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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7. 묵상글 들 ( 주님 공헌 대축일 후 금요일. - 땅에서 하늘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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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7. 주님 공헌 대축일 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땅에서 하늘을
어제 서간의 말미에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세상을 이긴다고 하고,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라고 한 것에 이어
오늘도 세상을 이기는 믿음에 대해 요한의 서간은 얘기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보면 이것을 믿는 이들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승리하거나 성공하는 사람은 믿지 않는 이가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분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승리하는 사람과 세상을 이기는 사람을.
사실 믿는 이들은 세상에서 승리하거나 성공하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세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세상을 초월하는 사람이며,
세상의 가치를 가치있다고 생각지 않고
천상적 가치를 추구하기에 세상적 가치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세상적 가치는 무엇이고 천상적 가치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다릅니까?
세상적 가치의 가장 쉬운 예는 돈과 권력입니다.
세상에서는 돈과 권력이 가치있고,
돈과 권력을 많이 쥔 사람이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또는 승리했다고 하지요.
그러나 천상적 가치는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사랑이 최고의 천상적 가치이고,
사랑에 이바지하는 것들이 또한 천상적 가치들이지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오시고,
이 사랑 때문에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게 되니 참으로 가치있지요.
그런데 사랑이 참으로 가치있는 이유는
우리를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것 때문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땅에서 하늘을 미리 살고, 이미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미천한 이들에게도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시고,
이 하느님 사랑으로 이 세상에서부터 하늘을 사는 법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그러니 제가 비록 주님처럼 땅에서 하늘을 사는 법을 여러분에게
가르치지는 못해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땅에서 하늘을
미리 그리고 같이 살자고 권유는 해도 되겠습니까?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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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7. 주님 공헌 대축일 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오늘도 우리 주님 공현은 계속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치유를 통해 예언자 ‘엘리사의 활동’을 완성함으로써,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2열왕기>(5,1-27)에는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을 요르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씻게 하여 나병을 낫게 함으로써 야훼 하느님이 주님이심을 드러내셨듯이,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병을 직접 치유하심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나병환자는 <레위기>에 따르면,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윗수염을 가림으로써 자기가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음을 드러내야 하고, 사람이 다가오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레위 13,45)라고 외쳐야만 했습니다. 그는 건강한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었고(민수 5,2-4),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이된 일인지,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엎드려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 깨끗하게 해 주기를 청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 카 5,12)
여기에서,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규정을 제시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와서 치유를 받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레위 13,45-46), 나병환자가 집 안에 들어서면 그 집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부정함을 입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하물며 부정한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십니다. 예수님의 “손”은 구원의 힘을 드러내며, 그분의 신체적 접촉은 우정과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율법보다 더 앞세우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부정을 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병환자가 깨끗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함은 부정을 피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져 깨끗하게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신께서는 불결함에 더럽혀지지 않는 “거룩하신 분”이심을 드러내줍니다. 곧 당신의 신성을 드러냅니다. 마치, 호렙산의 불꽃 속에서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처럼(탈출 3,2), 성모님께 아기를 낳으면서도 동정성을 잃지 않게 하신 것처럼, 불결한 이를 만지면서도 자신은 불결해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결한 이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참으로 당신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오, 사랑이신 구원자이십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뜻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주님!
불순함으로 제 온 몸이 부스럼투성입니다.
죄와 상처로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불결하기에 저는 망설이지만, 당신은 오히려 불결하기에 다가오라 하십니다.
죄인이기에 저는 숨지만, 당신은 오히려 용서받을 대상이라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제게서 이루소서.
당신이 원하니까 제가 원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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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7. 주님 공헌 대축일 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외딴곳으로 물러가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혜로운 말씀과 능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 답은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시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외딴곳은 ‘광야’로 가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달콤한 자리를 떠나 하느님을 만나러 나가는 작은 탈출입니다. 광야는 바로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분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이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6,6). 기도를 통해 내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되고, 또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요, 영혼의 숨결이라고 합니다. “심장과 심장의 만남”이라고도 합니다. 하느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또한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토마스 키킹신부).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하더라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기도’에서 말하듯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병에 걸린 사람이 엎드려 청한 것처럼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5,12).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것은 ‘모든 것은 주님께 달려 있고, 나는 오로지 주님의 처분만을 바랄 뿐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믿음의 자세가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자세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나의 바램을 이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는 것이고,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관계를 회복하면 모든 능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느덧 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으로, 내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를 확장하려는 사람으로 바뀌어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늘 행복하게 됩니다. 그러니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기도한 나병환자의 마음으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당시 나병은 불치의 병이고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가족은 물론 사회에서 격리되어 살아야 했고, 사람들은 그들을 철저히 소외시키고 외면을 했습니다. 나병환자는 공공장소에 나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혹 누가 가까이 오면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나병환자는 더는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했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려있습니다.’ 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만이 저의 희망입니다.’ 하는 순종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분 앞에 피조물로써 경배하는 자세입니다. ‘당신만이 저의 모두입니다.’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올 때 취할 자세는 바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자세입니다. 그 안에 치유의 능력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외면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손을 내밀어 병자에게 대시고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5,13) 하시며 나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서서 치유의 손길을 보내주셨습니다.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죄로 인한 벌로써 병을 얻었다는 종교적 단죄, 사회적 소외에서 해방시켜 그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앓고 있는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를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의 모든 병을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당신의 따뜻한 손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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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7. 주님 공헌 대축일 후 금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공현의 과정: 물과 피와 성령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 지방에서 주로 활동하시던 예수님의 소문이 그 지방을 넘어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치료할 엄두도 내지 못해서 천형(天刑)이라 불리던 나병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뜻만으로 아주 간단하게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루카 5,13).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그 놀라운 치유 능력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몸이 깨끗해진 나병환자에게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단지 한 말씀만 하셨는데, 그것은 사제에게 가서 깨끗해진 몸을 보여주고, 그러니까 나병이 나았음을 증명해주고 이에 대한 예물을 바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공생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이 장면의 본질에 대해서는 오늘 독서에 나오는 사도 요한의 진술이 적중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으며, 성령으로 그분의 참 모습이 증언된다고 진술하였습니다. 여기서 물은 세상의 죄에 물들어 자기가 지은 죄를 씻어버리는 회개를 상징합니다. 의로움의 가치를 드러내는 세례성사의 은총입니다. 또 피는 아직도 여전히 사람들이 짓고 있는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한 희생을 상징합니다. 거룩함의 가치를 드러내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이 의로움과 거룩함의 가치로 사회 공동선을 위해 헌신하는 사도직 활동은 불치의 나병이라도 깨끗하게 하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세상에 드러내어 주는 힘이 있습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신데, 이로써 세상은 온갖 오류와 이로 말미암은 우상숭배적이고 무신론적인 죄악들로부터 정화되어 깨끗하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 죄악들은 사탄이 조종하는 인간의 어두운 본성, 즉 탐욕과 지배욕은 물론 진리에 눈먼 무명(無明)까지 걸쳐있어서,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탐욕은 사람들이 함께 공동으로 소유해야 하거나 공동으로 사용해야 할 재화들을 독차지하려 들기 때문에 부동산 가격의 폭등, 분배정의의 지체, 빈부양극화 선호 등을 초래합니다. 지배욕은 기왕에 차지하고 있던 기득권의 카르텔을 방어하고자 허수아비를 내세워서라도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합니다. 무명은 세상에서 얻은 지식과 명성에 기대어 하느님을 가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눈먼 채로 살아가게 합니다.
