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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브루너 / 유광웅/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와 신학] 에서
Ⅰ. 에밀 브루너(Emil Brunner)
브루너는 스위스의 쮜리히와 독일의 베를린에서 신학을 전공한 뒤 1924년 쮜리히 대학신학부의 조직신학과 실천신학 교수로서 재임하면서 역대 그 어느 신학자보다도 폭넓게 세계를 무대로 신학적 활동을 전개했다. 영어권 국가들은 물론 네덜란드, 헝가리, 덴마크, 핀란드, 스웨덴 등 유럽 여러 나라의 교회와 신학교의 초청을 받았고, 미국 프린스톤의 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일년 동안 연구하면서 다민족국가의 종교적 상황을 접해볼 수가 있었다. 또한 그는 일본의 국제기독교대학(International Christian University)에서 삼년동안 교수로 있었으며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돌아보면서 비기독교적, 이방종교적 정황에서의 기독교복음 전파의 가능성을 모색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스위스와 독일, 그리고 몇몇 인근 일부 국가들을 여행하며 주로 자기 신학의 추종자들과의 대화로 만족했던 칼 바르트(Karl Barth)와는 달리 이처럼 수많은 국가의 민족들과 종교들을 접하는 가운데 기독교 선교의 과제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독특한 신학적 방향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일본, 미국, 유럽의 여러 국가들의 친구들과 완전히 다른 정황 속에서 예수그리스도의 교회 형성에 대해 고뇌함으로써 교회 앞에 놓여있는 선교적인 장애물들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특히 일본에 머무는 동안 그가 오랫동안 염두에 두고 있던 '접촉점' (Anknupfungspunkt)에 대한 보다 분명한 소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브루너는 세계기독대학생운동과 도덕 재무장 운동(Moral Rearmament Movement)에 깊이 관여하였고, 청소년 종교교육과 설교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브루너는 처음부터 신앙의 주관화에 대해 적극적인 저항을 감행하면서 경건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중심의 슐라이에르마허(F. D. Schleiermacher)의 신학을 신비주의로 규정, 배격하였다. 그는 초기에 '변증신학' 의 공동전선에 함께 했던 칼 바르트가 구속에 비해 창조를 등한히 하였고, 일부 신학자들은 창조에 비해 구속을 등한시한다고 보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행위의 평형성을 유지해 보고자 시도한다고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타르트는 교회의 사람으로 교회를 위해 생각하지만, 나는 선교사로서 생각하고 있다'라 하였다.
선교사의 입장에 선 브루너는 '접촉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자연신학' 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언제까지나 기독교적 신앙인식 밖에는 구원의 증거로서의 그 어떤 자연적 신지식이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신학은 그리스도를 '신비의 전달자'로서 여길 수 없고, 자연역사와 인간정신 속에서 하나의 계시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기독교의 신앙이 '일반계시 (Allgemeine Offenbarung)' 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한다 신앙의 역할은 인간이 자기 자신 안에 하나의 '손상된' 하나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위에 그 근거를 지닌다고 한다.
일반계시가 없으면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물을 수도 없다. 단지 문제는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받아들여져야 하는가 하는 것일 뿐이다. 직접적인, 아니면 간접적인 의미에서인지, 그리스도의 계시(특별계시)가 단지 이 일반계시의 한 정점으로서 여겨지는지, 아니면 그것이 완전히 다른 그 자체로서의 계시로 이해되는지 하는 문제일 뿐이라고 브루너는 말한다.
브루너는 자신의 신학을 논쟁적 - 변증적신학(Eristik)이라고 명명하면서, 그것은 곧 선교적 신학이라고 밝힌다. 그의 지론은 신학이 생동적이고 실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신앙이 시대정신에 의해 그 유효성에 있어 위협을 당할 때, 바로 그곳에 서서 신앙을 해석하고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도 바울이 말한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 10:4-5)라는 말 속에 논쟁적-선교적 신학이 지향하는 프로그램이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보았다(Dogmatik Ⅰ.108f.).
선교사가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이미 갖고 있는 인식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한다. 따라서 만일 전도 대상자들이 인식하고 있는 것을 깊이 파헤쳐 그 뿌리를 잘라내지 않으면 그 증언은 전혀 효력을 낼 수가 없다. 불신자는 일정한 시대정신과, 복음에 적대적인 인생관과 자기이해에 묶여있다. 그 안에는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혼합되어 있다. 자연인에게 있는 전적인 죄성이란 그가 생각하고 믿는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기이해와 인생관 속에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별해 내기에 완전히 무능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진리를 받은 자가 해야 할 임무는 이 분리를 수행하고 그 분리과정 속에서 기독교 복음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선교적 신학의 임무인 것이다. 선교적 신학은 이처럼 복음을 들어야할 사람들의 정신적 상황을 고려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펼쳐가는 작업이다.
