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 원촌-
인물을 만드는 사색의 땅
‘수졸당’ 앞을 따라 동쪽 산길을 넘으면 바로 ‘원촌遠村’이다. 원촌은 아득한 시절 ‘말을 멘 대臺’라 하여 ‘말 멘 대’라 불렀다. 이 말은 다시 ‘말 먼 데馬繫村’, ‘먼 먼 대遠遠臺’, ‘먼 대遠臺’로 변했다. 이런 이름들이 ‘먼 마을’이라는 뜻의 ‘원촌遠村’이 되었다. 어느 것이든‘말이나 키울 오지의 먼 마을’을 뜻한다.
그러나 이름만 그렇지 실상은 전연 그렇지 않다. 원촌은 배산임수의 전형을 보여 준다. 흔히 풍수지리에서는 봉화의 닭실, 영양의 주실, 경주의 양동, 울산의 돌내를 명당으로 꼽지만 산수의 조화로움이야 어찌 원촌에 미치랴. 고향의 원형이 있다면 원촌은 바로 그런 곳이다. 지금은 마을 앞 동수洞藪가 없어져 허해 보이지만, 원촌은 마을이 지녀야 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다. 전국을 유람해 봐도 이런 마을은 사실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땅은 세 가지 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 살 만한 땅[可居之地], 볼 만한 땅[可觀之地], 놀 만한 땅[可遊之地]. 땅은 저마다의 용도가 있을 뿐 불모의 땅이란 없다. 땅은 심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볼 만한 땅에 가서 살면 안 되며, 놀 만한 땅에 가서 살아도 안 된다.
가령 설악산은 어떤 땅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볼 만한 땅이다. 놀 곳은 못 된다. 살 곳은 더욱 못 된다. 산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석사 역시 마찬가지다. 부석사는 산서山書를 모르는 사람도 올라 보면 천하의 명당임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그 명당은 그것을 감당할 큰 스님이 아니면 안 된다. 부석사 앞으로 펼쳐진 광활무애함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부담스러움을 넘어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부석사는 천하의 볼 만한 땅이지 살 만한 땅은 아니다. 부석사에 스님들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은 것도 이런 지형과 관련이 있다.
서울 강남은 어떤가. 강남은 살만한 땅이라기보다는 놀만한 땅에 가깝다. 살만한 땅은 한강 북쪽의 땅들이다. 강남은 강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배산임수에 역행한다. 강남이 오랜 세월 주거지역으로 비워있었음은 이런 연유에 기인했다. 사람들은 놀만한 땅과 살만한 땅을 혼돈 하는데 강남이 그렇다고 보면 된다.
유원지는 놀 만한 땅이다. 이런 땅도 살기에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과연 살 만한 땅은 어디인가? 산과 강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산은 높지도 낮지도 않아야 한다. 적당해야 한다. 물은 흐르는 물이어야 한다. 또한 여울, 소, 구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구비에 적당한 토지를 장만해 두어야 한다. 그런 산과 강이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그 산과 강은 당연히 ‘나물을 캐러 갈 만하고 낚시를 할 만해야’ 한다. 이런 환경은 사색의 공간을 만든다.
사색은 인간을 ‘인물’로 만든다. 사색은 인간 최고의 교육이다. 안동의 산천이 대부분 그러하지만 도산 원촌은 바로 그런 안동 땅의 전형이다. 말이나 키울 궁벽한 오지 원촌에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된 것도 이런 산수의 영향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안동에서 하회마을이 시쳇말로 ‘뜨고’, 극찬하는 사람까지 나왔다.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필자에게 한 곳을 살라고 하면 주저 없이 원촌을 택하겠다.
그러나 이곳 역시 하계와 다르지 않다. 댐 수몰지역이기 때문이다. 원촌은 안동댐 마지막 수몰 동네다. 지금 몇몇 떠나지 못한 집들만이 산 밑에 웅크리고 있다. 그래서 원촌을 지날 때마다 ‘신원촌’을 조성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한다. 앞들 가운데를 가로질러 제방을 하면 신원촌 조성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를 위해 정말 탄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이육사
원촌 동리를 열어 간 사람은 이구李폓(1681~1761)다. 퇴계 5대손이자 동암 이영도의 증손자다. 하계에서 생장했지만 결벽에 가까운 성격은 속세를 더욱 멀리하게 했다. 그래서 이곳 말 멘 데로 와서 지명을 원대遠臺로 고치고 호로 삼았다. 그래서 ‘원대처사’가 되었다.
