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수(喜壽)의 이별
이 수 영
그는 갔다. 남은 사람들의 가슴에 한 점 안타까움이라는 흔적을 남기고….
눈물은 액체로 흘러 몸 밖으로 사라지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가슴에 뭉쳐 있다가 꿈속에서, 산길에서, 그리고 술자리에서 조금씩 풀려 나와 내 마시는 술잔에 흘러듦을 나는 내 의지로 막을 수 없었다.
희수(77세)라면 살만큼 살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요즘 같은 장수 시대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다. B온천으로 몇몇 동료들과 기분 좋게 나들이하고 돌아오는 길로 입원한 그는 2개월 남짓 투병 후 병명도 밝히지 못한 채 벽력같은 부음으로 곁을 떠났다.
그는 막걸리를 좋아했다. 그가 마시는 술잔에서는 꿀꺽꿀꺽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울대가 꿈틀대고 다 마신 잔에서 입을 뗄 때는 ‘쪽’소리와 함께 절로 터져 나오는 ‘커어’라는 감탄사가 옆 사람의 술맛까지 더하게 했다. 그러고는 손등으로 입을 쓱 닦아내고 입맛을 쩝쩝 다시는 품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그는 술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그저 기분 좋을 만큼 즐기는 애주가랄까. 그래서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안주도 딱 한 두 점, 그러니까 술도 안주도 좋아는 하지만 탐하지 않았고 세상사 모두에 욕심이 없었다. 평생을 절에 다니며 공양하던 부처님을 닮았음일까?
당신과 함께 제법 여러 차례 등산을 했다. 같이 걸으면 말이 없어도 심심치 않았다. 큰 키에 허리를 앞으로 약간 구부리고 앞장서서 허위허위 산을 오르는 모습은 결코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산이 사람을 닮았는지 사람이 산을 닮았는지, 한 번도 빨리 가자고 채근하거나 길을 잘못 들어도 실망하지 않았다. 그냥 가다보면 길이 나온다는 거였다.
그리고 땀을 흘리며 올라온 정상에서 마시는 딱 한 두 잔의 정상주를 그렇게 좋아했다. 그는 소식가였다. 그 큰 체구에 몇 숟갈 밖에 안 되는 식사, 그것도 가져 온 숭늉이나 물에 말아 후루룩 들이켜는 날이 많았다. 먹는데도 욕심이 없었다. 가져온 양갱이나 과일 등의 간식도 남 주기 바빴다.
그는 어린 아이들을 정말 좋아했다. 엘리베이터나 지하철, 버스 그리고 길거리에서 부모와 함께 걸어가거나 유모차에 탄 아이를 보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입이 함박처럼 벌어지고 무슨 말이라도 건네야 직성이 풀리는 듯 먼저 인사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는 천생(天生) 동심을 닮아 있었다.
어느 부분에서 그는 단호한 면도 있었다.
야하게 옷을 입고 다니는 젊은이들을 늘 못마땅해 했고, 늙은이가 야단스럽게 치장한 것은 더욱 못마땅해 했다. 서실에 기분 좋게 출근한 날은 예의바른 젊은이를 만났거나 수수하고 소박하게 차려입은 여인을 본 날이었다.
그는 제법 넓은 텃밭을 가꾸고 있었다. 텃밭 옆에는 큰 밤나무가 있었고 밭 둑에는 두릅나무, 옻나무 등의 나무들이 다투어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부지런한 손끝에서 여러 가지 채소들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나도 스무 평 남짓 남의 땅을 빌려 텃밭을 가꾸는 형편이라 가끔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고 모종이나 씨앗을 얻어 가꾸기도 했다.
어느 날 귓속말로 자기 밭에 한 번 오라는 거였다. 가까운 일요일 나는 몇 번이나 다녀 본 대구 스타디움 오른쪽 골짜기의 내환지와 청계사를 지나는 등산로를 따라 그의 텃밭이 있는 Y골로 넘어 갔다.
막걸리 두 통과 김밥 두 줄 그리고 약간의 간식을 챙겨 찾아간 당신의 텃밭에는 가져가기 좋게 토막토막 잘라 놓은 옻나무와 참나물, 머위 그리고 부드러운 참취 나물이 한 보따리였다.
그날 나는 그것을 가져와 당신의 숨결을 느끼며 아들, 손자, 며느리까지 모여 얼마나 맛있게 먹었던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거의 같은 시기에 서예에 입문하면서 부터였다. 벌써 10년 가까이 되었지만 우린 인연이 깊었다. 같은 서예가의 체본을 받아 수년 동안 같은 대회에 같이 입상하고 그리고 서예 작가가 되기까지 우연찮게도 우리는 늘 함께였다.
서예를 하면서도 그는 화가 날 정도로 겸손했다. 잘 쓰면서도 늘 자기는 못 쓰고 글씨가 안 된다는 거였다. 모르기는 해도 가슴에 당신만이 아는 응어리가 뭉쳐서 그걸 풀어내느라 억지를 부리는 방편이었을까?
그는 그런 말을 할 때마다 한숨과 함께 자조어린 모습을 했다. 그러면서도 서실을 청소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헌 물건을 고치는 등 온갖 궂은일은 찾아서 했다.
당신이 떠나고 며칠 동안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밥맛도 없었다.
하루는 저녁 식탁에 막걸리 두 통과 잔 두 개를 놓고 혼자서 술을 마셨다. 잔 하나는 내 잔이고 또 하나는 그대의 잔, 부딪히고 권하고 혼자서 다 마셨지만 회한은 그대로 남았다.
이제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다.
왜냐하면 내가 줄곧 당신의 잔을 빼앗아 먹는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눈물은 눈에만 맺히는 액체인 줄 알았는데 그게 가슴에 응어리로 맺혀서 더 오래 남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잘 가시오!
늘 후학이고 후생인 나도 언젠가는 그날이 오겠지만 떠나는 순간은 당신처럼 아름다웠으면 좋겠소.
2015. 8. 16
첫댓글 마음에 와 닿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참 아름다운 교분임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애틋한 추모가있으니 꼭 극락왕생하셨을겁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어린아이 같이 천진난만하고 욕심없었던 좋은 동료를 떠나보내셨군요. 아직 좀 더 살아계셔야 할 나이인데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소 함께하였던 일들로 가슴이 메어지고 그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눈물이 나시겠지요.
회자정리라지만 더욱 사모치도록 그리움으로 남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은 아마도 선생님에게 삶의 의미를 크게 부여
해주신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후일 두분께서는 또 다른 세상에서 만나실수 있다고 믿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