들의 시체와 쓰러진 말들, 수레, 깃발, 무기가 들판을 뒤덮었다.
올출은 성의 서쪽으로 숙영지를 옮겼고, 호를 파고 수비를 강화하였지만, 그날 저녁에 큰 비가 내려서 평지는 30cm 이상 물에 잠기게 되었다. 유기는 이 때를 틈타 야습을 감행하였다.
12일, 올출은 중장비도 없었고 장기간의 포위도 곤란하였기 때문에, 전군을 이끌고 개봉으로 돌아갔다. 귀환하는 도중에 아로보로 하여금 귀덕부를, 한 장군으로 하여금 영창부(潁昌府)를, 적(翟) 장군으로 하여금 진주를 수비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금의 주력의 침공은 순창에서 저지되었고, 금은 침공에서 점령지의 확보로 전략을 변경하였다.
이 무렵 송의 조정은 호북·서경순무사 악비(岳飛)에게 순창을 구원할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에 응하여 장헌(張憲), 요정(姚政)이 구원하러 나섰고, 악가군(岳家軍)의 모든 병력은 중원을 향하여 행동을 개시하였다. 올출이 순창을 고집하지 않았던 것은, 악비와 대결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5. 악가군의 북상
조정은 금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악비가 대군을 이끌고 북진하는 것을 제지하기 위해 사농소경 이약허(李若虛)를 덕안부로 파견하였다. 하지만 이약허는 악비의 작전에 찬동하고 진격을 허락하고 말았다. 악비는 휘하의 제장을 파견하여, 하남부, 영창부, 여(汝), 정(鄭), 진(陳), 조(曹), 광(光), 채(蔡) 등의 여러 주를 탈환하도록 하였다. 또한 양흥(梁興)을 황하 북쪽으로 파견하여, 이보(李寶)가 이끄는 하북의 의군(義軍, 금에 반대하는 봉기군)과 연계하여 금의 후방을 교란하는 임무를 맡겼다.
악비의 군대인 악가군, 즉 행영호위군은 총 병력이 10만 이상이었고, 악주(鄂州, 호북성 무한시)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행영호위군은 배외군(背嵬軍), 전군(통제 장헌), 우군, 중군(통제 왕귀[王貴]), 좌군(통제 우고[牛皐]), 후군(통제 왕경[王經]), 유혁군(통제 요정), 답백군(踏白軍, 통제 동선[董先]), 선봉군(통제 이도[李道]), 승첩군(勝捷軍, 통제 조병연[趙秉淵]), 파적군(破敵軍), 수군의 각 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배외군은 병력이 8,000명으로, 특별히 선발된 장병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중기병을 포함하는 악가군의 최정예부대였다. 각 군을 지휘하는 통제는 22명, 통령(統領)은 5명, 그 이하의 장교는 252명이었고, 장헌과 왕귀가 선무사제거로서 부사령관 급이었다.
윤년 6월 22일, 장헌, 부선(傅選)이 영창부(하남성 허창시)를 탈환하였고, 악비는 주력을 이끌고 언성(郾城)으로 들어갔다. 장헌은 우고와 함께 병력을 진주로 진격시켜 적(翟) 장군의 군대를 잇달아 격파하였고, 24일에 진주를 탈환하였다. 한상은 기병 6,000명을 이끌고 영창부를 공격하였지만, 25일 동선, 요정에 의해 격파되었다. 같은 날 왕귀 휘하의 양성(楊成)이 정주 남쪽에서 금군 5,000명을 격파하고 정주를 탈환하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서 왕귀 휘하의 유정(劉政)이 29일에 개봉에 인접한 중모현(中牟縣)을 공격하였다.
7월 1일에는 중군부통제 학정(郝晸)의 군대가 서경 하남부에 도달하여, 휘하의 장응(張應), 한청(韓淸)이 맞서 싸우러 온 금군 수천 기를 격파하였다. 금군은 하남부를 버리고 황하 건너편의 맹주(孟州), 회주(懷州)로 도주하였고, 2일에는 송군이 하남부를 탈환하였다. 또한 맹방걸(孟邦傑)은 하남부의 영안군(永安軍)을 탈환하였고, 그의 휘하 장수인 양우(楊遇)는 남성군(南城軍)을 탈환하였다. 악가군은 전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개봉을 포위하려 하고 있었다.
6. 언성 전투
악가군의 북진에 대하여 올출은 악가군의 중추부를 타격하기 위해, 돌합속, 완안새리(完顔賽里), 한상의 군대를 모아서 총 병력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영창부로 향하였다. 7월 8일 올출은 15,000명의 정예 기병을 이끌고 악비가 사령부를 둔 언성으로 직진하였고, 철부도군을 중심으로 하는 괴자마(拐子馬) 진형을 갖추었다.
이것은 세 명의 중기병을 서로 이어서 벽과 같이 하여 전진하는 진법이었다. 이것에 대하여 악비는 중앙에 양자인 악운(岳雲)이 이끄는 배외군과 유혁군을 배치하는 진법을 취하였다. 이러한 포진은 악비가 기병을 주력으로 하는 금군을 격파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한 것이었다.
기병 돌격을 격파하기 위한 요령은 중장보병에 있었는데, 악비는 보병들에게 적 기병을 올려다보지 말고, 단지 말의 다리만을 노려서 베어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전투는 3~4시 무렵부터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수십 차례에 걸쳐 금군은 돌격을 반복하였지만, 괴자마는 악비의 지시를 따른 보병들에게 저지당했고, 오히려 금군의 중앙이 악운이 이끄는 기병의 격렬한 돌격을 받게 되었다. 악비 휘하의 장수 양재흥(楊再興)은 단신으로 적진에 돌입하여 올출을 노렸지만, 수백 명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올출은 놓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금군은 정예 기병의 다수를 잃으면서 퇴각하고 말았다.
