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여 2004년에 시집 『앤디 워홀의 생각』을 상재한 이규리 시인을 모시고 벚꽃 그늘에서 봄밤 시 향기에 젖어 볼까 합니다. 문학평론가 이남호 님은 시평에서 이규리에게서 시쓰기가 다리 놓기라면 타자를 향하여 자기를 열어두고 다가가는 일이면서 동시에 타자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부지런히 자신의 안과 밖으로 다리를 놓는 이규리 시인은 더 이상 은화식물도 결핍의 존재도 아닌 풍요의 존재라고 하셨습니다.
그 동안 이 시인이 목말라한 몸과 마음과 말의 사막에서 탈출하려는 지향을 시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좋은 사람과 동무하여 봄밤에 나들이하십시오.
시에 마음을 맡겨도 좋을 듯 싶습니다.
-2005년 4월 15일(금요일) 오후 7시 30분
-대구 수성구 두산오거리 수성못 동남쪽 끝 수변공원 간이무대(두산동사무소 뒤편)
-간단한 음료, 문학계간지 시하늘, 행사용 작은 시집이 무료로 제공됩니다.
-주차는 두산동사무소 마당이나 못 주변에 주차하시면 됩니다.
-(우천시)대구MBC방송국 맞은편 삼성화재빌딩 지하1층 카페 스타지오
-(우천시)날짜와 시간은 같습니다.
-(우천시)회비는 10,000원이며 , 식사, 음료, 다과 및 작은 시집이 제공됩니다.
-(우천시)주차는 3시간 무료입니다.
*이규리 시인 약력
-경북 문경 출생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2004년 시집『앤디 워홀의 생각』(2004, 세계사, 세계사 시인선 124)상재
-현재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재학 중
*시편들을 감상하십시오.(시에 따라 한 칸 들여 써야할 부분에 -로 표시한 것은 편의상 한 것이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시집 만들 때는 지울 것입니다.)
소리의 角
-이규리
점점 말이 없어지는 사람은
소리를 모으고 있는 거다
소리의 角을 뜨고 있는 거다
말 대신 침묵에 집중하는 일
그리하여 어룽어룽 고요에 닿는
길 만들어
때로 어둠을 터널처럼 통과하지만
끝내 말을 버렸으므로
차디차게 언 극점들이
소리에 닿는 것,
角이 되는 것,
사랑이여
소리의 개화인 모서리여
폐허라는 것
-이규리
허물어진 마음도 저리 아름다울 수 있다면
나도 너의 폐허가 되고 싶다
살아가면서 누구에겐가 한때
폐허였다는 것, 또는
폐허가 날 먹여 살렸다는 것,
어떤 기막힌 생이 분탕질한 폐허에 와서
한판 놀고 가는 바람처럼
내 놀이는
지나간 흔적들 빠꼼히 들여다보는
쌈박한 도취 같은 것
콜로세움은 폐허가 아니었고
상처가 아니었고
먼 훗날 아들의 아들, 손자의 손자가
할애비의 놀이터를 구경하라고
날 무딘 칼로 뚜껑을 썰어 연
단
면
도
엘리베이터 꽃
-이규리
타래난초가 층층 손톱 불 켜 들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우리 등을 밀어넣었다
올라가세요
꽃잎들 차례로 누르면 엘리베이터
단추에 불이 온다
꽃잎 하나의 욕망, 꽃잎 둘의 맹목,
꽃 핀 정거장 마다마다 끼워 넣었던
문 열고 누가 일기장을 훔쳐본다
어디쯤에서 미농지 같은 사춘기가 찢겨 나가고
몇 사람의 애인들이 가고 오지 않았다
저 먼 아래
녹슨 철문의 빗장 지를 때마다
끼익 몸을 긋던 소리
빗금으로 파인 흔적들,
빗장도 없는 엘리베이터가
실어 주는 꿈은 날렵하지만
지나치는 층 층마다 삶의 문들이
꽉 닫혀 있다
욕망의 맨 꼭대기 층, 엘리베이터가 멎고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신발 가지런히 벗어놓고
옥상 난간을 발끝으로
민다
투신,
타래난초가 찌익, 눌렸다
틈
-이규리
겨울, 아프지 말아요
뼈와 뼈 사이 현이 매어져 있어
퉁기면 어제의 내용이 튀어나와요
찬바람 속 빨랫줄과 겨울나무, 전선에서도
땅!