교의학은 계시된 진리를 제시하며 "이것이 인간의 구원이다"라 말하고, 선교적 신학은"이것이 인간의 곤경이요 위험이다.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원이다"라 말해준다. 선교적 신학은 우선 온전히 듣는 자의 편에 서서 그의 곤궁과 절망, 그의 의혹과 동경을 살핀다.
불안한 마음(cor inquietum)을 들춰내 왜 그의 마음이 불안한가를 이해시킨다. 그의 곤경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있음으로 발생하며 이 떠남이 곧 그의 곤경임을 인식시키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기적이 이 곤경을 깨뜨려 줌을 가르쳐 준다.
선교적 신학은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갖는 대화의 형식을 지닌다. 상대방의 의문에 귀기울이고 그가 실제로 알고 인식하는 것을 이해하면서, 그의 인식과 질문들이 참된 해결과 참된 인식을 주는 진리를 비켜가고 있음을 지적해 준다.
이러한 선교적 신학의 과제에 있어 '접촉점'의 문제가 중요하다. 브루너에게 이 '접촉점'은 논쟁적 - 선교적 신학의 근본 문제이다. 세상에 대한 주의 깊은 관계는 기존하는 것들에 대한 사회적인 비판을 넘어 '교양 있는 불신앙'과의 논쟁으로 이어져야 한다.
'만남으로서의 진리' 가 브루너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이해를 위한 하나의 개념이다. 하나님 -당신과 그에 대해 자유롭게 대답하고 결단하는 인간 -나 사이의 인격적 만남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참된 관계이다. 인간의 자아가 항상 너'와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발견되듯이, 주체와 객체의 합리적 사고 테두리는 인간의 인격이 하나님-당신과의 관계성 이해와 나 -그것 -세계의 관계로부터 나 - 당신 -세계의 관계가 구별될 때에 극복될 수 있다.
브루너는 종교개혁신학에 입각하여 교회의 선포행위는 오직 성경만을 그의 심판자로 두고 있으며, 하나님의 지존하고 자유로운 선택의 은혜에 대한 선포만이 온당한 것임을 분명히 전제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아무런 보탬을 할 수 없고, 그의 의지는 자유롭지 못하고 죄에 묶여있음과 하나님께서는 자유로우신 자비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그리고 이 십자가에 대한 복음을 생생하게 깨닫게 도와주는 성령을 통해서 인간의 구원을 이루심을 브루너는 너무나 분명하게 알고 있다.
논쟁적 대결은 결코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다. 논쟁(변증)의 역할은 아주 겸손한 것으로써, 신앙은 우리를 과학적인 탐구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브루너는 '선교적 신학자'로서 논쟁술(Eristik)과 교리학(Dogmatik)을 엄격히 구분하려 하지 않는다. 나아가 그는 윤리학자로서 성령의 사역을 주목하였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 혹은 성령의 열매에 중점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기독교 신앙과 선교는 인간이 모든 문화와 도덕과 종교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절망적인 정황에 처해있다는 위기감 속에서 비로소 건전히 유지되는 것이다.
세상의 상황뿐 아니라 교회와 개인의 신앙상태도 브루너의 눈에는 절망적으로 나타났다. 브루너는 자신의 논쟁적 신학 입장에 서서 복음과 상황, 하나님 말씀과 인간실존, 계시와 이성, 교회와 세상 사이를 연결코자 하기 때문에 이 역동으로부터 윤리학자로서, 후기에는 교리학자로서 세계 신학과 교회에 폭넓은 기여를 하였다.
그는 모든 성경적인 복음의 선포는 논쟁적-변증적 요소를 지니게 마련임을 강조하였다. 감추어진 뿌리, 즉 믿음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의 삶에는 반드시 열매가 맺어짐을 역설하였다. 믿음은 그 자체가 열매를 맺는 새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는 '두뇌신앙' 을 극히 경계하였다. 그는 사도적, 성경적인 교회로부터 오늘날의 교회가 멀리 이탈해있음을 밝혔고, 참된 그리스도 공동체의 실현을 위한 깊은 소망 안에서 교회와 더불어 고뇌하였다.
II. 에밀 브루너의 '자연신학적' 관심
자연신학은 기독교 신학의 한 원리로서 예수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니님의 계시를 통하지 않고서도 인간이 태어나면서 본성적으로 인간으로서의 특징적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갖고 있거나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런 주장 아래서 펼치는 신학적 노력과 그 과정을 일컫는 개념이다.
자연적 신지식에 대한 관심이 주로 세 가지관점에서 고조되고 있다. 첫째는 변증법적 관심이다. 비기독교인이나 무신론자와의 대화속에서 필요한 논증으로써 자연신학의 필요성이 등장하게 된다. 이럴때 '이성'이 공동의 이해를 위한 기초가 되기 때문에 상대방의 이성에 호소하여 비록 기독교의 진리' 는 아직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존재 혹은 적어도 하나의 절대자의 실재를 논증함으로써 비관주의나 이론적 무신론을 반박하고자 시도하게 된다. 모든 인간이 타고난 '종교의 씨' 를 파헤쳐 밝혀내는 것이다.
