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0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19. 예수 십자가 죽음이 내 죄를 대신함을 믿습니다 》
갈 3:13
〈 감기의 원인 〉
겨울입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그럼에도 감기에 걸리곤 합니다.
감기에 걸리면 누구나 ‘내가 왜 감기에 걸렸지?’ 하고 자문합니다.
① 간밤에 춥게 잤나? ② 옷을 얇게 입었었나? ③ 과로했나?
또 뭐가 있습니까?
④ 감기를 앓고 있는 가족에게서 전염되었나?
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에 갔었나?
누구나 이렇게 감기의 원인이 진단해 봅니다.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이 증상과 함께 발병 원인을 말해 줍니다.
왜 이렇게 하지요? ~ 그래야 다음에는 감기에 안 걸립니다.
원인을 찾아서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감기, 두 번 걸릴 거 한 번 걸립니다.
엊그제가 수능 시험일이었습니다.
수험생들은 자기 성적표를 받아 볼 것입니다.
좋은 점수로 만족하는 학생도 있지만, 대부분 불만을 드러냅니다.
기대한 만큼 점수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자기 점검을 합니다.
‘시험 당일 컨디션 조절에 실패했어!’ 아니면,
‘지난 여름 방학 때 너무 놀았어!’
‘시험 직전 피치를 더욱 끌어 올렸어야 해!’
사람들은 이렇게 ‘오늘의 현실에서 어제의 잘못’을 찾아내고자 합니다.
‘내가 너무 과로해서 감기에 걸렸어~’
‘내가 너무 게을러서 점수가 낮았어~’
원인이 무엇입니까?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잘못 했다’ 잘 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잘못’ 이 말을 법적 용어로 표현해 보십시오! 무엇입니까? ~ 그렇습니다. ‘죄’입니다.
우리는 늘 잘못하면서 세상을 삽니다. 그렇지요? ‘잘못’ 이 말을 신학적으로 바꿔봅니다.
“우리는 늘 죄를 지으면서 삽니다.”
☞ 사람들이 모르지 않습니다. 다 압니다!
〈 죄 중에 살면서도 〉
감기에 걸린 이유? ~ 죄 때문입니다.
시험 성적이 기대치에 못 미치는 이유? ~ 죄 때문입니다.
동의가 안 되십니까? ~ 한 번 더 입증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원에서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앞으로 6개월 밖에 못삽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야 신난다. 암 진단 받았으니, 보험료 천 만원 받고, 치료비도 받게 되었다!”
이렇게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반응하지요?
“아니,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하필 내가 암에 걸린단 말입니까?”
“나만큼 착하게 산 사람 누가 있습니까?”
중병 진단을 받으면 사람들은 이렇게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라고 반응합니다.
이러는 것은 평소에 ‘오늘의 결과는 어제의 죄 때문이다!’하면서 살았다는 반증입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옆에서 누가 “너는 죄인이야!” 이러면 화를 버럭 냅니다!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왔으면서, “나는 죄인이 아니야!” 이렇게 딴 소리를 합니다.
감기만 걸려도 ‘내가 뭘 잘못했지?’ 하는 인간이, ‘나는 죄가 없어!’
수능 점수가 낮은 것은 ‘내 잘못이야’ 인정하면서도 ‘이건 내 죄가 아니야!’
늙어 말년에 중병에 걸리니,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내가 이 병에 걸려?’
이렇게 항의하면서도 늘 ‘나는 죄가 없어’ ‘나는 의인이야’ ‘나보다 더 착한 사람은 없어!’
☞ 이것이 얼마나 모순인지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평생을 삽니다.
☞ ‘오늘의 결과는 어제의 죄 때문’이라고 여기면서도, 나는 죄가 없어!
☞ 사람들이 왜 이렇게 뻔뻔스러워졌습니까?
☞ 왜 이렇게 이율배반적인 모순에 빠져있습니까?
모든 원인이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 때문입니다.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지금부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내가 판단한다’
여기서부터 배배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고난 이후부터 인간이 판단합니다.
‘오늘의 결과는 어제의 죄 때문이다!’하면서도 ‘나는 의인이다!’ 합니다.
이것이 인류의 모습입니다. 늘 자기 죄를 들여다보면서도 ‘나는 죄 없어’ 합니다.
☞ 지은 죄도 엄청난데, 그 죄를 부인하니, 죄가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합니다.
〈 나는 죄인입니다! 〉
‘오늘의 결과는 어제의 죄 때문이다!’ but ‘나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다!’
얼마나 모순입니까? 이율배반입니다. 이것이 인류가 역사를 이어온 참 모습입니다.
