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몸 받았을 때 성불하라 / 수월스님
도를 닦는다는 것이 무엇인고 허니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거 아녀.
이리 모으나 저리 모으나 무얼 혀서든지 마음만 모으면 되는 겨.
하늘천 따지를 하든지. 하나둘을 세든지,
주문을 외든지 워쩌튼 마음만 모으면 그만인겨.
나는 순전히‘천수대비주’로 달통한 사람이여.
꼭‘천수대비주’가 아니더라도 ‘옴 마니반메훔’을 혀서라도 마음 모으기를,
워찌깨나 아무리 생각을 안 하려고 혀도 생각을 안 할 수 없을 맨큼 되는 겨.
옛 세상에는 참선을 혀서 깨친 도인네가 많았는디,
요즘에는 참 드물어. 까닭이 무엇이여?
내가 그 까닭이 무엇이여?
내가 그 까닭을 말한 것인게 잘 들어봐.
옛날 스님들은 스스로 도를 통하지 못했으면
누가 와서 화두참선법을 물어도 “나는 모른다”며 끝까지 가르쳐주들 않았어.
꼭 도를 통한 스님만이 가르쳐주었는디,
이 도통한 스님께서 이렇게 생각하신단 말여.
‘저 사람이 지난 생에 참선하던 습관이 있어서 이 생에도 저렇게 참선을 하려고 하는구나.
그러면 저 사람이 전생에 공부하던 화두는 무엇이었을까?
도를 통했으니께 환히 다 아실 거 아니여. 혀서‘옳다. 이 화두였구나’하고 바로 찾아주시거든.
그러니 그 화두를 받은 사람은 지난 생부터 지가 공부하던 화두니께 잘 안하고 배길 수가 있남.
옛날 사람들은 화두 공부가 잘 되지 않더라도,
화두를 바꾸지 않고 “나는 열심이 모자라니께 열심히만 정진하면 꼭 성취할 것이다.”는
한생각으로 마음을 몰아 붙여 오로지 한길로만 애쓰다가 도를 통하기도 혔어.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그게 아니여.
무엇이든지 한 가지만 가지고 끝까지 공부혀야 하는디,
이것이 꼭 밥 먹기와 매 한 가지여.
똑같은 반찬이라도 어떤 사람은 배불리 맛있게 먹지만 어떤 사람은 먹기 싫고,
또 어거지로 먹으면 배탈이 나는 뱁이거든.
공부도 마찬가지여.
염불을 열심히 혀야 할 사람이 딴 공부를 하니 잘 안 되는 겨.
“한 집안에 천자 네 명 나는 것보다 도를 깨친 참 스님 한 명 나는 게 낫다
.”예부터 이런 말을 많이 들었지. 만일 중이 되어 도를 통할 것 같으면
그 공덕으로 모든 조상영령들과 시방삼세의 중생들이 다
이고득락(離苦得樂)할 것이니 이 얼마나 좋으냐 말여.
이 세상이라는 게 중이 되면,
머리가 있고 없고 글이 있고 없고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여.
차라리 그런 것들은 없는 게 훨씬 나아.
참으로 사람 되기가 어렵고,
천상천하에 그 광명이 넘치는 불법 만나기가 어려운데 말이지,
사람 몸 받아가지고도 참 나를 알지 못하고 참 나를 깨치지 못하면 이보다 더 큰 죄가 워디 있을 겨
.부처님께서도 “나도 너를 못 건져준다. 니가 니 몸 건져야 한다”하셨어.
그러니 참 그야말로 마음 닦아가지고 니가 니 몸을 건지지 못하고 그냥 죽어봐라,
이렇게 사람 몸 받고도 공부를 이루지 못하고 그냥 죽어봐라,
다 쓸데없다. 어느 날에 다시 이 몸을 기약할 것인가.
▶수월 스님은?수월(水月, 1855~1928)
스님은 혜월, 만공 스님과 더불어 경허 스님의 3대 제자 중 한 분으로
머슴 생활을 하다 서른이 가까워서야 충남 서산 천장암에서 출가했다.
그 후 금강산과 묘향산 등 현재의 북한 지역의 사찰에서 수행하다
간도에 초막 같은 송림산 화엄사를 창건해
그 지역으로 흘러든 조선의 유민들과 독립군들까지 거두었다.
1928년 여름 안거를 마친 스님은 화엄사
옆 개울에서 짚신을 머리에 얹고 단정하게 열반에 들었다.
◆중생 아픔 나눈 자비의 보살/수월스님◆
수월 스님은 근대 한국 간화선을 중흥시킨 경허 스님의 제자로
평생을 중생이 겪는 고통의 현장에서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눈 자비의 보살로 알려진 인물이다.
일제시대 조선유민들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도 소먹이꾼으로 일하며 밤에는 짚신을 삼고
낮에는 소를 치며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주먹밥을 공양하는 등
스님은 평생을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은 수행자였다.
그러나 이런 스님의 삶은 텅빈 허공처럼 또 한 낮의 태양처럼 자취를 남기지 않았다.
한 번도 그럴듯한 법상에 오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여느 스님처럼 이렇다할 행장도 남기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스님의 삶은 친분이 있거나 스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의 구전(口傳)에 의해 전해질 뿐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스님은 1855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남의 집 머슴살이로 고단한 삶을 살아가던 스님은
나이 서른이 가까이 되던 해
어느 날 우연히 찾은 한 탁발승이 전해준 수행이야기에 감명을 받아 출가를 결심했다.
29세 되던 해 경허 스님의 친형인 천장암 주지 태허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글을 배우지 못했던지라 불경을 익히는 것은 남들보다 느렸다.
이에 은사 태허 스님은 글을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고 땔나무를 해오는 부목(負木),
밥을 짓는 공양주 등의 소임을 맡으라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법당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듣고
이를 단박에 외워 나무를 하러가거나 밥을 짓거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항상 입을 떠나지 않고 중얼거렸다.
이후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일심으로 독송하던 스님은 마침내
거대한 빛을 뿜어내며 ‘대비심다라니로 통달한 성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또 한 번 보거나 들은 것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고,
잠이 없어졌으며 아픈 사람의 병을 단번에 고칠 수 있는 특별한 힘을 얻게 됐다.
그러나 스님은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도 수행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스님은 월정사 상원암을 비롯해,묘향산 비로암, 금강산 유점사 등지를 돌며 보임 행에 임했다.
이후 스승 경허 스님이 입적하자 박해받는 조선유민들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간 스님은
간도의 한 암자에서 밤에는 짚신을 삼고, 낮에는 소를 치는 소먹이꾼으로 일했다.
스님은 이를 통해 생긴 돈으로 주먹밥을 지어 굶주린 조선인들에게
나눠 주는가하면 병든 환자를 정성껏 치료해 사람들을 감화시키기도 했다.
평생을 자비의 보살처럼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수월 스님은 1928년 7월 16일 간도의 한 계곡 바위 아래서 알몸으로 좌탈 입망했다.
세수 74세, 법랍 45세였다. -출처:법보신문-
첫댓글 경인년은 염불의 해로 정하여 열심히 수월스님의 성취의 도 이루고저 노력하려 합니다. 성불하소서.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