둘째로 사도신경 가운데 제 1항, 즉 창조주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고백의 장이 자연적 신인식의 문제를 담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때 신지식이 점차적으로 달라질 뿐 아니라 양적으로도 분리될 수 있다는 전제가 있게 된다. 즉, 비록 단지 잠정적이고 어둡고 나중에 채워져야 할 것이지만, 어떻든 속죄자 하나님과(사도신경 제 2항의 내용) 성령 하나님(제 3항)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창조자 하나님(제1항)의 인식이 가능하다고 보게 된다. 그리고 나아가 이방인들이 지닌 그들 나름대로의 신인식도 간접적으로나마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일치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나 우리 주변의 현실에서 한 초월적 존재성이나 의미성 또는 당위성을 만나게 될 때 그때 우리는 -비록 덮여져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이 같은 전제가 없이는 이 두번째 신학적 관심은 전개될 수가 없는 것이다.
셋째로는 연속성의 문제이다. 자연적 신인식의 인정은 하나님의 은혜행위와 '자연적'실재성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케 만든다. 특별계시가 있기 전이나 그것의 밖에 있는 실체는 단지 비었거나 무의미한 것일 수가 없다. 하나님은실로 믿는 자들의 창조자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창조자시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비록 죄악에 의해 더럽혀졌을지라도 그 자체로써 무의미한 것일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보다 중요한 문제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 인간 예수가 하나의 허상이요 따라서 그 계시도 허구이든가, 아니면 이 인간 예수 그리스도가 죄 없는 것만을 제외하고는 한 실재적 인간이었을 것이다. 후자가 사실일진대 인간의 본성자체는 계시를 수용할 수동적 자질을 보유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 이전이나 그 계시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이 전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말할때에는 이같은 주장은 불가능하게 된다.
즉, '자연'과 '은혜'사이에 하나의 연속성(Kontinuit t)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행위를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들어오신다. 이때 이 역사는 그 자체로써 하나님의 은혜행위의 장소가 될 만한 어느 정도의 적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하나님 말씀의 선포는 이성적인 언어로써 이루어지며, 신학 역시 이성적인 말로써 선포를 위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즉, 기독교의 설교나 신학의 '형식적' 기관은 곧 '자연적'이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
리의 '자연적' 이성은 그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나아가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는 그 말을 수용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수동적 적성이 이미 존재해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양한 면에서 항상 동일한 질문이 제기되고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인간, 역사, 이성 즉 자연' 이 '은혜'에 대한 적성 또는 수용능력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귀착된다. 인간에게서 자연적 신지식의 가능성을 보는자는 이 '자연' 의 수용력을 시인하는 것이다.
죄가 인간의 '자연' 을 삼켜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죄가 곧 인간의 자연' 이고 '본성'이 되고 말았으므로 인간은 결코 이같은 적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될 때에는 후라키아니즘적인 결정론의 오류 속에 빠지고 만다(Matthias Fracius,1520-1575 루터의 추종자로서 예나대학에서 신약학을 교수하다가 신인동역설 논쟁과 관련되어 퇴임. "인간은 자기의 회심에 있어 통나무나 돌맹이만도 못하다. 인간은 죄인으로서 오직 하나님에 대해 반역할 따름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원하는 자를 회개시키는 것이 아니고, 이 항거하는 인간을 회개시킨다"라 말함으로써 '결정론자'로 여겨져 배격 당함).
그리고 죄와 상관없이 인간의 자연성이 존재론적으로 보아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수동적 적성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고 보게 될때 창조와 화해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놓이게 되며 영지주의나 마르시온적인 이원론에 빠지고 말 것이다.
브루너는 창세기 1장 26절 이하에 언급된 하나님의 인간창조를 근거로 한 하나님형상(Imago Dei)의 교리가 신학의 운명을 결정지우는 핵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의 특유의 인간론을 제시한다. 브루너는 인간 안에 있는 원래의 하나님 형상은 파괴되었고 본래적인 의(촌), 그리고 그것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선한 것을 행하거나 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상실되었으며, 자유의지까지 없어졌다는 진리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본래 원하셨던 인간존재성(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는 삶으로써의 의)인 그 자료적 (materiale) 하나님 형상성은 죄로 인해 남김없이 파괴됨으로써 도착(倒錯)상태에 있으나, 인간은 형태적(formale)으로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묶여있다고 한다.
브루너는 이와같이 인간의 하나님형상성을 두 가지 의미로 설명하면서 그것을 어디까지나 카테고리로서 이해해 주기를 당부하고 있다 하나님형상의 두번째 카테고리, 즉 형태적 하나님형상은 초기 프로테스탄트 교리학자들이 말한 '형상-잔여' 라는 양적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형태적 하나님형상'은 인간을, 그가 죄인이건 아니건, 다른 피조물들과 구분 지우는 인간만의 독특한 것, 다름 아닌 그의 '인간성(Humanum)'을 말한다.
