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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과는 다른 일들
은 희 경
1
그 여름 어머니는 중풍으로 3년째 자리보전을 하고 있었다. 네 번째 바뀐 간병인이 대소변을 제때 치워주지 않아 욕창*이 검해졌다. 쉬파리까지 달라붙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그녀를 인사시키는 일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를 보자마자 그녀의 눈에 맺히는 눈물을 본 순간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눈물은 물방울 다이아몬드처럼 그의 심장에 간직 되었다.
결혼 후 그녀는 형제들이 나눠 내는 어머니 약값을 부기며 불평을 터뜨리곤 했다. 이렇게 나가는 돈이 많아서 어느 세월에 짐을 사. 그녀의 눈은 파충류처럼 차가웠다. 보석 같은 눈물이 굴러 떨어졌던 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구사이 눈을 빼고 의안*을 박아 넣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스무 살 이래로 그는 한결같이 술을 많이 마셔왔다. 아직도 그는 술을 마시지 않을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취해 들어오는 날마다 그녀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대체 무슨 돈으로 이렇게 술을 먹고 다니는 거야. 그러고는 그의 주머니를 뒤졌다.
결혼 전 그가 밤늦게 전화를 걸면 그녀는 술값을 가지고 달려 나오곤 했다.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그를 달래며 속삭였다. 이제 결혼하면 언제나 함께 있을 텐데 뭐. 그때의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그가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집이 아니라 일상이라는 것을.
그가 집을 싫어할 리는 없었다. 술자리에서 그는 네 살 난 아들이 브릭을 잘 맞춘다고 자랑했다. 밤거리 노점상에서 기둥 모양의 비닐 샌드백을 사다 준 적도 있다. 그것을 보자마자 아들은 이불 속에서 뛰쳐나와 허공에 훅을 날렸다. 그녀는 짝짝 박수를 보냈다. 그 일 이후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자상한 가장이라는 사실이 깊이 각인되었다.
어느 일요일 그는 그녀와 밥상에 마주 앉았다. 그녀가 가시를 발라서 밥 위에 조기를 얹어주었다. 그녀의 굵어진 손마디로 힐끗 눈이 갔다. 밥상을 물리고 한가로이 담배를 피워 문 그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녀의 인생에 대해 잠깐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아이가 잠들기를 기다려서 그녀의 뒤로 다가가 어깨를 안았다. 그녀는 놀라는 척했다. 싫어, 이런 대낮에, 설거지도 안 끝났단 말야. 그러면서도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하지만 월요일 밤늦게 문을 따주며 그녀의 얼굴은 다시 미얄할미*의 탈바가지로 돌아갔다.
싸울 때마다 그녀는 이혼을 들먹였다. 하도 들어서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그 뜻을 실감 못 하게 된 지 오래였다. 단지 ‘나는 너를 흥분시키고 싶다’는 신호로는 유효했다. “이렇게 살 거면 이혼해!” “내 말이 그 말이야!” 하고 소리친 다음, 그들은 의견 일치를 본 사람들답지 않게 쿠션이나 재떨이 따위를 던졌다.
그는 사표 쓸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그를 지금의 광고 회사로 끌어갔던 선배가 독립하여 작은 프로덕션을 차렸다. 선배는 조직의 기압이 낮은 곳에서 마음껏 아이디어를 펼쳐보자고 권했다. 그 말을 들으니 그는 한 직장에 6년째 다녔다는 것이 성실인지 무능인지 알고 싶어졌다. 지금의 직장에 꿈도 젊음도 몽땅 착취당한 기분도 들었다. 그는 서른둘이었다.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머릿속 계산으로는 불안도 없지 않았지만 그의 가슴이 먼저 뛰노는 데야 어쩔 수 없었다.
그 가슴의 박동을 그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곗돈은 어떻게 부으라고, 하면서 징징댔다. 월급은 나온다니까, 라고 설명해도 소용없었다. 뻔하지 뭐, 선배라는 사람하고 어울려 다니면서 맨날 술이나 마셔대겠지. 그는 직업 이 카피라이터*였지만 이런 경우에는 오래된 명구(名句) 하나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게 남편을 뭘로 알고!
무협지로 사춘기를 보낸 그에게는 무협지 수준의 대범함이 있었다. 그 대범함은 대학 시절 장자*를 알게 되면서부터 허무주의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술자리에서 그는 자신을 표표히* 무림을 떠나는 고수로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즐겨 곁들이는 안주는 ‘나비의 과부’ 였다.
한 과부가 남편의 무덤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 무덤의 흙이 말라야 개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장자의 아내는 분개한다. 그러나 장자가 죽자마자 그녀는 문상 온 후왕자에게 교태를 부린다. 금방 죽은 사람의 골을 파서 눈에 얹어야 낫는다는 후왕자의 병을 고치기 위해 장자의 관까지 뜯는다.
여자란 다 잠정적 과부라구. 품속에 부채 하나씩은 갖고 있을걸. 그의 결론은 늘 그 자리의 술맛을 돋우었다.
그는 조바심 잘 내는 그녀의 성격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무리하게 계를 두 목이나 들었고 아들이 태어나기를 기다려 교육보험에 든 그녀였다. 얼마 전에는 생명보험까지 들었다는 말을 듣고 기가 막혔다. 왜 그런 데에 수입의 반 이상을 써야 하는지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지켜 앉은 앞에서 신용카드를 꺾어 던져버린 후로는 더욱더 그녀의 궁상이 지겨웠다.
