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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성모님과 함께 걷는 마음의 순례 (1) 온유함의 힘
누군가와 함께 순례를 떠난다면 어디로 향하느냐도 중요하지만, 함께 하는 이의 마음과 성향도 중요합니다. 성모님과 함께 영적인 순례의 길에 오르면서, 자연스레 묻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성모님은 어떠한 마음으로 이 여정을 함께해주실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성경 속 장면은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와 마주한 순간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구세주를 잉태하리라는 놀라운 선포 앞에서 두려움과 당혹스러움을 느끼셨음에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응답하십니다. 이 당시 성모님은 어떠한 마음이셨을까요? 진정 이 대답은 그저 단순한 동의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앞에서 자신의 내면을 열어 보이는 온유한 마음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온유함이란 무엇일까요? 온유함은 일반적으로 성격이나 마음씨가 사납거나 급하지 않고, 겸손하며 부드럽고 따뜻함을 뜻합니다. 저에게 떠오르는 온유함의 첫 번째 기억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아주 작은 사건에서였습니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는 늘 엄격하고 철저한 분처럼 느껴졌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의 저는 사소한 실수도 크게 혼날까 늘 조심스럽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형과 장난을 치며 방에서 놀다가 연필 깎기 통을 떨어뜨려 산산조각을 내고 말았습니다. 바닥 장판에는 검은 얼룩이 깊게 배어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곧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실 시간이었고 형과 함께 필사적으로 바닥을 닦았지만 흔적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아버지가 들어오셨습니다. 형과 저는 혼날 일만 걱정하며 아버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잠시 바닥을 바라보시더니 아무 말 없이 화장실에서 무언가를 들고 와서는 조용히 바닥의 얼룩을 말끔히 지워주셨습니다. 그날의 순간은 길지 않았지만 제 마음에는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야단을 맞을까 초조해하던 것과는 달리, 아버지가 보여주셨던 모습에서 참으로 온유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온유함으로 인도하시는 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8-29) 여기서 ‘온유함’이라는 표현은 희랍어 πραΰς(práus)로, 단순히 “성격이 부드럽다”라는 뜻을 넘어서는 훨씬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본래 이 단어는 야생마가 길들여져 가는 과정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야생의 말은 본래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명마라도 야생의 힘이 길들여지지 않으면, 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온유함이란 힘을 잃은 것이 아니라, 목적에 맞게 조절되고 길들여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이 길들여져 야생의 본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대로이지만 주인을 신뢰하는 마음 안에서 절제하고 조화로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서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 5,5)라고 말씀하실 때의 온유함도 바로 이 의미입니다. 강한 힘을 가졌지만 하느님의 뜻을 위해 절제하고, 그분께 자신을 맡기는 이들의 행복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성모님의 온유함 역시 이러한 의미를 지닙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앞에서 자신의 뜻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온유함을 지니셨습니다. 이 온유함이 있었기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는 하느님의 위대한 일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온유함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마리아의 모성은 우리를 하느님의 부성적인 친밀함(the paternal tenderness of God)으로 이끄는 가장 가깝고, 가장 직접적이며, 가장 쉬운 길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머니만큼 자녀들의 어려움과 외로움을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존재는 없습니다. 어머니는 자녀가 말하지 않아도 마음의 기척을 읽고, 아버지의 자비 안으로 자녀를 일깨우십니다. 그리고 그 자비는 성자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로부터 인간의 연약함을 느끼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셨습니다. 동정녀 마리에게서 육체의 연약함을 받으셨기에, 예수님께서는 고통받는 이들을 바라보며 연민과 동정심으로 다가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온유함은 성모님의 마음과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레지오 단원은 온유함을 실천하는 작은 마리아 돼야
어느 날 아버지께 들은 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당시 가족과 매우 각별하게 지내는 신부님 한 분이 계셨는데, 아버지 말씀으로는 처음에는 그분이 무척 엄하셔서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모동산 주변이 무척 어질러져 있음을 보시고, 아버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며칠 동안 그곳을 정리하고, 낡은 전등을 갈고, 필요한 작업을 꾸준히 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임 신부님께서는 깊이 감동하셨고, 이후로 아버지를 더욱 신뢰하고 자주 의지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생각했습니다. 성모님께서 아버지를 이끌어 교회 안으로 더 깊이 다가오게 하셨고, 어린 시절 제가 느꼈던 아버지의 온유함이 하느님의 일을 향한 조용한 헌신을 통해 드러나게 하셨던 것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인간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향한 연민과 따뜻한 시선을 성모님에게서 배우셨다고 언급하셨습니다. **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유년 시절부터 자신의 삶을 통해 온유함의 본을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그분의 온유함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의 때를 신뢰하며, 당신의 강인함을 하느님께 맡기며, 모든 사람에게 부드러운 마음을 간직하는 태도였습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 또한 언제나 성모님과 함께 걷는 길고 긴 순례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서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온유한 순례자이셨고, 그 온유함 안에서 하느님의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레지오 마리애의 사도직은 따뜻함과 친밀함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머물고자 하는 내적 강인함이 필요합니다. 바로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그 마음 말입니다.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을 향한 순례길에 나서는 레지오 단원들이, 이 온유함의 정신을 실천하는 작은 마리아가 되어 세상 속에서 복음을 드러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영성의 샘] 성모님과 함께 걷는 마음의 순례 (2) 봉헌의 영성
