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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라(눅 2:8-14)
성탄절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기쁜 날입니다. 첫번째 성탄절에 하늘에서 천군천사들이 성탄을 축하하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외쳤습니다. 이 은혜로운 날, 여러분의 심령과 삶, 여러분의 가정과 삶의 처소에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넘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메리 크리스마스!!!)
오늘 본문을 보면 주의 천사가 밤중에 베들레헴 지경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나타나 그리스도의 탄생소식을 알려 주는 내용이 소개됩니다. 실로 그들이 알리고 전한 이 소식은 세상에서 가장 복되고 기쁜 소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메시야의 강림,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천 년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타락한 이후로 끊임없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약속되었던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약전체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왕으로 오셔서 하나님나라를 회복하고 자신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주시고 온전한 구원을 베푸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에 이어지는 천사들의 메시지를 들어보면 납득이 잘 되지 않는 내용이 나옵니다. 저들이 그렇게 사모하고 기다리던 메시야가 나셨다는 이 말을 들은 목자들은 천사도 흠모할 찬란하고 영광스런 모습으로 그가 오실 것이란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목자들은 전혀 예상 밖의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천사들의 말을 다시 들어봅시다. 12절,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우리는 먼저 '표적'이란 단어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표적'이란 헬라어에서 증거, 상징, 표시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를 천사들의 증언과 연결시키면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는데 그 증거, 상징, 표시가 바로 강보에 쌓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사의 말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해서 창세 이래 지금까지 기다려 온 메시야,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의 탄생의 표적이 마굿간의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일 수 있습니까? 명색이 메시야이신데 그 성탄의 표적은 좀 더 그럴 듯해야 하지 않느냐 이 말씀입니다. 왕궁은 아니라 하더라도 마굿간은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거리낌 없이 바로 구유에 누인 아기로 오셨다는 것이 예수의 그리스도되신 표적, 확실한 증거라고 진술합니다.
그렇다면 말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가 어떻게 모든 백성이 기뻐할 메시야의 표적이겠습니까? 오늘은 이에 대해 생각해 보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아기 예수는 기쁨의 표적입니다(8-10).
목자들이 베들레헴 들녁에 밤중에 양떼를 지키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큰 빛이 비추이면서 주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8-12)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베들레헴의 어느 마굿간 말구유에 '어린 아기'가 누워있는데 바로 그가 세상을 구원할 구주라고 전하였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인류를 구원하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이야말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전하였습니다.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성탄입니다.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시러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0절 말씀을 다시 봅시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이것이 누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된다고 하였습니까?
'온 백성'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기 위해서 마구간 말구유에 누우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낮은 곳에 오셨기에 가장 낮은 사람이든 가장 높은 사람이든 누구나 만나기를 원하면 만날 수 있는 구세주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그 때 동방박사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예수님이 헤롯 왕궁에서 태어나셨거나 로마 총독의 관저에서 태어나셨다면 어떠했겠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아기 예수와 그 부모는 행복했을지 모르나 그것이 온 백성에게 미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니, 당시 헤롯 왕가와 로마 권력으로부터 이중으로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던 백성들에게 그의 탄생은 또 한 명의 압제자가 났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슬픈 소식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서 나셨습니다. 그 누구라도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가장 낮은 자리에 탄생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에 대해서 (빌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기 위해서 가장 낮은 곳에 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마태복음 20:28절에서 무엇이라고 소개하셨습니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의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어찌 높은 곳, 화려한 곳에 오시겠습니까?
소외당하고 버림받고 무시당한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시려고 예수님은 마구간 말구유에 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와 여러분은 나와 같은 연약하고 부족함 많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감사와 찬송, 기쁨의 성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탄생은 온 인류의 기쁨의 표적인 것입니다.
2. 아기 예수는 구원의 표적입니다(11-12).
(11-12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나의 구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인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러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입니다.
죄로 인해 죽어서 영원히 지옥에서 심판받을 수 밖에 없는 모든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소식은 무엇보다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죄의 결과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 나이가 들면 죽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죽지 않고 영생하는 영적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 2:7에서는 최초의 인간을 “생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면 죽음을 보지 않고 영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태초에 아담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모든 인류가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지 아십니까?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모든 인간들이 고통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과 갈등, 가난과 굶주림, 억압, 온갖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윤리적, 도덕적 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 의미의 죄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 사는 그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난 것이 저주이며, 풍요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난 것이 가난이요, 결핍인 것입니다. 그리고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난 것이 질병과 무능력이며, 생명이신 하나님을 떠난 것이 사망이며 심판인 것입니다.
이처럼 생명과 축복과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 저주와 가난과 연약함과 무능과 사망의 늪에서 영원히 고통하며 죽는 것이 바로 모든 죄인들의 운명입니다. 누가 우리를 이 저주와 가난과 무능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우리를 구해줄 수 있습니까?
