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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영광] 05
#.1 씬. 종가 마당 전경.(밤)
#.2 씬. 마루.(밤)
단아, 삼월, 수영,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는.
태영, 하품하면서 화장실에서 나오는.
태영 : 자다가 화장실 가는 이 놈의 병을 고쳐야 하는데..... (그러다 세 사람을 보고) 아니, 왜들 다....
석호E :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습니다, 아버지.
태영 : (벙한 표정으로) 지금....누구 목소리야?
#.3 씬. 만기의 방.(밤)
눈이 둥그레져 있는 동동의 표정에서 카메라 천천히 만기 쪽으로 움직이면.
만기 : (굳은 표정으로 석호를 바라보는)
석호 : 아버지, 허락해주십쇼.
만기 : 상중이다.
석호 : 압니다.
만기 : 아는 사람이 이 밤에......
석호 : (자르며) 결혼 하고 싶습니다.
만기 : 3년 상이나 치루고 나서 얘기하자.
석호 : 그렇게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만기 : 그 안에 세상이 어떻게 된다고 하디?
석호 : 3년씩이나 기다리며 허송세월하기엔 제 나이가 너무 많습니다.
만기 : 너한테는 조부님 상이 허송세월인 게냐?
#.4 씬. 마루.(밤)
수영, 태영, 단아, 삼월 서있는.
태영 : (흥분해서) 지, 지금 아버지 결혼하겠다고 저러시는 거야?
이게 말이나 돼? 아버지. (방 쪽으로 움직이려고 하면)
수영 : (태영 잡으며) 가만있어.
태영 : 우리 아버지 어느새 노망나신 거야?
#.5 씬. 만기의 방.(밤)
만기, 석호 대치하듯 마주 보고 있는.
동동, 눈만 번갈아 돌리며 두 사람을 보고 있다.
석호 : 불효라는 거 모르지 않습니다.
만기 : 아는 사람이 이 밤에 이 소란인가?
석호 : 세상이 변했습니다. 아버지. 상중이라고 해서 결혼 못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만기 : 좋다. 그럼 1년 뒤에 얘기하자. 조부상이니 나도 3년을 고집하지는 않겠다.
철없는 나이도 아니니, 1년도 길다고는 하지 않겠지?
석호 : 깁니다. 저한테는 한달도 깁니다.
만기 : (물끄러미 보는)
석호 : 아버님 앞에서 이런 말씀드리는 건 송구스럽지만 제 나이가 적지 않습니다.
제가 마음을 준 사람과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보고 싶습니다.
만기 : 에비란 사람이 이리 철이 없으니 자식 놈들이 그 모양으로 살지.
#.6 씬. 마루. (밤)
태영, 흥분해 있고, 암담한 수영, 단아, 삼월.
태영 : 지금 할아버지 앞에 계신 분 우리 아버지 맞아? 우리 아버지가 저러실 수 있는 거냐구?
수영 : 가만 좀 있으라니까.
주정, 물병 들고 방에서 나오는.
주정 : 왜들 나와 있어?
태영 : 아버지 결혼하시겠대요.
주정 : 너 잠꼬대 하니?
태영 : 고모할머니도 그렇죠? 헛소리 같죠?
주정 : (단아 보면서) 네 작은 오빠 왜 저러니?
단아 : ......
삼월 : 조용히들 좀 해.
#.7 씬. 만기의 방.(밤)
만기 : 그만 나가 보거라.
석호 : 아버지?
만기 : 자식들한테 부끄러운 줄 알거라.
석호 : 아버지 자식으로, 애들 아버지로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저 나름으론 애쓰며 살아왔습니다.
만기 : 그런 사람이 지금 이런 작탠가?
석호 : 그만큼 그 사람이 제겐 소중합니다.
만기 : 스무 살 혈기에 찬 젊은 나이도 아니고....
석호 : 그래서 더 서두르고 싶습니다. 제 나이가 지금 스무 살이었으면 10년이라도 기다렸을 겁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나입니다.
만기 : (물끄러미 보다가) 어느 집안사람인가?
석호 : ......
만기 : 당장 혼인을 할 수는 없지만, 자네 맘이 그리 절실하다니 혼약은 맺어둘 수 있지 않겠나.
사람을 시켜 정식으로 말을 넣을 테니 말해보게나. 어느 집안사람인가?
석호 : ......
만기 : 왜 말을 못해?
#.8 씬. 마루.(밤)
수영, 태영, 단아, 삼월, 주정, 긴장해서 만기의 방 쪽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석호E : 아버지도 아시는 사람입니다.
모두 더욱 긴장해서 서로의 얼굴을 보는.
#.9 씬. 만기의 방.(밤)
만기 : 내가 아는 사람이라니?
석호 : ......
만기 : 자네가 그런 마음을 가질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누가 있어?
석호 : ......
만기 : 왜 말을 못하나?
석호 : 이영인 실장입니다.
만기 : 누구?
석호 : 우리 회사에서 일하는.....
만기 : (입 벌어지는)
#.10 씬. 마루.(밤)
수영, 태영, 단아, 삼월, 주정 긴장해서 서있는.
태영 : 지, 지금 이영인 실장이라고 하신 거야?
수영 : ......
주정 : 이영인 실장이 누구야? 젊은 아가씨야?
단아 : .....
태영 : 우리 아버지 정말 어떻게 되신 거 아냐?
#.11 씬. 만기의 방.(밤)
만기 : 그럼 말을 넣어볼 것도 없겠구만.
석호 : ......
만기 : 없었던 일로 하세.
석호 : 아버지.
만기 : 나가봐. 난 못들은 걸로 하겠네.
석호 : 전 해야겠습니다.
만기 : 아비하고 인연을 끊겠다는 건가?
석호 : .....
#.12 씬. 마루.(밤)
석호, 암담한 표정으로 만기의 방에서 나오는.
수영, 단아, 삼월 어색한 표정으로 서있는.
태영 : (다가서며) 아버지? 그건 말도 안 되죠.
수영 : (잡으며) 너 왜 이러니?
태영 : 이영인 실장이라시잖아? 새어머니 감으로 이영인 실장이 말이나 되냐구?
주정 : 대체 이영인 실장이 누군데 그래?
석호 :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주정 : 조카, 조카.
삼월 : (주정을 잡지만)
주정 : (뿌리치고 석호의 방으로 쫓아 들어가는)
#.13 씬. 마당 일각.(밤)
정자 정도의 장소.
태영, 흥분해서 왔다갔다하고, 수영, 단아 어두운 표정으로 서있는.
태영 : 아버지 어떻게 되신 거야. 그렇지 않고선 말이나 돼, 이영인 실장이 말이나 되냐구?
단아 : 말이 안 될 건 뭔데? 아버지가 마음을 주신 분이잖아?
태영 : 마음 주면 아무나하고 결혼 하냐?
단아 : 아버지가 선택하신 분이잖아?
태영 : 넌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래.
수영 : 말조심해라. 그 여자라니.
태영 : 지금 이 말 저 말 가릴 때야? 두 번인가 세 번인가 이혼한 여자잖아. 그것도 한번은 외국 남자였다지 아마.
단아 : (굳어지고)
태영 : 우리 회사로 옮길 때 할아버지랑 면접 보면서 그거 자랑스럽게 떠벌인 사람이야.
어쩌다 그 나이까지 혼잔가 하니까, 그 여자 뭐랬어? 결혼은 곧잘 하고 지냈습니다, 그랬던 여자야.
수영 : 말조심 좀 하라니까. 너보다 상사고 아버지가 마음 주고 계신 분이야.
태영 : 그런 사람이 우리 새 엄마 감으로 당키나 하냐구?
#.14 씬. 석호의 방.(밤)
석호, 웃옷을 벗어 걸고 있으면, 주정 뒤에 서서.
주정 : 대체 어떤 여잔데 조카가 그렇게 푹 빠진 거야?
석호 : 저 옷 갈아입어야 하는데요, 고모.
주정 : 쭉 연애 해온 거야?
