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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의지하라
시편 115:1~14
오늘 읽은 시편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데 이 시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임을 미리 알고 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도 어려운 병을 고친 다음에 그들에게 절하면 이것을 말리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15편의 중심입니다. 사람에게 영광을 돌아가게 하지 말고 모든 존귀와 영광은 주님의 이름에 돌릴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면 안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세요.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왜 그래야 합니까? 우리 인간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우리 자신의 의로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행한 무엇이 있다면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우리가 가진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자비의 은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크게 찬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신명기 9장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에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감사와 찬양은 이와 같이 겸손한 곡조로 불러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그리고 반복해서 “여호와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시고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하였습니다. 모든 영광은 주의 이름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행해진 모든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서 이뤄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비를 영화롭게 하시며 그의 약속을 성취하십니다.
우리 인간에게 씌워지려는 모든 면류관은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 벗어 드려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그것을 쓰고 있으면 우상이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은 약하기 때문에 여간 조심하지 아니하면 주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의 면류관을 대신 쓰고 타락해버리고 마는 경우가 되고 맙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첫 부분에 있는 말씀과 마찬가지로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합니다. 사람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으면 안됩니다. 역사 이래로 모든 독재자들이 인간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 받기 위해 일했고, 인간을 우상화했고, 결국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7-2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열방의 비난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2절 말씀에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저희가 그렇게 말합니까? 저희는 하나님이 계시는 사실을 알지 못해서 그럽니다. 그의 약속과 은총으로 항상 우리에게 가까이 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저희가 그렇게 말하도록 내버려두십니까? 더구나 왜 이스라엘을 낮추셔서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허용하십니까? “하나님이여, 우리의 소생을 위해서라도 나타나 주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을 주십니다. 3절 말씀에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이방 신들이 있지 않는 하늘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의 처음과 나중이시며 우리와 항상 가까이 계십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 신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열방의 신들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이방의 신들은 형체가 보이지만 실상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저희는 처음에 해와 달을 섬겼습니다. 그 후에는 신상을 만들어서 섬겼습니다.
4절 말씀을 보세요.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5절 이하에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호세아 8장 6절에 있는 말씀대로 “이것은 공장이 만든 것이라 참신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상에다가 “입과 눈과 귀와 코와 손과 발”을 만들었지만 그 안에는 아무런 생명이 없고 감정도 있을 수 없습니다.
바알의 신상에는 아무런 음성도 없으며 누구에게도 응답해 주지 아니했습니다. 바알 신상들은 그들 앞에서 예배하는 자들이 엎드리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저희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저희의 기도 소리가 아무리 커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분향이 아무리 좋은 향기를 낸다 해도 맡을 수 없었고, 그들에게 주어진 예문을 만지지 못했으며, 예배하는 자들에게 은사를 베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우상을 만드는 사람에 대하여
본문 8절에 말씀했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재간은 인정할 수 있으나, 우상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고 우둔한 것을 말해 줍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거역하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셨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내 버려 두사” 하는 말이 세 번나옵니다.
24절에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했고,
26절에 “하나님은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28절에 보면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와 같은 인간들이 생각하기로는 자신들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이 아닌 것을 경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이라고 생각해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줄 압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된 것은 인간의 자유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우리를 이와 같은 정욕대로 내어버리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무리 죄를 범해도 아무런 벌도 없고 그대로 세상 사람의 눈으로 만사 형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내 버려 두어서 자기 마음대로 살게 하는 사람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로마서 1장 29절 이하에 “모든 불의와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 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시편 기자는 9절로부터 11절까지 말씀에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말씀을 거듭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 같이 읽어보십시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 이시요 너희 방패 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 이시요 너희 방패 시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 이시요 너희 방패 시로다”
여기 ‘이스라엘아’ 한 것이나 ‘아론의 집’이라고 한 것이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라고 한 것은 다 같은 뜻입니다. 택함을 받은 백성, 구원함을 입은 사람들을 가리킨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 번씩 거듭한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권면을 매우 강조한 것을 의미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까? 왜 우리가 주님을 의지해야만 합니까?