이 인간성이 인간으로 하여금 전 피조세계 속에서 최우위에 위치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죄인일지라도 여전히 창조의 중심이요. 정상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인간의 우위성은 하나님을 향해 지니는 인간의 독특한 위치를 말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특별한 것을 위해, 즉 자기의 형상을 지니도록 창조하셨음을 의미한다.
인간이 하나님형상 때문에 할 수 있는 역할은 죄로 인해 파기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죄를 지을 수 있는 전제를 이루기도 한다. 브루너는 인간이 지니는 형태적 하나님형상을 두 가지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인간의 주체성(Subjektsein)과 응답성 (Verantwortlichkeit)이 그것이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로서 한 주체이다. 하나님은 원상적 주체시고 인간은 형상적 주체일 따름이다. 인간은 비록 죄인일지라도 한 주체이기를 그치지 않았고, 그와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고, 그와 하나님 사이에 대화의 가능성도 완전히 중단되지 않았다. 그것은 곧 인간이 응답할 수 있는 책임적 존재임을 말해준다.
죄인으로서도 인간은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다. 말을 하고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능력 (Wortf higkeit)과 응답능력 (Verantwortlichkeit)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인간에게 말을 하시는 성육신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는 것이다(Verantwortlichkeit는영어로 responsibility = response-ability가 흔히 '책임성' 이라고 번역되고 있는데 본래의 뜻은 '대답할 수 있는 능력' 이다).
육신이 되신 말씀, 육신이 되어 인간 가운데 거하시며 인간에게 건네시는 말을 인간이 전혀 이해할 수 없다면 그 성육신은 무의미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타락 이전이건 이후건 여전히 인격이며, 하나님께서 원상적으로 소유하신 것을 형상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인격적 인격이 아니고 비인격적 인격이다.
그 다음 브루너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세계이며, 모든 피조물에 있어서 그 창조자의 영이 어느 정도 감지된다고 말한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를 찬양한다.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만드셨을 때 그것에 자기 존재의 인(印)을 치신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창조는 동시에 하나님의 자기계시이기도 하다.
인간은 또한 '양심(Gewissen)'을 지니고있다. 어쨌든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바로 오직 그 때문에 또한 죄를 지을 수 있다.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존재는 또한 죄를 지을 수 없을 것이다(한국어로 '양심' 이라고 번역되는 독일어의 Gewissen이나 라틴어에서 나온 영어의 conscience =con-science라는 용어가 '앎', '함께 아는 지식' 을 의미하고 있음을 볼 때 이 관계가 더욱 분명해진다) . 때문에 죄인의 책임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은 동일하며, 하나님 법에 대한 지식은 또한 바로 하나님 지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려운 질문은 두 가지의 계시가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성경은 이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주고 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계시, 즉 창조로부터의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의 계시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 것일까? 첫번째의 창조를 통한 계시는 죄에 빠진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하기에는 부족하고, 따라서 구원을 얻게 하도록 이끌어주지는 못한다. 바울에 의하면 창조 속에 나타난 계시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주를 그의 존귀와 지혜를 따라서 인식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죄가 인간의 시선을 흐리게 하여 하나님 대신에 잡신들을 '인식하고' , 또는 그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는 바른 신앙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를 근거로 이중계시를 말할 수 있다. 즉 첫째로 창조 안에 나타난 것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해 깨우쳐진 자에게만이 그 전체 범위가 밝혀지게 되는 계시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로써, 그 온전한 빛 안에서 인간은 그 첫째 계시를 비로소 확실히 보며, 나아가 그 창조계시가 드러내 보여주는 것을 초월하여 제 삼의 계시인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바라보게 될 그 때를 소망하게 된다.
온전한 신학은 하나님께서 진실로 이방인을 하나님에 대한 무지 가운데 내버려두지 않으셨고(행 14: 17) , 그럼에도 이들이 하나님을 알려 하지 않으며 구원의 길에 이르지 못했다는 이 이중 명제를 지나쳐버릴 수가 없다. 전능하신 창조주와 인간의 죄악이 동시에 진지하게 여겨질 때에 필연적으로 세번째 개념, 즉 '하나님의 은혜로운 보존'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자기로부터 멀리 떠난 죄 중의 피조물에게조차도 가까이 계신다.
바로 이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과 인간의 멀리 있음의 동시성이 신학에 결정적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타락한 피조물에게 가까이 계심이 바로 그의 '보존(지탱 유지)하시는 은혜' 이다. 하나님은 보존하시는 은혜가운데 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창조은혜를 죄에 빠진 피조물로부터 완전히 거두어 가시지 않으신다. 이 은혜는 죄가 가져오는 무서운 결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시기 위해 새로운 수단을 사용하는데, 그 예가 국가와 결혼(가정)이다.