석호 : 저 옷 좀.....
주정 : 얼마나 연애 했는데? 천지가 개벽할 사건이다, 정말.
아니 조카 같은 하늘이 내린 샌님이 어떻게 연애를 다 했대?
석호 : 네. 제가 연애 했습니다. 됐죠?
주정 : 진짜 사랑하나보다. 상 치룬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 결혼 하겠다고 나선 걸 보면.
어떤 여자야? 이뻐? 참, 처녀야?
석호 : ......
주정 : 우리 집 종부 처녀 아니면 안 되는 거 조카도 알잖아?
석호 : ......
#.15 씬. 마당 일각.(밤)
태영 : 설마 애 가진 거 아냐?
단아 : (굳어지고)
태영 : 아버지, 저렇게 서두르시는 게 수상하잖아.
그 이유 말고 아버지가 저렇게 하루가 바쁘다고 하실 게 뭐가 있냐구.
수영 : 넌 입이 왜 그렇게 지저분하냐? 우리 아버지가 그러실 분이냐?
태영 : 하긴, 그건 아니겠지. 그래, 그건 아닌 거야. 진짜 원단 노망이 아니시면.
단아 : .....
태영 : 그럼 뭐야? 진짜 사랑하신다는 거야? 왜?
단아 : 왜라니?
태영 : 왜 하필이면 그런 여자를.
수영 : (버럭) 그 말조심 좀 하라니까. (집 쪽으로 움직이는)
태영 : 괜히 성질이야. 형도 그 여자 마음에 안 들잖아? 그래서 괜히 엄한 데다 화풀이 하는 거잖아?
단아 : 작은 오빠는 입 좀 다물고 있으면 안돼?
태영 : 이 집안 문제가 뭔지 아냐? 다들 입 가지고 너무 다물고만 있는 게 문제라구.
그래서 다 우울증인 거야. 난 그거 안 걸리려고 더 열심히 떠들어대는 거구.
단아 : 누가 우울증인데?
태영 : 너 몰랐냐? 우리 집안사람들 단체로 우울증인 거? 나랑 고모할머니 빼곤 다 우울증이야. 너.
#.16 씬. 단아의 방.(밤)
단아, 들어오면, 주정 생각에 잠겨 서있는.
단아 : 왜 안 주무시고 여기 와 계세요?
주정 : 넌 지금 잠이 오겠니? 지붕 위로 핵폭탄이 떨어져 내렸는데.
내가 ‘세상에 이런 일이’ 조연출도 해봤지만 이렇게 쇼킹한 사건은 첨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조카가, 니들 아버지가 연애를 했다는 게 있을 수나 있는 일이냔 말야.
열부문 하사 받을 날이 멀지 않은 사람이.
단아 : 그런 게 요새 어디 있어요?
주정 : 내 말이. 받지도 못할 열부문 받겠다고 작정한 사람 아니면 저럴 수 있나 싶었거든 나는.
네 아버지, 네 엄마 죽고 난 이후론 외간 여자 손 한번 안 잡아봤을 걸.
그런 사람이 난데없이 연애 했다면서 결혼하겠다고 나서는데 놀라 자빠지지 않겠냐구.
단아 : 그럼, 그냥 기절하고 마세요, 할머니.
주정 : (흘겨보고) 너 너무 담담하다. 너 아무렇지도 않니?
단아 : 어른 하시는 일에 아랫사람이 왈가왈부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주정 : 그럼 이 집안에서 왈가왈부 할 사람은 느네 할아버지하고 나 밖에 없는 거겠다. 그지?
단아 : .....
주정 : 그럼 나 혼자 열심히 왈가왈부한다.
단아 : 재미있으세요?
주정 : (킥 웃으며) 신기하잖냐? 수영이 색시 간통 했다는 것보다 난 이 사건이 더 신기한 거 있지?
단아 : 진짜 악취미세요.
주정 : 참, 단아야?
단아 : 네.
주정 : 근데 눈치가, 네 아버지 눈치가 말이야. 보통 여자는 아닌 거 같아. 처녀냐고 물으니까 꿀 먹은 벙어리드라.
자기 나이가 있는데 처녀장가 가겠다고 하는 것도 제 정신 아닌 인간이지만.
그래도 어쩌니. 우리 집안 노친네들이 처녀가 아니라고 하면 난리 부르스들을 춰 대실텐데.
#.17 씬. 만기의 방.(밤)
만기, 생각에 잠겨 앉아있는.
동동 : (누워서 물끄러미 만기를 보고 있는)
만기 : (동동의 눈과 부딪치고)
동동 : (얼른 눈감고)
만기 : 자는 척 해라.
동동 : 네.
만기 : ......
동동 : 불 끌까요? (일어나서 불을 끄고 자리에 눕는)
만기 : (어둠 속에서 깊은 시름에 잠겨 앉아있는)
#.18 씬. 하옹의 방.(아침)
상식 의례 진행 중.
석호, 만기가 들고 있는 잔에 술을 따르고 있는. 그 뒤에 수영, 태영, 단아, 삼월, 동동 서있는.
옷은 모두 상중에 입었던 상복으로 통일함.
#.19 씬. 마루.(아침)
조만, 물그릇 쟁반에 받쳐 걸어오면, 주정 하품하면서 다가오는.
조만 : 웬일이세요? 이렇게 일찍 일어나시고?
주정 : 구경 좀 하려구.
조만 : 네?
주정 : 그런 거 있어.
#.20 씬. 하옹의 방.(아침)
만기, 석호, 수영, 태영, 단아, 동동 절하고 있는.
삼월, 뒤에 서있는, 조만 물그릇 가져가 상 옆에 놓고.
주정, 삼월 옆으로 다가오는.
주정 : (삼월에게 귓속말로) 아무 일도 없는 거야?
삼월 : (가만있으라고 옆구리 찌르는)
주정 : 우리 오빠가 조카한테 술 따르게 해?
삼월 : (아 그 참)
만기 : 떠들지 마라.
주정 : 네. 오빠. 근데요, 오빠. 아침부터 긴장감은 죽이네요.
#.21 씬. 종가 집 앞.(아침)
단아, 태영, 동동, 인사하고 있으면, 수영, 운전석에 오르고, 석호 뒷자리에 올라타는.
단아, 태영, 동동 인사하는.
태영 : (동동에게) 가자.
동동 : 고모 가요.
단아 : 내가 데려다 줄게.
태영 : (뒤에 대고) 너 쭉 그럴 거냐? 사내자식이 길게 그러면 디게 쫀쫀한 거란 거 너 알지?
동동 : (단아와 나란히 걸으면서) 아빠는 사내다워서 엄청 폼 난다.
#.22 씬. 길.(아침)
운전하는 태영.
태영 : 하, 이영인. 하늘이 두 쪽 나도 안 되지, 안돼. 그 여자한테 어머니. (욱하고 구역질하는 시늉)
내가 차라리 이효리한테 엄마라고 부르라면 부르겠다.
신호 붉은 등으로 바뀌고 있지만, 꼬리 물고 달려간다.
신호 바뀌면서, 다른 차선들 차 움직이고.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으로.
저쪽에서 호루라기 부는 말순.
태영 : 미친다, 정말.
#.23 씬. 길-차안.(아침)
달리고 있는 차, 운전하는 수영, 그 뒤에 석호.
석호 : 너희한테는 면목 없구나.
수영 : ......
석호 : 곱게 늙다가 가줘야 하는 건데.
수영 : 아버지 인생이신 걸요.
석호 : .....
#.24 씬. 길.(아침)
말순, 한쪽으로 차대라는 수신호.
태영, 이 악물고 차 길 옆에 대는.
태영 : (차 창 내리면서) 전 분명히 노란 신호일 때 진입 했거든요.
말순 : 전 분명히 빨간 불일 때 진입 하시는 거 봤거든요. 면허증 주세요.
태영 : 교통 단속이라는 게 단속에 의미가 있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교통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게 목적 아니냐 그겁니다.
말순 : 맞습니다.
