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극(史劇)을
아주 즐기는 건
역사를 알아야
미래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즈음 사극(史劇)들은
불필요한 각색이 너무 많이 되어
연출가도 작가도
출연진도 연기력도 그렇고 해서
밍밍하고
임팩트가 없어 재미가 없다.
하지만,
조선 역사 만큼
재미있는게 없다.
조선시대에는
손꼽는 천재가 있는데
음...
정도전, 이이, 정약용...
그 중에
신숙주(申叔舟,1417~1475)!!
국제적 안목과
실무적 능력을 겸비하여
조선 4대 왕 세종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조선 전기의
명신(名臣)중에 명신(名臣)이다.
그의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자는 범옹(泛翁),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그의 아버지는
공조참판을 지낸 신장(申檣)이다.
5형제중 셋째로
21세때 생원시, 진사시, 문과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과거급제(科擧及第) 3관왕을 한다.
인품 또한 온후하고
초서, 예서에도 뛰어났으며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 여진어 까지
4개 국어를
통역과 번역까지 구사했던
독보적인 인물이다.
신숙주는
집현전과 사헌부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어느 날
집현전에서 밤새도록
책을 보다 잠이 든 사이
신숙주 어깨에
세종이 용포(龍袍)를 덮어준
일화가 유명하다.
세종의 총애를 받은
신숙주는
일본 사행(使行) 길에
동참하게 되고
외교 문서를 기록하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일본과의 관계를 위한
여러 외교 사안을 조율하며
가는 곳마다
일본의 산천(山川)과 요충지,
조선 초기
일본 관계의 변천 등을 알 수 있는
해동제국총도(海東諸國總圖)를
저술을 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정보 종합 서적이다.
이렇게 중요하고
높은 성과를 올리게 되자
중국에서
사신(使臣)이 왔을 때는
그들을 접대하면서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발휘
중국 사신들이
극찬을 하였다 한다.
이렇게,
세종의 미션을
완벽하게 완수하므로써
세종은 또 다시
신숙주를 명나라로 보낸다.
숙원 사업인
한글 창제를 앞두고
한글 원리와 한글 과정을 나열한
한글 해설집인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을
마무리 하기 위함이다.
이때,
명나라로 가는 신숙주 옆에는
성삼문(成三問,1418~1456)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절친으로
훈민정음을 위해
수십 차례
명나라를 다녀 오게 되면서
드디어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하게 된다.
이로써,
세종은 신숙주를
큰 일을 맡길 사람 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세종은
손자인 단종을
잘 보살펴 달라며
부탁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1450년 2월 17일
세상을 떠난 세종과
1452년 즉위 2년만에
문종의 죽음
그리고,
12세에 왕위에 오른
단종 즉위 3개월 후
신숙주는
1452년 8월 10일
운명을 바꾸는
술자리를 갖게 되는데...
여보게 신숙주!
어찌 문 앞을 지나며
들어오지 않는가?
어디선가
신숙주를 부른다.
옛 친구를 어찌하여
찾아와 보지도 않는가 말일세!
내 자네와
이야기하고 싶은지 오래였네!
이렇게
신숙주를 집에 들이고는
신숙주와 술잔을 기울이며
회포를 풀면서
또 다시
농담처럼 이런 말을 건넨다.
사람이 다른 일에는
목숨을 아끼더라도
사직(社稷)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어야 하는데
나와 함께
명나라로 가지 않겠나?
단종의 책봉을
명나라의 승인받기 위함이
모를리 없는 신숙주는
이렇게 대답한다.
장부(丈夫)가
아녀자 손 안에서 죽는다면
세상 돌아가는 일을
모른다고 할만 합니다.
즉,
장부는 나랏 일을 하다가
죽는게 마땅하다며
그의 청(請)을 받아 들인다.
그가 바로
단종의 숙부이자
세종의 둘째 아들인
훗날 조선 7대왕 세조인
수양대군(首陽大君) 이였다.
두 사람은 서로 동갑으로
집현전에서도 한글 창제에
함께 동참하고
함께 지혜를 모았던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관계였을 것이다.
이렇게 5개월 동안
명나라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수양대군과 신숙주...
신숙주는
국정에 복귀 8개월 후
충격적인 사건에
마주 대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1453년 10월 계유정난(癸酉靖難)!!
수양대군이
좌의정 김종서를 비롯한
여러 대신들을 숙청하면서
권력을 장악한 사건으로
어린 왕을 휘둘러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이유이다.
그리고,
계유정난(癸酉靖難) 5일 후
정난에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던
신숙주에게는
정난의 2등 공신으로
책봉한 것과
성삼문에게는
정난의 3등 공신으로
책봉한 것에
신숙주는
더 큰 혼란에 빠지고
신숙주는 가당치 않다며
공신 책봉을 사양하나
단종은
신숙주의 청을 단호히 거절
공신 책봉 확정과
급변하는 정세속에서
또 한번 요동을 치는
사건이 벌어진다.
1455년 윤.6월 11일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讓位)하는 과정에서
단종의 옥새(玉璽)를
담당 관리했던
승정원 동부승지인
성삼문은
옥새(玉璽)를 안고
목 놓아 통곡을 하니
옥새(玉璽)를 기다리는
수양대군은
엎드린채 머리만 들어
매서운 눈으로
성삼문을
빤히 쳐다 보았다.