하나님께서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골고루 해를 비추어주시고 인간에게 생명과 건강과 힘 등을 주시는 것이 보존은혜이다. 다른 말로 말해 '일반은총'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는 은혜, 즉 '특별은총' 을 알기 전에, 비록 올바로 알지는 못하고 있었더라도, 이 보존하는 은혜 속에 살아왔음을 알게된다. 나아가 인간의 전역사적 삶도 이 보존하는 은혜 아래 있는 것이다.
부모나 민족, 전인류, 그리고 그의 역사로부터 우리가 지니는 유산은 신앙 안에서 볼때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은총의 선물이다. 다시 말해 구원하는 은혜가 아니라 보존하는 은혜이다. 그리고 역사적 -사회적 삶 속에서 지속적인 윤리성을 지니는 '질서들(Ordnungen)' 이 또한 이 보존은총의 범주 속에 포함된다. 결혼과 국가와 같이 그것들이 없으면 인간의 공존이 불가능하게 되는 존엄한 질서들이 있는 것이다. 브루너는 이것을 '창조질서 (Schopfungsordnungen)' 라고 부른다. 결혼은 창조주가 주신 하나의 '자연적' 질서이다. 결혼의 가능성과 그 실현을 향한 '자연적인' 역동이 인간의 본능으로 주어졌고,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구현된다. 결혼은 인간의 자연적인' 충동일 뿐 아니라 인간성 자체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혼도 오직 믿음에 의해 그 의미가 온전히 이해되며, 그 결혼을 제정하신 창조주의 뜻에 합당하게 실현될 수 있다.
국가도 그 형태가 어떠하든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다. 인류의 역사가 존속하는 한국가도 함께 있을 것이다.
결혼이나 국가가 믿음에 의해서만,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 본래적인 의미와 가치가 드러나고 하나님 사랑의 의지와의 연관 속에서 비로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돌덩이나 막대기가 아닌 인간 주체만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때 궁극에는 그 누구도 이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혜를 위한 '접촉점'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 '접촉점'은 죄인에게 있어서도 없어지지 않은 '형태적인(formals)' 하나님형상, 인간의 인간됨, 인간성을 구성하는 언어능력과 응답성이다. 인간이 말을 들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인간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수용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 이런 것은 죄인 안에서도 파기되지 않았다 단지 이 '수용성' 이 질료적인(materiale)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수용성은 하나님 말씀에 대해 '예', 혹은 '아니오' 라 대답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형태적 언어 수용성을 일컬을 뿐이다. 하나님에 의해(그리고 인간 상호간에) '말건넴 받을 수 있는 가능성'(Ansprechbarkeit)이 또한 그 말건넴에 대해 응할 수 있는 응답성(책임성)의 전제를 이루고 있다. 도대체 말건넴 받을 수 있는 존재만이 책임적 응답을 할 수 있고, 심지어 죄를 지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책임적으로 죄를 범하기 때문에 그는 또한 그 죄에 대해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인간이 어떻게든 죄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이해하는 전제가 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없이는 죄도 있을 수 없다. 죄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의 죄일 뿐이다. 그러나 죄 안에는 하나님 지식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은 죄의 거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Natur und Gnade, 18) .
여기에 하나의 역동성이 내재한다. 이 역동성 속에서만이 믿음의 책임성이 드러난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그 불신이 자신의 잘못 탓이고, 믿는 자는 자기의 믿음이 순전한 은혜임을 안다. 여기에 하나님 은혜의 역학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비로소 인간의 언어능력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타고난, '자연적' 능력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다시 스스로 이 인간의 언어능력으로 하여금 자신의 말씀을 믿음 가운데 들을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때문에 접촉점의 교리는 '오직 은혜'의 교리를 전혀 위협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전혀 지니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가 닿을 수 없을 것이며, 양심을 지니지 않은 자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는 외침에 얻어맞지 못할 것이다. 성령에 관해 생각해볼 때에도 이러한 역학이 분명해진다. 성경이 믿음을 성령의 역사요. 은사라고 말하고 있음이 확실하지만, 나의 안에서 성령이 믿어주고 있다고도 결코 말하지 않는다. '내'가 성령을 통해 믿는 것이다. "우리가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2)
브루너는 자연신학이 교회에 줄 수 있는 몇가지 실제적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교회의 임무인 복음선포는 설교나 교육, 영혼간호(Seelsorge, 상담), 신학, 개인적인 간증 등으로 행해질 수 있는데, 인간의 말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에 인간의 말들 가운데 가능한 한 하나님의 말씀에 근접하는 말들을 찾아내야만 한다.