노송정이 15세기에 온혜에 입향했고, 손자 퇴계가 16세기에 상계를 개척했으며, 퇴계 손자 동암이 17세기에 하계를 열었고, 동암의 증손자가 18세기에 원촌을 개척했다. 대략 100년 간격으로 열어 나간 셈이다.
하계의 계보에서 다시 연결해보면,
1) 李詠道- 岐- 希哲.........하계파
克哲.........원촌파
2) 李克哲- 槼.........단사파
榘.........원촌파
이구의 후손으로 원촌이 배출한 인물을 적어 보면, 동추 이세익, 참판 이귀운, 군수 이귀성, 현감 이정순, 판서 이효순, 동추 이휘철, 대사간 이만유, 교리 이만현, 응교 이만정, 응교 이만용, 독립운동가 이광호, 이영호, 이신호, 이열호, 이선호, 이육사, 이원영 등이다.
이분들이 살던 집이 서울댁, 언양댁, 병성댁, 영해댁, 너다래댁, 참판댁, 아산댁, 상주댁, 진사댁, 대감댁 등이다. 그러나 지금 원촌에는 ‘목재 고택(이만유 가李晩由 家)’을 비롯해 네 채만 남아 있다. 나머지는 모른다. 내가 그 소재를 알고 있는 집은 안동 시내로 나온 서울댁(육사 생가)과 ‘치암 고택’이라 부르는 언양댁(이만현 가李晩鉉 家) 뿐이다.
원촌을 알린 인물은 단연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1904~1944)이다. 육사는 오지 원촌을 전국에 알렸다. 육사가 아니라면 원촌은 아직도 ‘먼 동네’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이를 상징하듯 최근 원촌은 육사 생가 복원과 기념관 건립 등 육사기념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육사기념관은 동리 입구에 지어졌다. 전에 육사 기념 조형물을 생가 터에 희고 둥근 돌들로 조성했는데, 그리 정감이 가지는 않았다. 청포도 송이를 상징하는 것인가? 아무튼 돌에는 시 <청포도>가 새겨져 있다. 천천히 읽어 본다.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원촌을 지날 때 가끔 이원무 어른을 뵙는다. 이원무 어른은 연세가 86세로 과거의 원촌을 알고 계신다. 어느 날 문득 “육사가 있을 때 동네에 청포도가 있었습니까?” 물었다. 포항시 문인들이 ‘육사청포도시비’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청포도> 시를 육사가 포항에 갔을 때 쓴 것이라고 생각한단다. ‘푸른 바다와 흰 돛단배’는 포항 앞바다의 풍경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고장 7월, 청포도가 익어 가는 곳’은 포항이란 말인가?
이원무 어른의 답변은 “그때 마을에 청포도가 있었다”였다. 앞 강변 쑤藪에 느티나무와 시무나무에 산머루가 얽혀 있었다. 당나무라 고도 불린 느티나무는 암수 두 그루로 육사의 동생 이원조의 기록처럼 “하루 종일 볕 한번 들지 못할 정도의 큰 고목”이었고, 강변에는 추억이 서린 ‘붉은 바위’가 있었다. 사람들은 당나무 아래에서 낮잠을 자거나 붉은 바위에서 멱감질을 하며 온 여름을 여기서 보냈다. 육사의 유년 시절도 그러했다. 이원무 어른은 산머루가 청포도라고 단정했다.
원촌 출신의 이동수 형은 육사의 시 <초가>의 “앞밭의 보리밭에 말매나물 캐러 간” 구절에 나오는 말매나물이 원촌에 무수히 많았고, <초가>의 시적 이미지는 그대로 원촌의 정경이라 했다. 지금 원촌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친구 이동렬도 <광야>의 광야는 원촌 앞들 벌판이라 했다. 사실 윷판대에서 본 원촌은 바로 그 육사의 광야였다.
문학적으로 ‘청포도’는 풍요로운 삶의 상징이고, ‘내 고향’은 공동체의 오랜 역사라 한다. 육사 역시 “내 고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이며, 일본은 곧 끝장난다”고 하며, “함께해야 할 사람들은 지금 ‘청포를 입고’ 고달픈 몸으로 삶을 살아가며, 언젠가 다가올 ‘은쟁반 하얀 모시 수건’의 순결한 만남을 소망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증언과 저런 분석이 있을 수 있다.
