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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9월 1일 화요일
[(녹) 연중 제22주간 화요일(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공동의 집인 지구를 돌보는 것에 관한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반포하고 해마다 9월 1일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로 지내기로 하였다. 이날 교회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의미를 묵상하고, 창조 질서를 파괴한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며, 생태계를 보호할 것을 다짐하는 시간을 가진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시어 마귀를 몰아내신다(복음).
제1독서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2,10ㄴ-16
형제 여러분,
10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11 그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아니고서야,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12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13 우리는 이 선물에 관하여, 인간의 지혜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말로 이야기합니다.
영적인 것을 영적인 표현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14 그러나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15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습니다.
16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32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3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34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3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36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37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몹시 놀라서 이야기합니다.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루카 4,36) 예수님의 말씀이 지닌 권위와 힘은 사람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기도 하고, 아픈 이들을 고쳐 주기도 하며, 마귀들을 쫓아내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고 목격하는 것은 참으로 큰 은총이었을 것입니다.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살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을 가까이할수록 그 말씀을 듣는 은총의 기회를 더 자주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하느님께서 뚜렷한 응답을 해 주시지 않아 답답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하느님께 바라는 것이 있을 때에는 적극적으로 열심히 기도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하는 데에는 소홀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 읽기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매우 훌륭하고 중요한 기회입니다. 말씀이 지닌 권위와 힘은 그것을 읽고 마음에 새기는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그 삶을 변화시키고, 힘든 마음에 위로를 줄 것입니다.(왕태언 요셉 신부)
믿음에 행동이 수반되지 않으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기존의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모습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권위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선포하는 말씀에 행동이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은 당신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되었습니다.
자연스레 예수님의 말씀에는 힘과 생명력이 흘러넘쳤습니다. 그분 말씀을 듣는 청중들은 앉아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기적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 회당 안에는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 마귀들린 사람조차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파악하였습니다. 놀랍게도 마귀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영의 신앙고백을 경멸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4,35)
믿음에 행동이 수반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부정한 영이 예수님 앞에서 신앙고백을 했지만, 결실이 없는 헛고백이었습니다. 신앙고백에는 언제나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생활이 뒤따라야 합니다.
이 세상에 다양한 마귀들의 횡포와 그로 인한 악이 창궐하지만, 예수님의 능력, 예수님의 권위는 그 모든 것을 능가하고 초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곧 거룩하신 분, 전지전능하신 분, 완전히 다르신 분, 지극히 힘있는 분임을 입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어느 정도 권위와 힘이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말은 이웃을 살리는 말인지 아니면 죽음으로 몰고가는 말인지 반성해봐야겠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친일 군부 독재자들의 통치방식에 익숙해서 그런지,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우리는‘권위’라는 단어에 큰 거부감을 지니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 사실 권위라는 것은 나쁜 것이 절대 아닙니다.
권위라는 것은 한 사회나 조직이 조화있고 균형있게 운영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힘입니다. 리더에게 있어 권위가 사라지게 될 때,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권력으로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리더 안에 권위와 품위, 품격이 조화를 이룰 때 그 조직은 살아나는 게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인격 안에는 그 모든 것이 자연스레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갖은 기득권이란 기득권은 다 누리며, 언제나 정통성 없는 군사독재 정권 편에 섰던 언론들, 수많은 무죄한 사람들을 궁지로 몰아놓고 죽음까지 몰고 간 반민족적 언론들, 선량한 국민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릇되고 거짓된 정보를 제공한 반복음적 적폐 언론들을 바라보며, 권위와 겸손, 품위과 인격이 사라진 말이 얼마나 천박하고 사람을 해치게 되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 존재와 다른 동물과 뚜렷이 구분되는 것이 바로 이 언어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만 부여하신 가장 독창적인 능력이 바로 언어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권위와 힘이 실릴 수 있도록, 늘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에 가면 꼭 들리는 곳이 있습니다. 용인에 있는 ‘성직자 묘지’입니다. 맨 윗자리에는 한국인 최초의 주교였던 노기남 대주교님, 많은 분의 사랑을 받으셨고 사랑하셨던 김수환 추기경님, 기억력이 좋으셨고 늘 기도 중에 함께하셨던 정진석 추기경님, 외유내강을 보여 주셨던 유경촌 주교님이 성직자 묘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먼저 하느님 품으로 가신 사제들이 있습니다. 성직자 묘지를 하나하나 돌아보며 고인이 되신 사제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하였던 말이 생각납니다. ‘세상에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순서가 없다.’ 후배 신부님들도, 사랑하는 동창 신부들도 먼저 하느님 품으로 가서 천상의 별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은 그 길이로 평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임마누엘이신 주님과 함께하였는지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9월의 첫날입니다. 한국교회는 ‘순교자 성월’로 지내고 있습니다.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와 순교자들의 전구로 세상을 떠난 성직자들이 평화의 안식 얻기를 청합니다.