전자기타 소리가 나네요
욕망까지도 소리가 되는,
앙상한 몸들이 서로 닿으려
현을 만들었을까요
겨울이 차고 맑아지기 위해
수분을 반납했다면
내 자리도 그 쪽이에요
틈을 지닌 몸,
미파와 시도 사이 반음처럼
고요히 결핍에 든
겨울,
그리고 音
정전기
-이규리
-내 생각은 겨울에 뜨겁습니다. 집중 때문이지요. 열 개의 손가락에 퍼져 있는 삼천 오백 볼트의 전류를 지니고 칩거하는 날은 바람이 더욱 맵지요. 반작용을 아십니까? 들끓는 생각은 수위를 넘고 내 언어가 없는 곳에 당신이 있습니다. 말이 닿지 않는 곳, 하여 내가 검지를 펴서 당신을 지목한다면 삼천 오백 볼트의 전류가 순식간에 늑골을 관통해 한 마을을 지우겠지만 그냥, 깜짝깜짝 놀라며 나는 여기 더 살아 있을게요 당신을 탁 놓고
아직도 9시가 있다
-이규리
-밤 9시엔 내 아버지가 서 있습니다. 칼로 내리쳐도 지워지지 않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9시는 아버지의 세상이 문을 닫는 시각이지요. 책을 읽거나 밥을 먹거나 섹스를 할 대에도 나는 9시에 멈추어야 합니다. 9시는 완성되는 시각이 아니라 중단되는 시각이지요. 나는 꿈꿀 수 없습니다. 9시에서 끊어야 하니까요. 그리하여 나의 별이나 나무, 일기장이나 미술선생님도 9시에서 잘렸습니다. 내가 9시만큼 짧아진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백일홍이 배롱나무라고 가르쳐 준 사람 있어요. 그 나뭇가지에서 밤이면 대금 소리난다고 말해 준 사람 있어요......아버지의 9시가 덮어 준 이불 속에서 내가 떨군 눈물 아침이면 붓꽃이파리 위에서 글썽대고. 아버지, 은화식물은 가늘고 길게 자라지요. 내 몸이 자꾸 가늘어져요. 9시를 치워 주세요......
-아버지의 그때를 기다리다 웃자란 그리움들 뚝뚝 잘라내며 마당 가득 핀 황국 속으로 몇 대야의 가을을 좍 내다 부었습니다. 9시 밖으로 쏟아져 나가던 유령 같은 말들. 아버지의 9시는 무화과 잎보다 더 무성하고 나는 9시를 넘지 못하는 어둔 기적 소리였습니다.