그는 우리의 도움 이시요, 방패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주시고 누구든지 저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는 안 계십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주님의 나타나심을 보고 예수님을 모든 사람에게 소개하면서 외친 말씀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장차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세상 사람들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신 지시고 고난받으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 물로 주려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의미 깊은 사실을 로마서 5장 6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 되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건져 주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주는 이가 많이 있습니다. 좋은 도덕적인 교화를 주는 이도 많이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나 지식이나 철학, 사상을 소개해 주는 이도 많이 있습니다. 혹은 아름다운 생활로써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귀한 사람이 세상에 많이 있지만 나를 위하여 대신 죽고 나를 죄악 가운데서 건져내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는 안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지식을 구하려면 다른 사람에게 갈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과학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배우려고 하면 과학교수님이나 기술자에게 가면 될 것입니다. 철학을 배우려면 철학교수에게, 정치학을 배우려면 정치학교수를 따라가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사실 죄사함을 받기 원하고, 내 영혼이 구원을 얻기 원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 앞에 나아오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 하여 주시는 구세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주님께서는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 믿는 사람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주는 우리의 도움이십니다. 지금도 우리를 도와주시는 이는 주님밖에 안 계십니다. 유교 같은 데서는 물론 지금까지도 그들의 교조가 되는 공자 선생의 무덤을 자랑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회교 같은 데서도 모하멧의 무덤을 자랑합니다. 불교 같은 데서도 석가의 무덤을 지금까지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우리 기독교에서는 자랑할 만한 무덤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있다고 하지만 그 무덤은 빈 무덤일 뿐입니다. 왜요?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위대한 전도자들이, 오늘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이 약속을 믿고 어디서든지 어떤 어려움이 가로놓인다 할지라도 조금도 겁내지 않고 전도에 온 힘을 기울였고, 지금도 힘을 다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마음의 문을 열고 살아 계신 주님을 영접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들과 같이 계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영적인 체험을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빌립보서 4장 13절에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의지할 때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우리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그의 신앙체험을 간증한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도들이 그러했고, 세기를 통하여 참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살아 계시고, 그들과 같이 계시고, 그들을 도와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의 도움이시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일찍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같이 걸어가시듯이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믿는 성도들과 동행하시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을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은 지금도 능력으로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외로울 때 하나님은 지금도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병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권능을 베푸십니다.
우리가 시험 당할 때 우리로 하여금 바른 길을 걷게 하십니다.
우리가 슬픈 일을 당할 때 위로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근심과 걱정에 싸일 때 하나님께서 기쁨과 평화로 대신하여 주십니다.
이 어려운 세상 길을 걸어가는 우리를 항상 권고하시고 도와주시는 이는 주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우리를 향하여 외치셨습니다. “무릇 목마른 자는 내게 와서 마시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목마르지 아니할 터이요 그 속에서 생수가 되어 영원토록 솟아나리라” 마른 광야 같은 인생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에게 늘 생명수로 공급해 주고 계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까?
그가 우리의 소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의지해야 합니다. 인생의 길은 대체로 외롭습니다. 죽음의 길은 더욱 외롭습니다. 누구도 같이 할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친구가 쓸데없고, 부모나 자녀가 소용없고 부부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때는 세상에서 가졌던 모든 소망의 줄이 다 끊어지는 때입니다. 이와 같은 때에도 오직 우리에게 최후의 소망을 주시는 분은 주님밖에 안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있을 곳을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으로 영접하리라”
인간의 모든 소망의 줄이 다 끊어진다 해도 주님만은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십니다. 세상의 어떤 무엇이 우리에게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소망은 우리에게 만족을 줄 수도 없거니와 만족을 준다고 해도 잠깐 지나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소망은 참 소망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보이는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8장 24-25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6-18)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이 소망이 있는 자마다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 주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하십니다. 세상의 것은 변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은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갈대 같은 애굽 혹은 상한 갈대 지팡이 같은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세상 사람이 볼 때는 애굽이 철통같고 강한 나라요, 변함이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에는 상한 갈대 지팡이처럼 보였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그러므로 의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말씀하시면 말씀하신 대로 이루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만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 이시요 너희의 방패 시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절대 안전합니다. 돈을 의지하고 권세를 의지했다가 실패하는 사람은 많이 있어도 하나님을 의지했다가 실패하는 경우는 전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몰아치는 모든 악의 세력을 막아내는 방패가 되십니다.
끝으로 12-13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무론 대소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생각하십니다. 우리를 한순간이라도 잊어버린 적이 없으십니다. 왜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항상 우리의 처지와 우리의 부족한 상황과 죄의 짐을 기억하시며,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기억하시며, 우리와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십니다.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에게로 향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으로부터 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족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경우는 있어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신실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모든 백성에게 복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에게 선한 것을 말씀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더욱 좋은 것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집에 복을 주시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백성에게 특별히 주시는 축복을 의미합니다. “아론의 집에 복을 주시리로다” 하신 말씀은 교회를 통해서 임하는 축복을 의미하는데 민수기 6장 23절에 보면 제사장들은 백성을 축복해 주는 자들이었고, 그들의 축복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오늘도 교역자가 교인을 위해서 축복의 기도를 드리는 것은 그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무론 대소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34, 35절에도 베드로가 이 진리를 깨닫고 말했습니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하나님은 젊었거나 늙었거나 무론 대소하고 저희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 축복이 어떤 축복입니까? 14절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곧 너희와 또 너희 자손을 더욱 번창케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축복하는 사람은 번창합니다.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처음으로 축복하신 말씀이 “생육하고 번성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번창하는 데 있습니다. 가족이 번창하고 재산과 명예가 번창함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은 영적으로 축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식과 지혜의 증가는 물론 은혜와 거룩함과 기쁨을 넘치게 하십니다. “너희 자손을 더욱 번창케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우리는 계속 번창할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4장 18절의 말씀과 같이 “너희는 비추이는 광명”처럼 완전한 상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부모가 저희의 자녀들이 지혜와 강건함에 있어서 번창하는 것을 보는 것은 하나의 위로가 됩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자손에게 돌아갈 축복이 있습니다. 15절에 “너희는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복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를 저희의 “도움과 방패”로 삼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바로 천지를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축복은 아낌이 없습니다. 풍요한 축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넘치는 축복을 안겨 주십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절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영원히 찬송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보이는 죽은 신과 보이지 않는 살아계신 하나님
성경본문 : 시편 115: 1-18
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2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3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4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5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6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7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8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9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10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11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12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13 대소 무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14 여호와께서 너희 곧 너희와 또 너희 자손을 더욱 번창케 하시기를 원하노라
15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16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인생에게 주셨도다
17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18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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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며 묵상하며 :보이는 죽은 신과 보이지 않는 살아계신 하나님(115:1-18)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을 때, 열방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멸시하고 이스라엘 하나님을 조롱하였습니다(2절). 때로 우리의 인생도 고난과 절망의 상황을 맞이할 때, 세상과 사단은 우리를 향하여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우리 하나님을 멸시하고, 우리를 조롱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진리는 무엇입니까?
