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철 金榮哲(1892∼1969)】 "광복군총영에 입대하여 결사대장"
독립운동가. 기독교인. 평안북도 영변 출신. 본관은 경주(慶州). 일명 영철(泳喆). 호는 죽호(竹虎). 아버지는 윤홍(允弘)이고 어머니는 이정신(李貞信)이다. 소년기에 한학을 수학하였고, 미국인 선교사가 주재하던 미국인 선교사의 지도로 제2교회와 선교사가 경영하는 병원에 다니면서 영어와 성경을 공부하였다. 그 뒤 대한제국 군인으로 복무하다가 1907년 군대해산 후 남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관전현(寬甸縣)에서 대한청년연합회의용대(大韓靑年聯合會義勇隊)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대한독립단과 합류하고, 다시 광복군총영에 입대하여 결사대장이 되었다. 1920년 9월 미국 의원단이 내한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국내의 일제 주요기관을 폭파하고 일본 고관들을 암살하라는 광복군총영장 오동진(吳東振)의 명령을 받고 김성택(金聖澤)ㆍ김최명(金最明)과 같이 무기를 소지하고 국내에 잠입하였다.
이 해 8월 16일 친일분자인 자성군수를 살해하고 곧 황해도 장연으로 가서 장연군수도 살해하였다. 이 두 사건으로 일본경찰의 감시와 경계가 엄해지자 함경도로 가서 베상인으로 가장하고 서울에 잠입, 청진동 이승도(李昇道)의 집에 유숙했다.
1920년 8월 21일 아서원(雅敍園)에서 조선총독부ㆍ남대문역ㆍ종로경찰서 등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거사에 대한 모의를 하던 중,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경성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언도받고 복역, 1929년 10월에 만기출옥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운동가. 평북 영변(寧邊) 사람이다. 구한국(舊韓國) 군인으로 복무하였으나, 1907년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애국투사들과 교유(交遊)하다가 귀향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앞장섰다가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동년 5월 다시 남만주로 망명하였다.
관전현(寬甸縣)에서 대한독립단에 입단하였으며, 이어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의 결사대장에 임명되었다.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이 내한하는 기회에 총영장 오동진(吳東振)의 밀명을 받고, 국내의 일제(日帝) 중요기관 폭파와 일제 고관들을 암살하여 국제적인 여론을 일으킬 목적으로 권총과 폭탄등을 휴대하고 입국하였다.
동년 8월 16일 친일파인 평북 자성군수(慈城郡守)를 사살하고, 황해도 장연(長淵)으로 가서 역시 친일파인 군수를 살해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경의 감시가 강화되자 그는 동지들과 함께 베장사로 가장하고 서울로 들어왔다.
서울에서 총독부, 서울역, 종로경찰서 등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중국 요정 아서원(雅敍園)에서 김성탁(金聖鐸)ㆍ김최명(金最明) 등 동지들과 함께 결의를 다짐하는 모임을 갖고 있을 때 이를 탐지한 일경에게 포위당하여 체포되었다. 그는 체포되어 가면서도 동지들을 돌아보며 태연한 낯으로 "요정에서 회식하고, 자동차 타고 잡혀가니 남아가 할 만한 일이로다"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한다. 그는 1921년 3월 10일 징역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