인간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느 정도 적합할 수 있다는 것, 인간이 하나님에 관해 말을 하고, 그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음과, 주관적으로 볼 때에는 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간되심, 즉 그리스도를 통한 '말씀' 속의 계시는 인간이 죄에도 불구하고 형태적으로나마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 사이에 원상-형상적 관계가 기존하고 있다는 전제 아래 선포행위에 임하게 된다. 우리가 타인과 도대체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가능성 위에 비로소 교회는 선포의 용기를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접촉점'으로서 인간의 언어능력이며 응답성이다.
교회는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그에 따라 선포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아무리 좋은 선포내용이라 할지라도 한낱 허공을 떠도는 소리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인간의 마음을 여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의 감화-조명아래 인간은 그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순수한 진리교리와 성령의 작용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으나 우리가 찾아 행하는 선포의 형태도 결코 등한시될 수가 없다.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와의 연관성 속에서의 자연신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모든 기독교교육을 위한 필수조건이기도 하다. 올바른 선포의 내용(Was, 복음)과의 연관 속에 올바른 선포의 방법 (Wie 어떻게)이 강구되어야한다. "내가 죽음의 병상에 누워있는 한 사람에게 말해주어야 하는 그 내용, 즉 복음은 성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이 그에게 들어가 자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하는 방법도 그에 못지 않게 성스러운 것이다‥‥한 영혼의 간호자(Seelsorger, 상담자)가 -좀 강도있게 말하자면-그 선포내용을 가지고 천당에 들어가지만, 그 방법으로 인해 지옥에 떨어질 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Natur und Gnade,43).
이 '어떻게'의 문제를 간과하는 것은 신학적 진지함이 아니고 오히려 신학적 이기주의다. 말하자면 선포내용인 그 '무엇'에 대해서는 신앙이 감시하며 지켜야하고, 그 '어떻게'에 대해서는 사랑이 살펴 보호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 '어떻게' , 즉 사랑이 결여될 때에는 신앙까지 결여될 것이 분명하다. 자연신학은 불신자와의 대화를 위해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 우리는 이러한 대화에 있어 반역할 위험은 피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의 잘못된 변증적 접촉이 있을 수 있다고 하여 올바른 접촉을 피해서는 안된다. 선포를 위한 신학적 작업, 즉 선포행위를 도울 수 있고, 도와야 하는 개념적 -이지적 작업이 필요하듯, 선포에 있어 장애요인들을 제거하는 하나의 개념적 - 이지적 준비작업이 있어야 한다.
모든 선포행위를 움직이게 하는 중심점은 자연신학의 중심점인 하나님형상론, 특히 인간의 응답성에 관한 교리이다. 이 자연신학적접촉점에 대한 무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현대에 있어 교회를 완전한 고립 가운데로 몰아넣게 될 것이다. 물론 가장 중심되는 것은 교리학이나 논쟁술이나 윤리학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 말씀 자체의 선포다.
그러나 이 세 과제를 위하여, 그리고 선포자체의 방법을 위해서 자연신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절실히 필요하다.
IV. '접촉점'과 '한국적 신학'의 가능성과 그 한계성
'접촉점' (Ankn pfungspunkt는 '연결점' 이라고 번역함이 보다 정확하다)의 문제는 기독교읜 복음선포가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대두되어 왔다.
교회는 일차적으로 선교적 공동체이다. 복음선포의 의무,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에 대한 세상과의 커뮤니케이션이 교회의 본질적인 임무이다. 구원의 복음은 듣는 사람에게 극히 새로운 것일 뿐만 아니라, 낯선 소식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접촉의 문제가 불가피하고, 복음 청취인의 종교적 이해 속에 복음을 안착시킬 만한 그 어떤 점(란), 혹은 복음을 침투시킬 문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복음, 죄의 용서와 심판,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냉담하고 적대적인 세상을 마주해있다. 교회는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미련함' 인 복음을 선포해야만 한다. 이 '하나님의 미련함'은 인간보다 지혜롭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한다. '인간보다 강한 하나님의 약함'이 십자가이다. 원칙적으로 볼 때 선포되어야 할 그 복음은 전할 수 없는 것이요 전혀 커뮤니케이션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 복음은 그 어떤 언어나 인간의 사고방식, 흑은 표현형식으로도 결코 적당히 번역될 수가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럼에도 복음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업'에 대한 선포이기 때문께 인간의 가장 깊은 요구와 동경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인간의 말을 통한 이 복음 선포는 청취인의 반응과 변화를 가능케 할 수 있다. 이점에 있어서 접촉점 문제가 지닌 역설이 드러난다. 즉, 접촉문제의 배후에는 항상 '다른' 복음이 전해지지 않도록 복음을 충실하게 전달해야 하는 것과 그것을 진정으로'인간을 향해' 말하고자 하는 노력 사이에서 발생하는 치울 수 없는 긴장이 놓여있다.
