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으라, 이스라엘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마가복음 12장)
예루살렘에서의 세 번째 논쟁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예수(막11:1-10)께서는 유대 지도자들로부터 여러 질문을 받습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 사람들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 묻습니다(12:13-17). 사두개인들은 “부활”에 관한 물음을 던집니다(12:18-27). 이 질문들은 예수를 시험하거나 곤란에 빠뜨리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질문과 대답은 논쟁적이면서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갈등과 적대감을 격화하는 반면, 세 번째 질문은 앞의 두 경우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에서 시작되고 이어져갑니다.
“모든 계명(율법) 가운데 으뜸은 무엇입니까?”라고 예수께 묻는 사람은 서기관(율법학자)입니다. 이른바 ‘율법 논쟁’이라 불리는 이 토론은, 율법 전문가를 대변하는 서기관과 그리스도교의 머리이신 예수 사이에 벌어진, 예루살렘에서 유대교 지도자들과 예수 사이에 오고 간 여러 논쟁(11:27-12:37) 중 가장 비중 있는 토론입니다. 논쟁이 아니라 대화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에 대한 존중과 우애가 끝까지 지속된다는 점이 돋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대계명(Great Commandment) 논쟁”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이 토론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다룹니다.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점은, 두 종교(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이 토론의 결론이 이견 없는 일치로 마무리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30절) 이웃을 사랑하라(31절)”는 계명이 가장 크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율법학자도 이에 적극적으로 찬동합니다(33절).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신6:4-5)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레19;18)은, 원래 각각 독립하여 존재하는 계명들인데, 사랑하라는 명령어를 매개로 하여 가장 위대한 계명으로 결합합니다. 이를 근거로 하여 “사랑”은 기독교와 유대교 신앙에서 최고의 가치를 획득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는 종교는 없다는 점에서, “사랑”은 기독교와 유대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 신앙의 바탕인 “사랑”의 계명이 어떤 맥락과 무슨 함의를 지니는지 앎으로써,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을 이해하고 그리스도인답게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31절; 신6:4)
성서의 유일신 개념을 ‘세상에는 신이 한 분밖에 없다’는 의미라고 정의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유일신 개념은 성서 자신에 의해 부정당합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출20:3)는 제1계명이나, “(여호와는) 모든 신 위에 뛰어나시다”(시95:3; 97:9)는 식의 구절들은 하나님 외에 여러 신이 있음을 전제합니다. 따라서, 유일신 사상은 하나님 외에 어떤 신도 없다는 단일신적 개념으로 등치될 수 없습니다.
유일성을 설명해 보자면, 세상에는 여러 어머니가 존재하는데 나의 어머니는 한 분이라는 뜻과 같습니다. 여기서 유일함은 관계로부터 생겨나고 있고, 그 관계는 사랑을 바탕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유일성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유일성입니다. 이 관계는 십계명의 서문에서 천명됩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출20:2) 생명을 주고 사랑해 준 한 여인이 유일한 어머니인 것처럼, 출애굽이라는 구원 사건에 의해서 형성된 이스라엘에게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입니다.
유일한 사랑 : … 다하여 사랑하라 (32절, 신6:5)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성서의 계명이 여타의 사랑 명령들과 구별되는 지점은, 유일하신 분을 유일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특성에 있습니다. “유일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표현됩니다. “… 다하고, … 다하고, … 다하고, … 다하여”라는 단서야말로 하나님 사랑의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입니다. “다한다”는 수식어를 배제하고 하나님 사랑을 말할 수 없다는 얘깁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상을 섬김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상황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되(사랑하되) 다하여 섬기지 않는 경우가 우상 숭배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랑을 나누어 다른 것들(재물, 권력, 성공, 명예 등)을 겸하여 사랑하는 상태가 우상 숭배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6:24)는 선언과 동일한 선상에 놓입니다. 또한, 경건한 부자가 근심하며 돌아간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인이었지만 다하여 사랑할 수는 없었던 사람입니다(막10:17-22).
유일한 사랑 :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33절, 레19:18)
율법이 말하는 사랑의 본질은 “다함”에 있고, 다해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유일하심에 뿌리를 둡니다. 나아가, “다함”은 하나님을 사랑함에만 해당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네 자신과 같이(네 몸처럼)사랑하라”는 계명 역시, “다하여사랑하라”는 뜻을 표현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더라도 “나”는 유일한 존재라는 점에서, 우리가 어떤 이웃을 상대하든지, 그는 많은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니라, “나처럼 유일한” 존재로서 사랑하라는 의미이겠습니다.
