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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사랑방
 
 
 
카페 게시글
―‥‥세계엔n 스크랩 예쁜 신혼부부와 와인을 나누다
권종상 추천 0 조회 58 10.10.12 07:56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가끔씩, 제 책이 그래도 좀 팔렸나보다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지난 8월의 일입니다. 퇴근길에 팔뚝에 문신을 새긴 한 미국인을 만났습니다. 그 문신은 한글이었습니다. '제프 윌리엄 코헨'이라는 자기 이름이 궁서체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걸 보고 가만히 있을 제가 아니지요. "너, 제프냐?" 그는 저를 봤습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묻더군요.

"혹시 캐피틀 힐 지역에 대해서 책을 쓰지 않았냐?"

순간 놀랐습니다. 한국인도 아니고, 미국인이 제게 이런 질문을 던지다니. 약간 의아한 상태에서 "맞는데...?"라고 대답했더니 힘차게 악수를 청합니다. "반갑다. 내 아내가 한국인인데, 네 책을 보고 무척 좋았다고 하더라." 하, 이런 재미있는 인연이. 저는 그에게 제 명함을 건넸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제 블로그에 답글이 하나 달렸고, 그 댓글의 주인이 제게 이메일을 날려 왔습니다. 바로 제 책에 대해 물어봤던 분의 부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토요일, 그 집의 초대를 받아, 그 신혼부부의 집에서 와인 테이스팅 행사를 가졌습니다. 그래도 처음 가는 집인데 빈손으로 가긴 뭐 해서, 제가 아끼는 쿠거 크레스트의 데디케이션 2를 들고 갔습니다.

 

그날 따라 이상하게 비가 많이 내렸는데, 빗소리마저도 음악으로 들릴 정도로 즐거운 밤이었습니다. 코헨 씨는 범죄수사학을 전공했고, 아내인 은영 씨는 심리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은영씨는 지금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상담기관 중 하나인 ACRS의 카운셀러로 일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결혼했다는 이 부부의 아기자기한 작은 보금자리에 한두사람씩의 손님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기자생활에 만나뵈었던 ACRS 디렉터 님도 이 자리를 찾아 오셨고, 제가 웨스트우드를 떠날 무렵 그곳에서 수퍼바이저로 일하시던 분도 찾아왔습니다. 시애틀, 의외로 좁습니다. 하하.

 

이 부부는 얼마전에 소노마 밸리로 와인여행을 갔다 왔고, 거기서 만난 가이저 피크의 와인들을 잊지 못해 이날 집들이를 겸해 와인 테이스팅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저는 우연히 이렇게 인연이 되어 참석하게 된 것이구요. 가이저 피크, 종종 마시긴 와인이긴 했찌만, 그들의 보르도 스타일 블렌딩이 이렇게 뛰어난 것을 저는 이날 처음 알게 됐습니다.

이집엔 고양이가 두 마리 있는데, 붙임성 좋은 까만 모카와 수줍어하는 샤이니. 졸지에 '가족소개'도 받고, 함께 일하시는 즐거운 분들과 함께 한 즐거운 시간은 왜 제가 이 일을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지의 또다른 단면일지도 모릅니다.

 

처음 맛본 와인은 가이저피크의 비오니에. 원래 프랑스 원산의, 샤토 뇌프 뒤파프 등 론 스타일 와인에 많이 쓰이는 화이트 품종이지요. 캘리포니아에서도 론 스타일의 와인들만을 고집하는 이들이 있고, 이 때문에 '론 레인저 Rhone Ranger'라는 이름의 론 스타일 와인을 고집하는 이들의 단체가 있을 정도입니다. 서북미에서도 요즘 비오니에나 마르산느 같은 품종들이 많이 재배되고 있지요. 어쩌면, 미국산 론 스타일 와인은 이미 프랑스의 론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러면서도 특색있는 론 스타일의 와인들이 자리잡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비교적 가벼우면서도 색깔있는 톤이 좋습니다. 몇몇 화이트 와인들이 너무 칠링되어 이를 조금 실온에 놓기로 하고, 우리는 레드로 넘어갔습니다. 제가 가져온 데디케이션은 역시 언제나 지분냄새 폴폴 나는 명불허전. 왈라왈라의 전설적인 와이너리이기도 한 쿠거 크레스트가 제 이름값을 한껏 합니다. 약간 나이가 먹은 듯 코어와 림의 색깔 차이가 조금 나기 시작하고 카라멜, 흑설탕 등의 내음이 솔솔 흘러나오다가 장중한 부케로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나 역시 그 지분냄새는 변함이 없군요.