기독교 선교는 타종교들과 민족문화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지녀야 하며, 그에 따라 접촉점의 문제도 다양한 양상을 띠게 될 것이다. '이거냐 저거냐'의 강경한 입장이 있고(복음진리는 강경함으로만 복음일 수 있다), 고전적 '로고스 - 스페르마띠꾸스(Logos-Spermaticus)' 교리에 상응하는 동경(비기독교적 종교들) -성취(기독교)라는 하나의 연속성의 관계로 이해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고, '이것도 저것도 다 좋다'라는 복합주의 또는 종교적 상대주의적 입장도 있다.
신학적이고 또 실천적인 이유에서 우리는 접촉점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가 지니는 인간 종교들에 대한 관계가 강력하게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미련하심'은 '인간의 지혜'에 아무런 접촉점을 갖지 않는다.
여기서 바르트가 말하는 '위로부터 수직적으로' 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면그것은 접촉점의 문제에 있어 반쪽 대답일 수밖에 없다. 기독교의 복음화 위임에 대한 진지한 의식은 커뮤니케이션의 한 요소로서 이 접촉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접촉점을 말함에 있어 결코 펠라기우스적인 인간학의 오류에 빠져서는 안되며,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지식을 보충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한 '자연적' 신지식을 인정해서도 안된다. 그리고 그 어떤 접촉기술을 통한 신앙조작의 시도나, 십자가 복음의 '미련함'으로부터의 도피가 있어서도 안된다.
인간의 이해능력에의 접촉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건으로서의 신앙이 인간의 포착범위 저 밖에 있다는 사실에 있어 그 한계점을 드러낸다. 회심방법론, 혼합주의, 세속적인 적응은 잘못된 접촉형태이다.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 (고전 9:22)이라 함으로써 접촉 문제에 대한 좋은 선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복음을 위함이지 복음을 포기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인간적 연대 속에서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가까이 가져다주어 구원코자 함이다.
접촉은 이러한 의미에서 듣는 사람의 이해상황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고 복음의 증언에 있어 상대와 더불어 연대적 관계를 가짐을 의미한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말씀의 올바른 증언과 올바른 들음을 위함이며, 인간 편에서의 가까이 날아감과 말씀 편에서의 가까이 옴의 역동성의 보존이다.
V . 한국적 신학의 가능성과 그 한계
우리가 '한국적 신학' 이라 말할 때 그것은 한국 교회가 지닌 문화적 전통과 역사적 특수성을 배경으로 형성되는 한국적 개성'을 지닌 신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적 개성을 형성한다는 것은 한국의 사회-문화적 특수성과 오랜 한국 문화가 지닌 사상적 전통성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외국의 선교사나 신학에 의해 이해된 복음, 또는 교리들이 한국에 전달될 때에 이를 받아들이는 한국인의 문화적 상황과 의식구조에 따라 재해석됨으로써 한국적 이해가 성립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재해석, 즉 번역이 곧 '반역(反逆)'일 수 있다. 따라서 이 '반역'의 제거가 신학의 최대 과제라 할 수 있다.
한국적 신학이 기독교의 진리-복음에 반역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탈서구화'라든가, '우리의 한(恨) , 맛과 멋, 우리의 얼'을 주장 고집할 것이 아니라 부단히 원천으로 거슬러올라가 다시금 성경적 근원으로부터 출발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한국적 신학의 문제는 결국 해석학적 과제라 할 수 있는데 텍스트, 즉 기독교 진리-복음의 말씀인 성경과 한국적 정황과의 접촉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의 문제이다. 브루너는 종교개혁신학에 입각하여 선교적-논쟁적 신학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는 성경이 유일한 심판자요, 그 안에 계시된 구원의 복음이 그의 텍스트(Was)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존한 자유로운 선택의 은혜가 기독교 선포의 근본이며 중심임을 전제하는 가운데 또한 일반계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형태적 하나님형상에 근거한 자연신학적 접촉점을 통해 비기독교인이나 아직 철저한 결단과 확신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접목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접촉은 '오직 은혜'의 교리를 깨뜨리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지식을 보충하거나 그것을 상대화하지 않는다고 한다.
접촉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복음을 위함일 따름이다. 텍스트를 들고서 인간의 '인간성'즉 인간의 언어능력과 응답능력을 향해 다가가 그 텍스트를 연결시키고자 한다. 그리고는 그 인간의 곤경과 -그것은 다름 아닌 죄이다-불안한 마음(cot inquietum)을 풀어주고, 그 불안과 곤궁의 원인을 알려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어주고자 한다.
우리가 한국적 신학에 관해 논하고자 할 때에 우선 밝혀야 할 것은 한국적 개성'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크게 한국의 일반적 문화역사와 종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한국의 역사는 학문적으로보다는 성경적 입장에서 이해해야할 것이다.
기독교적 사관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역사에 섭리하시며,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 세상의 역사에 종말이 이르고 역사를 심판하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실 때까지 이 역사를 주관하고 통치하신다는 신앙 위에 유지되어야만 한다. 한국사를 비롯해 세계사를 섭리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께서 개인과 민족 하나 하나의 가치를 인정하시며 그에 의미를 두고 계신다는 전제로 한국사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가능하다. 사도행전 17장 24절 이하의 말씀이 이 사실의 근거가 될 수 있다.
