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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화가. 앙리 에밀 브누아 마티스는 1869년12월31일 밤 9시 북부 프랑스 르카토 캉브레지의 외가에서 곡물상을 하는 부친과 아마추어 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지냈다. 앙리 마르탱 고등학교 시절 그림에 소질을 보였는지는 몰라도 마티스가 미술사가 피에르 쿠르디옹에게 1941년에 토로한 바에 따르면, "그 당시에는 그림이 뭔지도 모르고"그렸다고 한다. 1887년 파리로 나가 법률을 배우고, 이듬해 법과 자격시험에 합격, 잠시 생캉탱의 법률사무실 서기로 일했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법률사무소를 잠시그만두어야 했다. 마티스는 회복기를 보앵에서 보냈다. 그는 병실을 같이 있는 옆 병상의 남자가 가끔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마침내 병상에 그림도구를 가지고 오게 되어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때부터 마티스는 어머니가 건네준 물감통을 들고 가서 물방앗간과 마을 어귀의 경치를 담은 풍경화를 그리기시작했다. 스무 살이 넘도록 자신의천부적 자질을 깨닫지 못하는 위대한 예술가들이 있다. 마티스 역시 그런 예술가 중의 한 사람이다. 유년시절과 청년기를 통해 그는 어떤 형태의 예술에도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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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이제는 앞날을 결정해야 했다. 아버지가 반대했지만, 그는 법률을 포기하고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쥘리앙에 들어갔고, 그는 푸생과 샤르댕 등의 작품을 모사하는 인습적 보수적 경향의 그림을 따라 했었고, 이듬해 에콜 데 보자르에 등록하였다. 에콜 데 보자르에서 마티스가 주물로 된 고대 조각품을 그리고 있을 때, 학생들의 작품을 검사하고 있던 귀스타브 모로의 주의를 끌게 되어 1895년부터 모로의 화실에서 작업을 하게 된다. 여기서 루오 마르케 등과 교우, 모로의 자유로운 지도 아래 색채화가로서의 천부적 재질이 차차 두각을 나타내었다. 마티스는 뛰어난 직관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본능적인 충동이나 영감의 원천을 흐려 버리지 않으면서 객관적인 사물을 구상화했다. 모로는 '너는 회화를 단순화 시킬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
그는 부단히 자기의 창작과정을 밝혀 나갔으며 자기 예술의 원천, 방법, 목적을 분명히 하기 위해 비범한 지성을 동원하였다. 마티스는 "예술가는 최선의 자아를 오직 그림 속에 쏟아 부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비극일 따름이다. 작가가 분석하고 개발한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마티스(프랑스, 1869-1954)의 말에 의하면 포비즘 운동은 어디까지나 표현수단의 순수한 것을 재발견하는 용기의 고취이며 추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티스는 표현에 있어서 화가의 주체성에 의하여 화면에 나타나는 구성을 뜻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긴밀한 질서를 지목하였다. 프랑스인들은 말한다. 물감은 보이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읽히기 위해서 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색채, 구조, 도안 따위의 특성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인들은 프랑스적 세련이라는 것에 대해 미묘한 이화감을 보이는데 , 그것은 '회화의 자율성' '대상으로부터 완전독립'이라는 19세기 후반에 파리에서 형성된 관념에 대한 이화감으로 표현할 수 있다. 1898년 만년에 이른 피사로는 여러 건물의 위층 창문을 통해 파리의 가장 찬란한 풍경을 인상주의적 화풍으로 그리고 있었으며, 아울러 필법과 감수성의 양면에서 1870년대 개척기의 인상주의 화풍으로 되돌아간 일련의 작품으로 일생을 마무리짓고 있었으며 이 작품들이 그 뒤 몇 년에 걸쳐 마티스에게 끊임없이 도전해왔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세잔느의 그림을 사들인 것은 마티스는 자기의 습작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독자적인 예술 활동을 하기 이전에 면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는 당대 화가의 작품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분명히 보여준 셈이었다. 1896년 소시에테 나시오날의 살롱에 4점을 출품,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곧 인상주의적 수법을 채용, 근대회화의 주류에 합류했고, 이어서 코르시카와 툴루즈에 반년씩 머물면서 지중해와 남프랑스의 밝은 햇빛 아래서 그림을 그렸다. 97년 소시에테 나시오날 전람회에 출품한 《독서하는 여인》을 국가가 매입하게 되자 이 전람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 후 피사로 등과 알게 되어 인상파에 접근하였고, 또 보나르나 뷔야르 등의 영향도 받았다. 