신앙의 길을 걷다 보면, 우리는 자주 봉헌이라는 말을 입에 올립니다. 너무도 익숙한 말이기에, 무심히 행해 온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봉헌은 인간이 행해 온 가장 원초적인 종교적 행위이기에 그 본래의 의미를 놓치고 습관적으로 반복하면서 살아온 것 같습니다. 유다 전통에서 피를 흘리는 희생 제물은 생명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가장 근원적인 봉헌이었고, 그 제물은 언제나 제대 위에 올려져 하느님을 향해 바쳐졌습니다. 이 전통은 가톨릭 신앙 안에서도 이어져, 봉헌을 하느님께 마땅한 제물을 드리는 행위로 이해해 왔습니다.
어린 시절 미사갈 때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어머니께서는 늘 제 손에 천 원짜리 한 장을 ‘봉헌 예물’로 쥐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돈이 언제나 성당의 봉헌 바구니로 향하지는 않았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오락실에 들러 게임을 하고 남은 돈을 봉헌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웃을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는 봉헌을 ‘내 것 중에 남는 것’, ‘내가 결정해서 떼어 보태는 것’으로 여겼던 솔직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동시에 봉헌을 은근히 거래의 방식으로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만큼 드렸으니, 하느님도 이만큼은 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라는 계산이 마음 한켠에 자리 잡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이런 생각들은 봉헌을 하느님을 향한 신앙의 표현이 아니라 교환 행위인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물론 이런 행위가 봉헌 행위가 아닌 것은 아니겠지만, 봉헌이라는 온전한 의미보다는 내 중심에 맞춘 여러 가지의 행위 중 하나로 보입니다.
20세기 프랑스의 여성 사상가 시몬 베유(1909–1943)는 인간의 내면 구조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전해주었습니다. 베유는 자신의 저서 「중력과 은총」(1947)에서 인간이 왜 그렇게 쉽게 자기 중심성에 사로잡히는지를 깊이 성찰합니다. 그녀는 인간의 자기중심적 경향을 물리적 개념에 빗대어 ‘중력’이라고 불렀습니다. 모든 생물체가 땅에 붙어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것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중력의 작용이 우리가 의도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중력은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저절로 아래로 끌어당겨지는 물리적인 현상입니다. 이러한 중력의 흐름은 인간이 지닌 죄성과 습관, 나약함과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베유는 은총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만, 다시 말하면 도덕적 개선이나, 종교적 열심만으로는 이 중력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에, 은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말하는 은총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보충되는 보조 장치도 아니고, 스스로 발전시키는 동력도 아닙니다. 베유는 은총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은총은 우리가 끌어당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중력이 멈춘 자리, 비워진 자리에 떨어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때문에 은총은 획득의 대상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자기 중심성을 잠시 멈출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은총은 바로 그 ‘멈춤’의 틈으로 들어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릴 수는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베유의 인간 이해는 비관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입니다. 베유의 사상은 은총을 통해서 자신을 비워 봉헌할 수 있는 인간 존재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은총은 힘의 응집 속에서 오지 않고, 계산 속에서도 오지 않으며, 오직 비움과 침묵, 그리고 기다림을 준비한 이들에게 내려집니다. 이러한 통찰은 봉헌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뒤흔듭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봉헌이 “하느님께 이런 일을 했으니, 나도 할 일을 다 했다”라는 자기 확인이 아니라, 나를 비워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존재의 태도임을 알게 됩니다. 이는 교회의 전통 안에서도 이미 분명히 강조되어 온 바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봉헌’(devotio, 신심)이 단순히 외적인 행위, 곧 소유물을 바치는 행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참된 봉헌에는 반드시 내적 헌신, 곧 마음의 봉헌이 함께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외적 봉헌은 눈에 보이기에 분명하지만, 내적 봉헌은 훨씬 더 어렵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바치는 것은 가능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판단, 자신의 방식과 계획을 내려놓는 일은 더 큰 용기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아퀴나스에게 봉헌은 물질 이전에, 의지와 마음의 방향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성모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성모님의 봉헌은 하느님을 위해 ‘무엇을 드렸다’라는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바치신 분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모님 자신이었습니다. 성모님의 봉헌은 성전에 어떤 예물을 바친 사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 되는 봉헌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 속해 있음을 받아들이는 전인적인 동의였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계획이나 이해를 앞세우지 않으셨고, 하느님의 뜻이 당신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셨습니다. 이 봉헌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의 전 생애는 이 봉헌의 응답을 날마다 새롭게 살아낸 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봉헌은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 방식이 되었습니다.