세상을 떠난 사제들의 묘비를 바라보며 바오로 사도의 강인함과 열정을 떠올렸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수많은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또한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사제들의 삶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때로는 외롭고 힘들었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었고, 맡겨진 양 떼를 위하여 기도하며 믿음을 지켰을 것입니다. 묘지에 있는 사제들은 이제 말이 없지만, 그분들이 걸어온 삶은 저에게 끝까지 달려야 할 길과 지켜야 할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부족함이 있었던 것처럼 성직자 묘지에 있는 사제들도 부족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였던 아버지처럼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사제들을 자비로운 품으로 받아주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분들의 묘비 앞에서 바오로 사도의 겸손과 헌신도 생각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많은 일을 이루었지만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며,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겸손은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데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하였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였기에 자신을 낮출 수 있었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사셨기에 기꺼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참된 사제의 삶도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삶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입니다. 용인 성직자 묘지에서 만난 사제들의 침묵은 제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습니다. “강인하게 믿음을 지키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며, 겸손하게 자신을 비우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모든 것을 바쳐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영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며, 다른 사람을 지배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은 우리에게 나누고, 낮아지고, 돌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영은 피조물을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여기게 하지만, 하느님의 영은 모든 피조물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선물로 바라보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꾸짖어 내쫓으십니다. 사람을 억압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악의 세력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인간의 욕심과 탐욕으로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다면, 우리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세상의 영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하느님의 영을 따라야 합니다.
용인 성직자 묘지에서 만난 사제들의 침묵은 제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습니다. “강인하게 믿음을 지키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며, 겸손하게 자신을 비우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모든 것을 바쳐야 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 머물렀다면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바오로 사도처럼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생의 전부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참으로 함께하는 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4,35)
빚는 이
빚음을 알고
빚지 않는 이
빚음을 알 수 없으니
빚음을 알아 모시어
빚음과 참으로 함께하는 길
바로 빚음입니다
믿는 이
믿음을 알고
믿지 않는 이
믿음을 알 수 없으니
믿음을 알아 모시어
믿음과 참으로 함께하는 길
바로 믿음입니다
희망하는 이
희망을 알고
희망하지 않는 이
희망을 알 수 없으니
희망을 알아 모시어
희망과 참으로 함께하는 길
바로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이
사랑을 알고
사랑하지 않는 이
사랑을 알 수 없으니
사랑을 알아 모시어
사랑과 참으로 함께하는 길
바로 사랑입니다
기쁜 이
기쁨을 알고
기쁘지 않는 이
기쁨을 알 수 없으니
기쁨을 알아 모시어
기쁨과 참으로 함께하는 길
바로 기쁨입니다
함께하는 이
함께함을 알고
함께하지 않는 이
함께함을 알 수 없으니
함께함을 알아 모시어
함께함과 참으로 함께하는 길
바로 함께함입니다
돌보는 이
돌봄을 알고
돌보지 않는 이
돌봄을 알 수 없으니
돌봄을 알아 모시어
돌봄과 참으로 함께하는 길
바로 돌봄입니다
섬기는 이
섬김을 알고
섬기지 않는 이
섬김을 알 수 없으니
섬김을 알아 모시어
섬김과 참으로 함께하는 길
바로 섬김입니다
살리는 이
살림을 알고
살리지 않는 이
살림을 알 수 없으니
살림을 알아 모시어
살림과 참으로 함께하는 길
바로 살림입니다
이루는 이
이룸을 알고
이루지 않는 이
이룸을 알 수 없으니
이룸을 알아 모시어
이룸과 참으로 함께하는 길
바로 이룸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여호수아 (Joshua)
활동년도 : +12세기경BC
신분 : 구약인물
지역 :
같은 이름 : 조슈아
성 여호수아(Josue)는 구약성서 여호수아서에 등장하는 중심인물로 그의 이름을 따서 성서 제목이 정해졌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거쳐 마침내 요르단 강 동쪽, 예리고 건너편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모세가 생을 마감하자(신명 34장) 모세의 시종이었다가 그의 후계자로 임명된 여호수아의 지휘로 이스라엘 백성은 요르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먼저 종교 의식을 거행한 다음, 예리고 함락을 시작으로 중부에 이어 남부와 북부까지 차례로 점령하였다.