이 세 가지가 물과 피와 성령, 즉 의로움과 거룩함과 사도직이 지닌 가치와 힘을 사회적으로 공현시켜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대적해야 할 과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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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7. 주님 공헌 대축일 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세상에는 불가능한 일이 많을까요? 아니면 가능한 일이 많을까요? 불가능한 일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 더 많고, 가능한 일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실제로 가능한 일이 더 많아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불가능하다고 말하면 뇌는 자동적으로 불가능한 이유를, 그 반대면 가능한 이유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이 더 행복할까요? 불가능이 많은 삶일까요? 아니면 가능성이 더 많은 삶일까요? 아마 굳이 답을 하지 않아도 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연히 가능성이 더 많은 삶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늘 가능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만약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앞서 말씀드렸던 뇌의 작용을 이용해서 “가능해지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식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곧바로 가능의 답이 스르륵 나올 것입니다.
가능의 이유를 찾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가능한 일들이 너무나 많음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당시에 도저히 구원이 없다고 했던 이들과도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구원받는데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한 나병환자가 다가옵니다. 나병은 전염성이 컸고 또 고치기가 어려워서 예수님 시대에도 혐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사회복지가 잘 되어 있어서 전염되지 않도록 따로 그들을 수용해서 간호하는 것도 아니었지요.
율법은 이들을 향해 두 가지 법적 규제를 합니다. 하나는 그들이 부정한 사람으로 선언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이런 사람이 사람들 있는 곳에 갈 때 스스로 “부정한 사람입니다.”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공동체에서 제외되고 모든 사람에게 외면당한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음에 우리는 주목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간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용기가 아니었을까요? 이 용기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요? 예수님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 5,12)
그의 믿음을 보시고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의 나병은 사라졌습니다. 이 믿음이 바로 ‘가능’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불가능한 일이라며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가능한 일이며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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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해보지 않고는 누구도 자신이 얼마만큼 해낼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푸블릴리우스 시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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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복수
어떤 형제님이 자신의 고민을 말합니다. 회사 동료로 인해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자기를 골탕 먹이려고 온 힘을 기울이는 것 같다고 합니다. 힘들어서 잠도 오지 않고 그래서 매일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그 사람으로 인해 분노와 후회로 망가지고 있다면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리고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맞는 것인지를 묻습니다.
“상처를 주고 있는 사람이 형제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잘 안 되기를 바라니까 그런 행동을 하고 있겠지요.”라고 대답하십니다. 상담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작전은 100% 성공이군요. 형제님은 지금 점점 망가지며 잘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 그래서 미운 그 사람의 작전대로 끌려가겠습니까? 복수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 복수는 그 사람의 바람과 정반대인 내가 잘되는 것입니다.”
이보다 확실한 복수가 어디에 있을까요? 굳이 그 사람을 미워하며 망가지지 마십시오. 사랑하면서, 그 사람의 바람과 정반대로 자신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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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7. 주님 공헌 대축일 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화장실과 세면대에 누수가 있었습니다. 화장실은 물을 내리는 부속이 낡았습니다. 세면대도 손잡이 부분이 낡았습니다. 고치려면 공구가 있어야 하지만, 공구도 없고, 자신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신문사의 창고를 이용하는 형제님이 부속을 사왔고, 화장실과 세면대의 누수를 말끔하게 고쳐 주었습니다. 참 고마운 형제님입니다. 비가 많이 오는 여름에는 하수구를 시원하게 뚫어 주었습니다. 그때 하수구를 뚫지 않았으면 비가 역류해서 낭패를 볼 뻔 했습니다. 지붕의 누수가 있었는데 그것도 말끔하게 정리해 주었습니다. 아마존에서 산 차고도 튼튼하게 고정해 주었습니다. 손재주가 없기도 하지만 제게는 형제님의 손은 마술사의 손 같이 보였습니다. 막힌 것은 뚫어 주는 손이고, 누수가 있는 것은 막아 주는 손이고, 어둠을 환하게 밝혀 주는 손이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보면 마술사의 손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같이 있는 신부님은 손가락 몇 번으로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기도 합니다. 여행가서 머물 숙소도 예약합니다. 손놀림 몇 번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수녀님은 예쁜 말씀 카드를 만들어서 이웃들에게 선물하였습니다. 저도 따라하려고 하지만 세례자 요한이 말했던 것처럼 그분들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습니다. 제가 주로 하는 일은 여행가면 설거지를 하는 겁니다. 다행히 큰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요즘 캠핑장에는 따뜻한 물이 나오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설거지를 하고 있습니다. 사제로 살면서 손의 소중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제병과 포도주를 축성하는 것은 저의 손입니다. 봉성체를 통해서 주님의 성체를 모셔 드리는 것도 저의 손입니다. 병자성사를 통해서 안수해 주는 것도 저의 손입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성서를 보면 아름다워야 할 손이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는데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와의 손은 선과 악을 아는 열매를 따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카인의 손은 사랑해야 할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손이 범죄의 도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손은 욕망과 탐욕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유다의 손은 주님을 팔아넘기는 표적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근대화의 바람을 타고 손은 노예를 팔아넘기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식민지를 나누는 서명에 손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손은 마음을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따라가는 손은 축복과 나눔의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욕망과 탐욕의 마음을 따라가는 손은 폭력과 전쟁을 만들어 냅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손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눈이 먼 사람의 눈에 손을 대니 볼 수 있었습니다. 귀가 막힌 사람의 귀에 손을 대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죽은 소녀에게도 손을 대시며 ‘탈리타쿰’ 하시니 일어났습니다. 오늘 나병환자에게도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치유되었습니다. 예전에 할머니의 손은 ‘약손’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배가 아프면 할머니께서 배를 만져 주셨습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배 아픈 것이 없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손에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의 손에는 손자들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향해 내미는 아기의 작은 손을 봅니다. 그 아이의 손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잡아주는 엄마의 손을 봅니다. 바티칸에서 보았던 손이 기억납니다. 천지창조를 하시는 하느님의 손과, 인간 아담의 손입니다. 하느님의 손을 통해서 인간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전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내가 내미는 손이 축복의 손이면 좋겠습니다. 오늘 내가 잡은 손이 사랑의 손이면 좋겠습니다. 손과 손이 만나서 희망의 열매를 만들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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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7. 주님 공헌 대축일 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도와 믿음
- 믿음의 치유와 구원 -
이번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주간 낮기도후 계속 반복되는 후렴과 계응송이 은혜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과거 모든 세대에 감추어진 이 신비는 오늘 드러났도다.”