레지오 단원의 봉헌은 특별한 일을 더 많이 하겠다는 결심이 아닙니다. 또한 내 방식으로 선을 이루겠다는 의지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제 자리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이 다짐이 봉헌에 대한 레지오 단원들 신앙 고백의 중심입니다.
봉헌은 내가 무엇을 더 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내 중심성을 내려놓는 용기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조용히 일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우리는 말하지만, 침묵할 줄도 압니다. 우리는 활동하지만, 결과를 소유하지 않으려 애씁니다. 우리는 수고하지만, 스스로를 중심에 두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이 모든 태도는 자신을 비워 하느님의 은총이 머무를 공간을 마련하려는 봉헌의 실천입니다. 성모님과 함께 걷는 이 두 번째 순례의 길에서, 드리는 것의 크기가 아니라 전부를 드리는 봉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계산하지 않되 전 존재로 응답하는 봉헌의 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모님께서 늘 우리를 이끌어 주시어 우리의 봉헌이 더 단순해지고, 더 깊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영성의 샘] 성모님과 함께 걷는 마음의 순례 (3) 기도, 청원과 감사
삶은 언제나 고단하고 예기치 못한 일로 가득하기에, 우리 힘만으로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매일 빠지지 않고 기도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삶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고, 이끌어 주시기를 청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기도는 우리 삶을 지탱해 주는 가장 소박하면서 아름다운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정말 기도가 절실한 순간’, 가장 먼저 하게 되는 기도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많은 이들이 ‘묵주기도’를 떠올릴 것입니다. 매일 기도를 바치고 성사를 거행하는 저 또한, 마음이 다급해지거나 간절해질 때면 무의식적으로 묵주를 먼저 손에 잡습니다. 그리고 묵주기도를 봉헌하며 전구를 청합니다. 어쩌면 이 습관은 제 마음 안에 새겨진, 신앙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렸을 때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이른 아침 잠결에 눈을 뜨면, 새벽 미사를 다녀오신 어머니께서 제 머리맡 의자에 앉아 계셨습니다. 성모상이 놓인 집안의 한구석 자리에서 묵주 알을 조용히 굴리며 기도하고 계셨지요. 어렴풋한 기억에 어머니께서는 그 시절 무엇이 그렇게 청할 것이 많으셨는지, 기도 지향을 적어 놓고, 봉헌하실 묵주기도 단수를 적어 놓으셨던 것 같습니다.
또 하나의 기억이 있습니다. 유학 시절, 한동안 몸과 마음이 몹시 좋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급히 귀국해 치료에 전념했지만, 몸이 채 회복되기도 전에 다시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습니다. 어찌 될지 모를 어둠 앞에서 아버지께서는 묵주기도 봉헌 단수가 빼곡히 적힌 쪽지 하나를 건네주셨습니다. 아파하는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는 일뿐이었던 아버지의 마음이 그 종이 한 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저를 기도하게 하셨구나”
사실 저는 성모 신심이 그리 강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늘 하느님께 부족한 제 신심을 고백하며, 성모님을 향한 마음을 키워달라는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신학생 시절, 방학 때 독일 프라이부르크에 머물 때의 일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어학연수 중이던 동료 신학생이 저를 보러 왔습니다. 그 신학생은 이곳에 오기 전에 루르드를 다녀왔는데, 저를 만나서는 줄곧 “신학생이라면 어머니의 집에는 꼭 들러야 한다”라고 강하게 말을 하였습니다. 루르드를 아직 다녀오지 못한 저를 어찌나 타박하던지, 그 말이 계속 가슴에 남았습니다.