한동안 그는 퇴근하자마자 선배가 얻어놓은 작은 사무실로 달려갔다. 창사 회의를 한다고 이틀 계속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 집에 들어가니 그녀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한밤중에 아파트 놀이터의 벤치에 몽유병자처럼 멍하니 앉아 있어야 했다. 한참 만에 그녀가 오더니 열쇠를 던졌다. 아이를 업고 손가방을 들고 있었다. 이젠 내가 외박할 차례야! 그는 발밑의 열쇠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대로 일어나 여관으로 갔다.
그날부터 꼭 닷새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그는 담배 세 대를 연거푸 피우고 천천히 서랍을 열었다. 그날 사표를 찢어버리고 그날로 집에 들어갔다.
며칠 안 가 후회했다. 그녀는 그를 돌아온 탕아에게 하듯 반쯤은 꾸짖으면서 반겨주었다. 그가 투항했다고도 생각했다. ˙작심삼일이라더니 그러고도 또 술이야? 받아 든 그의 윗도리를 방바닥에 팽개치는 태도가 미련스럽게도 기세등등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밀쳐버렸다. 그녀는, 그래 때려 때려, 하고 달겨들면서 당장 이혼을 하겠다고 소리쳤다. 다음 달에 입주할 새 아파트는 자기 위자료라고 악다구니를 썼다.
그는 생각했다. 자기가 사랑한 것은 결혼 전의 그녀라고. 그가 가슴에 간직 한 그녀는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시커먼 숯검댕이었다고 처녀 아닌 아줌마와 살아야 한다는 것이 모든 결혼한 남자의 비애임을 그때의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는 죽었다.
2
그녀가 병원에 도착하기 10분 전에 그는 죽었다.
멍하니 벽에 기대선 그녀에게 경찰이 다가와서 조사를 시작했다. 먼저 이름하고 주소를 물었다. 그녀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조차 귀에 들리지 않았다. 받아 적던 경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이 방학동인데 왜 그 시간에 잠실에서 사고를 당했지?
잠자리에서 불려 나온 그의 둘째형이 꽉 잠긴 목소리로 대신 대답했다. 그저께 이사를 갔어요. 걔는 술에 취해서 전에 살던 집으로 갔던 겁니다.
그 집은 비어 있었다. 전세만 줬던 집이라 고칠 데가 많다고 주인은 일주일은 수리를 하고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는 열리지 않는 옛집 문을 몇 번이고 걷어찼다. 그런 것을 알아보려고 부검까지 할 수야 없겠지만 발가락에 멍도 몇 개 들었을 것이다.
차도로 뛰어드는 그의 그림자는 취한 사람답지 않게 빨랐다고 한다. 그녀에 대한 포한*이 그를 과격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녀에게서 멀리 떠나는 것이 그녀를 가장 괴롭히는 일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떠나기에 너무 바빴던 그는 달려오는 택시를 향해 마주 달려갔다.
휘청이던 그의 몸은 중앙선 가까이에서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내려오기가 무섭게 건너편에서 달려오던 차에게 한 번 더 토스를 받았다. 부서진 그의 몸을 마지막으로 택시가 급정거를 하며 깔고 지나갔다.
그녀는 자신을 저주했다. 이사만 가지 않았어도 그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슬픔이 생기면 사람은 다 어리석어진다.
전날 이삿짐 정리를 도와주러 온 사촌 언니는 계속 혀를 찼었다. 일이 한도 끝도 없겠다. 아무리 평일에 이사 비용이 싸다고 해도 그렇지 네가 뭐 과부니? 이사를 혼자 하게? 그래, 네 남편은 가장이라고 집은 제대로 찾아왔디? 뭐? 내 집 장만하면 집에 정 붙이고 술도 덜 먹을 거라고? 아셔라. 내가 보기엔 네 남편 평생 그 버릇 못 고친다. 두고 봐라, 내 말이 맞나 안 맞나.
그녀는 사촌 언니가 정리해준 그릇장 속의 그릇을 죄다 꺼내고 다시 정리했다. 책장 배치도 다시 했다. 언니가 해주고 간 것은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걸레질까지 마친 뒤 겨우 다리를 뻗고 앉으니 자정이 넘어 있었다. 그렇게 원해왔던 내 집에 앉아 있는데도 시계 소리가 낯 설었다.
화장대 서랍 안에는 이혼 신청서가 들어 있었다. 인감*을 떼려 동사무소에 갔다가 눈에 띄어 그냥 집어 온 것이다. 오늘은 그것을 들이대며 기어코 각서라도 한 장 받아놓아야겠다는 작정이 들었다. 문득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만약 그가 정말 이혼하자고 나오면?
‘해버리지 뭐, 나도 이제 지긋지긋해.’
그 순간 전화벨이 귀청을 찢었다. 그녀는 날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놀랐다.
그녀는 스물아홉 살이고 아들 재형이는 네 살이었다. 그는 너무 일찍 죽었다. 어머니한테 한번 다녀가라고 큰형에게 전화를 받던 날 말없이 담배 연기를 뿜어대더니 어머니보다도 2년이나 일찍 죽었다. 두고 보자던 사촌 언니를 단 하루 동안 의기양양하게 해주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혹시 예상하고 각오했다면 그것은 이혼이었다. 그의 죽음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의 죽음에 철저히 대비한 사람 같았다. 그녀는 1억 원짜리 생명보험의 수혜자였다. 28평짜리 새 아파트도 그녀 혼자만의 것이 되었으며 보상금도 처음 보는 큰돈이었다. 그녀의 인생은 여러 가지로 달라질 국면에 있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새 출발이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저녁이면 여전히 복도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가 집 앞에서 멎으면 화들짝 반가운 기분이 되었다가 다시 멀어져 가면 그를 원망했다. 자기가 원망해야 할 것은 그의 늦은 귀가가 아니라 무정한 죽음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의 팔에는 촘촘하게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욕실로 들어갔다. 칫솔꽂이에는 이제 칫솔이 하나뿐이었다. 입술이 찢어져라 우악스럽게 이를 닦았다. 그녀의 빨개진 눈은 빈 칫솔꽂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고무줄로 묶었던 긴 머리도 풀어서 득득 빗었다. 그녀의 시선이 손 안에 든 브러시에 멈춰졌다. 눈빛이 멍해졌다. 그녀는 빗살 사이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어서 그 속에 잔뜩 엉켜 있는 머리카락을 파냈다. 짧은 것만 가려내더니 그것을 가운뎃손가락에 둘둘 말았다.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은 너무 가벼웠다. 먼지처럼 힘없이 욕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이제 그가 전화를 걸어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은 없었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듯이 그는 다시는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 수도 없다. 그녀의 행복과 불행은 일단 둘 다 유보된 셈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며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불행하게 했다는 기억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 그녀를 미워하며 죽어갔다. 그녀가 그를 향한 문을 닫아건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도.
