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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7:1-8
▣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인 기도-요한복음 17장-
어떤 이들은 이 장을 “요한복음의 지성소“라고 쉽게 말해 왔다.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와의 대화를 듣는 특권을 갖는다. 우리는 이 장에 있는 진리들에 대해 묵상하는 데 많은 주일들을 보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점만을 다루려 한다.
1. 그리스도 자신을 위한 기도(17:1-8)
가장 큰 주제는 그가 구원의 일을 마치셨다는 것이다. 2장 4절에서 시작해서 요한은 “때“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성구사전을 사용해서 이 절들을 추적해보라. 예수께서는 “내가(구원의 일을) 이루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었다. 항상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수단으로 십자가를 보셨으며(12:23), 바울 역시 십자가 안에 있는 영광을 보았다(갈 6:14).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죽기 위해 세상에 오실 때 제쳐놓은 영광을 다시 자신에게 주실 것을 기도하신다(빌 2:1-12). 영광이 나타난 유일한 때는 변화산 위에서였다(요 1:14/ 벧후 1:16-18).
2절의 “주신“이라는 말에 유의하자.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온 인류를 다스릴 권세를 주셨고, 아들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신다. 요한복음 17장에 있는 보배로운 진리들 중의 하나는 각 신자들이 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이다(요 6:37). 영생은 값없는 선물이다. 죄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죄인이 이 일을 할 때에 그는 아버지께서 자기를 아들에게 주셨음을 알게 된다(요 6:37). 이것은 우리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이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 감사한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들에게서 결코 빼앗으려고 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는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진술인 “나는... 이다“에 관련시켜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나는... 이다“(출 3:13-14)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되신다는 것을 계시하신다. 주린 자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잃어버린 자들에게는 “나는 길이요“라고 하시며, 눈 먼 자들에게는 “나는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요 17:9-19
2. 그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17:9-19)
여기서의 핵심 사상은 거룩함, 곧 제자들의 세상에 대한 관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다“(14절)고 말씀하시며, 17절에서는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 따로 떼어져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거룩함(성화)이란 완전히 무죄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께서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19절)라고 말씀하실 수가 없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거룩하게 된 그리스도인이란 매일 말씀 속에서 성장해 가는 사람들이며, 그 결과로서 세상으로부터 아버지께로 더욱더 성별되어 진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제자들을 지켜 주시도록 간구하신다(11절). 이 요청은 그들이 구원을 상실하게 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다. “...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는 참으로 완전한 기도임에 주목하자. 15절에서는 그들이 악으로부터 보전되기를 요청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체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셨으며 마음과 목적에서 연합되어 세상으로부터 성별되도록 그들을 지키실 수 있으셨다. 이제 그리스도는 하늘로 돌아가려 하시며 그들을 지키시기를 아버지께 간구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12절을, 믿는 자들이 그들의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증거로서 사용한다. 그러나 이 절을 주의깊게 읽어 보면 그 반대라는 것이 증명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중 누구든지 멸망의 자식 외에는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 중의 어떤 누구도 잃어버리지 않으나, 오직 멸망의 자식만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유다가 믿는 무리 속에 전혀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여기에 사용된 “오직“은 대조의 말로서, 유다가 다른 제자들과는 다른 부류에 속했다는 것을 보신다. 11절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모든 자를 지키신다고 명백히 말씀하신다. 유다는 잃어버렸으므로 그는 아들에게 주신 자 가운데 있을 수 없다. 오늘날 유다가 “그의 구원을 잃어버렸다“고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은 6장 66-71절에서 유다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한 베드로와 같은 잘못을 저지른다. 그 때 그는 구원을 받지 못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세상에 있다. 우리는 주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생활을 정결하게 지킨다. 그리스도는 사실상 자기를 대신해서(18절)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다.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책임이 있는가 !"
요 17:20-26
3. 그의 교회를 위한 기도(17:20-26)
여기서 중요한 주제는 영광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주었사오니“(22절). 그리스도는 “내가 그들에게 줄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 신자는 이미 영화롭게 되었기 때문이다(롬 8:30). 이것은 믿는 자의 영원한 안전에 대한 또다른 증거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에 관한 한 영화롭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와 함께 있도록, 그리고 그의 영광을 보게 되도록 기도하신다. 골로새서 3장 4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게 될 것을 말하며, 로마서 8장 18절은 우리가 그의 영광을 나타내리라고 약속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신다(21절). 하나됨과(마음과 영에 있어서 하나됨) 통합(기구와 계획에 있어서의 하나됨)에는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는 결코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의 세계 교회 속에 있게 될 것을 의미하시지 않는다. 현재의 교파적인 병합과 세계 연합 노력들이 기구적인 통합은 가져올지 모르지만, 그들은 하나됨을 낳을 수 없다. 하나됨은 외부의 압력에서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온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교파에 속했을 때에도 참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이다. 그리고 세상에 복음의 진리를 확신시키는 것은 바로 이 사랑 안에서의 영적인 하나됨이다.