“그는 이 땅에 나타나셨고, 우리와 함께 지내셨도다.”
한주간 똑같이 반복되는 그대로 성탄시기 복음의 요약같습니다. 역시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구원의 현실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만날 때 치유의 구원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어 성무일도시 시편 125장 1절 말씀도 마음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주님께 의지하는 이 시온 산 같으니 흔들림이 없어라. 항상 꿋꿋하여라.”
마침 이 말씀과 연상되어 언뜻 스치듯 들은 말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 그분은 태산같은 분입니다. 태산은 흔들릴지라도 그분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대로 태산같은 믿음의 사람임을 드러냅니다.
결국은 믿음이 답입니다. 믿음을 통한 치유의 구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의 치유이야기가 이를 입증합니다. 마치 한폭의 살아있는 그림같은 장면입니다.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은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았고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하니 그대로 간절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에 대한 주님의 즉각적 응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치유의 구원에 앞서 반드시 우리의 믿음이 전제되어야 함을 봅니다. 우리의 믿음에 따른 주님의 응답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합니다. 주님의 삼박자 치유의 진리를 깨닫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1.측은히 여기는 마음, 2.사랑의 스킨쉽, 그리고 결정적 3.권능의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후속 조치가 참 완벽합니다.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기존의 사제와 율법을 존중하시며 율법관례에 따를 것을 명령하시니 이 또한 예수님의 겸손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나병환자가 상징하는 바 갖가지 형태로 영육靈肉으로 병든 우리들 모습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전인적 치유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분명 나병환자는 육신의 치유와 더불어 영혼도 치유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요한 1서가 이 진리를 분명히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나병환자는 육신의 치유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모시게 되었으니 온전한 치유에 참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 하여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실 때 영원한 생명의 참 구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우리의 전인적 치유의 구원에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모시는 일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흡사 오늘 복음 장면은 작은 믿음과 큰 믿음의 만남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나병환자의 작은 믿음과 예수님의 큰 믿음의 만남이요 믿음과 믿음의 만남을 통한 구원의 치유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의 묘사가 참 귀한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역시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점점 퍼지고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오자 주님은 즉시 이들을 떠납니다. 군중들의 요구는 끝이 없고 떠나야 할 때 즉시 떠나 기도하는 주님에게서 분별의 지혜를 배웁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마디가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외딴곳에서의 기도가 예수님의 날마다의 삶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음을 봅니다. 기도와 일이, 관상과 활동이 균형잡힌 하느님 중심의 예수님 삶임을 입증합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비결은 바로 이런 기도를 통한 아버지와의 깊은 일치의 믿음과 사랑에 있음을 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영육의 상처와 병을 치유해주시고 필요한 믿음을 선물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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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7. 주님 공헌 대축일 후 금요일. 주교회의 홍보국.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어제 복음에서 나자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오늘 한 나병 환자의 치유를 통하여 실현됩니다.
당시 나병환자는 피부병으로 생긴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일상과 인간 관계에서 철저하게 소외되는 정신적 고통도
함께 겪어야 했습니다.(레위 13-14참조)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의 예언을 이루시는 메시아라면,
예수님께서는 육체적 '병의 치유'와 정신적 '관계의 회복'이
모두 가능하실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의 청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치유는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를 끄는 예수님의 행동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병 환자에게 '당신의 손을 내밀어 대셨습니다.'
말씀만으로 충분히 병자를 치유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행동을 하셨을까요? 그리고 오랫동안
어떠한 접촉도 없이 살았을 그 나병 환자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요?
율법에 따르면 정한 사람도 이러한 접촉을 통하여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준수보다, 나병 환자의 치유가 더 중요합니다.
율법의 본디 정신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치유와 더불어 정신의 치유,
곧 관계의 회복을 선사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선포하신 것처럼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이들, 억압받는 이들'에게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을 선물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하느님의 증언을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생명을 선물하는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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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7. 주님 공헌 대축일 후 금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의 지엄한 권능과 나병 환자의 굳은 믿음이 짝을 이루고 있다. 그 환자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다. 자기 죄를 부끄러워하는 마음과 겸손의 표시이다. 그는 자기 상처를 내보이며 고쳐달라고 간청한다. 이 간청 속에 이미 믿음이 충만하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12절) 주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불결함 때문에 자신이 없었다.