태영 : 맞는데요?
말순 : 교통 흐름에 지대한 방해를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꼬리 물기 단속 하는 건 교통 흐름을 원활하게 하자는데 의미가 있다는 건 아시죠?
태영 : (혼잣말로) 말 못하다가 죽은 귀신이 조상에 있나.
말순 : 네?
태영 : (면허증 화가 나서 꺼내주며) 일부러 그러는 거죠?
장기 다가오는.
장기 : 아, 또 이 분이시네. 안녕하십니까? 또 걸리셨네요?
태영 : 국가를 위해 이 한 몸 희생하려구요.
장기 : 네?
태영 : 벌금이라도 보태보려고 솔선수범하고 있는 중입니다.
장기 : 아, 네. (웃으며) 한 유머 하시나 봐요. 다들 단속만 됐다하면 소리부터 지르고 성질 피시는데
선생님같이 유머로 대해주시면 저희가 얼마나 감사하지 모릅니다.
태영 : 그럼 감사패라도 하나 주시던가. (버럭) 아, 뭐해요, 빨리 딱지 끊지 않고.
말순 : 끊고 있잖아요.
태영 : 저기요?
말순 : 네?
태영 : 나한테 관심 있죠?
말순 : (기가 막혀서 보는)
장기 : (태영과 말순 번갈아보는) 아시는 사이세요?
태영 : 다른 사람들은 웬만하면 보내주죠?
말순 : 아닌데요.
태영 : 뭘. 그런 거 같은데. 내가 좀 생겼지, 터프하지, 유머 감각 남다르지 관심 가져주는 건 고마운데.
말순 : 아침 잘못 드셨나 봐요.
태영 : 근데, 어쩌나. 내 스타일은 영 아니신 걸. (벌금 용지 홱 잡아채서 차 출발 시키는)
장기 : (말순에게) 진짜 관심 있는 거예요?
말순 : (장기 장딴지 걷어차는) 내가 약 먹었니?
#.25 씬. 마당 정자.(낮)
만기, 앉아있으면, 삼월 차를 들고 다가와 내려놓는.
삼월 : 기력이 많이 쇠하신 거 같아서 인삼을 좀 다려봤습니다. (인사하고 돌아서려고 하면)
만기 : 게 좀 앉아 봐요.
삼월 : (보고, 조심스럽게 앉는)
만기 : .....
삼월 : (찻잔에 차를 따라 만기 앞쪽으로 내려놓는) 식기 전에 드세요, 회장님.
만기 : 이봐요.
삼월 : 네, 회장님?
만기 : 내가 그렇게 본이 안 되는 사람인가 싶구려.
손주 놈들도 그렇고, 자식 놈도 그렇고, 보고 배운 것 없는 놈들처럼 구니.
삼월 :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만기 : 상중에 결혼 운운하는 나이 든 자식 놈 보고 있자니 내가 어찌 살았길래 저런가 한심한 생각만 드는구려.
삼월 : 하사장이 말한 사람이 영 마음에 안 드세요?
만기 : .....(차를 마시는)
삼월 : 마음에 드는 사람이셨으면 그런 마음은 덜 하시지 않을까 싶어서요.
만기 : 내 집안사람이 될 사람은 아니오.
삼월 : (착잡하고) 우리 하사장 가여워서 어쩐대요.
단아 엄마 세상 뜨고 23년 만에 처음으로 마음 준 사람인데......
만기 : .....
삼월 : 그래도 하사장 회장님 뜻 어겨가면서 고집 부릴 사람은 아니니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만기 : ......
#.26 씬. 회사 전경.(낮)
#.27 씬. 영인의 사무실.(낮)
영인, 들어오면, 태영, 소파에 앉아 있다가 일어서는.
영인 : 웬일이에요? 하과장이 내 방에?
태영 : 바쁘십니까?
영인 : 늘 그렇죠 뭐. (책상 위에 서류 올려놓고 소파 쪽으로 다가오는) 차 할래요?
태영 : 아니요, 속이 거북해서.
영인 : 나한테 볼 일 있어 온 거예요?
태영 : 아버지께서 어제 밤에 이상한 말씀을 하시드라구요.
영인 : (보는)
태영 : 이실장님과 교제를 하시고 계신다구.
영인 : (기가 막히고)
태영 : 사내 연애 좀 그렇지 않나요?
영인 : .....
태영 : 그것도 보통 평사원도 아니고, 간부 사원 분들끼리. 더구나 연세도 지긋하신 분들이.
영인 : (기분 확 상하고) 그래서요?
태영 : 네?
영인 :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구요?
태영 :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딱 하나죠. 자제를 하시는 게 어떻겠냐.
회사 내에 흉흉한 소문나기 전에 조용히들 정리를 하시는 게 모두를 위해서 좋은 게 아니겠냐.
영인 : 주제넘다는 생각 안 해요? 하과장?
태영 : (울컥) 네?
영인 : 동생 일도 아니고, 아버지 일을 아들이란 사람이 나서서 흉흉한 소문 어쩌고 하는 거,
뼈대 있는 가문 자식으로썬 적당한 언사가 아닌 거 같은데.
태영 : 제가 원래 가문에 먹칠을 하는 놈이라서요.
영인 : 알면 자제를 하고 살아야죠.
태영 : (피식 조소하듯 웃으며) 결혼 하실 생각은 없으신가 봐요? 이실장님?
혹시 결혼할지도 모를 상대의 아들한테 이렇게 함부로 하시는 거 보면?
영인 : 그건 하과장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혹시 아버지의 아내가 될지도 모를 사람한테 이렇게 함부로 하는 거 보면,
날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인 거 같은데?
태영 : 아, 역시 명석한 두뇌세요. 여러 말 필요 없어서 정말 좋네요.
영인 : 내 두뇌는 내가 아니까 빈정거릴 것까진 없구. 나 하석호 사장님과 다른 관계로 발전할 생각 전혀 없는 사람이니까
앞으로 이런 일로 귀찮게 하는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태영 : 다른 관계로 발전할 생각은 없으시다? 그럼 지금의 관계는 유지하실 수도 있다, 뭐 그건가요?
영인 : (싸늘하게 미소 지으며) 난 정리했으면 좋겠는데,
하과장 아버님께서 죽자고 매달리셔서 조금 갈등하고 있는 중이긴 해요.
태영 : (자존심 확 상하고, 그래도 억지로 허세를 부리는 심정으로) 제가 남녀 관계는 좀 아는데요.
손뼉이 마주치지 않고 소리 나는 경우는 절대 없드라구요.
혹시, 매달려주길 바라면서 뻗대시는 건 아니신가요?
여자들 그거 잘 쓰는 수법이잖아요? 적당히 튕겨야 달아오르게 한다는 거, 선수들은 알죠 왜?
영인 : 나 그런 수법까지 쓸 만큼 자신 없진 않거든요. 지긋한 연세에 너무 잘난 척 하는 건가요? 내가?
태영 : 역시 한가닥 하시면서 사신 분이시라 그런지 뭐가 달라도 다르시네요.
영인 : 알면 건드리지 말아요. 내가 자존심을 다치면 이상한 짓을 하는 못된 버릇이 있거든요.
나 바쁜데, 좀 나가 줄래요?
태영 : .....(나가는)
영인 : 내가 죽었다 깨나도 네 새 엄마는 안한다, 이 나쁜 자식아.
#.28 씬. 대학 전경.(낮)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있는 강석, 차에서 내리는.
#.29 씬. 대학 건물 복도.(낮)
노교수 사무실에서 나오는 노교수, 따라 나오는 강석.
강석 : 교수님?
노교수 : 강의가 있다고 하잖았나.
강석 : 가격을 올리고 싶어서 이러시는 거라면.....
노교수 : (멈춰 서고) 못된 젊은이로구만.
강석 : 원하시는 액수에 구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노교수 : 내 물건도 아닌 걸로 무슨 흥정을 하겠나? (무시하고 가려고 하면)
강석 : 그 집안 자손에게 구입 하시지 않았습니까?