한국사를 특별은총에서보다는 일반은총의 빛 아래 놓고 봄으로써 하나님께서 한국의 기원으로부터 시작하여 현재와 미래의 역사까지 주도하심을 믿는 신앙고백적 역사이해 아래서만이 한국적 신학의 가능성을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에밀 브루너도 동일한 선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전의 역사를 이해하고 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갈4:4)한 말씀을 통해 브루너는 예수그리스도의 오심 이전의 시간을 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한 대기(待機)와 준비의 시간으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기독교가 이 세상에 널리 퍼져 나간 역사를 회고해볼 때 여러 가지의 준비단계가 있었음을 예로 들고 있다. 알렉산더 대제의 로마제국의 확대로 인해 민족을 분열시켰던 큰 요인인 민족적-종교적 담이 무너짐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선교의 길이 예비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중해 연안의 모든 민족에게 구원자에 대한 대망의 기운이 고조되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로마법에 의한 세상의 상호교류의 확장과 세계 공용어로서의 그리스어 정착 등이 그리스도를 맞고, 복음의 전파가신속해지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다고 보고 있다(Dogmatik Ⅱ.249ff) .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는 한국의 기독교 전래 이전의 역사를 구속사와 연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관 아래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하나의 접촉점으로 삼을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볼 수 있다. 예를 들면 15세기에 제작된 한글은 19세기 말 기독교 복음전파에 큰 역할을 하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한국어가 지닌 특성이 접촉점으로써 한국적 기독교 형성을 위한 하나의 촉매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한국적 종교가, 만약에 그것이 도대체 있다면, 하나의 접촉점 역할을 하여 한국적 신학 형성에 이바지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는 가연성이 문제된다 유교, 불교, 도교,샤머니즘 등이 하나의 일반은총적인 접촉점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유교와 불교와 도교는 한국 종교가 아니며, 샤머니즘도 한국 특유의 종교만은 아니다. 본래 우리 민족의 조상들은 물화론적 신앙과 다신론적 신앙을 지녔고 아직도 이러한 종교심이 다양한 형태로 많은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종교적 심성이 하나의 접촉점이 될 수 있을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모든 다른 종교들은 기독교의 순수성을 해치며 복음전파에 역기능만을 할 뿐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타종교들은 부정적인 면에서 볼 때에 기독교 진리의 순수성 보존을 위한 한 자극제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한국적 신학을 구상하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한국이 도대체 어떤 문화적 혹은 종교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질문해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 문화가 타문화보다 우수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순한 필요에 의해 민족단결과 민족자강을 외치는 천박한 쇼비니즘(chauvinism)은 결코 기독교 신학에 자리할 수 없다. 진정한 한국적 신학은 게토(Ghetto)로 머물러서는 안되며 어디까지나 세계의 신학과 교회에 봉사할 목적에서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 교회가 이룩한 성장에 힘입어 한국 교회뿐 아니라 세계 교회가 필요로 하는 신학을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일단 선포의 방법(Wie 어떻게)에 앞서 이제는 기독교 진리복음의 내용, 즉 성경의 내용(Was)을 한국말로 가장 근원에 가깝게 번역하며 , 부분적 진리에 집착함 없이 가능한한 분명하고 포괄적으로 정돈, 정리하는 작업에 힘을 경주하여야 할 것이다.
어느 신학이든 성경적 신학이기를 그치지 않으려면 한 민족이나 국가 또는 한 개인이 자신의 문제들과 필요성, 혹은 그때 그때의 이슈를 들고 텍스트를 덮치려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텍스트가 스스로 말하는 바에 귀를 기울이고 항상 보다 크신 하나님(Deus sempermajor 하나님은 항상 보다 더 크시다)의 새롭고 변화케 하는 말씀을 들어 마음에 담아야할 것이다.
그래야 신학은 시대정신에 휘말리지 않고 초연할 수 있고 그 초연함으로부터 나와 당당히 세상 앞에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비로소 한국의 신학은 진정 '탈서구화' 할 수 있고 참다운 성경적 신학을 이루어 '탈한국화' 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한국적 신학'을 이루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잘못 이해된 자연신학과 접촉점 그리고 잘못 추구되는 한국적 신학에 대한 경고로써 칼바르트의 말을 빌려 본다. "옛날에는 해석학이 신학의 일부였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신학이 해석학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옛날에는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었는데 오늘날에는 꼬리가 강아지를 흔들고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통신학. 참된 보수신학을 한국적 신학의 과제로 삼아봄이 어떠할지‥‥ 사실 전세계의 신학은 신선한 정통신학의 은사를 요구하고 있다. 그 은사가 우리 한국 신학계에 주어지기를 바란다. 한국적 신학은 '한국적 정통신학'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