《외젠느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라는 책을 읽고 시냑과 신인상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 책은 원래 그가 파리를 떠나있던 1898년에 《르뷔 블랑슈》에 연재되었다가, 이듬해 단행본으로 나온 것이었다. 바로 그 매력에 사로잡혀 있을 동안에 그가 들라크루아의 작품 <레베카의 납치>(1899년)를 펜과 잉크로 모사한 습작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마티스는 이 습작을 통해서 인물들을 이례적으로 넓고 아주 짙은 그림자로 에워쌈으로써 불쑥 솟아오른 듯한 부조감을 강조하려고 했다. 결국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야수파 회화의 흑백판이 되는 드로잉 양식으로서 그것은 마티스가 공인된 거장의 작품을 놓고 그때까지 만들어낸 습작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었다. 신인상주의의에 관한 한 그 궁극적인 결과는 마티스가 시냑을 직접 만나 볼 기회가 있었던 1904-5년에서야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모로가 죽은 후에는 아카데미 카리에르에 다니며, 드랭과 알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웠다. 한편 예술적으로는 드랭을 통하여 블라맹크를 알게 되고, 1900년 이후에는 세잔풍(風)을 도입하여 극도로 구성적인 포름과 어두운 색조로 전향하였으나, 1904년 시냐크·크로스와 함께 생트로페에 체재하게 됨으로써 신인상파 풍을 짙게 받아들였다. 이 새로운 교우관계가 이듬해에 시작된 야수파(포비슴) 운동의 강렬한 색채의 폭발로 나타나게 되었다. 드랭·블라맹크 등과 함께 시작한 이 운동은 20세기 회화의 일대 혁명이며, 원색의 대담한 병렬(竝列)을 강조하여 강렬한 개성적 표현을 기도하였다. 98∼99년에는 후기인상파에서 유래하는 한층 강렬한 색채의 실험에 착수할 준비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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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1900년 전후의 마티스의 작품은 신인상주의적인 필치와 색채의 대담한 대비 등, 일종의 야수파적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1901년 무럽에는 일단 종식되고 곧 이른바 <어두운 시절>이 시작된다. 이 시기에 그는 색채문제에서 벗어나, 잔손질이나 구성에 마음을 쓰게 된다. 마티스가 다시 색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04년의 여름을 남프랑스의 생트로페에서 P.시냐크·H.크로스 등과 함께 지낸 뒤부터였다. 이듬해인 1905년의 앵데팡당전(展) 출품작 《호사(豪奢)·정적(靜寂)·일락(逸樂)》은 모자이크모양의 선명한 색채의 단위로 구성되어 있어 전보다도 훨씬 명쾌한 신인상주의적 스타일을 나타내고 있다. 1897년까지 브르타뉴 지방을 여행하여 반 고호풍의 그림에 관심을 보였으나, 1898년 남불의 강력한 햇빛을 발견한 이후로 환한 색채가 강력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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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여름 그는 남프랑스의 콜리우르에 머물러 신인상주의의 규칙적인 점묘(點描)를 초월하여 강렬한 색채를 아울러 사용하는 야수파 스타일로 돌진한다. 그 해의 살롱 도톤은 야수파를 탄생시켰는데, 그는 이때 《열린 창문》 《모자 쓴 여인》을 출품했다. 빨강과 녹색, 오렌지와 파랑을 기축으로 한 채색법은 긴장된 화면에서 강렬한 빛을 반사하는 듯한 효과를 냈다. 1910년 뮌헨의 이슬라믹 대전시회를 보러 갔던 마티스는 그해 가을 남부 스페인의 유적을 탐사했으며, 이듬해에는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이콘화와 벽화를 공부하기도 했다. 또한 이 같은 그의 관심은 1912년부터 1913년 겨울까지 모로코 행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모로코에서 마티스는 화가로서 마치 천국을 부여받은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강렬한 태양과 원색의 꽃들, 낯선 이국의 빛깔과 문화에 마티스는 감동했다. '색체의 해방'을 슬로건으로 20세기 초에 일어난 미술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야수파. 