결국,
신숙주는
수양대군의 운명을 가르는
왕 책봉 승인과 다름없는
중요한 문서를 들고
명나라로 떠나게 되고
그로부터 4개월후
명나라의
책봉 승인 문서를 들고
신숙주가
무사히 돌아오게 되면서
이 사건으로
신숙주와 성삼문이
완전히 갈라지게 된다.
이때,
성삼문과 집현전 학자들은
계획을 세우는데
세조가 된 수양대군을
즉위 축하 연회날에
신숙주와 함께
제거한다는 계획 이였다.
그러나,
무언가 촉(觸)이 작동한
수양대군의 한쪽 날개
한명회(韓明澮, 1415~1487)는
이상함을 감지
연회장이 좁고 더우니
무사(武士)들을
들이지 말자는 요청에
세조인 수양대군이
승락하므로써
그 계획이
수포(水泡)로 돌아갔다.
그 다음날,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이 의금부에 끌려가
세조 수양대군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함께 암살 거사를 주도했던
김질(金礩)의 밀고로
그만
줄줄이 체포된 것이다.
시퍼런 칼날 앞에
조금도 두려움 없는
성삼문은
세조인 수양대군에게는
천륜을 어긴 나으리는
왕이 아닌 도둑이라고 외쳤고,
신숙주에게는
세종께서 단종을
잘 보살펴 주시라는 말은 잊었는가?
자네의 악독함에 치가 떨린다.
이 같은 성삼문의 비난에
신숙주는 말을 잊지 못했다.
그것으로 그들은
능지처참(陵遲處斬)으로
사지(四肢)가 찢겨져
죽음을 당하고
그들의 머리는 본보기로
저작거리에 3일동안
매달리는
효수(梟首)가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 또한
단종의 복위 운동을 하다
세조 수양대군에게
사약(賜藥)으로
또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세조 수양대군은
집현전을 없애 버리고
신숙주가
단종의 죽음을 거론한지
1개월 후...
1457년 10월 11일
유배지 영월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폐위(廢位)된
단종의 죽음의 소식이
전달된다.
신숙주는 그 후
관료로서 최고직
영의정이된 신숙주!
재상(宰相)으로 우뚝 선
신숙주에게
세조 수양대군은 이렇게 말을 한다.
신숙주는
곧 나의 위징(魏徵) 이다.
여기서 위징(魏徵)은
중국 당나라 태종의 명신(名臣)이자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정치가로써
당 태종을 도와
문화 통치를 일궈 낸 인물이다.
위징은 당초
당 태종의 형 이건성 책사였으나
당 태종이 형과 동생을 죽이고
당나라 황제로 등극하면서
자네의 주군(主君)은 죽고 없네!
나와 함께 하겠는가?
당 태종의 물음에
위징은 나라를 위해서라면
그리하겠사옵니다 대답한다.
당 태종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위징을 아꼈고
위징은 능력을 알아봐 주는
당 태종에게 충성을 한다.
그리하여,
당나라의 태평성대를
이뤄 낸 이 두 사람!
그리고
세조 수양대군과 신숙주!
그림이
겹쳐지는 듯 하다.
세조 수양대군은
신숙주의 뛰어난 능력과
이를 알아보는
자신의 안목을 자랑하듯
공식 석상에서
3번이나 극찬했다.
그 후,
득병한 세조의 죽음과
즉위 1년만의 예종의 죽음
그리고,
13세에 즉위한 성종...
현직에서 물러나
원로 대신이 된 신숙주는
또 다시
영의정으로 오르면서
역사서, 예법서,
법전서, 외교서까지
조선 전기 문물의 기틀을 마련하는
편찬 사업에 몰두한다.
그런데,
성종과 신숙주와의
강력한 의견대립이 생긴다.
몸이 극도로 쇠약한 신숙주는
사직을 청하였으나
성종은 이를 반려한다.
선왕 세조께서 위징에 비유한
이유이다.
그러다 4년이 지난
신숙주는
1475년
조정을 떠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병환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결국,
사직이 받아 들여지지 않고
영의정 신분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
참으로
긴박한 신숙주의 일대기!
그렇다면,
신숙주의 변절자 의미지는
언제부터 였을까?
신숙주 사후(死後)
200년 지난
1691년 9월 조선 19대 왕
숙종(肅宗)의 어명으로
절개에 감탄하여
사육신(死六臣)의 복권이 이루어지고
사육신의
명예가 회복 되다보니
반대 급부로
신숙주의 비난이 일어난 것이며,
그 비난이 견고해진 건
일제 강점기부터 이다.
소설가
춘원(春園) 이광수(1892~1950)
단종애사(端宗哀史)에서
신숙주를
자신의 이익만을 쫓는
인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광수 자신도
창씨개명(創氏改名) 하여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힌 바도 있고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한 바도 숨길 수 없다.
역시,
사람은
자신에게는 호의적이며
남을 나무랄 때는
지혜가 번뜩이는 법이다.
신숙주(申叔舟,1417~1475)
자는 범옹(泛翁), 시호는 문충(文忠)!
그는 정유생(丁酉生)으로
닭띠이며
한마디로,
명월지상(明月之象) 과
전도(前道)를 밝히는 등화(燈火)이다.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조선 왕
4대부터 9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을 것인데
변절자가 맞다
변절자가 아니다
이분법으로만 판단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며
누구나
사정이 있듯이
그 시대 그 상황에
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듯...
그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있기를 기대한다.
甲辰年
七月 第一十五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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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5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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