어느 밤인가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는 그를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며 그녀는 울었다. 그가 다시 올라와서 벨을 눌러주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3월인데도 꽃샘바람이 차가웠다. 그녀는 그가 내의를 벗어버리고 나간 것을 알고 있었다. 베란다 문이 덜컹거릴 때마다 등이 시려왔다. 아이를 들쳐 업었다. 정말로 나갈 작정은 아니었다. 그의 손을 꼭 잡고 옆에 누워서 자고만 싶은, 깊은 밤이었다.
그를 잠시 살려내서 그 말만이라도 들려줄 수 없을까. 여보, 난 당신과 싸우기 싫었어. 그래서 더 화를 냈던 거야.
그가 죽은 다음 달부터 그녀는 직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의 회사에서는 사우*의 미망인에게 일자리를 주는 관례가 있었다. 이력서의 빈 칸을 채우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차라리 식물인간이라도 되어줬더라면…… 그렇게라도 그가 살아 있다면 보험 세일즈나 학습지 방문 교사를 해가면서라도 얼마든지 생활을 꾸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학 동창 중에 그런 친구가 있었다. 남편이 암에 걸린 뒤로 암웨이라는 회사의 외판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친구를 동정했던 자기를 비웃었다. 이제 그녀의 소원은 바로 그 친구처럼 이라도 되는 거였다. 그가 살아 있기만 하다면 어떤 처지라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없이는 세상이 다 두려웠다.
방학동에서 회사가 있는 서대문까지는 먼 거리였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탔다. 그녀는 전동차 안에서 두 번이나 외투 단추를 뜯겼던 그의 출근길을 생각했다. 그녀는 운전 학원에 등록했다. 면허를 따자마자 새 차를 샀다. 그녀는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궁상스러운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에 대한 그의 오해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감이 없고 무능하지 않았다. 자료실 일에 쉽게 적응했다. 신착 자료를 밀리는 법 없이 스크랩했고 열람이 잦은 자료는 따로 복사본을 마련해두었다. 분류를 할 때도 광고 회사의 특성에 맞는 방법을 찾아냈다. 연애 2년 결혼 생활 4년, 그녀는 언제나 캐묻기를 좋아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던 그녀의 성격은 그를 짜증나게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녀의 직장이 된 그의 직장에 대해서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그녀에 대한 오해의 절정은 그것 이었다. 그녀의 관심이 누구나를 다 짜증나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업무 처리에는 가정식 백반처럼 정감 같은 게 있었다. 가을 인사 때 그녀는 비서실로 발탁되었다. 그녀는 자기가 아직은 이십 대라는 데에 처음으로 주목했다. 컴퓨터를 배우고 향수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6년이 지나자 그녀는 승진했다.
그동안 남자와 데이트 한 번 하지 않았다. 일 이외에는 일곱 살 소년으로 자라난 재형이뿐이었다. 그녀가 매력적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점심 한 끼 같이 먹는 것이 평생 소원이라고 농담을 하는 남자가 늘 서넛은 되었다. 지금 그녀의 눈을 볼 수 있다면 그도 그녀가 의안을 해 박은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비서실 안에서도 세련된 축이었다. 속옷까지 고급 브랜드를 걸쳤다. 쇼핑에 따라갔던 사촌 언니에게 선뜻 투피스 한 벌을 사주기도 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더니 네가 웬일이냐, 하면서 언니는 벌쭉 웃었다.
회사 근처의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 일이다. 앞서 살던 사람이 가스와 전기 요금을 내지 않고 가버렸다고 사촌 언니가 흥분했다. 신경 쓰지 마, 그게 얼마나 된다고, 그녀가 말했다. 무안해진 사촌 언니는 아니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다 어떤 돈인데, 너, 남편 몸값을 그렇게 헤프게 쓰는 거 아니다, 라고 난데없이 생전의 그와 가까웠던 척 했다.
그녀의 씀씀이가 크게 헤픈 것은 아니었다. 저축을 하지 않을 뿐이었다. 보험에도 들지 않았다. 설명할 순 없지만 미래를 계획한다는 것이 어쩐지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사촌 언니에게는 아무 대꾸두 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걸레를 빨지 않아 매끄러워진 자기의 손마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녀의 손을 유심히 쳐다보는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9층에서 내렸다. 새로 이벤트 회사가 들어선 층이었다. 며칠 후에 또 남자를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다. 그녀는 묵묵히 엘리베이터의 숫자판만 보고 있었다. 남자도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만 쳐다보았다.
나중에 남자가 말했다. 손이 예뻐서 그런 줄 알았어요? 당신이 들고 있는 서류 파일에 씌어 있는 부서명을 읽으려고 그런 거죠. 어느 부서인 줄 알아야 꼬셔볼 거 아네요.