나병 환자 치유는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의 선포의 일부로서, 그분은 신성으로는 능히 병을 다스리고 당신의 인성으로는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뻗으심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주님께서는 환자의 간청을 받아 주시고 당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음을 감추지 않으신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13절) 또한 당신의 전능한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신다. 그러자 곧 나병이 사라지고 환자의 괴로움도 끝났다.
나병 환자는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깨끗해진 데 대한 예물을 바치라는 분부를 듣는다. 사제에게 몸을 보이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병이 나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모세의 법규에 따라 예물을 바치게 하심으로써, 주님은 또한 당신이 율법을 폐지하지 않고 완성하러 오셨음을 보여 주신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시면서도 언제나 기도하시는 분이셨다. 그분이 그렇게 기도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열심히 기도하며 살아가야 하겠는가!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멸시하고 또 쓰라린 수치로 가득 차 있을 때에도, 예수께서는 나병환자를 고쳐주듯이 우리의 죄를 깨끗이 해 주시고자 언제나 기다리고 계신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인가? 다른 것이 아니다. 복음의 나병환자와 같이 우리는 주님 앞에 나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인간적으로는 손댈 수 없는 자에게까지 손을 대시고,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시며,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에게 향하고 있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여 알아야 하며, 내 자신이 그러한 사랑과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도 또한 다른 이를 그러한 사랑과 용서로써 대하여야 함을 나병환자의 치유에서 알아야 할 것이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자신의 모습, 많은 경우 죄로 인해 더럽혀진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느님 앞에 진실하게 인정하고 그분의 용서를 치유를 청하며, 용서받은 우리 자신이 이제 우리의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줄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다시 한 번 다짐하면서, 언제나 용기를 갖고 나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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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7. 주님 공헌 대축일 후 금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 13)
주님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여주십니다.
우리들의
아픔과 슬픔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예수님 안에
치유의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마음으로
우리의 아픔을
읽어주십니다.
삶의 실패자란
없습니다.
다시 치유되고
다시 시작 할
힘을 주십니다.
기다림이라는
믿음이
가장 알맞은 때에
치유라는 선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에게서
버려진 사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치유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다시 살리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치유가 있습니다.
아픔의 문을 열어
다시 깨끗하게 하시는
주님의 치유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깨끗하게
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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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7. 주님 공헌 대축일 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를 치유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루카 5,12-13).”
복음서에 언급되어 있는 중풍(루카 5,18), 여러 가지 신체장애(루카 6,6),
하혈증(루카 8,43), 나병(루카 5,12) 등은 당시에는 불치병이었고,
‘하느님의 힘’으로만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병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병을 앓고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당신이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어떤 나병 환자를 고쳐 주신 이야기는,
예수님의 권능보다는 ‘자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병고’는 인간을 괴롭히는 많은 고통들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고통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치유의 은총’은 그 고통을 없애 주시는 자비입니다.
여기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라는 말은, 그 병자가 하느님께 경배하듯이
예수님께 경배했다는 뜻인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 것도 그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는
“주님께서 저를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입니다.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은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말입니다.
이 말은, ‘주님의 권능’은 믿고 있지만,
‘주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믿음’이란, ‘권능’에 대한 믿음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 합해진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병자처럼 ‘권능’에 대한 믿음만 있고,
‘자비’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주님께 간청하면서도,
주님께서 간청을 들어주실 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불안해하고, 반신반의하게 되고, 결국 의심하게 되고, 기다리지 못하게 됩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만 있고 ‘권능’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예수님께 간청하더라도 그것은 주님이신 분께 간청하는 일이 아니라,
그냥 자비로운 ‘사람’에게 의지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간청하는 것은,
예수님의 권능과 자비를 모두 믿기 때문입니다.
(고통 속에 있는 나를 가엾게 여기셔서 나의 청을 들어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과
나의 고통을 없애 줄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믿음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황에 따라서 이 말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간청을 무조건 들어 주시는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되는 일을
경험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병을 고쳐 달라는 간청’을 예수님께서 거절하신 일이 있습니다.
거절당한 사람은 바오로 사도입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7ㄴ-10).”
바오로 사도는 어떤 고질적인 만성 질병 때문에 평생 고생했다고 전해지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병을 고쳐 달라는 바오로 사도의 간청을 거절하셨습니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힘을
드러내시려고 일부러 그를 약한 상태로 지내도록 내버려두신다는 뜻이 아니라,
‘약한’ 바오로 사도가 ‘강한’ 주님의 힘을 드러내는 일 자체가
곧 그에게 내린 큰 은총이라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런 몸으로 그렇게 놀라운 선교활동을 한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내가 청하는 것을 주시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일입니다(마태 7,11).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는 병의 치유보다 주님의 힘을 드러내는 임무를 맡은 것이
그가 받은 가장 좋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라는 예수님 말씀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나는 원한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고쳐 주신 것은 당신이 원하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는, 그가 청하지 않았어도
예수님께서 먼저 고쳐 주셨을 것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좋은 예가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병자입니다(요한 5,1-9).
그 병자는 예수님을 몰랐고, 그래서 예수님께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 주신 것은 순전히 그를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라는 말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대심으로써
나병 환자와 접촉하는 것을 금하는 율법을 폐지하셨고,
인간 세상과 나병 환자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깨끗하게 되어라.”는 치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 말씀만으로 병을 고치실 수 있는 분이고,
그 말씀은 언제나 항상 즉시 효력이 발생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마자 곧바로 나병이 치유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은(루카 5,14),
‘몸의 치유’에 관해서만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그 병자는 예수님의 지시를 어기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널리 알리고 퍼뜨렸습니다(마르 1,45).
좋은 의도로 그랬더라도 예수님의 지시를 어긴 것은 잘못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몸의 치유’가 아니라 ‘영혼의 구원’입니다.
(물론 몸의 건강은 분명히 필요하고,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신앙생활의 목표가 될 수는 없고, 인생의 목적이 될 수도 없습니다.