희망이란 것
-이규리
부레옥잠은 팔뚝에 공기주머니 하나 차고 있다
탁한 물에서도 살 수 있는 건
공기주머니 속에 든 희망 때문이다
가볍게 떠 있던 물 속 시간들
희망이 꼭 미래를 뜻하는 건 아니지만
나도 팔뚝에 희망 하나 차고 다닌 적 있다
잊을 수 없는 일마저, 건널 수 없는 세상마저
그 속에 밀어 넣었던 적 있다
그런 희망이 텅 빈 주머니란 걸
언제라도 터뜨려 질 수 있는 눈물이란 걸
나는 몰랐을까
부레옥잠이 떠 있는 건
희망 때문이 아니다
속을 다 비워 낸 가벼움 때문이 아니다
잎잎마다 앉은 한 채씩의 승가람
그 자리는 서늘해서 누구나
바람 소릴 노래처럼 안고 가는데
옥잠이란 이름에 부레 하나 더 얹은
쓸쓸한 감투가 그의 이름이듯이
보랏빛이라는 것
-이규리
-왜 미안하다고 말했을까. 네가 맥문동과 나란하다. 달빛 아래서 맥문동을 보면 결핵 빛깔이다. 세계를 투정하고 세상을 밀어내던 내가 꽃보다 오래 산다는 건 미안하다. 맥문동은 흔들리면서 생을 완성한다. 너는 외대에 닿는 흰 바람조차 붙들고 싶었던가. 일획 단정한 잎들이 단명과 유사하다면 맥문동은 네 기침이 피우는 꽃, 비 오는 날은 더욱 자지러진다. 생이 기우뚱 풍경들을 놓칠 때 왜 보랏빛일까. 너무 큰 신발을 신고 숨차 오르던 여름 내내 돌아보면 굽이마다 맥문동 보였다. 보랏빛 네 단명 앞에 탕진하듯 내 살아 있음이 미안했던 걸까.
西向
-이규리
내 몸이 너무 가늘어 그 사람 숨겨 둘 데 없습니다
혼자 바라보는 저녁 산에 소름이 돋고
오래 바라보다 꿈쩍 않는 산 하나 옮깁니다
사람과 이별하는 일은 그렇게 자리를 바꾸는 일이지요
동서남북을 죄다 흔드는 거지요
말을 줄이는 일은 여기서 비롯됩니다
내 야윈 겨드랑이를 몇 알 열매가 붙잡고 있습니다
섬
-이규리
-날마다 누가 전화를 걸었다가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섬 하나 보인다)
-그 사이 잠깐 동안 그와 내가 공유하는 긴장 속에 꽃잎 같은 숨소리 지나갔다 (섬에 닿는다)
-상상은 재빨리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길을 내지만 말하지 못하는 저 사람 (섬에 갇힌다)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는 저 사람 (섬에서 운다)
-익명을 요구하는 사람의 슬픈 허구를 나는 안다 (섬이 된다)
-마음속에 갈 수 없는 섬 하나 만들어 놓고 발목이 시린 물결들의 수심은 진보랏빛 용담이다 (섬은 사라진다)
섭씨 41도
-이규리
-사막 온도계가 섭씨 41도를 기록했다. 막막함이 주는 유혹도 있다는 걸 노랗고 자그마한 사막양귀비가 말해 주었다. 뜨거움 속에서도 울컥 피우는 노란빛 집중, 꽃잎을 둥글게 감싸주는 믿음 근처 콘트라베이스 소리가 났다. 사막 어디쯤 깊은 곳에 덩치 큰 악기 하나 묻혀 있다가 모래와 햇빛 사이, 뜨거움과 견딤 사이 텅! 하는 울림소리가 수로 하나 만들어 주었다. 아 내 안에 고여 있는 출렁이는 물,
-사막을 걸어서 너에게로 갔다. 말이 콱 막혔던 더위, 뜨거움을 구둣발로 차내며 내가 닿으려 했던 건 나무나 샘물이 아니다. 붉게 녹아 흘러 이대로 눈멀고 귀먹고 싶은 것, 내 무덤이고 싶은 것, 사막을 황폐하다고 말한 사람을 믿지 않겠다. 사막양귀비와 콘트라베이스의 울림이 모래산을 옮겨 한마을을 만든 곳, 아픈 살점 떨어지듯 보고픔이 뚝뚝 모래알로 날리던.