남자는 예술공연팀의 차장이었다. 그녀와 공통점이 많았다. 동갑인 서른둘에다 모짜렐리아 치즈를 넣은 스파게티를 좋아하고 직장 생활에서의 어려움은 영어를 잘 못한다는 점 등.
그리고 둘 다 일곱 살 난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처음 함께 술을 마시던 날 남자는 이혼한 얘기를 털어놓았다. 군대에 있을 때 안 여자였다. 임신을 하는 바람에 복학하자마자 식을 올렸다고 했다. 남자는 스물일곱 살에 아들 딸린 이혼남이 되었다. 이제 여자를 만나면 잘 해줄 것 같아요. 늙어서야 겨우 철이 든 홀아비처럼 말했다.
그녀도 그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비 오는 날이었다. 전철 안에서 그녀는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자리에 앉은 남자가 자꾸만 쳐다보았으므로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 바람에 우산을 두고 내렸다. 아차 하고 돌아보니 문은 거의 닫히고 있었다. 그 순간 문을 빠져나오고 있는 남자, 그녀를 계속 흘끗거리던 그였다. 손에 그녀의 우산을 들고 있었다.
그때 남편도 그랬어요. 예뻐서 쳐다본 줄 아냐고. 내 우산이 자꾸 쓰러져 자기 바지가 젖었나 봐요. 세상에는 짐작하고 다른 일들이 참 많아요.
짐작과 다른 일은 많았다. 결혼 후에도 그녀는 버스나 전동차에 우산을 두고 내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녀의 우산을 갖고 따라 내리는 남자는 더 이상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칠칠찮다고 투덜댔다.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는 분이었나 봐요. 당신이 좋아할 만한 남자군요.
그녀는 안심했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그동안 남자들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은 그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가 두려웠던 게 아닐까 하고.
모든 것이 빨리 진행됐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저녁을 같이 먹었고 주말마다 영화나 공연을 보러 갔다. 두세 시간씩 체증에 시달릴 것을 알면서도 차를 몰고 교외로 나갔다. 그 무렵 남자는 독일에 살고 있는 세계적인 한국인 작곡가에 대해 많은 얘기를 했다. 조국으로 돌아올 수 없는 노작곡가. 남자는 그 작곡가가 감방에서 썼던 오페라를 곧 한국무대에 올릴 거라고 릉분했다. 그것은 이번 시즌 남자의 회사가 기획한 가장 큰 이벤트이기도 했다. 그녀는 다음 날로 그 작곡가의 시디를 사러 갔다.
국내 레이블로는 단 한 개가 나와 있었다. 오페라 「심청」 중 두 개의 아리아. 1막 2장 중 「친절한 젊은 분에게」. 1막 5장 중 「지금 나는 떠나야 해」. 그녀는 두 제목을 붙여서 읽어보았다: 친절한 젊은 분에게 지금 나는 떠나야 해.
남자가 청혼한 날 처음으로 그들은 차 안에서 입을 맞췄다. 남자의 입술은 그의 입술보다 부드럽고 침도 더 많았다. 그의 입술에서는 언제나 고소한 담배 냄새가 났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남자에게서는 입냄새가 약간 났다. 그게 싫지는 않았다. 낯선 키스라서 몰두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남자 몰래 손등으로 침을 닦았다. 그러나 다시 남자가 키스해주기를 기다렸다.
집에 들어갈 거야? 남자가 그녀의 귓불에 대고 속삭였다. 그녀는 애매하게 웃기만 했다. 차에 시동을 걸고 나서 남자는 다시 한 번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오늘 밤 같이 있고 싶어.
결혼 전 그도 꼭 그렇게 말하곤 했다. 들어갈 거야? 같이 있고 싶어. 그때마다 그녀는 대답했다. 결혼하면 늘 같이 있을 텐데 뭐. 그때나 지금이나 그녀는 그런 실랑이가 싫지는 않았다. 조금 우쭐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가 살아 있던 시간으로, 아니 그와 결혼하기 전의 시간으로 세월이 거슬러 올라간 것 같았다. 자기의 낡은 삶이 다시 처녀성올 회복하여 복원되는 듯한 희열. 그것을 느끼는 순간 그녀의 눈빛에 처녀의 교태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남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차를 세우고도 운전대를 잡은 채 앞만 보고 있었다. 그녀는 키스를 기대했지만 그냥 내려야 했다. 그녀가 내리자마자 차가 출발했다.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그녀는 속옷이 젖어 있다는 걸 알았다.
잠든 재형이는 남편과 너무나 닮았다. 모로 누워서 한쪽 다리를 직각으로 세우고 잠들어 있다. 정수리께가 부스스 일어난 머리카락, 납작한 뒤통수며 구부정한 등. 그녀는 잠든 아들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귀에 입을 대고 가만히 불러도 보았다. 재형아, 재형아. 아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곤드레가 된 그는 그녀가 말을 붙일까 봐 들어오자마자 이불 위에 쓰러져 버리곤 했다. 꿀물을 타서 갖고 가보면 코를 골고 있었다. 그녀는 몇 번인가, 여보, 이것 좀 마시고 자, 하고 흔들었다. 발이라도 씻고 자라니까, 할 때는 목청이 좀 높아졌고, 어유 지겨워, 하면서는 그의 몸을 힘껏 밀쳤다. 그래도 꿈쩍 않던 잠이었다.
그녀는 아들의 등을 가만가만 다독여주었다. 지금쯤 남자는 집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녀의 손길은 한결 조심스러워졌다. 죽은 그의 잠을 깨울까 봐 두려워하기라도 하듯이.