아무렴 어떠냐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나는 누가 무어라 하든 그렇게 본다. ‘내 고향’은 원촌이고, ‘청포도’는 원촌의 청포도라고. “파랑새 노래하는 청포도 고향”은 바로 원촌이다. 육사가 원촌에서 이를 체험하지 않았다면 어디서 느꼈단 말인가! 나는 원촌 산수의 아름다움이 <청포도>와 <광야> 같은 시를 낳았다고 믿는다.
그런데 조형물 옆에는 또 다른 비석이 우뚝 세워져 있다. 당연히 육사의 이력을 새겨 놓았거니 하고 보니 그게 아니다. 전면에 ‘육우당유허지비六友堂遺墟址碑’라고 쓰여 있다. ‘여섯 형제들이 살던 터를 기리는 비’라는 뜻이다. 육사 생가에 육사 이야기는 없고 웬 여섯 명의 형제 이야기인가?
돌아와 여러 문헌을 찾아보니 육사의 가족은 6형제였고 우애가 남달랐다. 조부들의 우애는 더욱 남달랐다. 육사의 장조카인 이동영 교수의 글에 이 비가 세워진 연유가 설명되어 있었다.
고조는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만휘, 만철, 만정이라 했다. 장자 만휘가 아들 없이 일찍 죽자 만철은 외아들 중직을 형에게 양자 보내고 자기는 동생 만정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다. 육사의 여섯 형제들은 콩 하나도 여섯 조각으로 나누어 먹었고, 성장해서도 내 것 네 것이 없이 지냈으며, 의복도 맞으면 서로 바꾸어 입고 나가 남들이 여유가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육우당비’는 이런 연유로 세워졌다.
지금 이 글을 보면, 이 집 후손들은 아마 육사의 애국보다 집안의 우애전통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형제우애’를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운 예는 보기 어렵다. 이곳 말고 다른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르겠다. 육사집안의 이런 우애는 원대처사의 유훈 때문인지도 모른다. 원대가 후손들에게 남긴 유훈 한 가지는 “형제간에 혹 언짢은 일이 있더라도 참고 또 참아라”였다. ‘행략行略’에 보이는 기록이다. 원대의 이런 유훈은 퇴계의 유훈을 이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퇴계언행록》에 이런 구절이 보인다. “형제간에 잘못이 있으면 서로 말해 주어야하지 않습니까?” 하고 어느 제자가 물으니, 퇴계 답변이 이렇다.
우선 나의 성의를 다하여 상대방을 감동하도록 한 다음에라야 비로소 서로간의 의리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성의 없이 대뜸 나무란다면 서로 사이가 벌어지지 않은 경우가 드물 것이다. 그래서 말하기를 ‘형제간에는 항상 기쁘고 즐거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했는데 진실로 이 때문이다.
問兄弟有過則 可相言之否 曰但當致吾誠意 使之感悟然後 始得無害於義 若誠意不孚而 徒以言語正責之則 不至於相疎者幾希矣 故曰兄弟怡怡 良以此也
‘우애’는 어렵다. 형제는 선의의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우애가 하나의 덕목으로 존재함은 우애가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 어려움을 퇴계는 ‘대뜸 나무라기만 하기 때문’이라 진단했다. ‘성의를 다한 감동’을 전제했다. 성의 없고 감동 없는 충고는 상처만 준다는 논리이다. 우리는 뜻밖에 가족들 사이의 상처로 가슴 아파한다. 까닭 없이, 이유 없이, 대책 없이 상처를 많이 준다. 상처 받음에는 예민하고 상처 줌에는 관대하다. 상처 줌을 ‘사랑’이라 여기기까지 한다. 이것이 가족상처의 주범이다.
나도 전에 퇴계의 이 글을 보고 느낀 바 있어 불현듯 수첩에 메모하고 이를 실천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심은 그 순간 뿐, ‘감동하도록’ 한 경우는 그 후 한 번도 없었다. 언제 퇴계처럼 감동을 주는 우애를 나눌 수 있을는지. 나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건지.
