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 토벌대인 간도특설대 장교였던 백선엽(1920-2020)이 창씨개명한 일본 이름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인데, 시라카와는 윤봉길 의사에 의해 폭사한 일본군 대장이다.
윤봉길 의사와 시라카와 요시노리의 일을 돌아보면, 백선엽이 시라카와의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한 행위가 얼마나 가증스러운 "반역의 다짐"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런 백선엽이 친일반역자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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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전인 1932. 4. 29. 당시 25세 홍안의 청년이었던 매헌 윤봉길 의사는 상해 홍구 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축하행사장 단상에 유명한 수통폭탄을 투척하여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1869-1932) 대장을 죽이는 등 일제의 군관계 요인들 다수를 살상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윤봉길 의사가 20세 약관의 나이에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하여 농민독본 3권을 집필하고 야학, 독서회 활동 등을 활발히 하다가 일제의 감시대상이 되자 부인과 어린 두 아들에게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돌아오지 않는다"라는 글귀를 남기고 만주로 망명한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다.
그런데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의거로 폭사한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은 일본군부를 대표하는 거물로서 중국주둔 일본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당시 괴멸적 위기에 놓여있던 상해 침략 일본군을 뛰어난 전략전술로 회생시켜 군신으로까지 추앙받던 인물이었다.
그런 거물을 폭사시켰기 때문에 일제는 윤봉길 의사를 중국 민간형무소가 아닌 일본 본토의 오사카 육군형무소로 끌고 가서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상태에서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가하였다.
그런 다음 일제는 사진에 보는 바와 같이 윤봉길 의사를 무릎 꿇려 앉힌 자세로 나무말뚝에 묶고 흰 헝겁으로 눈과 이마를 가린 상태에서 미간에 총을 발사하여 총살하였는데, 정확히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절명한 시각에 발포하였고 윤봉길 의사의 시신이 마치 일장기가 그려진 머리띠를 두른 모습으로 만들었다.
일제의 비열하고 치졸하기 이를데 없는 복수였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는 절명하셨음에도 굳게 다문 입으로 죽음조차 꺽을 수 없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셨다.
이런 피 맺힌 희생으로 되찾은 나라다. 윤봉길 의사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을 기억하며 그 고귀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할텐데, 우리는 아직 친일반역에 대한 단죄도, 억울한 분단의 극복도 하지 못하고 있다. 윤봉길 의사를 비롯한 순국선열께 죄스럽고 면목없어서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