다음 날 남자의 전화 목소리는 밝았다. 좋은 생각이 있어. 저녁에 나올 거지?
오페라 연습이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했다. 「나비의 꿈」이라는 그 오페라에는 장례 행렬을 따라가기만 하는 아역이 있었다. 당신 아들하고 우리 훈이를 출연시키는 거야.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잖아. 망설이는 그녀의 잔에 남자가 콸콸 시원스레 맥주를 따랐다. 유리컵 주둥이로 거품이 맹렬히 기어올랐다. 그의 입가에도 거품이 달려 있었다.
오페라 얘기를 꺼내자 재형이는 눈빛이 불안해졌다. 안 하면 안 돼? 하고 물러섰다. 낯가림이 심해서 자라면 애비처럼 술을 좋아할 저라던 사촌 언니의 말이 생각났다. 그녀는 청국장찌개 속의 두부를 집어 재형이의 숟가락 위에 놓아주었다. 남자를 만나기 시작한 후 처음으로 동화책도 읽어주었다.
훈이의 유치원으로 가는 도중 그녀는 재형이 생각에 두 번이나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유치원 교사가 훈이를 데리고 왔다. 그녀가 어색하게 인사를 하는 동안 훈이는 차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훈이는 안전벨트 고리를 소리 나게 채웠다. 아줌마, 이 차에 우리 아빠도 탔었죠? 당황하는 그녀에게 훈이가 명랑하게 말했다. 아줌마 차가 아빠 차보다 더 좋아요. 그러고는 유치원에서 병원놀이 한 이야기를 조잘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옆눈으로 계속 훈이를 힐끔거렸다. 훈이의 손은 남자의 손과 똑같았다. 쌍꺼풀진 눈매며 내민 뒤통수, 벌리고 앉은 허벅지 사이의 각도도 비슷했다.
훈이가 손등을 불쑥 그녀의 눈앞에 가져왔다. 아줌마, 이거 볼래요? 이 흉터 말예요. 놀이터에서 병 조각 갖고 놀다 다친 거예요. 할머니가 물어봤을 때는 끝까지 말 안 했어요.
재형이는 아파트 1층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옆자리에 앉은 훈이를 보고 눈을 두어 번 끔뻑거렸다. 훈이가 얼른 안전벨트를 풀더니 뒷자리로 옮겨 탔다. 그녀는 조수석에 앉으려는 재형 이를 훈이 옆자리에 앉혔다.
뒷자리에서 얼마 안 가 얘깃소리가 들려왔다. 훈이의 쾌활한 목소리가 날 때마다 그녀는 안심하는 표정이 되었다. 재형이가 어리무던하게* 몇 마디 대꾸할 때는 얼굴을 찌푸렸다.
차가 유난히 막혔다. 점심 먹을 틈도 없이 예술의 전당으로 가야 했다.
재형이와 훈이의 연습은 간단했다. 무대 한쪽에서 걸어 나와 반대쪽 끝까지 지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한 시간을 넘게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렸으므로 꽤 지쳤다. 예술의 전당을 나오며 그녀는 점심부터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훈이는 남자와 식성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스파게티를 먹겠다고 했다. 훈이의 말에 갑자기 그녀도 허기가 느껴졌다. 집 앞에 재형이를 내려놓자마자 차를 출발시키려고 기어를 변속했다. 재형이는 가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창문을 내리자 우물우물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엄마, 나도 스파게티 먹을래. 뭐? 나도 밥 압 먹었다구. 자, 아줌마한테 시켜달라고 해. 그녀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주었다. 재형이를 데리고 함께 식당에 간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입력된 동반자는 훈이였다.
저녁은 남자와 함께 먹었다. 늦은 점심이 꺼지지 않았다고 하는데도 남자는 계속 그녀의 접시에 새우튀김을 옮겨 놓았다. 혼자 와인을 두 병이나 비운 남자는 화장실에도 세 번이나 들락거렸다. 그때마다 그녀의 어깨를 한 번씩 감싸 쥐었다. 그녀도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던 일을 재잘거렸다. 어쩐지 떳떳하고 모든 게 제대로 갖춰진 기분이었다.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상쾌했다. 9월 밤 숲에서 신선한 냄새가 났다. 길 옆에 차를 세워놓고 그들은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그날 남자의 입술에서는 향긋한 술 냄새가 났다. 뺨을 비빌 때 끈끈하게 닿는 살의 감촉도 좋았다. 남자의 겨드랑이에 머리를 기대고 그녀는 달을 보았다.
제주도에서 호텔 창으로 저런 보름달을 본 적이 있었다. 그녀의 잠옷 단추를 벗기는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신혼여행 첫 밤까지 2년을 기다렸다는 것이 스스로를 감동시킨 듯했다. 그가 감동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만족했다. 재형 이는 허니문 베이비였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자기 생애에 한 사람 이상의 남자와 같이 자게되리라는 것은 짐작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깃들이기 위해 다가왔던 두 개의 달이 닫힌 눈꺼풀 앞에서 망설이다가 마침내는 눈꺼풀 속으로 스며들었다.