이런 생각은 잠시 뿐, 나그네의 관심은 다시 온통 육사로 쏠린다. 나는 육사가 어떻게 일제에 저항했고, 어떻게 북경감옥에서 순국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지조를 지켰다’는 것은 믿고 있고, 그것만으로도 이런 생각이 든다. 윤동주, 한용운, 이육사가 있어 만 명의 문인 지식인의 변절을 ‘변절’이라고 할 수 있다고. <사슴>을 쓴 노천명이 정신대에 끌려간 여자들을 찬양한 <남방의 처녀야>를 바로 볼 수 있다고.
그런데 이 글을 쓰는 도중 임청각의 후손이며 친구인 이재업이 뜻밖에 육사 이야기를 했다. 임청각은 상해임시정부국무령을 역임한 석주 이상룡의 생가다. 내용은 “육사가 몸이 아파 임청각에 상당 기간 머물러 있었는데, 그 무렵 나운규가 와서 영어를 가르쳤고, 얼마 뒤 하회마을로 가서 다시 영어를 가르쳤으며, 그것을 증명하는 사진이 최근까지 있었다”는 것이다. 진술이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라 생각하여 그 사진에 대해 묻자, 그도 지금 그것의 행방을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 문헌을 찾아보니 임청각과 관련한 육사 자료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기념사업회에 문의해 봐도 금시초문이라 한다. 안동대 김희곤 교수의 역작 《육사평전》을 보니 단 한 줄의 인척 관련 내용만 언급되어 있는데, 그것도 허은 여사가 석주의 며느리라고 잘못 소개되어 있었다. 그래서 족보를 살펴보니 육사와 허은 여사가 인척 관계인 것은 사실이며, 독립운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 관계를 대략 도표화 해보면,
1. 李龜雲(문과, 참판)-程淳(생원, 현감)-彙明-晩器-中杰-觀鎬-源永(애족장)
晩實-中聖-寧鎬(애족장)
晩晋-中立-奎鎬(처사, 문집)
晩由(문과, 대사간)
彙鈺-晩儉-中洙(처사, 문집)
彙斌-晩徽-中稙-家鎬-源祿(애국장, 육사陸史)
彙면-晩鉉(문과, 교리)
*李晩由의 딸-李相龍의 며느리
*李家鎬의 처-許蘅의 딸
2. 李承穆-相龍(독립장)- 濬衡(애국장)-炳華(독립장)
相東(애족장)- 衡國(애족장)
運衡(애족장)
鳳羲(독립장)- 光民(독립장)
光國(항일옥거)
*李濬衡의 妻-육사 재종조모, 李晩由의 딸
*李炳華의 妻-육사의 외사촌, 許蘅의 손녀 許銀
3. 許운-祚- 薰(애국장)
(애국장)
蔿 (대한민국장)
禧- 蘅- 발- 銀(1907-)
佶(1876-1942)
珪 (독립운동)
* 許銀- 李相龍의 손부, 육사의 외사촌
* 許佶- 李家鎬의 처, 육사의 어머니
* 許珪- 육사의 외삼촌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줌
*許佶의 ‘佶’은 많은 책에 ‘吉’로 많이 표시했는데, 여기서는 허은 여사의 회고록에 따른다.
상해임시정부국무령을 역임한 이상룡(石州 李相龍)의 손부 허은 여사는 의병장 허위의 종형인 허형의 손녀로 육사의 외사촌이다. 임청각은 육사의 외사촌 집이고, 육사의 집은 허은 여사에게 고모의 집이다. 한편 허은 여사의 시어머니는 이만유의 따님으로 이분은 육사의 재종고모가 된다. 이를 보건대 육사가 임청각에 머물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더구나 이 증언이 허은 여사에게서 나왔으니 의심할 수 없다.
친정 허씨 집안은 말할 것도 없고, 시댁 역시 시조부, 시아버지, 남편이 모두 독립운동을 했으니 허은 여사의 일생 또한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이런 집안에 인척이자 저항 시인인 육사가 찾아와 머물렀다는 사실은 전연 이상할 것이 없다. 찾아오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일이다.
