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디카시인가?
생활 예술의 한 장르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태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Ⅰ.
문학은 진화하는 것이다. 몽테뉴의 비문학적 에세이가 242년 후에 태어난 찰스 램에 이르러 문학적 에세이로 변용되는 것을 우리는 보아왔다. 독립된 예술로 존재할 수 있는 영상이미지와 시를 디지털 공간을 통해서 매개한다는 이 마법 같은 진화는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그 다양한 결합 방식에 따라 혹은 디지털 미디어와의 다양한 응용 여부에 따라서 디카시는 시적 실천의 영역을 넓힐 수 있는 장점 또한 가지고 있다. 미디어의 변화에 부응하여 시의 외연을 확대시킬 수 있는 디카시야말로 생활 예술의 한 장르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태라 하겠다. 언어 예술의 총아였던 정통시는 문학의 위기에도 나름의 향유계층과 예술의 본성인 난해성을 기본으로 건재해야 함이 마땅하다. 모든 삶의 가치가 실용으로 환원된 이 시대의 요구로부터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시는 문학의 총아로서 고상성과 높은 예술정신으로 디카시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을 것이다. 이미지가 삶―시간―세계를 대변하는 21세기의 문화적 징후 속에 문자시보다는 디카시의 접근성이 더 크리라 예견된다.
Ⅱ.
이런 시점에서 사진과 시를 접목시키는 새로운 작업은 시대성을 성찰한 결과로 보일 수 있다. 작가는 시대를 따라가거나 앞서가야 하질 않는가. 문학과 관계가 밀접한 ‘전선미’의 ‘미’는 미래적 관점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디카시는 사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한 순간의 장면을 보고 사진을 찍고 그 장면에서 떠오르는 감흥을 최대한 짧게 촌철살인의 정신으로 그려내는 디카시는 일본의 하이쿠와 우리나라의 선시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면 된다. SNS 소통환경 속에서 누구나 창작하고 향유할 수 있는 새로운 시의 놀이로서 디카시가 디지털시대 새로운 시의 장르로 부상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한 순간에 스친 생각과 느낌 그리고 찰나에 떠오르는 삶의 지혜, 비수를 깎듯이 벼리고 다듬은 느낌을 표현하는 게 디카시다. ‘디카시’란 스마트폰이나 디지털카메라를 이용해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감흥을 순간 포착, 그 영상과 함께 5행 이내의 시적 문장으로 표현되는 일종의 실험시로서, SNS 등으로 실시간 쌍방향 소통하는 것이 장점이다.
모든 시 운동이 그랬듯 시의 진화를 주창하는 디카시 운동 역시 지금 이곳의 시단을 비판적으로 문제 삼는 데서 자신의 존재 근거를 찾고 있다. 디카시 운동의 변방성이 디카시 운동의 자생성-능동성으로 전이되는 이유도 변방의 존재들에게는 무엇보다 스스로 ‘살아남으려는’ 생명력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디카시라는 장르를 개척한 창신대 문창과 이상옥 교수에 의하면, 디카시는 문자시와 다른 미학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디카시는 순간 포착의 극순간성의 창작미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감흥을 느끼면 문자시는 그것을 시의 종자로 보는 것이다. 디카시에서는 그걸 시의 온 몸으로 인식한다. 문자시는 시의 종자를 가슴에 품고 그것을 상상력으로 키우고, 또 키우고 하여 시의 몸을 만들어 나간다. 모든 미적 체계는 ‘무엇’을 말한 ‘어떻게’다. ‘무엇’이 미의 이상이라면 ‘어떻게’는 미가 말해질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말하자면 이제까지 전개된 미의 현실성은 ‘어떻게’가 만들어낸 순열조합이다. 특히 디카시는 두 개의 ‘어떻게’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이질성의 총아다. 그 이접은 언제나 새로운 결합이 가능한 확산일 뿐만 아니라, 리좀적이기까지 하다. 따라서 디카시는 눈 앞에 펼쳐진 다양한 방식의 ‘어떻게’를 융합하는 새로운 시적 형식이라 하겠다.
디카시를 쓸 때 시인은 창작자라는 개념보다 에이전트의 개념이 강하다. 사물의 언어를 대신 받아쓰는 자라는 의미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디카시의 문장은 어떤 문장보다 좋은 글이 된다. 왜냐면 가장 좋은 문장이란 사물이 듣고 싶은 말이자, 사물이 전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디카시의 메카니즘 측면에서 말하자면,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감흥을 포착했을 때 이미 시는 완성됐다고 본다. 그것이 날아가기 전에 디카로 찍고 바로 또 문자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디카시는 본질적으로 문자시보다 응축되며, 그래서 길이 또한 짧게, 하이쿠처럼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런 시적 감흥이 날아가기 전에 디카로 찍고 문자로 옮겨 그것을 sns로 실시간 바로 소통하는 것이 디카시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이런 작업의 즉흥성을 볼 때, 결코 아무나 쓸 수 없는 시라 하겠다. 누구보다도 탁월한 사물인식 능력과 해석력을 필요로 한다고 하겠다.
스마트폰으로 인해 디카시는 언제든지 생성 가능한 환경을 맞았다. 이렇게 본다면 디카시를 쓰기 위해 여러 사진을 찍어 놓고 그 중 하나를 골라 언술하기 위해 고뇌하고 상상하는 것은 디카시가 원래 추구하는 바와는 맞지 않는다. 디카시는 사진예술성도 중요하지만, 현장성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시적 감흥이 날아가기 전에 그것을 순간 포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가능하면 디카시는 순간 포착과 순간 소통이 실시간 이루어지는 것이 좋다는 의미다. 순간성을 배제한 상태에서 시상이나 영감이 익으면, 디카시의 매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바로 찍고 바로 표현해서 발표함으로써 포토시와의 차별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지나치게 생각하고 퇴고하고 하면, 그것이 문자시처럼 강렬한 제작성으로 쓰는 디카시가 되어서 디카시 특유의 날시성 같은 것이 많이 훼손될 것이다.
Ⅲ.
문자시에서, 시의 종자는 영감의 산물로 신의 선물이다. 물론 현대에 와서 영감보다도 강렬한 제작성을 더욱 중요시한다. 그렇다면 시인은 신이 준 선물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키우고 키워서 완성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영감과 자신의 노력으로 시를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문자시가 영감과 시인 자신의 상상력으로 쓴다면, 디카시는 순전히 영감에 의존하며, 시인 자신의 상상력은 크게 개입되지 않는다고 하겠다. 문자시는 시인 자신이 주체가 되고 자연이나 사물이 객체가 된다면, 디카시는 자연이나 사물이 주체가 되고, 시인이 오히려 객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디카시는 자연이나 사물의 언어를 받아쓰는 심정으로 창작한다는 점에서 변별성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