‘건강’은 목적지에 잘 도달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외딴곳으로 물러가서 기도하신 것은(루카 5,16),
당신이 정말로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 또는 우리가 예수님께 정말로
청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무언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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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7. 주님 공헌 대축일 후 금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
“영원한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1요한 5,10)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준다고 가르친다. 요한의 첫째 편지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는 4장에서 그리고 특히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에 관한 주제와 결합될 때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저자는 이 두 번째 주제에 대해 덧붙인다. 이런 맥락에서 무엇보다도 ‘세상을 이기는 신앙’이 강조되고 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 관하여 해주신 증언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이다.”(1요한 5,11)
닷, 홀던, 마샬, 슈트렉커 등은 ‘하느님의 증언’이 성령과 물과 피의 증언들을 합친 것이라고 본다. 요한은 하느님의 삶이요 종말론적 구원인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파견되어 나타나셨으며 우리가 ‘만질’ 수 있는 아들 안에 있다고 선포한다(5,11-12).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기에(5,12)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에서는 나병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피부병을 나병이라 한다. 나병은 불결하고 전염성이 강하다고 여겼으므로, 나환자들은 다른 이들과의 접촉을 피해야 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불결, 불결” 하고 소리를 질러야 했고, 예루살렘과 기타 성곽도시에는 들어가지도 못했고 다른 곳에서는 따로 살아야 했다. 나아가 종교의식이나 사회생활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나환자들은 '산 송장' 취급을 받았다. 율법교사들의 눈에 그들은 나병이라는 형태로 자기 몸에 죄를 짊어진 이들로 보였다. 그들이 만지는 것은 즉시 불결한 것이 되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경계의 대상이었고 배척받는 죄인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한 나환자가 자신의 처참한 처지를 알고 인정하면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5,12) 겸손하게 예수님께 깨끗하게 해주실 것을 간청한다. 치유 여부는 온전히 예수께 달려있음을 알고, 나병환자는 선입견이나 자기주장을 버리고 가장 낮은 자세로 자신을 그분의 뜻에 온전히 내맡겼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자 곧 그에게서 나병이 떠나갔다(5,13). 나병이 떠나감은 단순한 몸 안의 치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아픔과 고통과 영혼의 어둠 상태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토록 "쓴맛이었던 바로 그것이 도리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한 것"(성 프란치스코 유언 3)이다. 이는 하느님의 자비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의 결과였다. 한없이 낮추는 자세가 소통과 치유와 해방을 가져온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참된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 참된 믿음을 지니려면 무엇보다도 신앙의 대상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알아야 하고 그분께 초점을 맞추고 집중해야 한다. 참 신앙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자세로" 믿는 분께 모든 것을 기꺼이 맡겨야 한다. 참 신앙에는 사랑의 동기 외에 다른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믿음은 순수해야 하고 진실해야 하며 항구해야 한다. 때와 장소에 따라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을 한다면 참 신앙이 아니다. 참 신앙을 지닌 사람은 겸손하며 차별을 없애려 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며 삶으로써 실천한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동기로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나환자를 해방시켜주셨다. 그분은 자신이 부정하게 되거나, 율법을 어겼다고 적대자들로부터 비난받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다. 그분께서 접촉이 금지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는 것은 승리자의 위엄 있는 동작이다. 그분의 이런 행동으로 “버림받았던” 한 병자가 다시 생명을 회복하고 공동체에 되돌아 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도 모두가 멀리하고 싫어하는 '좋지 않음'의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어야 하지 않을까?
'영원한 생명 안에 머무시는' 그분은 몸소 인간 조건 속으로 들어오시어 우리의 나약함과 어려움을 가엾게 여기시는 연민의 정을 드러내 보이시며 우리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주신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을 탁월한 치유자로 여기고 필요할 때만 당신께 낯을 돌리는 것을 원치 않고 당신 안에 머물길 바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이다(1요한 5,12). 우리 모두 사랑으로 오신 그분을 믿어 영원한 생명의 길, 해방의 길로 나아가자! 영원히 살기 위해 생명이신 그분께 있는 그대로의 나를 개방하고 내맡기도록 하자!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영혼의 나병이 나에게서 떠나가게 해주시라고 기도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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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7. 주님 공헌 대축일 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용기를 내거라! 내가 고쳐주겠다! 내가 모든 것을 원상복귀 시켜주겠다!
오늘 루카 복음사가는 한 인간 존재의 비참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온몸에 나병이 걸린'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루카 복음 1장 12절) 율법까지 어겨가며 목숨을 내걸고
예수님께로 다가온 나병환자의 모습과 행동을 떠올려보니, 그 가련함과 절박함에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나병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온몸이 그야말로 만신창이입니다.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깊은 심연의 바닥에 주저 앉아 울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 비참한 몰골에 멀리 비켜가며 혀를 쯧쯧 찼습니다. 가족들도 포기한지 오래 전입니다.
언제나 머릿속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생각 하나!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왜 나를 빨리 데려가지 않으시나?’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오늘 우리들 처지가 꼭 나병환자인 듯 합니다.
겉으로는 호탕하게 큰 웃음치지만, 뒤돌아서서는 사무친 외로움과 괴로움에 소리없는 굵은 눈물 방울을 뚝뚝 떨어트립니다.
틈만 나면 나 이런 사람이라며, 금박 장식된 화려한 명함을 돌리지만, 홀로 남겨져 거울앞에 서면, 있는 그대로의 민낯, 내 부끄러운 모습에 가슴을 칩니다.
끈질긴 악습, 무한 반복되는 죄, 여기서 상처받고 저기서 상처받고 만신창이가 된 영혼, 그러나 그 어디에도 마음 편히 하소연할 데 없는 우리 역시 한 가련한 나병환자입니다.
따지고 보니 나병환자나 나나 거기서 거기입니다.
다행히 자상한 치유자이신 예수님께서 울고 있는 우리 뒤로 조용히 다가오십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며, ‘그간 고생했다’며 위로해 주십니다.
‘용기를 내거라.’‘내가 고쳐주겠다.’
‘내가 모든 것을 원상복귀시켜주겠다.’며 속삭이십니다.
‘갓 태어났을 때의 보송보송한 피부를 되찾아주시겠다.’며 격려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복음 5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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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7. 주님 공헌 대축일 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은 왜 엎드려 청할 때까지 들어주시지 않는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시는 내용입니다.