육사 집안 또한 예사롭지 않다. 육사의 6대 조부 이귀운은 동생 이귀성과 더불어 외모와 인품과 학문이 빼어나 임금의 총애도 받았다. 임금은 이귀성에게 “서경에 ‘경운경성慶雲慶星’이라는 말이 있으니 너의 이름을 바꾸라” 했다. 이에 귀주龜疇를 귀성龜星으로 개명했다. 원촌파의 대부분이 이들 형제의 후손으로 원촌역사를 주도해왔다. 육사의 치열한 저항 정신에 이런 가계의 자부심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얼마 전 허은 여사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正宇社, 1995)를 청년유도회 이형수 회장에게서 얻어 보게 되었다. 육사 관련 부분도 있어 더욱 기쁘게 있었다. 전에 《백범일기》를 읽고 큰 감동을 받은 바 있었는데, 이 책은 《백범일기》보다 더 진한 여운을 주었다. 그것은 《남부군》이라는 책 한 권으로 한국 근대사를 알게 된 경험과 비슷했다. 육사와 관련된 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해방 이듬해 10월에 원일, 원조, 원창이 삼형제가 돗질에 들렸다. 묘사 지내려 안동 오는 길에 외사촌누나인 나를 보러 왔던 것이다.
“우리는 국수 좋아하는데 국수 좀 해주시려는가?” 그들 중 누가 그랬다.
“국수를 좋아하면 더 좋지. 반찬을 따로 안 해도 되고.”
밀가루를 반죽해서 손으로 썰어 얼른 칼국수를 해 주었다. 한 그릇씩 먹고 더 먹는 걸 보고 어찌나 흐뭇했는지 모른다. 집 앞에 있는 정자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더니 개울물 소리가 좋다고 찬사가 대단했다.
“원일아 너 거기서 시 하나 지어라” 했더니, 그렇잖아도 쓰려던 중이라 했다.
나운규의 안동 출현과 영어 교육, 육사와의 관련은 정말 흥미로운 일이지만 현재로서는 추적할 단서가 없다. 그런데 얼마 전 육사기념사업회의 이진구 선생이 나운규가 전진환 씨 등과 안동에 와서 교육을 했다는 서이환 씨 아버지의 메모가 있었는데, 지금 그 자료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실낱 같은 증언이지만 후일 육사 연구에 조금이나마 자료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되어 적어 둔다.
육사는 존경 받아 마땅하다. 그렇지만 하계, 원촌의 정서가 그런 토양을 재공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독립유공자로 표창 받은 분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가까운 집안 어른들의 언동 편린을 보면 육사의 인생 행로는 이미 예고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령 이만현이 경술년 국치 이후 비분강개하여 화병으로 세상을 하직했다는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당대의 학자 이중수 같은 분의 유사遺事를 보면, “4천 년 예의의 나라가 어찌 이런 수치와 욕됨을 당하게 되었는가. 선비 된 자 죽을 곳도 없고 살아도 죽은 거와 같으니 내 장차 어디로 돌아갈까” 하며 날마다 ‘체읍황황涕泣徨徨했다’고 한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내 이제 조국에 뼈를 묻게 되니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 한다.
이규호의 《우송문고》를 보면 육사의 조부 중직, 동생 원조, 외삼촌 허규 등에 보낸 여러의 글이 있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주고받은 편지도 실려 있어 흥미롭다. 전에 홍명희에게 보낸 편지를 풀이하여 ‘《사랑방안동》’의 권세홍 편집위원장에게 넘겨준 바 있다. 이분들은 독립운동가 이원영, 이영호와 더불어 육사에게는 모두 8촌 이내다. 8촌까지가 ‘한 가족’으로 이른바 ‘집안堂內’이다. 집안 어른들의 이런 모습을 보며 성장한 문인 육사에게 색다른 인생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이런 진술이 육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자료가 되고, 그 진위가 확연하게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원촌 대감과 안동 간고등어
육사 생가 터 옆에는 목재 고택, 사은 구장, 원대 종택, 칠곡댁 등의 당호를 가진 고택이 이어져 있다. 입향조 원대처사와 발신한 후손들의 집이다. 세월의 무게 때문인지 무너져 내리고 있다. 벌써 문화재로 지정하고 보수를 해야 할 집들이나 그게 그렇게 안 되는 모양이다. 집터를 수자원공사가 소유하고 있는 것도 한 원인이라 한다. 댐 건설 당시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둔 집들인데 나라에서도 무너질 때까지 방치해 버릴 모양이다. 안동이 아닌 다른 지역에 있었다면 그 흔한 성역화라도 할 집들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들 집에서 몇 발자국 옮기니 스레이트를 덮은 초라한 집이 있다. 집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누가 알랴, 이것이 유명한 원촌 대감의 집이었음을! 대감은 육사가 태어나기 전 원촌의 이름을 널리 알린 분이다.