야수파 화가들은 캔버스를 자신들의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공간으로 충분히 활용하였다. 그들은 회화의 질서를 위한 표현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주관적인 면에만 치우치는 것에 문제점을 드러냈고, 통일된 강령을 갖고 체계적으로 운동을 펼쳐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불과 2, 3년 정도의 수명만 유지했을 뿐, 그 후 야수파 화가들은 입체파 등 다른 운동에 가담하며 활동하게 된다. 야수파의 거장 마티스는 고유색을 부정하는 주관적인 색체와 거친 붓놀림 등이 작품의 큰 특징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기본적으로 사물 자체에 대한 관찰과 발견, 느낌과 경험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마티스는 예술이 단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만을 위한 예술로 나아가길 추구했다. 이를 위해 사물이 갖고 있는 고유의 색채를 부정했으며, 전통적인 방법에서 일탈한 매우 혁명적인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방법적인 측면에서의 수많은 시도 속에서 마티스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자유롭고 강렬한 색채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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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마티스의 작품에서 색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다. 마티스는 색채에 관해 “내가 녹색을 칠할 때 그것은 하늘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이다. 마티스에게 있어서 색채는 보여지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의 경험과 감정의 표현이었고, 이는 20세기 초의 미술운동인 야수파의 전형적인 특징이기도 했다. 이어 그의 색채는 더욱 강렬한 것으로 되어 1905년 살롱 데 엥데팡당전을 기화로 본의 아니게 야수파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의 작품은 가능한 한 가장 솔직한 방법으로 그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는 것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아름다운 파랑, 노랑, 빨강 등 인간 감각의 저변을 뒤흔들 수 있는" 색깔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1906년 발표한[삶의 환희]는 단순화한 형태, 대담한 색의 사용, 종교성을 배제한 신화의 원용 등의 성격으로 다시 한번 물의를 일으킨다. 당시 마티스는 프랑스 내에서는 큰 반향을 얻지 못했던 반면, 미국의 스타인, 러시아의 모로조프와 후슈킨 등 외국이 소장가들이 그를 지원하게 된다. 특히 후슈킨은 그의 아파트를 장식할 대형 장식화를 주문해, 형태를 더욱 단순화하고 단일 색채를 강조한 [춤]과 [음악]을 낳게 된다. 마티스가 지닌 색채의 자유로움은 이미 고갱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국적이고 상상의 색으로 현실적인 색채를 벗어나면서 색채의 자유로움을 제시한 고갱. 또한 내면 세계를 그리기 위해 주관적인 색채를 사용했던 화가 고흐. 이들의 영향으로 야수파는 현실이나 형태로부터 색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이처럼 비현실적이고 주관적인 색채 표현은 후에 독일의 표현주의 미술에 영향을 주며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1907년 무렵부터 질서와 균형 있는 청랑한 예술을 찾아 평탄한 장식적 스타일을 거듭 시도했다. 이렇게 하여 탄생된 《빨강의 조화(1908∼1909)》는 야수파 스타일에 최종적 작별을 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전의 성과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의 무역상 S.시추킨의 의뢰로 제작한 장식화의 기념비적인 대작 《댄스(1910)》 《음악(1910)》은 야수파의 유산인 격렬하고 풍부한 색채로 빛나고 있다. 10년대에 들어와, 기하학적 구성에 의한 추상적·구축적 경향도 나타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입체주의의 영향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한 엄한 내성적 감정의 반영이 엿보인다. 17년부터 30년 무렵까지를 보통 <니스 시절>이라 한다. 