나병 환자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칫 이 말은 “하고자 하면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셨던 겁니까?”라는 원망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적을 청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겸손하게 청할 때까지 기다려주십니다. 알아서 다 해주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만약 나병 환자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기적을 행해주셨을까요? 아마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하지 않으시는 것이 우리 겸손을 위해 더 좋다면 예수님은 기적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목적을 명확히 알아야 우리도 그분께 좋은 것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겸손’은 관계의 기본입니다. 교만하면 판단하게 되고 판단하면 관계는 끝납니다. 판단을 안 하는 습관을 기르려면 자기 판단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자녀를 겸손한 아이로 자라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영화 ‘오만과 편견’(2005)은 오만과 편견이 관계의 적이고 그 오만과 편견은 진정한 사랑으로만 녹아내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인공 엘리사벳은 매우 냉철한 판단력의 소유자입니다. 사람을 첫인상, 사교성, 가치관, 사용하는 언어와 제스처 등으로 정확하게 판단할 줄 압니다. 그리고 그런 엘리사벳에게 가장 안 좋게 판단을 받는 남자가 재벌이자 미남인 다아시입니다. 다아시는 돈 많고 무표정하고 사교성 없고 거만하게 사람을 깔보는 듯한 오만한 인물입니다.
엘리사벳에게 극도로 오만하다고 판단 받은 다아시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닷없이 청혼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집안을 부잣집 남자들을 꾀는 여자들이라고 여기는 듯한 다아시의 청혼을 받아들일 리 만무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벳은 남들보다 두 배나 빠르게 글을 쓸 줄 아는 다아시가 온종일 정성 들여 쓴 두 장의 편지를 읽으며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깨닫습니다.
영화 내내 엘리사벳의 눈으로 다아시를 보아서 그가 오만하게 보였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따듯하고 배려심 있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오만하다는 편견으로 남을 판단하고 있었던 자신이 진짜 오만한 사람임을 깨닫고 겸손해져서 항상 솔직해서 문제였던 다아시를 받아들입니다.
자녀를 교만하게 만들어 하느님과 이웃과 관계를 맺지 못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금쪽같은 내 새끼 80회’에서 “엄마 꺼져!”라고 외치는 게임에 중독돼 난폭해진 쌍둥이 형제들이 나옵니다. 아이들이 게임에 중독되었다는 뜻은 현실이 행복하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그 이유는 엄마가 아이들을 너무 ‘통제’하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매를 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여서 그렇다고 하지만 잔소리와 체벌이 난무합니다.
아이를 겸손하게 하는 법은 부모가 알아서 모든 것을 다 해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아이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고 자존감을 잃습니다. 자존감을 잃으면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고 교만해집니다. 그러면 자기 자랑을 하게 되지 부모 자랑을 하게 되지 않습니다. 부모를 바보로 여깁니다. 부모는 아이를 겸손하게 하려고 최대한 스스로 하게 하고 청하지 않으면 무엇을 해주거나 통제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키우려고 하다 보면 아이는 통제받고 자존감을 잃고 교만해집니다.
어느 만둣가게 주인이 제때 따듯한 식사를 하지 못하는 환경미화원과 부랑자들에게 ‘사랑의 만두’를 공짜로 나누어주었습니다. 어느 정도 선행을 계속하다가 주인이 만두를 더는 공짜로 주지 못하겠다고 하자 그간 만두를 얻어먹던 사람들이 거칠게 항의를 하였습니다. 대놓고 욕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만두 말고 돈으로 달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이른바 착하고 순진한 서민들이었습니다.
아이가 부모를 자랑할 수 없다면 자기 자신을 자랑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자랑할 것이 없다면 우리는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해지는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인간에게 어려움을 주시는 이유는 알아서 다해주면 인간이 하느님을 바보로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주다 안 해주면 오히려 짜증을 냅니다.
하느님께서 알아서 다해주시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당신을 신뢰하여 겸손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무조건 해주면 저절로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바치라는 것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다해주거나 혹은 아무것도 안 해주거나 다 문제입니다. 항상 기다리며 청할 때 해주려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당신께 청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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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7. 주님 공헌 대축일 후 금요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묵상과 기도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인류를 위한 자애와 사랑입니다. 주님 공현은 또하나의 '성탄 대축일'입니다. 동방 박사들을 통하여 인류의 구세주 아기가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황금, 유향, 몰약을 예수 아기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 아드님을 모시는 사람은 생명을 지닌다. 하느님 아드님 예수님이심은 우리의 물과 피와 성령의 믿음으로 그 생명이 증명된다.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은 깨끗하게 해 달라는 나병인을 치유해 주신다. 예수님의 소문이 점점 널리 퍼지자, 그분은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질병과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 그분께 다가오는 이들의 병을 고치시고 해방시키는 주님이시다.
회상과 성찰
지난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되돌아봅니다. 나와 이웃, 그들과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를. 두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그리고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그래서 증언하는 것이 셋입니다.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증언은 더욱 중대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느님의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 관하여 친히 증언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이 증언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에 관하여 하신 증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증언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1요한 5,5-13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시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셨다.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루카 5,12-16
실천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주 그리스도이십니다. 물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됨이요, 피는 그분의 제헌으로 속죄됨입니다. 이는 진리이신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증명이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이를 믿음으로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이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음을 믿고 또 고백합니다.
우리는 아드님을 모시며 살고 있습니다. 생명을 얻고 살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은 우리는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고, 그 고백을 다른 형제들과 공유하고 기쁜 소식으로 전합니다. 그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모두에게 곳곳에 전달되도록 노력합니다.
마침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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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7. 주님 공헌 대축일 후 금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주님 공현 후 금요일 제1독서 (1요한5,5-13)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5~6)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5)
'누구입니까'로 번역된 '티스 에스틴'(tis estin)에서 의문 대명사 '티스'(tis)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 바로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설의법적 표현이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승리를 매우 구체적이며 개인적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원리와 수단이기는 하지만(1요한5,4), 삶속에서 실제적으로 세상과 싸워 이기는 주체는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본문에서 '이기는 사람'으로 번역된 '호 니콘'(ho nikon)에서 '니콘'(nikon)은 현재분사로서 계속적으로 '쳐부수는 자','정복하는 자'라는 뜻이다.
