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오리 새끼’였던 안데르센의 인생 동화
크리스마스 대표 동화 ‘성냥팔이 소녀’를 비롯해 ‘인어공주’, ‘빨간 구두’, ‘미운 오리 새끼’ 등 수많은 명작 동화를 남긴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 동화가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다고 믿었던 안데르센은 매년 크리스마스에 어린이를 위한 선물로 동화책을 한 권씩 출판했습니다. 당시 ‘안데르센 동화집’이 크리스마스 트리와 함께 가정에서 가장 기다리는 선물로 등장할 정도였죠. 하지만 정작 안데르센 본인의 실제 인생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안데르센,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안데르센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공이었고 어머니는 세탁부였으며, 집안 형편은 늘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안데르센은 결코 잘생겼다고 할 수 없는 외모 때문에 평생 짝사랑만 하다가 독신으로 살았죠. 보통의 관점에서 보면 결코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해 보이는 인생 가운데서도 안데르센은 언젠가 자신이 ‘미운 오리’가 아니라 ‘백조’가 되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이 특별하다는 생각이 확고했고, 아이들에게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죠. 안데르센은 자신의 자서전, ‘내 인생의 동화’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인생은 멋진 이야기다.
행복하고 온갖 신 나는 일로 가득하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안데르센은 연극과 문학에 대한 꿈을 꾸준히 키워갔고, 마침내 서른 살에 처음으로 동화집을 냈습니다. 안데르센이 발표하는 동화들은 꾸준히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로 큰 성공을 거둔 안데르센은 유럽 문화를 움직이는 쟁쟁한 인사들을 비롯해 왕족과 귀족들과 교제하는 명사가 되기까지 합니다.
인생은 한 편의 동화
안데르센은 힘들 때면 여행을 통해 극복해 내고 전환의 기회로 삼기도 했습니다. 삶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간 안데르센의 인생은 그가 이룩해낸 업적이기도 한 셈입니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사가 바로 작품에 대한 최고의 해석이 될 것이라는 안데르센의 말처럼, 그의 동화는 ‘미운 오리 새끼’ 같았던 그의 인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신이 쓴 한 편의 동화이다.
–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물론 안데르센의 눈에 세상이 아름다운 동화로만 비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 기쁜 일만 가득하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슬픈 일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이것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내 인생’이라는 동화를 쓰는 신은 바로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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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Hans Christian Andersen
출생 - 사망1805.04.02. ~ 1875.08.04.
11875.8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1805년 4월 2일, 덴마크 제2의 도시 오덴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두수선공이고 어머니는 세탁부였으며 집안 형편은 늘 어려웠다. 외아들 한스 크리스티안은 밖에서 뛰어놀기보다는 혼자 인형놀이를 즐기는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이었다.
그가 11세 때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자 가족의 생활고는 더욱 심해진다. 일찌감치 노래와 연기에 재능을 보인 소년 한스 크리스티안은 오덴세의 유력자 가문을 찾아 다니며 재주를 선보여 명물이 되었으며, 그렇게 모은 돈을 가지고 몇 년 뒤에는 본격적인 연기자의 길을 걷기 위해 혼자 무작정 상경한다.
2연기자의 꿈을 접고 작가로 거듭나다
1819년, 14세의 나이로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 도착한 안데르센은 여러 극단을 찾아가 입단을 요청하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는다. 연기에 재능이 있긴 하지만 아주 뛰어나지는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다행히 안데르센은 당시 정계의 실력자이며 예술 애호가인 요나스 콜린의 눈에 들게 된다.
일단 기본 학력이 있어야만 훗날 뜻을 펼치는 데에도 유리하리라는 조언과 함께, 콜린은 안데르센에게 왕실 후원금을 얻어주며 우선 수도를 떠나 중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돌아오도록 독려했다. 1822년에 안데르센은 코펜하겐에서 멀리 떨어진 슬라겔세로 갔고, 동급생들보다 대여섯 살이나 더 많은 17세의 나이로 다시 학교에 입학한다.