10일 올출은 후속 병력과 함께 언성 북쪽 약 3Km 지점에 재진출하였다. 배외군의 장수 왕강(王剛)은 50기를 이끌고 정찰에 임하고 있었는데, 금군의 전위 부대와 조우하여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것을 본 악비는 부하들의 저지를 뿌리치고 40기를 이끌고 구원하러 나섰다. 주장(主將)이 스스로 구원에 나선 것을 본 송군의 사기는 오르게 되었고, 한 번의 돌격으로 금의 전위 부대를 격파하였다.
7. 영창 전투
언성에서 패배한 올출은 언성과 영창부성(장사[長社])의 중간에 위치한 임영(臨潁)에 12만 대군을 집결하였다. 이것은 악가군의 병참선을 끊고 각개격파하려는 의도였다.
7월 13일 양재흥이 이끄는 300기가 금군 1만 명과 임영 남쪽에서 조우하였다. 양재흥은 분전하여 적병 2,000명을 쓰러뜨렸지만, 중과부적으로 전멸하였다. 구원하러 온 장헌의 부대가 남아 있는 금군을 격파하였고, 올출은 그날 밤 이동을 개시하였다.
악비는 올출의 의도를 파악한 뒤, 악운에게 배외군과 유혁군을 주어 영창부의 왕귀를 구원하도록 하였다. 14일, 올출의 군대는 보병 10만, 기병 3만에 달하였으며, 양 날개에 기병을 배치한 길이 6Km가 넘는 횡대를 전개하여 영창부로 육박하였다. 왕귀가 유혁군을, 악운이 배외군을 이끌고 성의 서쪽에서 금군을 맞아 싸웠다.
송군의 진형은 중앙에 악운이 이끄는 중기병 800기를, 양 날개에 보병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전투는 7시 무렵부터 12시 무렵까지 계속되었고, 동선의 답백군이 전투에 가담한 것도 있어서, 금군은 5,000명 이상이 전사하였고 올출의 사위인 하금오위 상장군을 시작으로 하여 수많은 장교들을 잃었으며, 2,000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고, 3,000필 이상의 말이 포획되는 피해를 입고서 패퇴하였다.
8. 송군의 전술상의 승리
영창부의 회전에서 승리한 악비는, 개봉 남쪽의 주선진(朱仙鎭)으로 병력을 전진시켰다. 이에 대하여 올출은 1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성벽을 구축하여 장기전으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악비는 배외군 500명의 우회 부대를 황하로 파견하여 마치 측면을 찌르려는 것처럼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인해 금군은 동요하였고, 완전히 무너져서 개봉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악비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기 위해 조정에 총공격을 건의하였다.
올출의 오산은, 송군이 전에 없이 강력하였다는 점에 있었다. 송군의 병사들은 정예 병력으로 단련되어 있었고, 장비도 우수하였으며, 지휘를 맡은 이들은 악비, 한세충(韓世忠), 오린(吳璘)과 같은 중국 전사상에 이름 높은 명장들이었다. 순창을 공격한 금의 장군들은 「지금의 남병(南兵)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다」라고 송군을 높게 평가하였다.
송군은 주력이 배치된 전선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전선에서도 승리를 거듭하고 있었다. 한세충이 파견한 통제 왕승(王勝)은 해주(海州)를 공략하였고, 장준(張俊)은 숙주(宿州), 호주(毫州)를 탈환하고 있었다. 섬서 지역에서도 송군은 선전하여서, 완안고는 봉상에서 물러나 공세를 중단한 상태였다. 하북에서는 양흥이 의용군과 합세하여 회주나 위주(衛州) 등의 황하 북쪽 기슭의 중요 거점을 공략하고 있었다.
하북의 도하 지점이 점령당했기 때문에, 올출은 대군을 보유하고는 있었지만 개봉에서 포위당하려 하고 있었다. 금군의 내부에서는 통제 왕진(王鎭), 통령 최경(崔慶)이 송군에 투항하였고, 돌합속의 휘하 장교들 중에는 악비와 내통하는 이들도 나타났으며, 소무대장군 한상도 휘하의 5만 병력을 이끌고 내응하려 하고 있었다. 송의 승리는 이제 마지막 한 걸음 단계까지 와 있었던 것이다.
전쟁은 송이 전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었지만, 남송의 조정, 특히 황제 고종(高宗, 조구[趙構])는 강화파였기에, 진회(秦檜)에게 화평을 추진하도록 하고 있었다. 진회는 화평 공작을 위해 원정 도중임에도 불구하고 송군의 진격을 억제하였고, 최종적으로 황제로 하여금 전군에 대한 철퇴 명령을 내리도록 하였다.
이러한 명령을 받은 악비는 「10년간의 노력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되었다」고 탄식하였고, 7월 20일에 전군을 철퇴시켰다. 금군은 송이 버려둔 각 주를 어려움 없이 점령하였다. 이듬해 양국 간에 화평이 성립하였고, 회수(淮水)를 경계선으로 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 「역사군상 그래픽 전사 시리즈 전략·전술·병기 사전 7권 : 중국 중세·근대편」(東京: 學習硏究社, 1999) 108~111쪽의 내용을 인용·번역하였습니다. 게시물의 상업적 이용 및 무단 이동은 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