귀국이 가까웠지만, 저는 서둘러 기차표를 끊었습니다. 프라이부르크에서 루르드까지는 기차를 세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먼 길이었습니다. 역무원은 환승 시간이 촉박하니 승강장을 잘 확인하라고 당부했지만, 저는 기차 갈아타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라며 조금은 귀찮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시련은 출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첫 기차가 달리던 중 갑자기 멈춰서더니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스마트폰조차 없던 시절이라, 환승을 놓치면 어디서 어떻게 밤을 지새워야 할지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막막함 속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손을 더듬어 묵주를 찾는 일뿐이었습니다. 저는 온 마음을 다해 매달렸습니다. “성모님, 제발 다음 기차를 타게 해주십시오.” 묵주 알을 굴리며 기도했지만, 첫 기차는 이미 도착 예정 시간보다 크게 늦어졌습니다. 저는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기차에서 내려 환승 열차 상황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음 열차도 연착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간신히 그 열차를 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 열차도 계속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연착했고, 그런데 마치 기적처럼 다다음 열차까지도 연착되어 있어, 저는 그날 밤 자정을 훨씬 넘어 결국 루르드에 도착했습니다. 그 순간 제가 느꼈던 것은 “기도를 이루어주셨다”라는 단순한 감사함을 넘어 “성모님께서 저를 기도하게 하셨구나”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준비 없이 길을 나선 저를, 성모님께서 기도의 자리로 이끄셨다는 느낌이 제 안에 강하게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루르드에서 보았던 광경들은, 성모님께서 왜 그 동료 신학생을 통해 저를 이곳으로 오게 하셨는지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곳에는 병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치유의 기적을 바라며 모여 있었지만, 제 눈에는 묵묵히 봉사하는 수백 명의 봉사자가 보였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시대의 기적은 돌이 빵이 되고, 낭떠러지에서 천사들이 사람을 받쳐 주는 일이 아니라, 내 안에 없던 마음이 생겨 다른 이를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변화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부제품을 앞둔 저에게 참된 봉헌과 기도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해준, 매우 소중한 은총 체험이었습니다.
성모님께 청원이란 하느님의 뜻에 기대어 드리는 신뢰
전통적으로 기도는 크게 ‘청원’과 ‘감사’라는 두 기둥으로 이뤄집니다. 우리는 바라는 것들을 하느님 아버지께 청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의 간절한 바람을 외면하지 않으시기에,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여 주십니다. 그러나 ‘받는 것’에만 마음이 머물게 되면, 주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뜻을 알아차리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감사기도가 필요합니다. 감사는 단순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드리는 인사가 아닙니다. 감사기도는 지금 내게 주어진 모든 은총을 돌아보고, 그 사랑에 응답하며 내 삶을 기꺼이 봉헌하겠다는 다짐입니다. 때로는 고단하고 가파른 길 위에서도 “주님께서 이 길로 나를 이끄신다”라는 믿음으로 고백할 때, 우리의 기도는 비로소 깊고, 성숙해집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두 가지 기도를 삶으로 몸소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께서는 아드님께 포도주가 필요하다고 겸손히 청하셨고, 천사의 예고 앞에서는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하시며 자신의 삶을 온전히 봉헌하셨습니다. 성모님께 청원이란 하느님의 뜻에 기대어 드리는 신뢰였고, 감사는 그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순명이었습니다.
레지오 단원인 우리는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아버지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란 결국 성모님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굴리는 묵주 알 하나하나가 간절한 청원이 되고, 또 깊은 감사가 될 때, 우리의 영혼은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것입니다. 성모님과 함께 걷는 이 마음의 순례가 우리 모두를 참된 은총의 길로 인도해 주기를 소망합니다.
[영성의 샘] 성모님과 함께 걷는 마음의 순례 (4) 연민과 동행, 약자를 향한 어머니의 마음
사순 1주간 주일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우리 삶에도 광야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 한켠에 설명할 수 없는 메마름과 외로움이 자리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 이유 없이 찾아오는 공허함, 그리고 문득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들. 어쩌면 우리 안에 스쳐 가는 이런 모습들이야말로 광야일지 모릅니다.