그때까지의 눌리는 듯한 답답함에서 해방된 마티스는 이 시기에 주로 남프랑스 니스에서 우미하고 관능적인 오달리스크를 비롯하여 매우 느긋한 작품을 제작했다. 화풍은 자연주의적인 것으로 되돌아가 화면도 작아졌으나 <은색의 빛>을 창출하여 그 속에서 데생과 색채를 융합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 뒤 <니스 시절>의 수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하여 빛과 공간에 의한 추상적·비물질적 감각을 추구하게 되고, 나아가서 단순화와 순수화를 추구했다. 48년에 착수하여 51년에 완성한 20세기 최고의 모뉴먼트의 하나로 평가되는 남(南)프랑스 니스의 방스성당의 건축·장식 일체를 맡아 여기에 모든 기법과 재료를 동원, 그의 예술의 집대성을 이룩하였다. 그의 작품은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회화의 위대한 지침이 되었으며 니스에서 죽었다. 야수파 동료들과는 달리 마티스는 당시에 갓 태어난 입체파 화가들의 기법에 빠져 외도를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힘찬 선의 장식적 율동을 창출하고 넓은 평면적인 색면과 명암을 강력하게 대비시키면서 인물에 살을 붙이는 모델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듯하다. 그의 목표는 입체파 화가의 목표와 비슷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 수단은 정반대였다 (그 목표는 내재적으로 모순되는 두 가지 문제를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실재와 똑같이는 아니더라도 일종의 입체 환각, 적어도 그리려는 인물의 입체감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전체 구도를 통하여 화폭의 평면성을 고스란히 보존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화면에 나타나는 모든 구성요소가 하나도 빠짐없이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져 그 조화를 이룬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그림에 있어서 나타난 모든 것은 하나도 副的 역할을 하는 것이 없다. 또 어떤 것이 主的이라고 할 수도 없다. 多樣相에서 단일화로 질서와 조화가 이루러졌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도감을 주었다. 사실 그도 "나는 균형이 잡히는 무구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사람들이 불안해 지거나 사람들을 혼란하게 하는 표현이 아니라 피곤에 담긴 사람들에게 휴식의 계기를 제공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뜻을 표명하고 있다. 콤포지션은 화가가 자기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자유로이 다루는 여러 가지 요소를 장식적으로 어레인지 하는 기술이다. 나는 자신의 감각을 제어할 줄 아는 화가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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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념을 가진 그는 선에 있어서 특유한 연구를 하였다. 종래에 있어서 선은 대상의 윤곽을 묘사하는데 쓰여졌다. 이러한 묘선은 대상에는 충실하고 정확한 선인 것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선이지, 선 그 자체를 화가 자신이 만들어낸 선은 아니다. 그러므로 선 그 자체로는 어떠한 표현도 없고 기능도 없는 죽은 선이다. 마티스의 선묘에서는 1890년대의 유겐트양식인 곡선을 特長으로 한 것과 같은 선을 구성하고 성숙시켜, 장려한 극치에 이른 것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선에는 움직임을 갖는 부드러움을 나타내 늘 유동하고 波動치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표면을 한정하는 선이며, 자기자신을 즐길 수 있는 자유의 선이다. |