노교수 : 맡아만 둔 걸세. 언젠간 찾으러 올 걸세.
강석 : 맡아만 두셨으면, 돈은 왜 주셨습니까?
노교수 : 그런 사정까지 자네가 알 거 없네.
강석 : 아드님께서 꽤 힘들어하신다고 들었는데요?
노교수 : (멈춰 서서 싸늘하게 보는)
다가오다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게 되는 남교수.
강석 : 여러 번 사업 실패를 하셨다구요. 새로운 사업을 구상 중이신가본데,
신용에 문제가 있어서 대출도 안 되는 상황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노교수 : 남의 사생활 캐내는 게 자네 전문인가?
강석 : 그 족보를 제게 넘기시면 아드님께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노교수 : 남의 집안 족보로 내 자식 뒷바라지 하고 싶은 생각 없네. (걸어가면)
강석 : 얼마 전에 아드님께서 자살 시도를 하신 적도 있다고 하던데. 너무 무정한 아버지시네요.
노교수 : (이를 악물고 참으며 걸어가는)
#.30 씬. 남교수 사무실.(낮)
단아, 혜주 얘기하고 있는.
단아 : 몸은 좀 어떠니?
혜주 : (고개 숙인 채) 괜찮아요.
단아 : 다행이다. 발표는 다른 팀원들이 다시 준비하겠다고 했으니까 혜주는 리포트로 대신하도록 하자. 괜찮지?
혜주 : 네.
단아 : (어깨 살짝 두드리며) 다음부턴....
혜주 : (흠칫 놀라서 뒤로 물러서는)
단아 : (당황해서) 미안해. 다음부턴 놀래키지 말라고 하려고 한 건데.
울리는 혜주의 핸드폰.
혜주 : 응, 오빠. 교수님 방에. 점심 먹었어. .....알았어. 나갈게.
들어오는 남교수.
단아 : 오빠 오셨나보구나, 나가봐.
혜주 : (인사하고 나가는)
남교수 : 그 족보 사겠다고 교수님 귀찮게 하는 젊은 애 있잖아?
단아 : (보면)
남교수 : 진짜 싸가지드라.
단아 : 왜요?
남교수 : 교수님한테 협박까지 하드라구. 교수님 아들 사업 실패로 힘들어 한다는 소문은 들었지 자기도?
단아 : .....
남교수 : 교수님 퇴직금까지 당겨쓰셨다잖아.
그 아들 사업 자금 마련해주느라 집까지 파셨다고 이교수님이 안타까워하시는 거 들었거든.
그 젊은 애가 그 사정까지 어떻게 알았는지 족보 팔라고 아주 성화드라.
단아 : .....
남교수 : 교수님이 딱 자르니까 그 싸가지가 뭐라는 줄 아니?
아드님이 자살까지 시도하셨다는데, 무정한 아버지시네요, 그러는 거 있지, 뭐 그런 인간이 다 있다니.
단아 : ......
#.31 씬. 교정 일각.(낮)
벤치에 앉아있는 혜주, 강석.
강석 : 며칠 집에서 쉬라니까 말 참 안 듣는다.
혜주 : (고개만 숙이고 있는)
강석 : 오빠 시간 좀 있는데 쇼핑 하러 갈까?
혜주 : (고개 젓고)
강석 : 오빠가 옷 사줄게. 혜주가 사달라는 거 오빠가 다 사줄테니까 가자.
혜주 : 사고 싶은 거 없어.
강석 : 얌마. 한참 멋 부리고 싶은 나인데 왜 사고 싶은 게 없어?
혜주 : 없어, 난.
강석 : 그럼 밥 먹으러 가자.
혜주 : 먹었어.
강석 : 점심시간도 안됐는데, 무슨 밥을 먹었다고 그래.
(일어나서 혜주의 팔을 잡아끄는) 가자, 혜주야, 오빠가 맛있는 거 사줄게.
혜주 : 싫어.
다가오는 단아.
강석 : (단아를 보고 혜주의 손을 놓는) 또 보네요.
단아 : 잠깐 할 얘기가 있는데, 혜주야? 잠깐 자리 좀 비켜줄래?
혜주 : (일어나서 걸어가는)
강석 : 이따 집에서 보자, 혜주야. (단아에게) 뭡니까? 우리 혜주한테 무슨 문제 있습니까?
단아 : 교수님께 그러지 마세요.
강석 : (묘하게 보는) 뭘 말입니까?
단아 : 연로하신데다 지병도 있으신 분이세요. 괴롭혀 드리지 마세요.
강석 : 내가 뭘 하든 댁이 상관 할 일이 아닐텐데요.
단아 : 제 은사님이세요.
강석 : 교수님이 댁한테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하십니까? 혹시 단순한 사제 사이 아닌 거 아닙니까?
단아 : (뺨을 갈기는)
강석 : (어이없는 표정으로 보는) 다소곳하고 순진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이런 짓은 너무 쉽게 하십니다.
두 번은 애교로 봐주지만 세 번째는 안 봐줍니다.
단아 : 나한테 함부로 하는 건 이해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은사님을 상대로 그러는 건 이해 못해요.
강석 : 파르르 하는 거 보니까 더 의심스럽네요.
현규, 다가오는.
현규 : (다가오며) 점심 먹었어요? (그러다 강석을 보고) 어, 안녕하세요?
강석 : 제자하고도 연애 합니까?
단아 : (한심하게 보는)
강석 : 제자하고 연애 하면 은사님하고도 못할 거 없겠네.
현규 : 지금 뭐라고 하는 겁니까? 누가 누구하고 연애를 한다는 거예요?
단아 : (현규 팔 잡으며) 하지마. 상대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야.
현규 : 지금 이상한 소리하잖아요?
단아 : 상대하지 말라니까. (현규 끌고 가려고 하면)
강석 : 좋은 가문에서 자란 아가씨가 애정관계가 너무 복잡한 거 아닙니까?
현규 : (돌아서려고 하면서) 저 인간 지금 뭐라는 거예요?
단아 : 제발. (잡으며) 하지 말라구.
현규 : (단아를 보고, 애써 참으며 걸어가는)
강석 : (그런 두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32 씬. 대학 주차장.(낮)
강석, 차에 올라타고. 그 위로.
단아E : 상대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야.
강석 : (주먹으로 핸들을 내리치는)
#.33 씬. 대학 교정.(낮)
걸어가는 단아와 현규.
현규 : 동생 때문에 또 온 거예요? 그 인간?
단아 : (멈춰 서고) 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현규 : 뭘요?
단아 : 벌써 두 번째야. 그 사람 뺨 때린 거.
현규 : (놀라서) 정말요? 그 인간 따귀 갈겼어요? 진짜요? 에이 설마.
단아 : (혼잣말처럼) 자꾸 화가 나. 그 사람만 보면..... 참아야 하는데, 다른 땐 그런 적 없는데.
그 사람한테는 참아지지가 않아.
현규 : 워낙 재수 없게 굴잖아요. 그 인간.
단아 : (괴로운 심정으로 시선 떨구고 서있는)
현규 : (그런 단아가 왠지 마음에 걸리는)
#.34 씬. 공항.(낮)
영희, 앉아있는, 옆에 여행 가방 두 개 정도. 다가오는 수영.
영희 : (일어서는) 그냥 가려고 했는데..... (쓸쓸하게 미소 지으며) 그래도 마지막으로 얼굴은 한번 봐야 할 거 같아서.
수영 : 어디로 가려구?
영희 : 우선 미국으로 가서 랭귀지 스쿨부터 다녀 보려구요.
수영 : ......
영희 : 대학 졸업하자마자 당신하고 결혼해서 그렇지 나 공부 좀 했어요.
머리가 굳어서 어떨진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다 잊고 공부만 해보려구요.
수영 : 당신은 잘 할 거예요.
영희 : 가슴 설렌 적 없죠? 나한테?
수영 : .....