호델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중앙등부터 껐다. 한사코 시트 끝을 끌어당겨 가슴께로 가져갔다. 그러나 남자의 뜨거운 입술이 젖가슴에 닿자 그녀의 몸은 온순하게 젖어들었다. 입술에서 따뜻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달빛이 들어와 그녀의 벗은 몸을 하얗게 비췄다. 시간이 옷자락을 끌며 느리게 밤길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시간은 창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그러고는 발꿈치를 들고 그 방의 정적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정적을 깬 것은 옆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으응, 소리는 불현듯 짧게 시작되었다. 못갖춘마디 형식이었다. 그다음은 바로 쉼표였다. 방 안이 잠잠해졌다. 난데없는 여자의 앓는 소리에 눈을 반짝 떴던 그녀는 도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쉼표가 끝나자 연주는 고음부에서 시작하게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아악, 하고 소리가 올라가는가 싶더니 도돌이표가 있었던지 아악, 아악, 아악, 세 번을 반복했다. 그러고는 일정한 소절의 반복이 계속 이어졌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것이 특히 기교적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남자 쪽은 조용했다. 틀림없이 소리를 듣고 있는 듯했다. 소리는 허억허억 비탈을 오르고 있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텔레비전이라도 켜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손가락이 전원 버튼에 닿기 직전에 남자가 말했다. 켜지 마. 의아하게 돌아보는 여자에게 남자가 다시 말했다. 듣기 좋은데 뭘.
혼자서라면 그녀도 아무렇지 않게 그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다. 그런 소리는 동참하고 있는 상대에게만 자연스러운 소리이다. 익명의 누군가가 되어서 혼자 엿들을 수는 있다. 그러나 둘 이상이 함께 듣는다면 그 소리는 사적인 자연스러움을 잃게 된다. 구경 거리로 공개된 섹스나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자기가 무대에서 발가벗고 정사를 벌이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다시 텔레비전으로 팔을 뻗었다.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놔두라니까. 손을 뿌리치려는 그녀를 남자는 갑자기 침대에 쓰러뜨렸다. 거칠게 입술을 더듬는 것이 꽤 흥분해 있었다. 그녀는 남자를 힘꼇 밀쳐냈다. 내 생각은 조금도 안 해주는 거예요? 조금 전 옆방에서 낯선 남자가 내가 내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는 생각은 안 해요? 남자는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왜 신경을 써. 다들 자기 볼일 보러 온 건데. 볼일이라고요? 그녀는 발끈했다.
옆방의 신음은 론도* 형식으로 세 번째 주제부를 연주하고 있었다. 유장하다 못해 거의 비통한 연주였다. 그녀는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대체 왜 그래? 남자의 목소리는 불만스러웠다. 미안해요. 당신이 결혼 전에 함부로 여자를 품에 안는 남자라는 걸 깜빡 잊고 있고 있었어요. 뭐라구? 이번에는 남자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난 실수를 책임지라는 식으로 내 인생을 떠맡기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비난하는 건 아녜요. 어쨌든 만만하게 보인 것은 내 잘못이니까.
그녀가 방문을 닫고 나갔다. 그때까지도 남자의 앞부분은 불룩 솟아 있었다. 눈치 없는 부교감신경이라니.
남산의 고갯길을 내려가며 그녀는 자주 브레이크를 밟았다. 상쾌하던 밤 숲이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기분 나쁜 달빛이었다. 남자들은 누구나 좋아하는 여자를 안고 싶어 한다. 그런 한편 자기에게 안겨오는 여자의 정숙을 의심한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넘쳐났다. 남자가 그녀를 그녀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여자로 안았을 뿐이라는 것은 생각 할수록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한 사람의 여자일 뿐이라면……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면 남자에게 그녀는 바람난 과부였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남자 때문에 울었다. 눈물이란 철저히 이기적인 현상이며, 불편한 죄의식을 떼버리기 위해서 스스로가 택한 통과의례의 한 방식이란 것을 그때의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울 때 대부분 자기가 왜 우는지 진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다음 날 그녀는 오페라 연습에 재형 이를 데려가지 않았다. 그러는 한편 남자가 먼저 전화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이틀이 지나자 남자 없는 삶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다시 퇴근길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자기 집의 불빛을 쓸쓸하게 올려다봐야 한다. 전화벨이 울릴 때 기대 없이 송화기를 들어야 하고, 신문 레저란의 「맛있는 집, 멋있는 집」을 읽지 않고 넘겨야 한다. 주말 델레비전에서 ‘오늘도 고속도로는…….’으로 시작되는 가족 행락 인파의 화면을 해외토픽처럼 뉴스거리로만 쳐다봐야 한다. 누군가의 마음에 맞춰 옷 색깔을 고르는 기쁨, 그 선택이 그의 마음에 들었을 때의 정답을 맞힌 기쁨도 없다.
옷 색깔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뭐든지 남자가 원하는 대로 맞출 수 있었다. 그날 밤 당장 호텔에 가서 숨을 죽이며 옆방의 소리를 함께 기다려줄 수도 있었다.
남자에게서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나흘이 지나자 그녀는 남자를 기다리는 대신 경멸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점심 한 끼 같이 먹기가 평생 소원이라고 농담을 하는 남자 중 하나인 영업부의 신 차장과 함께 오페라의 마지막 공연을 보러 갔다.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실망을 참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오페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줄거리조차 알지 못했다. 신 차장이 건네주는 펨플릿에서 ‘나비의 과부’라는 글씨를 읽는데 불이 꺼졌다. 막이 올랐다.
어둠 속에서 합창 소리가 들려왔다.
―백 년의 빛과 어둠은 한갓 나비의 꿈일 뿐, 돌아다보면 지나간 세월은 허무일 뿐, 오늘은 봄날, 그러나 내일은 시든 나뭇잎이 구른다. 마시자, 밤의 등불이 꺼지기 전에.
불이 켜지자 오두막집 앞에 앉아 있는 장자와 노자의 모습이 보인다.
―안과 밖은 하나. 빛과 어둠도 하나.
―그렇소.
―나비와 사람도 하나!
―과연!
―궁궐 중의 어떤 방은 바늘에 꿴 나비로 가득 차 있지.
다음 장면에서는 소복의 과부가 흰 부채를 새 무덤에 부치고 있다.