그러므로 마티스의 선은 대상의 모방이 아니라 다시 말하면 대상의 선에 종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정반대로 그의 주관의 움직임의 생생한 표현력을 가진 선이다. 더욱이 그 선이 아무리 대상의 묘사에 있어서 부정확하고 간략한 선이라 하여도 그것에서는 생명의 약동을 볼 수 있다. 그는'그림은 지나쳐가는 일순간의 감각적 정치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화가는 '현실의 보다 영속적인 번역'보다는 본질적인 성격을 추구해서 '감각의 응집상태'에 도달하지 않으면 않된다고 말해다. 이렇게 하여 마티스는 기본적으로 독특한 장식체계의 확립으로 정진하였으며, 또 그는 변화, 데상, 판화, 조각과 같은 광범위한 부분의 시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많은 성과를 냈다. 따라서 그는 원시적 생명력을 불어넣는 그림을 그렸다. 이에 따라 그의 그림은 비극적이 아니고, 명랑한 그림으로 죽음도 허무도 멸망도 절망도 없는 아니 그러한 것이 스며들 틈을 주지 않는 예술이었다. 결국 포비즘의 중심적 화가인 마티스는 장식성을 강조하는 화가로 평가되었다. 마티스가 색체의 단순화를 통하여 달성한 장식성은 자칫하면 화면을 경직시켜 단순한 무늬의 작품으로 변질시킬 수 있으나 , 그는 반대로 이 단순성의 세계에 리듬을 맥동시켜 일종의 모뉴맨틀한 성격을 갖춘 생기있는 세계로 변화시킨다. <삶의 기쁨>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야수적인 정신을 요약하고 이으며 ,그 단조로운 색면, 심한굴곡을 보이는 윤곽선 , 그리고 <원시적인 형태>는 분명 고갱의 여향을 받은 것으로서 , 그주제까지 고갱의 자연인으로의 모습을 닮고이다. 1908년부터 1917년까지 스페인, 모스코바, 모로코 등지를 여행함으로써 더욱 리듬감있고 유연한 선의 형태와 더욱 강렬한 색채의 장식예술(세라믹, 성화, 옷감)을 발견해 그의 그림에 이를 도입한다. 1913년 아모리 쇼에 출품한[푸른색의 누드] (1906년작)가 큰 물의를 일으킨다. 1차대전 기간 중에는[노란색 커튼](1914~1915),[모로코 사람들](1916), [피아노 교습](1916)과 같은 걸작을 그린다. 1919부터 10년간 니스에 머물면서 오달리스크, 실내 풍경과 여인, 창문으로 본 풍경 등의 소재를 다루는 작품에 임한다. 색채의 효과, 장식 요소의 극대화,복잡한 공간 구성 연구 등이 이 시기의 작품을 특징짓는다. 끊임없이 다루는 여인의 형체도 "나는 여자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림 한 폭을 그릴 뿐이다" 라는 작가의 말처럼 다른 요소들과 어울려지는 구성을 모색하게 위한 구실을 주는 것일 뿐이다. 1933년에는 미국 메리온의 반즈 재단을 장식할 작품[춤]을 같은 제목으로 두 번에 걸쳐 제작한다. 이 작품은 에피소드적인 내용이 완전히 제거된 "일반화된"신체의 모습을 통해 볼륨이나 원근법의 표현을 배제하면서도 그림으로 칠해진 화면을 초월하는 공간을 암시함으로써 모뉴멘트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1943년부터는 과슈를 칠한 종이를 "가위로 데생을 하듯이" 잘라내어 콜라쥬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이 기법을 통해 "데생을 중시하느냐 채색을 중시하느냐 하는 영원한 대립의 문제"에 해결책을 발견한 것이었다. 노년에 접어든 마티스는 몸을 거동할 수 없게 되면서 새로운 기법으로 제작된 색종이 그림을 그리게 된다. 관절염 관절염으로 인해 손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그는 병상에 누워 종이 자르기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71세에 내장 장애로 수술을 거듭하면서 거동을 못하게 된 후 8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그의 색종이 그림은 계속되었다. 마티스의 색종이 그림은 작품 세계의 완결이라고 표현될 만큼 평면적이고 자유로운 색채가 강조되었다. 그의 종이 자르기는 마치 조각가가 직접적으로 새기는 방식과도 같았다. 그는 색채도 혼합하여 마치 가위를 연필처럼 사용해서 색종이 위에 그림을 그렸다. 그 효과는 방법의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강하고 직접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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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는 색종이 그림을 통해 간결하고 명확한, 그리고 대범한 구획 속에서 고전적이라 할 만큼의 질서감과 절도감을 보여준다. 어쩌면 선과 리듬, 색채와 공간의 자율적인 세계 속에서 마티스는 우리에게 존재의 의미를 확증시켜 주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선에 대한 마티스의 이러한 생각은 분명 고갱의 영향 속에 있었던 것이며. 고갱에서의 상징성이라기보다는 리얼리스트의 면모가 더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그는 또 '사물을 표현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그대로 그리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예술적으로 그리는 것이다. |