영희 : 근데 난 좀 그랬어요. 당신 처음 봤을 때부터. 겨우 대학 입학 했다는 거 알았고,
만나기 전엔 동생 같은 남자와 어떻게 결혼하나 싶었는데, 당신 처음 보면서는 어쩌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4살이나 어린 당신이 나한테는...... 처음부터 남자였어요.
수영 : ......
영희 : 신혼 2,3년 동안 쭉 그랬어요. 부엌에서 당신 들어오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툭하고 내려앉고 그랬어요.
수영 : 난 늘 당신이 믿음직스러웠어요. 집에 들어갈 때마다 당신이 있어서 푸근 했구.
영희 : 나 당신하고 같이 총 매고 전쟁에 나간 동료 병사가 아니라 아내였어요.
그래서 설렌 시절이 있었고. 그래서 억울해진 거예요.
수영 : 아주 많이.....미안하게 생각해요.
영희 : (미소 짓고) 당신한테도 설레는 사람이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당신한테 무심했으면 좋겠어요. 내 얄팍한 복수심이예요.
안내 방송 나오고.
영희 : 들어가 봐야 해요.
수영 : 몸 건강해요. 힘든 일 있으면 연락하구.
영희 : 그런 일 없을 거예요. 할아버님이 사람 시켜서 장학금 두둑히 챙겨 보내주셨어요.
수영 : ......
영희 : 갈게요.
수영 : ......
영희 : (걸어가려다, 돌아서서 수영에게 다가와 살며시 안는)
수영 : (천천히 손을 들어 영희의 등을 다독이는)
영희 : 다르게 살아봐요, 수영씨.
수영 : (눈물이 글썽해지는)
영희 : (애써 눈물을 참으며) 당신이라는 사람 잊어버리려고 노력하겠지만,
잊혀지지 않는 동안은 기도할게요. 당신이 다르게 살게 해달라고..... (돌아서서 걸어가는. 눈물이 흐르는)
입국장 안으로 들어가는 영희. 두 사람의 시선이 한번 부딪치고. 영희, 사라지고.
돌아서는 수영의 얼굴 위로.
여자E : 오진아씨, 오늘부로 해고야.
진아 : (짐 가방 들고 안절부절하는 느낌으로) 신부님이 모자 안 챙겼다고 하셔서.....
수영 : (진아를 보는)
여자 : 그렇다고 비행기 표를 가지고 가면 어떡해?
진아 : 신부님이 워낙 정신없이 몰아치시는 바람에....
여자 : 변명 필요 없으니까 어제 오늘 일 한 거 경리부에서 받아가요.
(진아의 손에 들고 있는 짐 가방 뺏어들고 바쁘게 걸어가는)
진아 : (멍하니 서있는)
그런 진아의 옆을 지나쳐가는 수영.
#.35 씬. 공항 내 길.(낮)
수영, 차를 운전해서 나오는데, 갑자기 앞에 불쑥 나타나는 진아.
수영 : (놀라서 급브레이크를 밟는)
끽하는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
그 소리에 멍하니 돌아보는 진아. 눈을 한번 꿈뻑이고 그 자리에 푹하고 쓰러지는.
수영 : (굳어지는)
#.36 씬. 병원 응급실.(낮)
진아, 의식 없이 누워있고.
의사 : (챠트 보면서) 영양실조에 탈수 증상이 심하네요.
수영 : (진아를 보는)
의사 : 당장은 입원실이 없으니까 깨어나는 대로 퇴원 시키셔서 영양보충부터 시키세요.
영양 상태만 좋아지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다른 침대로 걸어가고)
진아 : (눈을 뜨는)
수영 : (내려다보는)
진아 : (두리번거리는) 여기가.....
수영 : 병원이예요. 내 차 앞에서 쓰러졌어요.
진아 : (일어나 앉으며) 죄송합니다.
수영 : 병원비 내고 갈테니까 나가서 밥부터 먹어요. (돌아서는데)
진아 : 저....우리 어디서 본 적 있죠?
수영 : (돌아보고) 실연 했다고 굶는 건 자기만 손해예요.
진아 : 아, 경찰서? 사랑 같은 건 없는 거라고 했던 그 아저씨 맞죠?
수영 : (걸어가 버리는)
#.37 씬. 마루.(낮)
삼월, 조만 다과상 두개 들고 만기의 방 쪽으로 움직이는.
조만 : 평촌 어른께서 제사도 아닌데 무슨 일이시래요?
삼월 : 낸들 아니.
#.38 씬. 만기의 방.(낮)
노인 상석에 앉아있고, 그 앞에 만기 앉아있는.
삼월E : 회장님?
만기 : 들어와요.
삼월, 조만 다과상 들고 들어와서 두 사람 앞에 놓고 나가는.
만기 :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부르시지 않구요.
노인 : 바쁜 사람 오라가라할 거 뭐 있나. 할 일 없는 노인네가 움직이는 게 났지.
저번에 보내준 장뇌삼은 잘 먹고 있네. 죽을 때 힘만 들게 뭐하러 그런 귀한 건 자꾸 보내나.
다른 게 아니고, 오늘 내가 온 건..... (두루마기 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놓는) 중자 경자 쓰시는 어른 외손잘세.
만기 : (사진 받아드는)
노인 : 나이는 올해 마흔 셋 됐는데, 젊어서 일찍 상처하고 슬하에 여식이 하나. 내년에 대학 간다니 다 컸지 뭐.
대학에서 교편 잡고 있는데 아주 젊잖고 사람이 괜찮아.
만기 : 네.
노인 : 주정이 짝으로 어떤가 싶어서 말일세.
만기 : (사진을 들여다보는) 제 동생 아이가 워낙 부족해서 이런 사람 짝으로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노인 : 그래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한번 만나보게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까 싶은데.
만기 : ......
#.39 씬. 방송국 복도.(낮)
병도, 걸어가는 주정의 팔을 잡고 사정을 하고 있다.
병도 : 선배, 선배? 사람 좀 살려주라.
주정 : 미쳤어, 미쳤어.
병도 : 선배? 나 좀 살려주라. 나 선배 아니면 정말 장가가야 한다니까.
주정 : 그냥 가.
병도 : (버럭) 선배. 튼실이 걔가 어떤 앤지 몰라서 그래.
주정 : (킥 웃고) 이름이 튼실이냐?
병도 : 몰라. 어렸을 때 별명이 그거구, 본명은 뭔지.
주정 : 이름도 튼실하고 좋다, 그냥 가버려. 애는 쑥쑥 잘 낳겠다.
병도 : 우리 할머니, 엄마가 그래서 밀어붙이시는데, 난 정말 걔가 싫거든.
주정 : 니 주제에 싫고 좋은 여잘 왜 따져?
병도 : 내가 어때서?
주정 : 너 상태 웬만치 않거든.
병도 : (노려보고) 튼실이 걔가 내 두밴 건 그런대로 참아주겠다 그거야.
근데 걔가 나 열 살 때까지 매다 꽂은 거 생각하면 내가 지금도 악몽에 시달린다니까.
주정 : 듬직하니 좋다 뭐. 얹혀 살아. 울릉도 어시장에서 도매상으로 날린다며?
병도 : 선배. 그냥 가서 인사만 한번 해 달라니까.
주정 : 내가 네 어머니 칠순에 가서 왜 인사를 해야 하는데?
병도 : 그냥 내가 결혼할 여잡니다, 하면 옆에서 고개 푹 숙이고 배시시 웃고만 있으면 된다니까.
주정 : 내가 밸 빠졌냐? 왜 일 없이 남의 집 잔치에 가서 히죽거리고 있냐구?
병도 : 결혼할 여자 있습니다, 하면 올해는 그냥 넘어갈 수 있다니까 그런다.
주정 : 내년 생신 땐 어떤 여자 달고 가려구?
병도 : 선배 외국 발령 나서 나갔다고 둘러대면 돼. 한 3년 기다려야 한다구.
그 여자 아니면 안 된다고 버티면 된다니까.