―부채는 슬픔의 물건! 이젠 내게 기쁨의 꽃을.
과부는 무덤에 장식된 꽃 중에서 한 송이를 집어 머리에 꽂는다.
―저럴 수가, 벌써 새서방을! 더러워.
흥분하는 아내 앞에 부채를 던진 뒤 장자가 쓰러진다.
―당신도…… 부채로…… 내 무덤에…… 곧…… 그녀는 그 장면에서부터 울기 시작했다. 신 차장이 옆눈으로 쳐다보았다.
장자의 아내가 후왕자에게 술상을 내온다. 소복 위에 울긋불긋한 천을 걸치고 화려한 화장을 한 모습이다. 장자의 관 앞에 장식된 꽃 중에서 한 송이를 골라 머리에 꽂는다. 갑자기 왕자가 쓰러진다. 장자의 아내가 도끼를 가져와 시종에게 준다.
―젊고 잘생긴 왕자가 죽을 염려는 없지요. 이 시체는 더 이상 필요 없다오.
그녀가 너무 많이 울었으므로 신 차장이 손을 꼭 잡아주었다:
관에서 나온 장자가 흰 수의*의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천천히 춤을 춘다.
―이젠 항상 꿈속. 난, 나비 되어. 난, 큰 고운 오색나비 되어. 난, 날고 날아, 날개를 펼쳐. 낮에도 날아서 따뜻한 바람을 타고. 난 나비되어 꽃들 사이를 날아서, 자유롭게 멀리, 저 멀리……
그녀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오페라 극장을 나왔다. 예술의 전당 뜰의 외진 벤치에 앉아서 또 울었다. 신 차장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아무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 말솜씨가 없는 탓이었지만 어쨌든 매우 이해심 깊은 행동을 보인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왜 우는지 알지 못했다. 더욱이 왜 그도, 남자도 아닌 신 차장에게 안겨 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녀는 신 차장과 결혼했다.
3
남자가 출장에서 돌아온 뒤 두 달 만에 그녀는 신 차장과 결혼했다.
그것도 벌써 2년 전 일이다.
남자는 다른 날보다 일찍 출근했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들고 남자는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저녁에 약속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일에 대해 자기의 마음을 잘 알 수가 없었다. 남자는 아무도 없는 사무실로 돌아와 신문을 집어 들었다.
한 작곡가의 죽음이 실려 있었다. 그 작곡가의 오페라 공연을 기획한 적이 있는 남자는 작은 슬픔을 느꼈다. 일흔아홉 살이니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예정된 것이라도 죽음은 언제나 놀라운 소식이다.
남자는 오전 내내 기분이 우울했다.
점심으로는 스파게티를 먹었다. 모짜렐리아 치즈를 얹은 스파게티를 만들지 않는 식당이었다. 대신 치즈 가루를 듬뿍 쳐야 했다. 포크로 스파게티를 말아 올리면서 남자는 깨달았다. 자기의 우울에 작곡가의 죽음이 차지하는 부분은 오분의 일 정도밖에 되지 않음을. 오페라를 떠올린 이후 줄곧 남자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그녀였다.
이제는 그녀의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를 안았던 일이 하룻 밤 꿈인가 싶었다. 그녀를 이해할 수 없어 미칠 것 같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도 이제 제자리로 돌아간 지 오래이다. 다른 시간들과 마찬가지로 흘러가 버렸다.
두 시에 남자는 브로드웨이에서 갓 돌아온 연출가와의 약속 장소로 갔다. 연출가는 자기의 제안에 상업적 성공을 약속했다. 남자는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다음에 한 번 더 만나죠, 대충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연출가와 헤어진 뒤 카페를 두 군데 더 들렀다. 한 군데에서는 다행히 창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두 번째 간 곳에는 손님이 많아 스피커 아래에 앉아야 했다. 누구와 얘기할 일은 없으니 상관없었다. 그녀가 앉아 있곤 하던 창가 자리를 조금 쳐다보다가 카페를 나왔다.
회사로 돌아온 남자는 전화기를 끌어당겼다.
네 번째 발신음이 갈 때쯤 송화기를 든 남자의 손이 잠깐 귀에서 떨어졌다. 아마 송화기를 내려놓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 순간 거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영업붑니다. 상대가 전화를 받자 남자는 되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시험을 망친 수험생이 전화로 합격 문의를 하고 결과를 기다릴 때의 표정 같기도 했다. 불리한 소식을 굳이 확인하고자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이 곁들여져 남자의 표정은 복잡했다.
상대는 쾌활하게 말했다. 한건물에 있으면서 얼굴 보기도 힘드냐. 시간 괜찮으면 생각난 김에 지하에서 좀 볼까? 왜, 무슨 일 있어? 그런 건 아니고, 서로 바쁘니까 이렇게 통화가 됐을 때 잠깐 보자구.
대학 동창인 황 대리는 지하 다방에 먼저 와 있었다. 남자가 앉자마자 몇몇 친구들의 승진 소식을 전했다. 자기 회사 인사의 부당함에 대해서도 떠들어댔다. 남자는 황 대리가 하는 말을 몇 시간 전 연출자의 경우처럼 건성으로 들었다.