 

아, 진판델이 한 병 있었습니다. 거의 앤션트 바인이라 불러줄 만한 넘이었는데, 수령 50년의 나무에서 자라난 진판델로 만든 전형적인 스파이시한 캘리포니아 진판델이었습니다. 꽤 인상적인 맛. 그래도 이날의 백미는 리저브 메리티지였습니다. 전형적인 보르도 좌안 스타일의 맛을 내고 있었는데, 역시 보르도 스타일의 인상적인 면은 캘리포니아 와인에서 더 드러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습니다. 꽤 멋낸 밸런스가 기억에 오래 남게 될, 그런 와인이었지요.

독일산의 피노느와도 한병 나왔는데, 선입관과는 달리 오히려 제대로 된 피노의 인상을 꽤 남겼습니다. 독일에서 이만한 피노가 나온다는 것은 와인 세계의 빠른 세계 트렌드 흡수를 보여주는 것인지, 아니면 급작스런 기후변화의 탓인지에 대해서는 평가를 유보하고 싶습니다.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요.

 

소비뇽 블랑이 뒤늦게 열렸는데, 산도가 충분히 살아 있으면서도 약간의 스모키한 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크통 숙성을 시키되, 거의 뉴트럴라이즈 된 통에서 시킨 게지요. 이제 이런 것들이 조금씩 느껴지는 걸 보니, 저도 와인을 마신지 꽤 오래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쓴 책이 창문가에 보이도록 놓여 있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은영씨는 찾아오는 벗들에게 제가 이 책을 썼다며 광고를 널리 해 주셨는데, 참, 감사했습니다. 아, 제 책으로 인해서 이런 인연이 맺어지기도 하는 거였군요.

 

늘 그렇듯, 신선한 와인은 언제나 과일향이 앞섭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익어가는 농염함과 그 안에서 융합되는 아로마, 그것이 은은한 부케로 성장하는 마술을 보여주는 것은 시간입니다. 제프와 은영씨의 모습에서 흘러나오는 아로마가 앞으로 시간이 흐르고 융합되어 부케로서 피어나는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것 역시 제겐 캐피틀 힐에서 주어지는 또다른 즐거움이 될 듯 합니다. 참 예쁘고 귀여운 젊은 커플을 알게 되어 기뻤습니다. 언제 다시 한번 와인을 나눌 기회가 있겠지요. 이번엔 아내가 바빴지만, 앞으로 우리 부부가 함께 모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부부도 그 전의 '아로마'시절을 회상해 볼 수 있겠지요.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들이 생긴다면, 다시 한번 즐거운 와인 모임을 가지면서 우리 모두 잔잔한 부케를 내뿜고 있을 듯 합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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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10.13 03:41

    첫댓글 뻬루아노가 노벨 문학상 탄 것 보다 더 기쁜 일입니다.
    권 형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정말 좋은 일입니다.
    계속 책을 내셔서 노벨 문학상도~~~ -ㅁ-

  • 작성자 10.10.13 04:00

    하이고... 말씀이라도...

  • 10.10.15 03:47

    꾸준히 좋은 글을 쓴 대가가 이런데서 나타나는군요.
    삶의 단면들을 훌륭하게 묘사하고,
    그것을 시사하는 방법이 모두에게 잘 어필하는군요.
    그 고양이들 참 예쁩니다.

  • 작성자 10.10.15 04:03

    저도 이집 고양이들 보고 뿅~ 갔습니다. 집에서 못기르게 하는 고양이, 여기 있더군요.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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