여자가 없는 줄 알고 자꾸 튼실이한테 밀어붙이시려고 들지, 있다고 하면 그냥그냥 넘어갈 수 있다니까.
주정 : 병도야?
병도 : (너무나 애교스럽게) 응?
주정 : 나 장난으로도 너하고 결혼할 여잡니다, 그거 하기 싫거든. (빠르게 걸어가면)
병도 : (쫓아가면서) 내가 1년 동안 술 사줄게. 아니. 2년 좋다, 2년. 간간히 발렌타인 섞어가면서.
주정 : 수영장에 발렌타인 채워준대도 절대로 싫거든.
#.40 씬. 일식집 내 룸.
석호, 앉아있으면, 종업원 문 여는. 서있는 영인.
영인 : (둘러보고) 왜 혼자예요?
석호 : 들어와.
영인 : 아직들 도착 안한 거예요?
석호 : ......
영인 : (들어와 앉는)
석호 : (종업원에게) 주문은 조금 있다가 할게요.
종업원 : 네. (나가고, 문 닫아주는)
영인 : 이미 광고 플랜 확정 됐는데 왜 다시 만나자는 거래요? 이런 데서?
석호 : 입맛 없을 거 같아서 전복죽 같은 거 먹여주려고 불렀어.
영인 : 지금 사기 친 거예요?
석호 : 전복죽 괜찮지?
영인 : (짜증스럽게 보는)
석호 : 버섯 튀김 좋아하지?
영인 : 나 좀 질리려고 하거든.
석호 : 우선은 참고 좀 먹어.
영인 : 나 갈게. (일어서려고 하면)
석호 : 아버지께 말씀 드렸어. 너하고 결혼하겠다구.
영인 : (기가 막혀서 보다가 앉는) 그래서?
석호 : 당장은 허락하시기 힘들거야. 내가 상중이고.
영인 : 내가 외며느리감으로 괜찮으시대? 회장님이?
석호 : .....
영인 : 명문 세도가 하씨 댁 종부로 만족스러우시대냐구?
석호 : 설득하면 돼.
영인 : 내가 왜 그런 결혼을 해야 하는데? 내가 뭐가 아쉬워서 선배 마누라 되려고 그 수모를 견뎌야 하냐구?
석호 : 사랑하니까. 사랑하면 그 정도는 해줘도 되지 않을까?
영인 : 누가? 내가? 선배를? 사랑씩이나? 내가 언제 선배 사랑한다고 한 적 있어?
석호 : 그런 건 말 안 해도 아는 거잖아?
영인 :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건,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야.
석호 : 그럼 나 혼자 하는 걸로 하자. 넌 그냥 내가 싫지 않은 것만 해.
영인 : 선배 이러는 거, 진짜 웃기는 거거든. 난 결혼할 마음도 없을 뿐더러.....
석호 : 그럼 방법이 없잖아?
영인 : .....
석호 : 나도 너랑 이 상태로 지내는 거 싫지 않아. 그래, 이런 상태로라도 너랑 같이 갈 수만 있으면 만족해.
하지만 네 안에 있는 아기한테 너도 이걸로 만족해라 그럴 수는 없잖니?
영인 : 태어나지도 않을 아이야.
석호 : 영인아?
영인 : 하과장이 그러드라. 흉흉한 소문나기 전에 정리하라구.
낫살이나 먹은 사람들이 그 정도 지각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구.
석호 : (굳어지고)
영인 : 하과장 말이 맞아. 선배 작은 아들 말이 다 맞다구.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사람 불러내지 마.
얼마 남지도 않은 정까지 떨어지려고 하니까. (일어서서 나가버리는)
석호 : ......
#.41 씬. 마당.(밤)
수영, 태영 얘기하고 있는.
태영 : 이실장한테 알아듣게 말 했어. 깨끗하게 정리하겠다고 확답 받았어.
수영 : 너 왜 돼먹지 않은 짓이야?
태영 : 형. 그럼 나도 형처럼 손놓고 나 몰라라 해야 하는 거야? 아버지 일인데?
수영 : 아버지 인생이셔. 아버지가 알아서 하실 일이라구.
태영 : 난 정말 형 이러는 거 미치고 팔짝 뛸 만큼 싫거든. 그게 가족이야? 그게 한솥밥 먹는 식구로 할 짓이냐구?
수영 : 네가 언제부터 식구들 생각을 그렇게 했는데?
태영 : 그래, 개망나니 짓 하면서 식구들 얼굴에 똥칠하며 살아온 거 사실인데,
그래도 난 형처럼 나 몰라라 하지는 않아.
형 그럴 때마다 얼마나 정나미 떨어지는 줄 알아? 그래서 형수도 바람핀 거 아니냐구?
수영 : (주먹을 들었다 참는)
태영 : 왜 못 때려? 한번 쳐. 치라구? 치고 싶잖아?
수영 : 그만 하자.
태영 : 대체 왜 그렇게 참고만 사는데? 나같이 더럽게 산 놈 입에서 형수 바람 얘기 나오는데 왜 참냐구?
들어오는 석호.
수영 : 지금 오세요?
석호 : (뚜벅 뚜벅 걸어가서 태영의 뺨을 갈기는)
태영 : 아버지?
석호 : 네 놈이 뭐야?
태영 : 아버지?
석호 : (다시 손을 올리면서) 네 놈이 뭔데 에비 일에 끼어들어?
수영 : (석호의 손을 잡는)
석호 : (당황하고)
태영 : (석호보다 더 놀라고) 형.
수영 : 말로 하세요, 아버지.
석호 : 놓지 못하냐?
수영 : 태영이 성격 아시잖아요? 전 아버지 인생에 관심이 없으니까 나서지 않는 겁니다.
하지만 저 놈은 아니잖아요? 저 자식은 식구들 일이라면 부르르부터 하는 놈이잖아요?
그래서 나선 겁니다. 그게 맞을 일은 아니잖아요?
석호 : (손 내리고) 너도 이실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구나. 그래서 생전 안하던 짓을 하는 걸 거구.
수영 : 전 정말 관심 없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와 결혼하시든.
석호 : (보다가 힘없이 집 안 쪽으로 움직이는)
태영 : (수영에게) 왜 그래? 형? 그렇게 모질게 말할 것까진 없잖아?
수영 : .....
태영 : 아버지 나 때릴만 하신 거 알잖아? 형도 돼먹지 않은 짓 했다고 했잖아? 근데 왜 그래?
수영 : 그거, 아냐? 아버지 나는 한번도 때린 적 없으시다는 거.
태영 : 뭔 소리야? 그게 억울하다는 거야 뭐야? 맞는 게 그렇게 하고 싶어?
형이 안 맞아봐서 모르나본데. 맞는 거 그거 보통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 는 거 아니다.
나처럼 맞는데 이골이 난 사람 아니면.....
수영 : (대문 쪽으로 움직이는)
태영 : 어디 가? 형?
#.42 씬. 석호의 방.(밤)
석호, 웃옷 벗고 있으면, 단아 들어오는.
단아 : 저녁 드셔야죠?
석호 : 생각 없다.
단아 : 그럼 약식이라도 좀.....
석호 : 생각 없다니까.
단아 : .....
석호 : 미안하다. 정말 생각이 없구나.
단아 : 아버지?
석호 : (보고)
단아 : 이실장님 마음은 어떠신 거예요?
석호 : ......
단아 : 두 분 마음만 확고하시면 할아버지 져주실 거예요.
석호 : .....
단아 : 나가볼게요. (나가는)
석호 : .....
#.43 씬. 동네 공원 정도의 장소.(밤)
수영, 벤치에 앉아있는. 회상에 잠겨있는.
#.44 씬. 공원 - 과거 회상. (밤)
벤치에 앉아있는 10살 정도의 수영.
다가오는 젊은 시절의 석호. 수영의 옆에 와서 앉는.
석호 : 왜 여기 있냐? 엄마가 걱정한다. 들어가자.
수영 : ......
석호 : 소풍은 내년에 가면 되잖니?
수영 : 내년에도 제사랑 겹치면요?