그녀가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도 그랬다. 무슨 뜻인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죠? 전화를 받는 여자는 웬일인지 남자를 미워하는 것 같았다. 결혼한다니까요. 그래서 그만뒀어요,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남자는 오해가 있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날 밤 회식 자리에서는 술을 많이 마셨다. 새벽에 목이 타서 잠을 깼다. 타는 목마름 속에서 그제서야 그녀가 떠나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와 만나지 못한 한 달이 남자에게는 말할 수 없이 바쁜 시간이었다. 행사란 항상 준비할 때보다 끝났을 때 번거로운 일이 더 많았다. 또 오페라 공연은 끝났지만 그 작곡가의 관현악과 실내악 연주는 지방공연도 있었다. 사정이 생겨서 남자는 생각지도 않게 열흘 동안이나 부산과 광주에 따라다녀야 했다. 돌아와서는 다시 그 뒷정리에 매달렸다. 그동안 몇 번인가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남자는 그 한 달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마지막 시한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아무리 강렬하다고 해도 그리움이란 얼마나 한가하고 무력한 감정인 것인지.
남자는 그녀가 떠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거기에 가장 큰 괴로움이 있었다. 여잔 다 그래. 그런 말로 일반화할 수가 없었다. 남자에게 그녀는 한 사람의 여자 이상의 존재였다.
그날 그녀가 호텔을 나간 뒤 남자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작곡가를 조국으로 부르려던 계획이 무산되려 하고 있었다. 여러 부처를 뛰어다니고 문화 인사를 찾아다니느라 남자는 녹초가 되었다. 오후 늦게 무대에서 작은 사고도 있었다. 중앙에 매달았던 장자의 관이 떨어져서서 연습하던 합창단 한 사람이 다쳤다. 몹시 피곤한 날이었다.
남자가 눈을 뜬 것은 여덟 시쯤이었다. 물을 마신 다음 곧바로 전화기로 눈이 갔지만 그녀가 출근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이었다. 택시 안에서도 몇 번이나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그럼에도 출근하자마자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일에 휩쓸려버렸다. 급류에 휩쓸려 가면서도 남자는 이따금 전화기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급류 속에는 전화기가 없다. 게다가 이 또한 당연한 일이지만 남자는 여자와 달리 한 가지 생각을 오래 하고 있질 못하는 법이다.
종업원이 와서 주스 잔을 치워 갔다. 그제야 남자는 황 대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참, 요새 신 차장네는 잘 사나? 황 대리의 말소리가 낮아졌다. 모르고 있었어? 이혼한 지 한참 됐잖아.
남자는 한 손으로 물컵을 빙글빙글 돌렸다. 황 대리의 시선이 남자가 돌리는 물컵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갔다. 신 차장이 회사 그만두고 사업한다고 할 때부터 사이가 나빠졌다나 봐. 결국 다 말아먹고 집까지 날렸잖아. 근데 이혼은 신 차장 쪽에서 하자고 했다던데.
남자는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그만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는데 황 대리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한 개비가 탈 동안은 그냥 앉아 있어야 했다. 그녀를 만났던 마지막 날이 생각났다. 그날 남자는 그녀가 완전히 제 것 같았다. 서로의 알몸이 남자의 태도를 흉허물 없이 만들었다. 남자는 방심했고 어쩌면 장난스러웠다. 남자가 담배를 피웠다면 그녀가 떠나지 않았을까. 담배 한 개비가 타는 시간 정도면 그 순간 그녀에게 함부로 굴고 싶어졌던 남자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황 대리가 길게 연기를 내뿜으며 덧붙였다. 우리 부 여직원한테 들었는데 말야. 그 여자 요즘은 암웨인가 하는 다단계 판매 있잖아. 거기서 외판을 한다고 하더라구. 사람 일이 참. 비서실 있을 때는 분위기 있고 괜찮은 여자였는데. 나도 왜, 점심 한 끼 같이 먹는 게 소원이라고 농담하고 다녔잖아. 황 대리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실패했다면 어쩐지 께름칙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더라구. 애비가 다른 아들이 둘이나 딸려서 재혼하기도 쉽지 않을걸.
아들이 둘이라고? 남자는 불현듯 뭔가에 속은 기분이 들었다. 보름달이 스며들던 그날 밤 호텔의 창문이 생각났다. 남자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러다가 깊게 두어 번 더 끄덕였다. 우리는 모두 삶에 속는다. 그러나 굳이 속지 않으려고 애쓸 이유도 없다. 유한한 앎을 가지고 무한한 삶을 어떻게 알 것인가. 알려고 하면 더욱 위태로워질 뿐이다.
자리로 돌아오자 훈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엄마 오는 날인데 잊어버린 거 아니죠? 헤어진 아내가 집에 오는 것은 오늘로 겨우 세 번째이다. 그런데도 훈이는 엄마 소리를 무척 자연스럽게 한다. 지금은 남자가 듣기에도 자연스럽다.
전화를 끊고 남자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얼마 안 있어 또 전화벨이 울렸다. 남자는 몹시 놀랐는지 몸을 흠칫 떨었다. 전화기로 뻗는 손이 긴장돼 있다. 마치 조금 전 합격 소식을 들은 수험생이 그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울리는 전화벨을 불안하게 쳐다볼 때의 표정 같았다. 여보세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저예요. 지금 왔어요. 훈이하고 나가서 저녁 먹을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일 보세요. 우리 얘기는 천천히 해요. 이번에는 저도 서두르고 싶지 않아요.
남자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일어났다.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복도에서 들어오던 후배와 부딪쳤다. 가벼운 접촉이었다. 문이 흔들리는 바람에 벽에 걸려 있던 포스터 패널*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을 뿐이었다. 후배가 그 패널을 집어 올렸다. 2년 전 기획했던 공연의 포스터였다. 무덤 두 개를 배경으로 젊은 여자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비의 꿈」 1막 3경.
남자는 포스터 속에 있는 두 개의 무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손으로는 그 포스터에서 떨어졌을 어깨 위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었다. 남자는 그 먼지를 아주 천천히 구석구석 털어냈다.
『창작과비평』 93호(1996년 가을): 『타인에게 말 걸기』 (문학동네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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