이집트의 조각을 보라. 그것들은 우리에게 딱딱하고 부동적으로 보이지만. 우리는 거기에서 부드러움과 생동감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갱 역시 이와 비슷한 말로 '냉정 속의 형태의 생동'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으며. 마티스는 또 다시 이를 다른 측면에서 다음 과 같이 말했다. '형태는 생물의 외견적 존재를 구성하고 그것을 항상 불명확하게 하기도 하고 변형하기도 한다. 순간과 순간 속에서도 보다 진실하고 본질적 성격을 추구하는 것은 가능하다. 예술가는 그 성격을 잡아서 현실의 연속적 해석을 부여한다.' 이는 곧 동중정(動中靜), 가변적인 것 중의 영속적인 것에 대해 말한 것이다 이 작품을 바탕으로 하여 [수영장](1952)과 같은 대형 세라믹 장식판이나 스테인드 글라스를 제작하기도 한다. 1947년부터 시작한 방스의 도미니그타 수도원의 성전장식화를 완요하는 데 4년이 소요된다. 마티스는 이 작품에 데생을 축소하면서 선 하나 하나를 중시하는 노력, 작품의 영혼성을 승화시키기 위한 빛의 효과 등 그가 탐구해온 모든 점을 집대성하였다. 1952년에는 고향인 카토와 여생을 보낸 니스의 시미에즈에 마티스 미술관이 설립되었다. |
1910-13년경 까지의 여행은 작업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생애에 독특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 결과 일련의 주요한 작품들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그가 돌아온 뒤 그때의 인상이 화실에서 다른 작품을 구상하는 영감의 구실을 했다. 이 시기에 <모로코 사람들>(1916년)을 그렸는데 이례적으로 세부분으로 나누어진 이 그림에서 화가는 1914년 시작된 입체파의 수법을 시도하고, 그 시각적 이미지에 불연속 효과를 투사한다. 그는 이 그림의 세 부분 사이에 명목상의 이음새를 잘라버리고, 각 부분을 공간적으로 불확실한 검정색 영역에 걸어놓는다. 여기서 하나의 장식면을 세 부분으로 나눈 것은 1914년에서 1917년 사이에 마티스가 때늦게 입체파의 개념에 일부나마 동화했던 사실을 나타내주는 고안이다. 이 시기에 제작된 중요한 작품의 상당수는 이러한 집착의 흔적을 거의 보이지 않지만 다른 몇몇 작품들에는 1907년을 전후한 초기 단계에서 마티스의 개인적인 기법의 유기적인 성장에 유해했던 입체파 양식을 터득하려는 직접적인 노력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런데 1914년에 이르면, 입체파의 화려한 시대는 막을 내리고, 그 양식은 평면적인 장식과 단순화 경향(후기에 와서는 '종합적 입체주의'라고 불린다)으로 흐르고 있었다. 더구나 일부 입체파 화가들은 단편화된 평면과 뒤틀린 양감의 작품들에 강력한 색채를 도입하고 있었다. 이들은 보다 단색적 경향을 띠고 있었던 초기 입체주의와는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었다. 이렇게 발전한 모든 기법들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1914년경에 후한 그리가 내놓은 그림이라 생각되며, 여기서는 생생하고 때로는 서로 충돌하는 색채가 평평하고 무늬진 화면을 형성했다. 이런 현상이 계기가 되어 마티스는 자기 고유의 화법을 버리지 않고 입체파의 고안들을 실험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기회를 잡았다. 어쨌든 1914년 직후의 주요 작품들과 아울러 수많은 이차적 작품들에는 입체주의의 성향이 배어 있으며, <강가에서 목욕하는 사람들>(1916-17)이 완성되면서 그 절정에 달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피아노 교습>(1916)은 수평, 수직과 대각선으로 이루어진 격자에 에워싸인 평면의 덩어리이고, 마티스가 입체파의 유산을 가장 일관성 있게 수용한 작품이 아닐까 한다. 아울러 이 그림은 입체파 운동에 힘입은 바 크지만, 단순히 그 기법을 불완전하게 빌어오거나 재해석한 집합체가 아니다. 얄궂게도 <파아노 교습>을 제작하고 있을 동안, 혹은 그 직후에 마티스는 그것과 짝을 이루는 <음악 수업>을 무르익고 부드러운 양식으로 그렸다. 그런데 이 작품은 분홍, 초록과 회색이라는 동일한 기본색으로 그려져 있어, 일단 입체파의 문제를 정복하고 난 뒤에는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체파는 그 뒤의 마티스 예술-후기의 자른 색종이 그림이나 대형 벽화 <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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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는 1920년대 낸 그는 하렘들과 그들을 잘 돌봐주는 수동적인 하녀들을 재현한 작품을 그리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따라서 드라크루아나 그보다 더 중요하게 연관되는 앵그르와 비교해보지 않을 수 없다. 잘 알다시피 앵그르는 입체파 세대의 화가들이 재발견하여 새로이 평가를 내린 인물이었다. 게다가 일찍이 1915년에 피카소는 위대한 프랑스 신고전주의자 앵그르의 양식과 기법을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듯한 소묘를 제작하고 있었다. 마티스가 <삶의 기쁨>을 그리고 있을 당시 또는 그 직후에 앵그르의 <황금 시대>를 알고 있었는지 증명할 길이 없다. 