석호 : 안 겹치길 바래보자꾸나.
수영 : 왜 태영인 소풍 가도 되면서 저는 안돼요?
석호 : 넌 장손이잖니.
수영 : .....
석호 : 수영아? 장손이란 사람은 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져야 할 짐이 있는 거다.
특히 우리처럼 불천위 제사를 지내야 하는 종가의 종손은 그 짐이 좀 더 무겁단다.
일찍 들어가 자야 내일 아침 일찍 종택으로 내려가지 않겠니?
수영 : 아버지?
석호 : 그래?
수영 : 전요. 아버지......(가슴을 가리키며) 여기가 맨날 답답해요. 숨을 크게 쉬어도 여기가 맨날 답답해요.
석호 : 안다. 이 아버지도 그렇단다.
수영 : 언제가 되면 안 답답해져요?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석호 : (수영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글쎄다. 그건 에비도 모르겠구나. 에비도 아직은 늘 답답하니 말이다.
수영 : 아버지. 전요. 진짜 너무 많이 답답해서 못살겠으면..... 도망 갈 거예요. 그러니까 찾지 마세요. 네?
석호 : 그러마. 찾지 않으마. 그러니까 아주 멀리 도망가거라.
#.45 씬. 동네공원. (밤)
현실의 수영.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쓸쓸하게 올려다 보는.
#.46 씬. 강석의 집 전경. (밤)
영자E : 혜주야, 혜주야?
#.47 씬. 강석의 집 거실.(밤)
강석, 집으로 들어서는데, 혜주 뛰쳐나오는.
영자 : 혜주 좀 잡아. 혜주 좀.
강석 : (놀라서 뛰쳐나가려는 혜주를 잡는)
천갑 : (방에서 나오는, 런닝 차림으로) 웬 소란들이야?
울상을 하고 서있는 가정부 아줌마.
강석 : 무슨 일이예요? (뛰쳐나가려고 발버둥치는 혜주를 잡고)
영자 : 지 방에 있는 쓰레기 가져다 버렸다고 저 난리다.
아줌마 : 전 혜주 아가씨가 애지중지 하는 거라서 치우면 안 될 거라고 사모님께 말씀 드렸는데....
영자 : 애지중지 할 게 없어서 쓰레기를 애지중지 해?
혜주 : (강석의 팔을 무는)
강석 : (놀라서 인상 구기는)
혜주 : (그 사이 뛰쳐나가는)
천갑 : 저, 저 놈의 자식.
영자 : 정말 쟤가 뭐가 되려고 저런대요?
아줌마 : 쓰레기 다 수거 해갔는데....
강석 : 혜주야? (뛰어나가는)
#.48 씬. 강석의 집 마당.(밤)
혜주, 뛰어나가는. 따라 나오는 강석.
#.49 씬. 강석의 집 앞.(밤)
혜주, 뛰쳐나와 뛰어가려고 하면. 강석, 따라 나오는.
강석 : (혜주의 팔을 잡는) 어쩌려구?
혜주 : (울면서) 찾을 거야, 찾아야 해.
강석 : (안타깝게 보다가) 기다려. 차 가지고 나올게.
#.50 씬. 쓰레기집하장.(밤)
혜주, 쓰레기 더미 위에 올라가서 마구 뒤지는. 강석도 쓰레기를 뒤지고 있다.
강석 : (그러다 혜주를 보고 혼잣말로) 그 자식이 대체 너한테 뭐냐?
(혜주에게 다가가는, 혜주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우는) 벌써 2시간째야. 못 찾아 혜주야.
혜주 : 찾아야 해. 찾을 거야. (막무가내로 뿌리치려고 하면)
강석 : (톤 높여서) 혜주야. 혜주야. (끌어안는) 이 자식아. 왜 그래? 언제까지 이럴 거니?
혜주 : ......
강석 : 다시 모아들이면 되잖니? 그렇게 해, 혜주야. 응?
혜주 : ......
#.51 씬. 강석의 집 거실.(밤)
천갑, 양주를 마시고 있는. 그 앞에 앉아있는 영자.
영자 : 안주도 없이 왜 그러세요? 안주라도 드시면서..... (안주 집어서 천갑의 입에 대주면)
천갑 : (뿌리치는, 안주 바닥으로 떨어지고)
영자 : 그럼 제발 천천히라도 드세요.
천갑 : 그 자식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우리가 저한테 못해준 게 뭐가 있다고 저 짓꺼리냔 말야?
영자 : 애가 어려서부터 워낙 별났잖아요.
천갑 : 그러니까 왜 별나냔 말이야. 보통만 가면 되잖아, 보통만.
영자 : 그래도 대학은 집어넣었잖아요?
천갑 : 과외 선생 과목마다 붙여서 겨우 겨우 대학까지 집어넣어놨으면 사람 구실을 해야 할 거 아냐, 사람 구실을.
저래 가지고 시집이나 보낼 수 있겠냐구?
영자 : 생긴 거 멀쩡하고 대학 간판까지 있고, 돈까지 있는데 설마 데려가겠 다는 놈 없겠어요?
천갑 : 그러니, 그게 저 놈 보고 데려가겠다는 거겠냐구?
돈 보고 덤벼드는 놈한테 보내고 나면 내가 발 뻗고 잠이나 제대로 자겠어.
영자 : 차차 나아지겠죠.
천갑 : 쓰레기 버렸다고 저 난린데 어느 천 년에 나아져, 나아지길.
초인종 소리. 아줌마 얼른 식당에서 나오는.
영자 : 들어오나 봐요.
천갑 : (술 쫙 들이키고)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져서 자식 놈이 저 모양인지.
영자 : 제발 그만 좀 드세요.
천갑 : 내가 지금 술 안 먹게 생겼어? 그러니까 내가 애 가졌을 때 참새 좀 먹지 말라고 그랬지?
영자 : 그 놈의 얘긴 또 왜. 없이 살 때 당신이 잡아다 구워준 참새가
혜주 그거 갖고 먹고 싶은 걸, 지금 와서 어쩌라구요.
천갑 : 애 가진 여자가 그게 먹을 거야? 참새가?
영자 : 그럼 구해다주긴 왜 구해다 줘요? 당신이 안 구해다줬으면.....
들어오는 강석과 혜주.
천갑 : (벌떡 일어서며) 너 이놈의 자식, 당장 이리 못 와.
강석 : 혜주 올라가라.
천갑 : (혜주에게 달려들려고 하다가 탁자에 걸려 넘어지고) 올라가긴 어딜 올라가?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고.
강석 : (얼른 천갑 부축하고) 올라가.
영자 : 네가 너무 싸고도니까 혜주 쟤가 더 저러는 거야.
강석 : 그만하세요. 올라가라니까.
혜주, 올라가고.
천갑 : 저 자식은 혼 좀 나야 해. 오냐 오냐 하니까 더 기승을 떠는 거야, 저 놈이.
강석 : 제가 알아듣게 말 했으니까 그만하세요, 아버지.
천갑 : 에이, 속에서 열불이 나서. (술 병 째 마시고)
영자 : 이 양반이. (술병 뺐으려고 하면서) 정말 왜 이러신대요?
강석 : (술병 뺐는) 그만 드세요. 이미 과하신 거 같은데.
천갑 : (강석의 기세에 눌려) 많이 안마셨어. 임마.
강석 : 아주머니?
아줌마 : 네.
강석 : 앞으로 혜주 방에 있는 물건 함부로 치우지 마세요.
영자 : 아줌마한테 그럴 거 없어. 내가 치우라고 시켰어.
강석 : 앞으론 꼭 혜주한테 물어보고 하세요. 아셨죠?
아줌마 : 네.
영자 : 굿이라도 해야 해요.
천갑 : 뭘 해?
영자 : 푸닥거리라도 해야 한다구요. 우리가 넝마로 돈 벌어놓고 딱 때려치우니까
귀신이 시샘을 해서 혜주 저거한테 들러붙은 거라구요.