재학 중에 <죽어가는 아이>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해 의외로 호평을 받은 안데르센은 연기자에서 작가의 길로 선회한다. 1828년, 23세의 늦깎이 학생 안데르센은 6년간의 공부 끝에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했고, 이듬해에는 첫 저서인 <도보여행기>를 발표한다. 1833~4년에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자전적인 요소가 깃든 장편소설 <즉흥시인>을 발표해 격찬을 받는다.
그리고 1835년에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는 제목으로 첫 번째 동화집을 펴낸다. 그의 동화를 읽은 어느 지인은 “<즉흥시인>이 자네를 유명하게 만들었다면, 이 동화는 자네를 불멸의 작가로 만들 것”이라고 격찬했다.
1835년에 발표한 <공주와 완두콩>(왼쪽),1836년에 발표한 <인어공주>의 본문에 삽입된 환상적인 그림
이후 안데르센은 <엄지 공주> <꿋꿋한 양철 병정> <인어공주> <벌거벗은 임금님> <성냥팔이 소녀> <눈의 여왕> <전나무> <나이팅게일>같은 대표작을 비롯해 200여 편의 동화를 꾸준히 발표한다. 그보다 한 세대쯤 전에는 독일의 언어학자인 그림 형제가 민담을 수집, 정리해서 발표해 큰 호응을 얻은 바 있었다.
1812년에 처음 출간된 <그림 동화집>은 1857년까지 일곱 차례나 개정판이 나오면서 작품 숫자도 늘어나고 표현도 약간씩 달라졌다. 안데르센의 동화도 초기에는 그림 형제의 동화처럼 민담을 토대로 삼았지만 나중에는 순수 창작품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교훈의 전달보다는 환상적 묘사에 치중한 안데르센의 동화는 발표 당시에만 해도 종종 혹평을 받기 일쑤였다.
1843년에 나온 새로운 동화집에는 그의 최고 걸작인 <미운 오리 새끼>가 수록되어 있었고, 이 작품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안데르센의 명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해진다. 1846년에는 덴마크 국민으로선 최고의 영예인 단네브로 훈장을 받았고, 왕족과 귀족을 비롯한 상류층 인사들과 교제하는 명사가 되었다.
고국인 덴마크에서는 종종 혹평을 받아 가뜩이나 예민한 마음이 크게 상했던 안데르센이었지만, 오히려 독일이나 영국 같은 외국에서는 더 일찍부터 명성을 얻은 바 있었다. 가령 영국의 경우에만 해도,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특히 안데르센의 열성 팬이 되어서 여러 번에 걸쳐 만나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을 정도였다.
1860년대에 들어서 덴마크는 연이은 전쟁의 와중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를 독일에 빼앗기는 등 적잖은 굴욕을 겪었지만, 이미 덴마크의 최고 명사가 된 안데르센은 평온하고도 영광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1867년에는 반세기만에 고향 오덴세를 찾아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1869년에는 그의 코펜하겐 입성 반세기를 축하하는 대대적인 행사가 열렸다.
말년의 안데르센은 류머티즘에 시달리며 종종 병상에 누워 있었고, 창작은 눈에 띄게 줄었다. 1875년 8월 4일 오전 11시 5분, 안데르센은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딱히 가족이라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8월 11일에 열린 장례식에는 덴마크 국왕과 황태자를 비롯한 수백 명이 찾아왔지만, 정작 그와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첫댓글 선생님의 좋은내옹의 글과 책 소개~
늘 마음으로 잘 보고 있습니다
지난번 소개해주신
마이런 알버그의 <아버지의 손> 은 마음으로 일고 <책 읽어주는 남자>는 머리로 읽었습니다 ~~
좋은 길 안내 감사드림니다 ~~
와^^
여름에 선물 한아름 받으신 기분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