하지만 1920년대말 이후로 마티스가 앵그르에게 보다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음직한 조짐으로 볼 만한 유사성이 그의 작품에 뚜렷이 드러난다. 마티스 예술의 신고전적 요소는 대체로 깊숙이 숨겨져 있고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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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의 색채에 대한 그의 관심은 화면에 깊이와 부조적 특성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과 언제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말을 바꾸면 공간적인 입체 환각과 인체의 모델링이라는 문제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 하나의 공식으로 이러한 필요와 욕구를 모두 결합하려고 노력한 나머지 1907년의 작품에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푸른색의 나무, 비스크라의 추억>과 <사치 I> 및 <사치II>를 비교하면 얻는 바가 있다. 누워있는 푸른 인물상은 땅에 고착되어 있고 육중하고도 근육이 우람하다. 나체의 여인을 에워싸고 있는 푸른 풍경의 단편이 그녀를 앞으로 밀어내는 듯한 구실을 하고 있으며, 감촉할 수 있는 부피감을 극대화하면서 동시에 그 구도에 있어서는 인체의 겉모양이 지닌 단순하면서 장식적인 윤곽선들을 반영하고 있다. 야수파의 모든 화가들 가운데서도 오로지 마티스만이 치열하면서도 단순화된 색채 조화와 세련된 소묘력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성취해 나가는 위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의 생애를 통틀어 마티스의 경쟁자를 꼬집어 낸다면, 피카소가 으뜸이었다. 이들 두 예술가들이 반세기에 걸쳐 조심스레 우정을 지키고 서로의 작품에 깊은 경의를 품고 있었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었다. 심지어 1945년에 그들은 합동 작품전을 열기까지 했다. 피카소의 초기 작품에는 충동적인 천재성, 무서운 속도로 과제를 빨아들이는 그의 감수성이 번득인다. 하지만 마티스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뚜벅뚜벅 착실히 앞으로 나아갔고, 그러면서도 전혀 진부하지 않고 이따금 현학적인 기미마저 보였다. 그가 스스로 선택한 기예의 전통에 자리잡은 그의 기반은 지나치다고 하리만큼 단단했다. 미국화가들은 마티스의 작품은 모든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입체주의를 바로잡을 수 있는 대항 수단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엘스워스 켈리나 프랭크 스텔라와 같은 젊은 화가들은 서로 다른 활동 시기에 그로부터 영감을 받았고, 톰 웨셀먼과 같은 팝아트의 화가는 자기 작품의 구성안에 일종의 장식으로 마티스의 회화를 그대로 복사했다. 보다 최근에 와서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이전까지 피카소와 몬드리안에게서 이미지를 차용해오다가 그 뒤 1973년에 화실을 소재로 한 작품과 정물화를 위한 도상학의 바탕을 거장 마티스의 주제 처리법에서 찾았다. 마티스의 마지막 작품들은 1960년대초에 문헌과 전시를 통해 널리 소개되어 20세기 후기의 새로운 세대에게 목표를 설정하고 노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고무하는 역할을 했다. 마티스는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요소들을 가미하면서 자신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완성시켜 나갔다. 이 같은 장식성은 이슬람교와 비잔틴 예술의 영향으로 마티스가 비서구적인 예술 형식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것에서 기인한다. 마티스는 1954년 사망했다. 마티스에게는 너무나 많은 찬사가 주어져 이는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켄버스라는 한정된 투기장위에서 마티스 만큼 훌륭하게 감각의 모든 광휘를 해방하고, 동시에 으지와 이성의지배, 질서의 승리를 실현해낸화가는 없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감정'을 표현하는데 생애의 목표를 ㅈ두었던 화가에게색종이작업의 재즈씨리즈는 , 참으로 경쾌하고 고뇌의 색조을 띄지않는 비상한의지의 집중과 감각의연마의집적이 이어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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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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