이방인들이 믿는 신은 보이는 신이지만 결국은 죽은 신이라는 사실입니다.
고대 근동세계에서 예배용 우상은 아주 지천(至賤)에 널려 있었습니다. 짐승이나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던 이러한 우상들은 잘 돌보고 먹여야 했습니다. 즉 제사상을 차리듯 음식과 과일 및 음료를 잘 차려서 하루에 두 번씩 공궤를 해야 했습니다. 또한 우상의 꾸밈에도 굉장히 신경을 써서 멋지고 위세 있게 보이도록 장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상 안에 신이 거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이 그 안에 거할 수 있도록 씻어주고, 향을 뿌리고, 화장품으로 치장시켰습니다. 은금을 가지고 화려하게 만들었습니다(4절).
그러나 그러한 우상은 여러 기관이 있으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입니다(5~7절). 발이 있지만 사람이 메어 나르는 존재입니다(7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에나 현대에나 우상 안에 신의 생명이 들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상들은 생명이나 감정이 없기 때문에 그것들을 신뢰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소용없는 것은 고사하고 화를 자초할 것입니다. 우상을 만들고 그것들을 섬기는 자들은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우상의 허무함같이 허무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8절; 롬 1:21~23).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 살아계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시편 기자는 죽은 우상을 신뢰하는 어리석음과 위험에 대한 표현에서 돌이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지혜와 복에 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반복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방패시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9~11절).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이방인들의 죽은 우상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들이 회복되고 복을 받게 되는 것은 우상 때문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때문임을 선포합니다(12~15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생각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12절).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손에 만져지고 눈에 보이는 사람이 만든 우상(4, 8절)이 아닙니다. 손에 만져지지 않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시며(3절), 천지를 창조하신(15절) 살아계신 하나님 이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믿음의 근거가 사람이 만들어서 손에 만져지고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히 11:1~3).
일용할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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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 멸망 재촉하는 우상숭배
1938년 9월9일 평양 서문밖교회. 188명의 총대들이 모여 제27회 장로회 총회를 열고 있었다. 방청이 금지된 이날 각 총대 곁에는 일본 형사가 붙어 앉아 삼엄한 분위기를 조성했고, 결국 신사는 종교가 아니므로 참배는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며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당시 선교사 블레어는 “불법이오”라며 이의를 제기했으나 묵살당한 채 신사참배가 결의됐다. 사전에 일경(日警)은 총대들에게 총회에 참석하면 신사참배는 죄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할 것, 신사참배 문제가 상정되면 침묵할 것, 그렇지 않으면 총대를 사퇴하고 출석하지 말 것을 강요했다. 1938년 9월10일 오전 10시30분. 평양 경찰서장의 각본대로 신사참배는 가결됐다. 총회가 우상숭배를 가결한 것이다. 그로부터 63년이 지난 오늘 일본 총리는 신사참배에 나섰고, 우익단체들도 때를 기다렸다는 듯 신사참배를 들고 나섰다. 우상숭배로 망한 일본이 한 세기도 지나기 전 같은 전철을 다시 밟고 있다. 단 다른 것이 있다면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발로 걸어가 참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형태와 형식이 어떻든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신다. 그리고 멸망의 원인이 된다. 일본은 이 점을 두려워하라.
박종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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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며 적용하며
1. 이스라엘 공동체의 간구와 탄식하는 모습이 어떠하며(1~3절), 그들의 이방 우상들에 대한 조소와 정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4~8절)?
2.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권고와 축복의 모습이 어떠하며(9~15절), 그러한 권고와 축복을 받은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16~18절)?
3. 당신은 무엇을 의지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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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하며 간구하며
하나님 아버지,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것을 좇아 살아갑니다.
썩어지고 없어질 것을 좇아 살아갑니다.
제가 그러한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