여호수아는 정복을 완료한 뒤 열두 지파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특수 영토로서, 실수로 살인한 이들이 피신하는 도피 성읍과 레위인들이 사는 성읍들도 지정하였다. 영토 분할이 끝난 뒤 가나안 정복에 동참한 요르단 동쪽 지파들은 돌아갔다. 여호수아서 마지막에는 여호수아의 유언과 세겜에서 소집된 집회 그리고 여호수아의 죽음과 장례가 서술되어 있다. 즉, 여호수아는 임종을 앞두고 백성들을 세겜에 소집한 후 진정으로 야훼 하느님을 경외할 것을 부탁하고 110세에 선종하였다.
성녀 안나 (Anne)
활동년도 : +1세기
신분 : 신약인물, 예언자
지역 :
같은 이름 : 낸시, 니나, 애나, 애니, 앤, 한나
성녀 안나(Anna)는 파누엘의 딸로서 아셀 지파의 혈통을 이어받은 예언자였으며 과부가 되어 84세의 나이가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없이 단식과 기도로써 하느님을 섬겨왔다. 첫아들을 주님께 바쳐야 한다는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가 성전에 봉헌될 때, 그녀는 그 자리에 왔다가 그가 이스라엘의 구세주라고 예언하였다(루가 2,36-38).
성녀 베레나 (Verena)
활동년도 : +3/4세기?
신분 : 동정녀
지역 :
같은 이름 :
성녀 베레나는 테반 지역 출신으로 테반 전설에 등장하는 성 빅토르(Victor)와는 친척지간이었다. 그녀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공경하기 위하여 아가우눔(Agaunum)으로 갔다가 아예 그곳에 정착하였다. 그녀는 사람들도 잘 다니지 않는 숲 속의 어느 동굴 속에 자리 잡고 일생을 살았다고 한다. 그녀는 스위스 전역에서 공경을 받는 성녀이다.
성 기드온 (Gedeon)
활동년도 :
신분 : 구약인물, 판관
지역 :
같은 이름 :
성 기드온은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12판관 중의 한 명으로 판관기 6장 1절부터 9장 6절 사이에 등장한다. 판관이란 그 시기에 이스라엘의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준 사람들을 말한다. 원래 히브리어의 판관이란 말에는 ‘구원자’란 뜻이 있었던 것 같다. 즉, 백성을 외적(外敵)으로부터 구해주는 사람이다. 나중에는 더 나아가 사람들은 판관에게 판결을 의뢰했고, 그를 일종의 집정관(執政官)으로 받들게 되었다. 그러나 개개의 종족은 아직 전혀 통일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이스라엘 전체의 대표자들로 간주할 수는 없었다.
판관기에 의하면 기드온은 이스라엘 민족이 미디안족의 침략으로 고통 중에 살 때 하느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았다. 므나쎄 지파에서도 가장 약한 문중의 가장 어린 사람이었던 기드온은 천사를 통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백성들과 함께 미디안족을 쫓아냈다.
성녀 베아트릭스(Beatrice)
신분 : 동정녀, 설립자
활동지역 : 실바(Silva)
활동연도: 1424-1492년
같은이름 : 베아뜨리체, 베아뜨릭스, 베아트리체
실바의 성녀 베아트릭스(Beatrix de Silva Meneses, 또는 베아트리체)는 포르투갈에서 브리트(Brites)로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1424년경 포르투갈의 캄푸마이오르(Campo Maior)에서 비아나(Viana)의 백작의 딸로 태어났으며, 개혁 프란치스코회의 창시자인 복자 아메데우스(Amedeus)의 동생이다.
그녀는 이사벨(Isabel) 공주의 시녀로 있다가 공주가 카스티야(Castilla)의 요한 2세와 결혼할 때 에스파냐로 함께 수행했는데, 이때 그녀의 나이는 20세였다.
성녀 베아트릭스의 미모가 공주에게 .질투심을 느끼게 하여 어이없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3일 동안 투옥되었는데, 이때 음식조차 주지 않았다고 한다.
석방된 후 성녀 베아트릭스는 궁중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톨레도(Toledo)로 가서 시토회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여자 수도회 설립을 꿈꾸어 오다가, 1484년경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수녀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가톨릭 신자이던 이사벨 여왕이 이 수녀회의 첫 공동체가 사용하도록 갈리아나(Galliana)의 성을 하사하였다. 그녀는 시토회의 규칙을 따랐고 푸른 외투에 흰 수도복을 입었는데, 성모님의 발현도 여러 번 경험했다고 한다.
성녀 베아트릭스는 1492년 8월 16일(또는 9월 1일) 톨레도에서 사망했는데, 이때부터 이 새로운 수녀회는 톨레도의 대주교이며 프란치스코회 회원인 시스네로스(Cisneros) 추기경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클라라회의 수도 규칙을 준행하는 수녀회로 승인을 받았다.