즉 완성적 차원의 승리가 아니라 계속되는 전투에서 계속적인 승리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것은 성도들이 계속되는 사탄의 유혹을 극복하면서 승리하는 것을 뜻한다.
당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많은 이단들의 속임이 있었는데, 그분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을 끝까지 지켜 나감으로써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그리스도론적인 메시지와 함께 당시에 있었던 이단들을 염두에 두고 이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6)
사도 요한은 이제 요한1서 5장 6~9절에서 육화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성령과 물과 피의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확실한 믿음의 대상임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물'로 번역된 '휘다토스'(hydatos)와 '피'로 번역된 '하이마토스'(haimatos)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이견들이 많다.
첫째는 물과 피가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를 의미한다는 견해이다.
둘째는 물과 피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물과 피로써 수난을 상징한다는 견해이다. 히포의 주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본절의 물과 피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연관시켜 해석하였다.
세째로 물과 피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심과 동시에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사건과 마지막 생애를 마감하실 때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사건이라는 견해이다.
이 세번째 견해가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인간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 오신 주님께서 물세례(수세; 水洗)를 받으심으로써 공생활을 시작하셨고,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죄인의 모든 죄를 대속(代贖)하셨다는 해석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공생활 활동의 시작을 상징하는 물과 공생활 활동의 완성을 상징하는 피란 표현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행하신 활동 전체를 포괄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새 성경은 '오신'으로 번역되었지만, 원문은 '오신 분'(호 엘톤; ho elthon)이다.
'엘톤'(elthon)의 원형 '에르코마이'(erchomai)는 기본적으로 '오다'(come), '가다'(go)란 뜻인데, 여기에서는 부정 과거 분사로 사용되어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이미 우리에게로 오셨다는 역사적 사실을 가리킨다.
당시 이단들 가운데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었다.
사도 요한은 그들의 그릇된 주장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 되심이 세례와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증명되었음을 선포하고 있다.
또한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이것은 영어의 'not~but'의 용법과 같이 전자를 부정함으로써 후자의 긍정적 의미를 보다 강조하는 '우크~알르'(uk~all)란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물만이 아니라'에서 '만'(only)에 해당하는 '모논'(monon)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을, '물' 단 하나와만 연관시키는 자들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영지주의 이단 가운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에 떠났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수님께서 공생활 기간 잠시 동안만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했다고 보는 견해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즉 사도 요한은 '단 하나 그것만'이란 매우 강한 배타적 의미를 지닌 단어를 사용하여 이러한 이단 사상의 입장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며, 또한 '우크'(uk)란 부정어를 사용하여 이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특히 후반절의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로 번역된 '엔 토 휘다티 카이 엔 토 하이마티'(en to hydati kai en to haimati)에서는 '토'(to)란 정관사와 더불어 '~안에'란 뜻이 있는 전치사 '엔'이 '물'과 '피'란 단어 앞에 개별적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물'뿐 아니라 '피'도 독립적인 가치를 지니며, 둘 다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됨을 역설하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증언하시는 분'으로 번역된 '토 마르튀룬'(to martyrun)의 원형 '마르튀레오'(martyreo)는 법적 용어로서 어떤 사실을 공적으로 증언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사도22,5; 1코린15,15).
여기서 사도 요한은 이 단어를 성령의 역사(役事)를 묘사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곧 성령께서 친히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느님의 아드님 되심을 증언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르튀룬'(martyrun)은 현재 분사이므로, 그 증거의 활동이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낸다(요한15,26; 16,13.14).
'성령은 진리입니다'로 번역된 '호티 토 프뉴마 에스틴 헤 알레테이아'(hoti to pneuma estin he alletheia)를 직역하면, '왜냐하면 성령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because the Spirit is truth)가 된다.
성령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은 그 성령이 진리의 영이기 때문이며, 그가 진리 자체이시므로 그가 증거하는 내용 역시 진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 역시 진리인 것이다.
성령께서 진리라는 사실은 예수께서도 말씀하신 내용이다(요한14,17).
한편 본문의 시제는 직설법 현재 시제이다. 그리스어에서 직설법 현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변치 않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성령이 진리'라는 사실은 예수님 활동 당시에도, 초대 교회 당시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변치않는 진리임을 나타낸다.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오늘 나병환자 처럼 예수님을 찾은 것이다.
(루카5,12-16)
12ㄱ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 온몸이 썩어 들어가도 고통을 모르는 것이 나병(문둥병)이다. 곧 자신의 죄로 영이 죽어가도 고통을 모르는 그 영적 병이다.
(묵시3,1) 1 “사르디스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말한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12ㄴ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자신의 얼(영)이 병(죄)이 들어 티끌(없음)일 뿐임을 인정하는 낮은 자세다. 자신이 찾아간 예수님이 자신의 나병을, 곧 자신의 죄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으신 그리스도임을 아는 병자다.
(잠언31,20) 20 가난한 이에게 손을 펼치고 불쌍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준다.
1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 그의 더러워진 죄의 얼이 깨끗해 졌다. 그것이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신 일이다. 주님의 말씀으로 깨끗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을 육의 치유로만 받는다면 헛된 신앙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그것보다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다.’ 가 문맥상 맞지않나? 그것은 나병환자- 그간 손으로 지은 죄를 용서하시려는 것이다. 죄의 본질은 하느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던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다.
다시, 하느님의 말씀, 계명을 깨닫지 못해 인간들의 선악의 계명으로 받아 하느님의 뜻을 헛되게 한, 그것이 모든 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창세3,22) 22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 반드시 죽어야 할 나병환자다. 그런데 죽어야 할 그 죄인을 오늘 살려주신다. 회개도, 그 어떤 행위도 없이 그냥 용서하셨다. 그 안에 하느님의 구원의 신비, 진리가 숨겨져 있다. 그 이유도 진실도 모르면서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다”라고만 말하면 안 된다.
14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시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셨다.
= 모세의 명령, 사제가 한 그 일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예물을 바칠 수 있다.