인류가 온갖 똑똑한 체는 다 하지만, 이러한 이율배반 속에 빠져서 나올 줄 모릅니다.
이렇게 사는 인류, 천국 언저리에나 갈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살아가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대입해 보십시오!
그 죄는 물먹은 솜처럼, 차마 감당할 수가 없는 무게가 됩니다.
이 죄를 어찌 하겠습니까?
☞ 죄의 문제는 마치 우리 몸의 질병과도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감기에 걸렸습니다. 그 감기 어떻게 해야 나을 수 있습니까?
가장 첫 번째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나 감기에 걸렸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병원을 가고, 약을 먹습니다. 병원 갈 정도는 아니더라도 조심을 하게합니다.
몸을 따뜻하게 하고, 물을 자주 마시고, 충분히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그런데 부인합니다. 감기 걸리고도 안 걸린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면 어찌 됩니까?
감기는 만병의 근원이라고 의사들이 말합니다.
감기를 우습게 여겼다가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죽게 됩니다.
죄의 원리도 이와 똑같습니다. “나 죄인입니다”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감기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치유가 시작되듯이 죄도, 인정하는 순간부터 구원이 시작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 말은 “나는 감기에 걸렸습니다!”와 똑같은 말입니다.
☞ 예수님은 그래서 공생애 첫 마디로 “회개하라!” 선포하셨습니다.
회개는 죄를 인정하고 그 죄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감기 환자가 감기를 인정하고 감기로부터 낫고 싶다고 작정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누구도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의인이 되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똑바로 고개 쳐들고 서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의인으로 판정해 주시기 전에는 누구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죄인이 죄를 씻어내는 것을 “구원”이라 합니다.
감기는 병원에 가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죄는 어디에 가서 씻어내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 예수 십자가 죽음이 내 죄를 대신함을 믿습니다 》
〈 죄와 구원의 메커니즘 〉
오늘 설교하면서 감기 얘기로서 죄에 접근했습니다.
‘오늘의 결과는 어제의 죄 때문이다!’ but ‘나는 의인이다!’ 하는 세태를 진단했습니다.
이제는 처방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누가 처방해 주십니까? ~ 예수님께서 처방해 주십니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온갖 죄를 범하면서도 “나는 착하다! 나는 의인이다!” 이렇게 사는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직접, 처방하십니다.
예수님의 처방은 병원 의사들과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직접 나섭니다.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도 《 예수 십자가 죽음이 내 죄를 대신함을 믿습니다 》
②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 사람이 짓는 죄는 모두 율법을 기준으로 합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 세상에 주신 법, 율법입니다.
율법이라는 잣대를 갖다 대니, 목숨을 부지할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 죄에서 속량하십니다.
종이 한 장, 처방전으로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나섭니다.
③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 말씀은 구약 신명기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기록된 바”라고 하신 겁니다.
신 21: 22~23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말할 것도 없이 “죽을 죄”입니다.
“죽을 죄”를 지은 자 중에서도 매우 엄중한 죄수가 있습니다.
그런 주검은 높은 나무에 매달았습니다.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극악무도한 죄를 범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죽어서도 땅에 묻히지 못하고 나무에 매달리는 죄인이 있습니다.
이러한 죄인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여겼습니다.
나무에 달린 죄인은 그날 해 지기 전에 끌어내려 장사지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중죄인까지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몸소 나무에 달리십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고 외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죄인들의 형벌을 자신이 몸소 감당함으로써 구원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대신하여 나무에 매달려 죽으니, 이 진실을 믿고 구원받으라!”
죄인들의 죄를 따져서 어느선까지만 내가 구원한다가 아닙니다.
세상 모든 죄인들의 죄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감당합니다.
이 진리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습니다.
《 예수 십자가 죽음이 내 죄를 대신함을 믿습니다 》
〈 하나님의 구원 섭리 〉
사람은 오늘 무슨 일이 생기면 과거를 돌아보면서 원인을 찾습니다.
‘오늘의 결과는 어제의 죄 때문이다!’ but ‘나는 의인이다!’
이렇게 이율배반적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원인은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의 선악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선과 악을 내가 결정한다” 그리고 저마다 선악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모순된 삶을 살아가는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방법은 선악과를 따 먹기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사람은 죄를 회개하고, 선악의 결정권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려야 합니다.
인간 스스로는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아시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을 죄 사함을 위한 유일한 길로 만드십니다.
이 길 말고는 사람이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죄 값을 치르고, 의인이 되는 길은 없습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사람이라면, 죄의 문제를 인식할 것입니다.
죄의 문제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시인하고 죄의 값을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께서 죄의 값을 대신 치러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