그리스도인이 사소한 문제에서 다르다는 것은 가능하지만 여전히 그리스도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마다 죽으면 하늘로 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셨으며(24절),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기도를 항상 들으시기 때문이다(11:41-42). 26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에 대한 더 깊은 계시를 약속하신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주신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으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누릴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신다(14:21-24). 우리는 이 기도의 주요 부분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구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었사오니“ 과거
(1-8절) (2절)
성화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현재
(9-19절) (14절)
영화 “내가 아버지의 영광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미래
(20-26절) (22절)
이 기도 안에서 신자의 영원한 안전에 대한 놀라운 증거들을 눈여겨보자.
신자들은 아들에게 주신 아버지의 선물이며(2절), 하나님은 그의 사랑의 선물을 되찾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사역을 마치셨다. 만약 신자들이 그의 구원을 잃어버린다면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을 완전히 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자기의 사람들을 지키실 수 있었고, 오늘날도 그들을 지키실 수 있다. 이는 그가 동일한 군주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종국에는 하늘에 있게 될 것을 아신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늘에 있게 될 것을 위해 기도하시며, 아버지께서는 항상 아들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요 18:1-14
▣ 그리스도의 고통과 재판-요한복음 18장-
예수께서는 그의 대적들을 만나기 위해 기도의 장소를 떠나신다. “기드론 시내“는 가족의 반역으로 보좌에서 추방되던 다윗 왕을 상기시킨다(삼하 15장 참조). 이 장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 체포(18:1-14)
예수께서는 자의적으로 유다와 그의 무리들을 만나셨다. 이는 주님께서 바야흐로 무엇이 일어나려 하는지를 아셨기 때문이다(13:1-3/6:6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아시므로, 항상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계셨다). 동산에서 체포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란 흥미로운 일이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적을 만나 승리하셨으나(고전 15:45), 첫번째 아담은 적을 만나 패배하였다. 아담은 자기를 감추었으나, 그리스도는 공개적으로 나타내셨다. 이 두 정원의 장면을 생각하며 다른 대조점들을 살펴보자.
유다는 원수들과 함께 서 있었다. “사도들이 다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행 4:23). 사람은 항상 그의 마음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한다. 유다는 그의 마음 속에 사단이 있었으므로 사단의 군중과 함께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베드로 역시 이같은 무리들과 함께 서 있었다. 예수께서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내로라“ /I Am)을 사용하여 그들을 놀라 자빠지게 하는 것을 보라. 믿는 자를 구원하는(17:6) 그 이름이 또한 잃어버린 자를 정죄한다.
8절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문제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에게 떠나라고 경고하신다. 그리스도는 이미 제자들에게 그들이 흩어지리라고 말씀하셨으나(16:32) 베드로는 남아서 싸우기를 좋아했고, 그로 인하여 문제에 빠지고 말았다. 베드로의 죄는 그가 멀리서 따라갔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따랐다는 바로 그 점이다. 그는 말씀에 순종하여 떠났어야 했다.
9절은 17장 12절로 되돌아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구원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언급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그들의 육체적인 보호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그리스도는 우리를 두 가지 면에서 지키신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 가운데 보존하시며, 우리의 몸을 그의 영으로 인쳐서 구속의 날까지 지키신다.
검을 사용함으로써 베드로는 분명하게 그리스도께 불순종했다. 그리스도께는우리의 보호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사단과 싸울 때 사용할 무기도 육체가 아니라 영이다(고후 10:4-6/엡 6:1-). 그는 잘못된 무기를 사용했고 잘못된 동기로, 잘못된 순서로 행하여 결국 잘못된 결과를 빚어 내었다. 말고를 치료하시고 베드로를 보호하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 ! 그렇지 않았다면 갈보리산 위에는 다른 십자가가 섰을 것이며, 베드로는 그의 때가 이르기 전에 십자가에 못박혔을 것이다."