사막 편지 2
-이규리
-사막은 남성성을 지녔다 잊을 만하면 돌아와 앞섶을 여는 회오리, 사막이 우는 날은 내가 한없이 유순해 진다 비로소 그를 안을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평원의 한 곳, 모래를 파고 만든 내 방에 한번 와 보시라 나는 점점 단순해지고 방안엔 명호청보다 부드런 깔개만 하나 있다 어떤 울음, 혹 콜로라도 강줄기를 따라 갔던 여행자들 중 만의 하나 다시 이곳을 들르는 사람은 보겠지 내가 사막의 페니스를 물고 기꺼이 혼절하는 것을,
-사막에서 재는 온도는 일생 중 가장 붉다 그건 울음의 온도이다
괘릉*에 마음을 걸다
-이규리
-잔디밭을 보면 눕고 싶어요. 보랏빛 꿀풀들이 소복이 모여서 베개를 만들어요. 연못을 가로 질러 왕릉을 걸어 두었던 사람들은 비 오는 밤이면 팔목이 아팠대요. 그의 와이셔츠 단추 하나를 더 풀면 이 왕릉의 풀밭은 다 내 것이에요. 잔잔한 바람결이 쓸어주는 풀들이 왕릉을 향해 발끝 힘을 풀어요. 따뜻한 잔디밭을 아세요. 들어가면 안 되는 보호팻말을 타넘고서 저 비구름 당겨 몸을 덮어요. 십이지신상은 왕릉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풀밭을 지키고 있어요. 출렁이는 초록의 관능을 누르고 있어요. 누웠던 자리에 풀들이 머리카락처럼 몇 잎 뽑혀 있어요. 습도가 높아요. 저녁부터 비가 올 거라는 예보가 있었어요.
*掛陵 : 신라 원성왕릉
半音
-이규리
-철길 따라 침목을 딛고 걸었어 경쾌한 바람이 등을 밀어 포플린 치마를 들추었을 때 갸웃 반음이 올랐던가 그 때 단조에 너무 기울어지지 말았어야 했는지 몰라 지루했던 레슨 시간을 견디게 한 건 검은 건반 때문이었고 반음을 짚을 때 웃으면 안 되는 걸 나는 알았지
-눈길에 발자국을 내며 걷다가 문득 멈춰선 곳에 반음 있었을까 내 생의 어느 곳에서 멎어버린 피아노 소리는 지층에 스며 침식되었겠지 마음의 절개지들 툭툭 끊어놓으며 돌아가지 않으리라 눈송이처럼 나뭇가지에 얹히던 반음의 무게들, 문득 이마가 시려 손을 얹는다
이규리 시인의 시를 워드로 치다 보니 까다로운 부분이 많더군요. 그 만큼 시인이 시를 쓰면서 각별한 의미를 두었다고 보아지는데, 인터넷에 옮기다 보니 잘못된 부분은 기술적인 문제를 이해하지 못해 그렇게 된 것이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낭송회 때 받을 작은 시집에는 제대로 할 것입니다.
첫댓글 " 시에 마음을 맡겨도 좋을 듯 싶습니다." 라고 하시는 글귀가 오늘따라 참 좋습니다. 그러고 싶습니다. 정다운 분들과 함께......
그래요 전향님 이규리 시인님 시 낭송회 꼭가야겠다는 마음이생기네요...
이규리 시인의 시를 워드로 치다 보니 까다로운 부분이 많더군요. 그 만큼 시인이 시를 쓰면서 각별한 의미를 두었다고 보아지는데, 인터넷에 옮기다 보니 잘못된 부분은 기술적인 문제를 이해하지 못해 그렇게 된 것이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낭송회 때 받을 작은 시집에는 제대로 할 것입니다.
시 낭송회 날이 내일로 다가왔군요. 낮 기온은 따뜻하게 느껴지는데 밤 기온은 조금 차다는 느낌을 받을지 모르니 옷을 따뜻하게 입고 오십시오. 벚꽃이 다 진 4월답지 않네요. 내일 뵈어요.
준비 하시느라 애쓰셨습니다. 내일 많은 분들과 함께 하길 바래봅니다.
시 낭송회 날 마음으로 몸으로 수고해 주신 모든 분께 고마움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