원촌 대감이란 형조판서를 지낸 이효순李孝淳(1789~1878)을 가리킨다. ‘판서’는 ‘대감大監’이고, ‘참판’은 ‘영감令監’이다. 정2품, 종2품의 차이지만 호칭, 대우가 엄청나게 다르다. 지금 장, 차관 차이가 그러한지 모르겠다. 당하관은 ‘나리’이다. 당상관, 당하관은 정3품의 상위품계인 통정대부, 하위품계인 통훈대부에서 갈려진다. ‘당상’, ‘당하’의 글자 뜻처럼, 임금의 국정 마루로 오르고 못 오르고의 차이와 같다.
‘대감’이 뭐 그리 대수랴만 당시 사정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조선 후기 영남 남인 중에서 대감이 된 사람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다. 원촌 대감을 비롯하여 하회의 류상조柳相祚(병조판서), 의성의 이희발李羲發(형조판서), 성주의 이원조李源祚(공조판서), 상주의 유후조柳厚祚(공조판서, 좌의정) 뿐이다. 노론들의 배려였고,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실세인 이조판서는 아예 없다. 대감은 남인이 쉬이 올라갈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대감댁은 가난의 애달픈 역사로 더욱 유명하다. 대감이 급제하기 전, 과거 시험을 위해 시집간 누이에게 여비를 빌리려고 갔다. 누이는 엄청난 굴욕을 감수하고 시어머니에게 돈을 좀 빌려 달라고 했다. “동생이 급제해서 고을을 살게 되면 갚겠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밭 골을 빌려 줄까 논 골을 빌려 줄까” 했다. 거절과 핀잔의 답변이었다. 이런 수모를 넘어서 동생은 과거에 합격했고, 드디어 영해부사가 되어 고기를 소달구지로 싣고 왔다. 고기를 본 시어머니가 탐을 내자 누이는 “이건 논 골 몫이고요 이건 밭 골 몫입니다”라고 하여 지난날의 야속함을 풍자하여 되갚았다고 한다.
가난은 대감댁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원촌 전체가 그러했다. 아니 도산의 마을들이 모두 그러했다. 가난은 인물을 낳았다. 가난은 생존을 위협했고 그 대안은 공부였다. 안동의 놀라운 공부 열풍은 이러한 환경 조건도 그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나는 그 가난을 ‘아주 적절한 가난’으로 본다.
지금 뜨고 있는 안동 간고등어는 실은 그런 가난을 표상하는 것이었다. 간고등어 정도밖에는 먹을 수 없는 가난, 간고등어 정도는 먹을 수 있는 여유가 곧 안동이다. 제삿날이 다가오면 어른들은 “고등어 마리는 놓고 지내야지” 했다. 그런 그 고등어가 지금은 유명한 안동 간고등어가 되었다.
그럼에도 대감집의 가난은 변하지 않았다. 대감이 돌아가시어 기일이 다가왔지만 제상에 올릴 음식이 없었다. 아들은 하는 수 없어 사돈댁으로 하인을 보냈으나 하인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를 보자 아들은 비관하여 강으로 가서 자결했다.
이 이야기는 전에 고로들에게 들은 것인데, 얼마 전 원촌에 살고 계시는 대감의 후손 한 분을 예방했더니 그 분 말씀이 “붉은 바위에 가서 몸을 던졌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대감의 손자 이만인은 많은 제자를 둔 당대의 학자로 대감댁의 영광을 이어 갔다.
대감이 죽으면 신도비를 세울 수 있다. 모두 세웠다. 그러나 원촌 대감의 무덤에는 아직까지 신도비가 없다. 근년에 유허비를 겨우 세웠다. 집 뒤 길가에 있는 비석에 올라가 보니 “세상 사람들이 ‘원촌 대감’이라 일컬었다”라는 뜻의 한문 구절-‘世稱遠村大監’-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유허비를 보고 천천히 강으로 내려갔다. 상수원 집수장 시설 옆으로 나오니 바로 강변이다. 육사가 “마음이 허전하면 저절로 찾아갔고” “흘러 흘러서 그 물소리를 따라 어디론가 가고 싶다고” 한 그 강가에 오니 ‘붉은 바위’는 진흙 속에 몸의 대부분을 묻고 있다. 조금 위로 올라가니 강기슭에 ‘범 바위’가 보인다. 전에 바위들 사이에는 공룡 발자국이 있었다. 범 바위의 범 발자국도 공룡 발자국일지 모른다고 친구는 말했다. 사람들은 아득한 시절부터 그 크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그렇지만 지금 그 흔적은 단천으로 가는 길이 확장될 때 묻혀 버렸다.