레위기 14장, 악성 피부병 환자의 정결례 법(1~32절) 중에서 ‘사제는 어린 숫양 한 마리를 끌어다, 그 피를 깨끗하게 되려는 사람에게 일곱 번 뿌린다.’ 그렇게 속죄 예식을 거행한다.(12-16절)
(레위14,19-20) 19 곧 사제는 속죄 제물을 바쳐, 부정한 상태에서 정결하게 되려는 이를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한다. 그러고 나서 번제물을 잡고, 20 번제물과 곡식 제물을 제단 위에서 바친다. 이렇게 사제가 그를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하면, 그는 정결하게 된다.
=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피, 속죄 제물로 죽으신 그분의 피로 깨끗해진 것이다. 율법(선악)의 모든 잘못을 씻어주는 구원의 새 계약의 피다. 그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히브10,18.22) 18 이러한 것들이 용서된 곳(십자가)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습니다. 22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겨 졌습니다.
= 나병 환자가 예물도 없이 깨끗해진 구원의 신비, 진리인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대속, 그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로 드리는 우리의 창조의 목적인 그 삶을 살게 된 것이다.(이사43,7)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물을 드리는, 곧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진, 거룩해진 자신을(히브10,14) 깨끗한 예물로 가사로이 바치는 하느님의 듯인 예배의 삶인 것이다.
(로마12,1) 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로,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가 씻겨 깨끗해진, 그래서 제사 예물이 필요 없게 된 그 진실은 모르고 그냥 치유의 예수님을 전하면 큰일 나는 것이다. 큰 잘못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진실, 그 구원의 진리를 모르고 전하면 모두가 제사 예물 드리는 그 종교행위의 신앙으로,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그 이타(利他)의 사랑, 그 은총, 은혜를 몰라 신앙의 열매인 죄에서의 해방(자유, 쉼)이 아닌 두렵고 무거운 짐 같은 구원 없는 그 헛된 신앙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15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 사람의 잘못, 죄를 드러내시어 그 죄를 용서로 살리시는 것이 말씀이시다.(히브4,12참조) 그러나 그 예수님의 말씀이 복음이 아닌, 인간들의 입(맛)에 맞춘, 그 소문으로 나간 것이다.
그래서 말씀으로 육신의 병을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온 것이다. 곧 육신의 만족을 위해 온갖 종교행위로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다. 그것이 손을 내밀어 하느님의 계명으로 따먹은 죄의 습성인 것이다.
1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 예수님은, 말씀은 그런 곳을 떠나신다.
(이사1,14-15) 14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 15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 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제물의 피, 제사행위)로 가득하다.
오늘독서(1요한5,5-11)
5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 손을 내밀어 따먹은 그 세상의 선악의 법으로 드러나는 모든 죄를, 예수님께서 대속으로 다 갚으시고 자유를 주셨음을 믿는 것, 그래서 그분의 십자가의 길이 구원, 생명의 진리임을(요한14,6) 믿음으로 고백하며 의탁하는 삶, 그리고 그 진리를 이웃에게 전하는 삶,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요한3,16)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6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 피(제사)는 하느님의 구원의 계약(대속)을, 물(생명수)은 구원을 다 이루시고 새 생명을 주신 말씀이신 예수님을, 성령께서는 그 모든 것을 구원의 진리로 증언하셨다.
7 그래서 증언하는 것이 셋입니다. 8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 하느님께서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으로 이루셨고, 성령께서 구원의 진리로 증언하신 것, 세위가 하나의 뜻으로 하나로 있는 것, ‘삼위일체’다.
11 그 증언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 하느님 말씀으로 오셨으니 그 구원 말씀의 힘으로 저희 마음을 움직이시어 저희가 모신 말씀에 더욱 맛 갖은 삶,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천주의 성령님! 티끌일 뿐인 저희를 하늘의 존재로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아멘.
주님 공현 후 금요일 복음 (루카5,12-16)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13)
루카 복음 5장 12절부터 15절까지는 나병환자 치유 기사이다.
이것은 공관 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오 복음에서는 산상설교를 마치신 직후에 일어난 사건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실상은 예수님의 제1차 갈릴래아 활동 기간 가운데 산상설교가 주어지기 이전에 있었던 사건이다(마태8,2~4; 마르1,40~45).
그리고 마태오 복음에서는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라고 되어 있고(마태8,2), 마르코 복음 역시 '와서'라고 되어 있다(마르1,40).
이것은 나병환자가 동네 밖에서 격리된 채 살아야 한다는 율법의 규정(레위13,45.46)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의 본문은 마치 나병환자가 동네 안에 있다가 예수님을 보고 다가와 엎드린 것처럼 되어 있다.
하지만 루카 복음사가가 마태오나 마르코 복음서와 같이 그 정황을 상세하게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지, 나병환자가 동네 밖에 있다가 예수님이 계시는 동네에 들어온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당시 사회적 통념이나 정결례법으로는 나병환자가 부정하게 취급되었다. 따라서 건강한 사람은 그들과 접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나병환자에게 몸소 손을 대시며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예수님께서 직접 손을 대셨다는 것은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가엾이 여기는 마음(마르1,41), 즉 측은지심(연민의 정)과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 그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셨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행동 가운데는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이 잘 담겨져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깨끗하게 되어라'에 해당하는 '카타리스테티'(katharistheti; be clean)는 '깨끗하게 하다'라는 동사 '카타리조'(katharizo)의 과거 수동태 명령형이다.
그런데 '깨끗하게 되다'라는 말 속에는 깨끗하게 되는 대상의 상태가 불결하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이 불결함의 이유는 일차적으로 '나병'이 전염성이 강한 불결한 병이기 때문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도 이러한 표현가운데에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병은 레위기의 정결에 대한 규정(레위기13장과 14장)과 연결되어 있는데, 거기에서 나병(악성 피부병)은 부정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고, 죄의 속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카 복음 5장 13절의 표현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셨다는 뜻과 더불어 그 나병환자의 영적 질병인 죄의 문제까지 해결하셨다는 뜻까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만이 이러한 전인적 치유가 가능하며, 예수님을 제외하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이러한 온전한 치유를 베풀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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