천갑 : (강석에게) 용한 무당 하나 찾아봐라.
강석 : 아버지?
영자 : 해야 한다니까. 그 방법 밖에 없어.
강석 : 세상에 비밀이란 거 없어요. 그런 굿하면 혜주가 이상하다드란 소문만 나요.
영자 : 그럼 어쩌자구?
강석 : 지 방 물건만 함부로 내다 버리지 않으면 조용한 아이잖아요.
천갑 : 넌 저 놈이 사람 구실하면서 살 거 같냐?
강석 : .....
천갑 : 부모인 나도 조마조마한데 어떤 놈이 저 놈을 데려가겠냔 말야?
강석 : 찾아야죠. 혜주가 마음에 들어 하는 놈으로.
#.52 씬. 길.(밤)
길가에 앉아있는 현규, 술에 취해 있는. 핸드폰 들고.
현규 : 자요?
#.53 씬. 단아의 방.(밤)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있는 단아.
단아 : 응. 자.
현규E : 진짜 띨띨하시다. 자는 사람이 응, 자, 하는 거 본 적 있어요?
단아 : 왜 전화 했니?
#.54 씬. 길.(밤)
현규 : 왜 한 거 같아요?
단아E : 몰라.
현규 : 와, 진짜 띨띨하다. 다 알면서.
단아E : 술 먹고 전화 하지 마.
현규 : 나 혼나는 거 무지 싫거든요. 근데 가끔은 혼날 거 알면서도 이러고 싶어요.
나, 여기 있어요, 하고 알려주고 싶어서.
단아E : 집에 들어가. 끊는다. (뚜하는 신호음)
현규 : 진짜 못됐다. 맨날 자기 마음대로야. 디따 이쁜 것도 아니고, 디따 섹시한 것도 아니면서.
벌써 서른 줄에 접어들었으면서 잘난 척은 혼자 다해.
모르죠? 나 좋다는 여자 애들 한 줄로 세우면 올림픽 공원도 한바퀴 돌릴 수 있다구요.
근데요. 어쩌죠? 나 그 애들은 싫은데...... 매일 구박만 받으면서도 싫지 않으니.
그쪽 때문에 자꾸 술을 마시고 싶으니...... 나 이러다 위에 빵꾸날 텐데.
나 위 빵꾸 내서 죽이고 싶지 않으면 제발.....그러지 말아요.
전화 제발 먼저 뚝 뚝 끊지 좀 말고..... 한번이라도 전화 해주면 더 좋구.....
#.55 씬. 단아의 방.(밤)
단아,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는. 전원을 끄는.
책장에 꽂혀져 있는 책을 꺼내 펼친다. 현규와 닮은 젊은 남자. 대학 졸업식 때 사진이다.
그 옆에 부끄러운 듯 서있는 여고생 교복 차림의 단아.
단아 : (손끝으로 남자의 얼굴을 만져보는)
#.56 씬. 찜질방.(밤)
말순, 장기 라면을 먹고 있다.
장기 : 근데, 왜 징계 먹고 온 거예요?
말순 : (라면만 먹는)
장기 : 정말 소문대로 취조 도중에 피의자 코뼈 부러뜨렸어요?
말순 : 턱뼈도 나갔어, 그 자식.
장기 : (헉) 성질 심하게 포악하다는 소문 진짠 거예요?
말순 : 깡패 자식이었어.
장기 : 아니, 아무리 깡패 자식이라도 그렇지 인권이 있는데.
말순 : 같이 살고 있던 여자 얼굴 뭉개놓은 놈이야.
장기 : 아, 네. 참 훌륭하세요. 나중에 여자들 표 모아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실 생각 있으신 거예요?
말순 : 비웃냐?
장기 : 아니요. 제가 겁대가리 상실 하지 않고서야 선배님을 함부로 비웃고 그러겠어요.
말순 : (무심히 시선 돌리다 한 구석에 누워 잠들어 있는 진아의 등이 보인다)
근데 넌 인상 자체가 사람 비웃는 것처럼 보이거든. 인상 관리 잘 하고 살아라. (일어서서 진아 쪽으로 걸어가는)
장기 : 말투 자체가 폭력적이야. 저러니 애인 하나 없지.
말순 : 너한테 애인 해달라고 안 할테니까 걱정 마라.
장기 : 귀까지 밝아요. 뒤에서 욕하다가 화장터 간 애도 있죠?
말순, 진아 앞으로 돌아가서 보면. 진아 식은땀을 흘리며 쪼그리고 누워있다.
말순 : (그 앞에 앉으며, 진아를 흔드는) 이봐요, 이봐요.
진아 : (의식이 없다)
말순 : (굳어져서) 이봐요. 이봐요.
#.57 씬. 동찜질방. (밤)
말순 물수건으로 진아의 얼굴을 닦아주고 있는. 장기, 약봉지 들고 뛰어오는.
장기 : 약국문 두드려서 겨우 사왔어요.
진아 : (천천히 눈 뜨는)
말순 : 정신 좀 들어요?
진아 : .....
말순 : (일으켜 앉히며, 약병 따서 입에 대주는)
장기 : 제일 좋은 피로 회복제래요.
말순 : 우선 이거 먹고 병원부터 가요.
진아 : 괜찮아요.
말순 : 뭐가 괜찮아, 괜찮긴. 정신도 없었으면서?
진아 : .....
말순 : 그때 경찰서 이후로 계속 여기서 지낸 거예요? 그런 거죠?
진아 : 아, 그 경찰 언니?
#.58 씬. 찜질방 일각.(밤)
진아, 우유를 마시고 있는. 말순, 그 앞에 앉아있는.
진아 : (인상을 구기는)
말순 : 왜 그래요?
진아 : 속이 쓰려서.....
말순 : 설마 그동안 아무것도 안 먹고 지낸 거예요?
진아 : 가끔 돈 생기면 먹기도 했어요.
말순 : 직장은?
진아 : 현재는 실직 중이예요.
말순 : 집은?
진아 : (피식 웃고) 전세 보증금 빼서 그때 그 자식 엄마 치료비로 주고. 고시원에서 지냈는데, 월세 밀려서 쫓겨났어요.
말순 : 그럼 뭐 먹고 살아요?
진아 : 아르바이트 생기면 하고.
말순 : 그 돈으로 먹기는 할 수 있을 거 아냐?
진아 : 카드 빚이 좀 있거든요. 돈 생기는 대로 그거 갚느라.....
말순 : 카드 빚은 왜 졌는데.
진아 : 그 자식 엄마 입원비가 부족해서.....
말순 : 참, 눈물 없인 못 듣겠다.
진아 : (웃으며) 그렇죠?
화장실에서 나와 다가오는 장기.
말순 : 나랑 같이 살아볼래요?
진아 : (놀라서 보는)
장기 : (후다닥 다가앉으며) 레즈비언이었어요? 그거였구나? 맞죠?
말순 : (주먹으로 장기 턱 돌려버리는)
#.59 씬. 석호의 방.(밤)
석호, 잠들어 있는. 울리는 핸드폰 벨.
석호 : (눈을 뜨고 잠시 멍하다, 핸드폰 들어보는. 번호 확인하고 다급하게 전화 받는) 응? 영인아? 왜?
영인E : 선배, 나 좀 이상해.
석호 : 영인아? 왜 그래?
영인E : 나 좀 아파.
#.60 씬. 종가 마당.(밤)
뛰어나가는 석호.
#.61 씬. 길 - 석호차안.(밤)
석호, 운전하고 있는. 핸드폰 누르는. 연결음만 계속 되고.
더욱 다급해서 운전하는 석호.
#.62 씬. 영인의 아파트.(밤)
석호, 번호키 누르고 달려 들어가는.
#.63 씬. 영인의 아파트 거실.(밤)
달려 들어오는 석호, 영인 소파 밑에 쓰려져 있다. 잠옷 위로 하혈 흔적이 보이고. 손에는 핸드폰을 쥐고 있다.
석호 : (다가가 영인을 안으며) 영인아? 영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