요 18:15-27
2. 부인(18:15-27)
이제 집중 조명의 촛점이 베드로에게 맞춰지며, 우리는 그의 슬픈 퇴보를 보게 된다. 다락방에서 그는 그리스도께 참되게 남아 있겠다고 세 번이나 장담했다(마 26:33/마 26:35/요 13:37). 동산에서 그는 기도해야 할 그 때에 세 번이나 잠에 빠져들었고, 그 후 주님을 세 번 부인하였다. 요한복음 21장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세 번 고백해야 했다.
다락방에서 그는 마귀의 그물에 걸려들었고(눅 22:31-34), 동산에서는 육체의 연약함에 굴복하였으며, 이제 제사장의 뜰에서는 세상의 압력에 항복하였다. 깨어 기도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
우리는 15절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제자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데에 동의해야 한다. 그는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일 수 있다. 종종 “다른 제자“로 불리워졌던(20:3) 요한이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행 4:1-3 참조). 그가 누구이든지간에, 그는 베드로를 위해 그 문을 열어 줌으로써 그를 죄로 인도하였다. 무지한 신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 불순종하도록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이다. 18절은 “그 때가 추웠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래서 베드로는 불가에 앉았다. 그러나 누가복음 22장 44절은 그리스도께서 그 밤에 기도하실 때에 땀을 흘렸다고 말해 준다.
베드로는 영육간에 다 추웠고, 적의 불 곁에서 그를 따뜻하게 해야만 했다. 그는 “악인의 꾀를 좇아 죄인의 길에 서 있었고,“ 이제 곧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을 것“이었다(시 1:1 참조). 그리스도께서 고통당하시는 동안 베드로는 자신을 따뜻하게 할 뿐 그리스도의 고통에 전혀 동참하지 못하였다."
요 18:28-40
3. 거절(18:28-40)
제사장들을 조정하는 두 인물이 있다는 사실은 그 당시 유대 나라가 얼마나 부패하였는지를 보여 준다. 안나스와 가야바는 성전 상거래의 공동경영자이며, 성전을 두 번 깨끗케 했던 것으로써 그리스도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늘날 소위 “영적 지도자“로 불리우는 어떤 이들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품화시키고 있었다.그리스도의 재판에 대한 불법적인 면들은 많이 기록되어져 왔다. 그 회의는 밤에 개최되어 죄수는 유죄로 기소되었고, 그들은 거짓 증인들을 고용하였으며, 묶여 있는 동안 잘못된 대우를 받도록 허용하였으며, 어떠한 변호도 승락하지 않았다. 은밀한 한밤중의 재판이 있은 후에, 교활한 유대인들은 최종적인 사형 언도를 위해 그를 빌라도에게로 데려갔다. 그들은 “더럽혀지지 않으려고“ 이방인의 홀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정죄하였다 ! 그리스도 없는 종교는 이러하다. 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며 약대는 삼키는 것이다.
33절로부터 19장 15절까지, 우리는 빌라도의 비겁한 우유부단함을 보게 된다. 적어도 일곱 번씩이나 빌라도는 홀에서 유대인들이 있는 밖으로 들락거리며 타협하려 하였다. 빌라도는 겁장이였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얼마나 많은 죄인들이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지옥에 있게 되는가 !
그리스도는 빌라도에게 자신의 왕국의 영적인 성격에 대해 설명하셨다. “그러나 지금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데에 유의하자.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면, 그리스도는 이 땅 위에 그의 나라를 세우셨을 것이다. 이제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써 그의 나라는 사람의 마음속에 거하는 영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는 날, 그는 이 땅 위에 그의 문자 그대로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진리가 무엇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은 수 세기 동안의 철학자들이 묻던 것이다. 14장 6절에서, 예수께서는 “내가 진리라“고 하셨고, 17장 17절에서는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말씀하셨으며, 요한일서 5장 7절은 “성령은 진리니라“고 진술한다.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세상은 영적인 일에 이르면 늘 잘못된 선택을 해 왔다. 사람들은 생명의 왕보다는 살인자를, 법을 주신 분보다 법을 어기는 자를 더 좋아하였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참 메시야를 거절하였으나, 어느 날 사단의 거짓 메시야인 적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것이다(5:43). 사람들은 다른 이유들로 그리스도를 거절하였다. 유다는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그리스도를 거절하였고, 빌라도는 세상에 귀를 기울였으며, 헤롯은 육체의 요구를 경청하였다.
빌라도는 “너희에게... 전례가 있으니“라고 말하였는데(39절), 그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서 종교적인 관습을 알았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오늘날에조차 사람들은 이와 같아서 종교적인 축일이나 관습을 지키는 데는 주의하면서도, 세상의 구세주에 대해서는 무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