그녀는 1926년 교황 비오 11세 (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6년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의 축일은 오랫동안 9월 1일 또는 8월 16일에 기념해왔는데, .2012년에 8월 17일로 변경되었다.
Name meaning
Beatrice (/ˈbiː(ə)trɪs/; Italian: [beaˈtriːtʃe]) is a name derived from the French name Béatrice, which came from the Latin Beatrix, which means "she who makes happy". Beatrice is the Italian language variant.
베아트리체(/ˈbiː(ə)trɪs/; 이탈리아어: [beaˈtriːtʃe])는 라틴 베아트릭스에서 유래한 프랑스 이름 베아트리체에서 유래한 이름이며, '행복을 만드는 그녀'라는 뜻이다. 베아트리체는 이탈리아어의 변형이다.
성녀 데레사 마르가리타 레디(Teresa Margaret Redi)
신분 : 수녀
활동연도 : 1747-1770년
같은이름 :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테레사, 테레시아
이탈리아 중부 아레초(Arezzo) 사람들은 흔히 성녀 테레사 마르가리타 레디(Teresia Margarita Redi, 또는 데레사 마르가리타 레디)를 안나 마리아 레디(Anna Maria Redi)라고 불렀다. 그녀는 10세 되던 해에 피렌체(Firenze)로 가서 성 아폴로니아 공동체의 수녀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후 계속하여 그곳에서 몇 년을 살았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온 지 몇 개월 뒤,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Teresa of Avila)의 책에 나오는 그녀의 초자연적인 권고에 이끌려 카르멜 회원이 되려고 하였다. 그래서 1764년 9월 1일 그녀는 피렌체에 있는 성녀 테레사의 맨발의 카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녀는 특히 예수성심 신심에 있어서 뛰어났으며, 숨은 생활이 오히려 남을 위해 희생하기 좋은 기회임을 잘 이해하고 실천했던 뛰어난 성녀였다. 그녀는 주로 공동체 내에서 아픈 동료들을 돌보았는데, 수녀이기보다는 간호사에 더 적합한 사람처럼 보였다고 한다.
1770년 3월 7일 23세의 일기로 피렌체에서 선종한 그녀의 유해는 현재까지 부패되지 않고 있으며, 피렌체 주민들로부터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그녀는 1929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934년 3월 19일 같은 교황으로부터 시성되었다.
복자 가브라 미카엘(Gabra Michael)
활동년도 : +1855년
신분 : 신부, 순교자
지역 : 에티오피아(Ethiopia)
같은 이름 : 게브레, 마이클, 미가엘, 미구엘, 미키
1790년경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에서 태어난 가브라 미카엘은 로마 가톨릭교회에 속하지 않은 에티오피아 교회의 수도원장으로 높은 성덕과 학덕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1839년 빈첸시오회의 에티오피아 선교단의 일원으로 에티오피아에 도착한 성 유스티누스 데 야코비스(Justinus de Jacobis, 7월 31일) 신부는 그를 만났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에티오피아 교회의 대표로 교황을 알현하러 로마에 가자고 초대하였다. 로마 방문 중에 큰 감명을 받은 그는 1844년 50이 넘은 나이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 후 그는 성 유스티누스 데 야코비스 신부를 도와 에티오피아인들을 교육하여 방인사제를 양성하는 것을 비롯하여 그들의 필요에 맞는 교리서를 저술하였다. 또 각종 신학서적들을 번역하고 대학도 설립하였다. 그러나 가브라 미카엘을 임명했던 에티오피아 교회의 수장 아부나 살라마(Abuna Salama)의 주장으로 그들은 추방형을 받고 마사와(Massawa) 섬으로 쫓겨났다.
이곳에서 성 유스티누스 데 야코비스 신부는 주교로 서품되었고, 비밀리에 에티오피아로 들어와서 그의 첫 번째 주교 직무 수행으로 1851년 가브라 미카엘을 사제로 서품하였다. 그들은 함께 활동하며 자신들을 쫓아냈던 에티오피아 교회 사람들까지도 개종시키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본 국왕은 가브라 미카엘과 4명의 동료들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사형 언도를 내렸다. 다행히 영국 영사의 중재로 목숨은 건졌으나 국왕의 명령으로 쇠사슬에 묶인 채 다른 감옥으로 옮겨야 했다. 콜레라에 걸렸다 겨우 회복된 그는 소량의 음식마저도 다른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나누었고, 그를 감시하던 간수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 1855년 8월 28일, 마침내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걷지 못하고 길가에 쓰러져 생을 마감하였다. 간수는 정중하게 쇠사슬을 제거하고 그의 시신을 매장하였다. 그는 1926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순교자로서 복자품에 올랐다. 그는 게브레 미카엘(Ghebre Michael)로도 불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