얼마 전, 평소 알고 지내던 이들과 함께 ‘자신의 광야’에 대해서 나눔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예상보다 훨씬 깊은 이야기를 꺼내 놓으셨습니다. 그분은 지난날 어머니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지만,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서 들은 말로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마치 자신이 살아온 시간 전체를 부정당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지금은 바로 그런 광야를 지나고 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평소에 그런 아픔을 드러내시던 분이 아니었기에, 그분의 광야는 더욱 뜻밖이었고 마음 깊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조용히 성모님께 그분을 위한 전구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성모님께서 약한 이들의 전구자로 우리 곁에 계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상처받은 이들의 어려움을 곧바로 없애 주시는 방식으로 일하시기보다 그들의 아픔 곁에 함께 머무르시며 하느님께 전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 성경 속의 마리아 – 약자의 노래를 부르다
성모님의 연민과 동행은 성경 안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엘리사벳을 찾아가신 성모님은 마니피캇을 노래하셨습니다. 이 노래는 단순한 개인적 감사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노래이며, 역사 안에서 억눌린 이들을 향한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하는 찬가입니다. “그분께서는 …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성모님은 스스로를 “비천한 종”이라 부르시며, 권력의 자리에 서 있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변방의 젊은 여인이었고, 아무런 사회적 영향력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 모습은 십자가 아래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모든 제자들이 흩어진 자리에서 성모님은 끝까지 서 계셨습니다. 아드님의 고통을 막을 힘은 없으셨지만,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교회가 성모님을 ‘고통의 어머니’라 부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모님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함께 서 계시는 동행자의 전형이십니다.
2. 역사 속의 마리아 –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가시다
성모님의 약자와의 동행은 성경 이후에도 이루어집니다. 1531년 멕시코 테페약(Tepeyac) 언덕에서 일어난 사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당시 원주민들은 식민지 통치를 당하며 억압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는 권력자가 아니라 가난한 원주민 후안 디에고에게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내 작은 아들, 내 가장 작은 아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말씀은 단순한 애칭이 아니라, 짓눌린 이의 존엄을 다시 일으키는 위로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또한 성모님께서는 그곳에 성당이 세워져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이 위로받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하여 황량한 언덕은 위로의 장소가 되었고, 소외된 이들의 자리는 은총의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교회는 이 사건을 통해 성모님을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로 고백합니다. 이는 어떤 이념의 언어라기보다, 마니피캇에서 이미 드러난 신앙의 고백을 이어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는 약자를 잊지 않으시며, 성모님께서는 그 구원의 길에서 가장 먼저 약자 곁에 서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3. 오늘의 교회와 마리아 – 교황들의 목소리
오늘날 교황님들께서도 약자들의 고통과 불안을 성모님의 전구에 맡기고 계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난민과 이주민, 그리고 세상의 무관심 속에 놓인 이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시며, 그들의 눈물을 성모님께 의탁해 오셨습니다.
레오 14세 교황님께서도 전쟁과 위기, 그리고 급격한 기술 발전과 사회 변화 속에서 흔들리는 인류를 위해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셨습니다. 특히 2025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는, 로마 스페인 광장의 ‘원죄 없으신 성모님 기둥 동상’ 앞에서 성모님께 평화를 위한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오 마리아여, 희망이 꺼지지 않은 수많은 자녀들을 굽어보소서. …
거룩한 문들이 열렸듯이, 이제는 다른 문들도 열리게 하소서. 가정의 문들, 평화의 오아시스의 문들이 열려 그 안에서 존엄이 다시 꽃피고, 비폭력을 배우며, 화해의 예술을 익히게 하소서. … 교회는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 동시대인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를, 특히 가난한 이들과 모든 고통받는 이들의 삶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 우리는 준비되지 못한 채, 무력한 듯 느껴지는 변화들 속에서 씨름하고 있습니다. … 우리가 언제나 백성과 함께, 백성 가운데 있는 교회가 되게 하시고, 정의와 희망을 부르짖는 인류 안에서 누룩이 되게 하소서. …
어머니, 평화의 모후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4. 레지오 단원들의 자리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전쟁터 한가운데 있지 않고, 난민의 처지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모님의 시선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말 못 할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 신앙 안에서 흔들리는 이들, 가정 안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곁에 조용히 함께 있으며, 기도로 동행하며, 위로의 한마디를 건네는 것, 이것이 바로 성모님의 연민을 이어가는 길입니다.
레지오 마리애는 성모님의 마음을 배우는 곳입니다. 성모님은 낮은 자리에서 고통받는 이들 곁에 서서, 하느님께 그들을 맡기셨습니다. 레지오 단원 여러분, 성모님의 시선을 따라 함께 걸으면 좋겠습니다. 연민과 동행의 길 위에서,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희망의 표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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