나를 사랑함은 본능적입니다. 때때로 내 자신이 싫어지고 원수처럼 여겨질 때가 있지만, 그런 때조차도 나는 나를 소중히 여기고 나를 위한 행동을 선택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이웃을 증오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조차도 미워하시고 분노하시며 질투하실 때가 있다고 성서는 알려줍니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부정적 감정의 지배를 받는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내 자신을 위한 행동을 선택하는 것처럼, 나는 타인의 유익을 위한 행동을 결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내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사랑함이 제사보다 낫다 (33절)
서기관은 예수의 율법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더 나아가 서기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다”는 말을 첨가합니다. 사실 이는 율법에 없는 조항이며, 소수 예언자의 견해에 지나지 않습니다(호6:5; 미6:6-8). 서기관과 예수 사이의 율법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 예루살렘이고 성전 근처(11:27)라는 점을 감안할 때, 성전의 제사보다 사랑하는 일이 우선이라는 주장은 매우 돌발적이고 위험한 발언입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최고로 여기는 제사장과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율법(말씀)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이런 상반된 두 주장이 예수 시대에 팽팽히 맞서고 있었으며, 후에 성전의 붕괴(주후 70년)와 더불어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몰락하게 되면서 후자의 견해가 유대 사회의 주류가 됩니다. 예수께서 서기관의 말을 ‘지혜 있는 대답’으로 여기셨다(34절)는 구절은 교회가 이 주장에 찬동한다는 의미를 암시합니다.
마음과 뜻 VS 목숨과 힘
원래 계명인 신명기 6:5에는 “목숨을 다하고”가 빠져 있습니다. 마가복음 저자가 “목숨”을 임의대로 첨가한 것은 “마음”과 “뜻”에 대구를 맞추기 위함이라고 추정해 봅니다. 마음과 뜻을 다함은 겉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목숨과 힘을 다함은 겉으로 드러납니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동기와 보이는 행동이 함께 작용해야 옳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사랑과 행동의 사랑은 때때로 이중적이고 자주 엇갈립니다. 게다가, 사랑하려는 열정이 오히려 사랑을 어렵게 만들거나 파괴적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늘 사랑은 어렵고 혼란스럽습니다.
사랑하라는 명령을 들었다고, 사랑의 감정이 생겨나거나 풍성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강요된 사랑은 억압이 되고, 두려움이나 거짓을 조장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사랑하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 명령이 마음을 바꿀 수는 없지만 행동을 바꿀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하라는 명령이 원수를 향한 증오의 감정을 누그러뜨리진 못해도, 증오의 행위를 멈추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나의 왼뺨을 때리는 이를 정서적으로 사랑할 수는 없지만, 보복하지 않기로 결단할 수 있지요(마5:39). 복수하지 않고 선하게 대해주는 행동을 사랑이라 한다면, 사랑하라는 명령은 언제라도 유효합니다.
들어라, 이스라엘 (29절)
계명은, 상식적으로, 명령입니다. 그런데 29-31절에 나오는 ‘사랑하라’는 동사는 명령형이 아니라 ‘미래형 직설법’입니다. 명령형의 동사는 단 하나인데, “들으라”입니다. 이를 근거로 문장을 다시 구성하면, “들으라, 그러면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가장 큰 계명은 “들으라”는 계명입니다. 어쩌면, 들으라는 명령은 모든 계명의 바탕이면서 가장 우선하는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들음으로써만 우리는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사랑 그 차체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분의 사랑에는 조건이나 한계가 없습니다. 의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햇볕과 비를 주시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 이를 대표합니다(마5:45). 분노하고 미워하기도 하시지만, 이를 초월하여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분으로서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사랑을 온전한 사랑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온전하심처럼 너희도 온전하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마5:48).
사랑이 실패하는 이유는, 내 힘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착각 때문입니다. 사랑을 위한 다짐과 노력이 좌절을 겪거나 왜곡되는 것은, 사랑은 사람에게 소유되지 않는 까닭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이신 하나님(요일4:8)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사랑하려는 자는 사랑이신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라’는 명령에 앞서 “들으라”는 명령이 먼저 주어집니다. 사랑은 인간의 결단과 노력으로 생겨나거나 완성되지 않고, 사랑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사랑은 시작되고 지속되고 완성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그 사랑에 사로잡힌다는 것이요, 사랑을 배운다는 의미이며, 사랑의 능력을 얻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모든 계명 중 으뜸은 “들으라! 주 너희 하나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을 유일한 주님으로 시인하는 것은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고백입니다. 사랑이신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는 이의 삶이 사랑이 됩니다.
https://www.youtube.com/live/4miW14JiHJk?si=3SC2jxShvNJBWb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