육사가 “낙동강이 무슨 죄이랴”라고도 했고 “차마 이곳은 범하지 못하였으리라”했지만 그 소망은 무너졌다. 몇 해 전 태풍 ‘매미’는 그나마 남아 있는 농토와 농작물을 그야말로 쓸어 버렸다. 문명은 수마와 같은 것인가! 과거를 묻어서 자잘한 편린으로 흩어지게 하고 추억은 한갓 부질없는 기억으로만 존재하게 한다. 아아! 한숨이 나오는 강변에 서서 산천을 둘러보니 어느덧 강 건너 마을이 눈앞에 성큼 다가온다.
『오가세록吾家世錄』
집안이나 가문의 역사를 정리하여 책을 만들기도 한다. 문중차원에서 간행하는 경우도 있고, 개인차원에서 펴낸 것도 있다. 그런 책은 ‘세적世跡’ ‘세고世稿’, ‘세헌世獻’, ‘가승家乘’ 등의 제목으로 출판된다. 안동지방에 매우 흔하다. 거의 집집마다 내었다. 하계 ‘계남댁’도 몇 해 전 『계남연하각가승溪南煙霞閣家乘』이라는 우아하고 예쁜 책을 내었고, 내압 마을에서도 『방적세헌邦適世獻』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우리 몇 년 전 『긍구당세헌肯構堂世獻』이라는 책을 출판한 바 있다.
원촌에도 있다. 이원회李源會 어른이 1980년 출판한 『오가세록吾家世錄』이 그런 책이다. 제목처럼 ‘우리 집 세대별 기록’이다. 조상의 이력을 대대로 정리했다. 분량 차이는 있지마는 기록방식은 비슷하다. 가장家狀, 행장行狀, 유사遺事, 고유문告由文, 묘갈명墓碣銘 등의 글을 실었다. 모두 ‘한 사람의 생애’를 기록한 것이지만 용도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지어진다. 글은 퇴계의 전범典範 관계로 엄격하다. ‘퇴계의 전범’이란 절대로 과장, 미화하지 않는 사실 그대로의 인물기록을 말한다. 세대별로 서술되니 한 인물의 일대기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이런 글과 책이 간행되는 한 후손들은 저마다의 조행과 시대적 책무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나는 아직까지 안동 명문의 후손에 파렴치범이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이는 이런 가풍의 영향 때문인지 모르겠다.
『왕조실록』은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문화유산이다. 남겼기에 훌륭한 것이 아니고, 그 책으로 말미암아 문명국으로의 위상과 전통, 국왕의 책임정치와 역사의식을 갖도록 했다. 그 의의는 진정 위대하다. ‘뿌리 깊은 나무’의 비밀은 여기에 있었다. 조선이 무기력하게 일제에 의해 식민지화한 사실에 모든 것을 부정적인 우울함으로 조망하는 일은 매우 좁은 소견이다. 500년을 이어온 왕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흔하지 않으며, 그 내용 또한 매우 건강하다.
『오가세록』은 가계실록이다. 왕조실록은 그 기술이 멈추었지만 가계실록은 이어지고 있다. 이는 안동문화의 뿌리이며 힘의 원천이다. 글은 지난날의 영광을 회고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결의가 있어 더욱 그러하다. 이원회 어른 역시 가문에 대한 긍지를 후손들에 당부하고 있다. 아들들의 결의문도 있다. 이는 『계남연하각가승』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자세는 후손 모두의 바르고 정당한 삶에 대한 결의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이원회 어른 아들들의 글 일부를 소개한다.
“앞으로 우리는 이 책 속에 어린 얼과 교훈을 귀감으로 삼고, 가일층 절차탁마하여 일거수일투족에 있어서도 명실상부한 명가후예로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겠다. 그리고 언제나 화목 단란한 가정을 도모하면서 오가의 명예는 물론, 나아가 국가민족의 발전에 기여할 것을 다짐해 본다. 이것이 바로 조상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다.”
사진 : 『오가세록吾家世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