(눅 1:78-79)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여기서 긍휼은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저주와 어둠과 사망의 음침한 꼴짜기에 앉아 있는 우리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돋는 해와 같이 위로부터 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저주스럽고, 어두운 삶을 밝히는 돋는 해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모든 저주와 가난과 질병과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승리자이십니다.
돋는 해같은 예수님은 우리의 해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것입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죄와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구주가 나셨습니다. 할렐루야 ! 이것이 바로 성탄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저주받은 자가 아닙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 안에서 모든 질병, 사망과 저주와 연약함에서 구원받은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의 나의 구주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의 주(왕)이십니다. 천사들이 전하는 기쁜 소식을 다시 한번 들어봅시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천사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인 동시에 주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을 구주로만 영접하고 있기 때문에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구원만 받고 그 다음은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이십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를 다스리시는 주인이시요, 왕이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우리의 왕은 이 세상 어두움 주관자, 마귀였습니다. 그는 우리를 죽이고 멸망케 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어 힘들게 살았습니다. 여러분 삶이 힘드십니까? 혹시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아시고, 우리를 다스리실 새 주인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마귀가 시키는 대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힘겹게 살고 있습니다. 자식 걱정, 재정적 염려, 장래 염려 등에 매여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책임질 수 있다는 마귀의 거짓된 생각에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 인생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출생시간, 성별, 국적 등. 그리고 우리의 미래도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키를 한 자도 더 크게 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닥칠 모든 일들을 다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발버둥쳐보지만 우리가 우리 인생을 책임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교만하게 스스로 주인되어 살고 있습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서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인생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 교만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인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교만의 뿌리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스스로 주인되어 사는 삶은 바로 우리의 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없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 삶을 다스리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살 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대신 살아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복음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복음없이 내가 주인되어 내 힘으로 사니 힘든 것입니다. 은혜없이 내 노력으로 사니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아니시니 우리 삶이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니 늘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닥쳐오는 모든 두려움, 염려, 근심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교만한 삶의 열매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번 성탄절에 우리의 모든 것 내려놓고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셔드립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우리 주 예수님 안에 쉼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에 참 안식과 위로를 얻기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멍에를 메야 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는 것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예수님의 통치를 받으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우리 영혼의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마굿간에 말구유의 탄생은 바로 구원의 표적인 것입니다. 교만의 자리에서 내려와 모든 삶을 다 주께 맡김으로 예수님이 나의 주인된 삶을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아기 예수는 평화의 표적입니다(13-14).
(13-14절)“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아기 예수님이 구유에서 나셨다는 표적의 세 번째 의미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골 1: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것이 우리 모두의 영적인 현주소였습니다. 여러분, 어린 아들이 아버지와 원수가 되어 어떻게 하루인들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신하가 임금과 원수가 되어서 어떻게 하룻밤인들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하물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는 인간이 어떻게 하루인들 마음 편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잠을 자는 것이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웃고 떠드는 것이지, 만일 영적으로 눈을 뜨게 되어 하나님 앞에 자기의 현주소가 얼마나 저주스러운가를 발견하기만 한다면 한 사람도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사는 그 자체가 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이와 같은 저주스러운 처지를 보다 못한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인간과 화해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평화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그 생각하는 것이 항상 악하였고 죄악이 가득찬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해서 홍수심판으로 노아의 여덟식구외에는 구원받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인간은 육신의 정욕에 눈이 멀어서 온통 악하고 음란하고 더러운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도성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 그 성은 불로 심판을 받아 모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깨닫지 못하고 자기 길로 가버립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길로 가버리니까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중대한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내가 직접 내려가 보아야 하겠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것도 가장 낮고 천한 마굿간에 태아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직접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수된 인간과 화목하기 위해서입니다.
에베소서 2장14-18절을 보시면 “(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무엇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까? 원수된 우리가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가게 되는 것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이 주신 평화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피값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셨을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무나 누리는 축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당시 사람들 중에는 메시야가 오실 때 정복자, 전쟁 영웅과 같은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 기대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압제하는 로마의 정부의 권력을 무너트리고 개선장군처럼 오실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여러분, 만약 메시야가 그렇게 오셨다면 과연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한 기쁨, 진정한 구원,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피흘림은 또 다른 피흘림을 초래하고,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불러 일으킬 뿐입니다. 압제자가 누군가에 의해 몰락하고 제거되었다 해도 분명 또 다른 형태의 압제가 계속되게 마련입니다.
이 땅에 참 메시야, 구원자가 오셨다는 소식을 천사로부터 들은 목자들은 구유에 누워 평화로이 잠이 든 한 아기를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천사가 찬송한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실로 아기 예수님은 평화의 표적으로 오신 것이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기로 말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표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셨습니다. 가장 약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의 표적이요 구원의 표적이요, 평화의 표적이 되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먼저 내 안에 진정한 기쁨과 구원과 평화를 회복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 가까이에는 내 사랑하는 가족과 형제, 그리고 옆집에 사는 이웃에게 이 평화의 복음을 증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