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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느 신앙잡지에 “현대 기독교인들이 주일 아침 교회에 나가는 이유는 과연 뭘까?”라는 제목의 기획 기사가 실려진 것을 보았습니다. 여론조사기관인 갤럽이 미국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교회를 다니는 이유를 조사한 내용이었습니다. 내용을 보니 ‘성경적인 가르침을 주는 설교 때문에 주일예배에 참석한다’는 답이 압도적이었습니다. 이 설문내용중 “어떤 설교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신앙을 매일의 삶에 연결시켜 주는 ‘‘적용성 있는 설교’를 높게 평가한다”것이 압도적이었습니다. 미국 교회 예배참석자들은 ‘설교의 내용을 중요시하고 설교 때문에 주일 교회예배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방금의 설문 내용에 볼 수 있는 “주일에 왜 교회에 모이는가?” “교회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지금 한국교회뿐 아니라 전 세계의 현대 기독교회가 직면한 문제이며 신앙적 딜레마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 이 시대 교회 문제이기도 하면서 오늘 본문 속 예수님 당시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교회가 어떤 사역을 해야 할지, 교회에서 주일에 행해야 할 사역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안식일에 회당에 모여서 예배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안식일에 대한 의미, 회당에서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의미를 우리가 다시 살펴보면서 우리는 지금 이 시대 어떤 교회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어떤 주일사역의 의미를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있는 지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일과 안식일의 참 의미를 발견하고 진정한 예배를 회복하게 될 때 우리는 이 시대 교회에서 해야 할 일과 주일예배를 통한 참된 신앙을 찾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본문을 통해 정말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속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지를 깨닫고 우리도 예배를 통해 변화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배를 통해 일어날 우리의 변화 첫째로, 악한 생각의 발견입니다.
마태복음 12장 9,10절입니다.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회당’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모임을 위한 건물로 헬라어로는 쉬나고게(συναγωγή)라고 불려지는 건물입니다. 이곳은 유대교인들의 예배인 제사를 드린 장소가 아니고 매주 모여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고 토론하면서 말씀의 의미를 찾아가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이 ‘쉬나고게’ 회당은 오늘날 교회처럼 예배와 성경공부, 친교, 섬김과 봉사를 매주 진행했던 곳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곳에 안식일에 모인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지고 매주 회당에 모였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저와 여러분들도 여러 가지 이유를 가지고 오늘 주일 교회에 모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왜 주일에 교회에 오십니까? 그리고 교회에서 온전한 예배를 드리십니까? 그리고 예배 아닌 또 교회를 찾는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를 해결하고 돌아가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교회에서 드려지는 사역, 무엇보다 가장 중심이 되는 예배를 통해 우리가 어떤 역사가 일어나야 할 지를 오늘 말씀을 통해 발견하고 변화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들의 이런 악한 마음을 모르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고소하고 예수님을 잡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저의를 다 아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6,7절을 보시겠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모인 사람들의 악한 생각을 아셨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 중 어떤 사람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고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세상의 운행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어느 누구도 사람들의 마음을 100% 꿰뚫어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신이시기에 하나님이신 그 분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알아보십니다.
요한복음 2장 24, 25절입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우리 인간은 인간의 마음을 파악하기 참 힘이 듭니다. “물은 건너가 봐야 알고, 사람은 지나 봐야 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자기 자신의 속을 자기 자신이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람들의 속마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의 마음을 밝히 아시는 분이 계시는데 바로 우리의 창조주, 우리의 주관자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낱낱이 들여다보시고 그 마음을 통찰하십니다. 이렇게 통찰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진단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우리 하나님은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지, 어떤 가치관으로 교회에 나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며 사역하는 지, 우리 생각을 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어떤 일을 할 건, 말 건지가 아니라 어떤 목적, 어떤 의도로 그 일을 하려고 하는 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지... 그것이 중요한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에 우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만질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우리가 깨닫고 치유하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끄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심어주시며 그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도록 기도하며 하나님의 만지심을 소망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저와 여러분이 우리의 마음상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고 같이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의 심령 상태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배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예배를 통해 회복되어야 하기에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간 이 곳에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 우리 각자 각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태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시기를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자신을 알 수 없고 서로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고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해 우리 자신을 알아갈 수 있게 하시는 역사,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며 그로 인해 변화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배를 통해 일어날 우리의 변화 둘째로, 고침의 경험입니다.
마태복음 12장 10절입니다.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손 마른 것’이 무엇일까요? 헬라어 원문의 동일한 단어를 다른 곳에서 번역할 때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이 본문의 단어를 ‘a shriveled hand’ 혹은 ‘a withered hand’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쭈글쭈글한 손, 시든 손, 굽은 손’이라는 의미합니다. 아무튼 이 사람은 한 쪽 손이 보통의 다른 사람들의 손과는 달랐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단어를 보니 그 손은 ‘피부가 쪼그라들어 있거나 손이 굽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한쪽 손이 말랐던 것만 표현되어 있지만 누가복음 6장 6절에서는 ‘오른손이 말랐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사였던 누가의 자세한 관찰력을 쓰셔서 기록한 누가복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쳤는데 그 한쪽이 오른쪽이였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오른손을 못쓴다’는 것은 대단히 곤란한 문제였습니다. 우리도 옛날 그런 가치관이 있었던 적이 있는데 오른손잡이가 아닌 왼손잡이를 병신이라고 표현하거나 장애인처럼 대접했던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왼손잡이는 좋지 않게 보고 오른손을 쓰지 못하는 병신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람은 아예 오른손 자체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을 명령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을 살펴보십시오.
마태복음 12장 13절입니다.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손마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는 내용만 나오지만 마가복음 3장 3절부터 5절의 똑같은 사건에 대한 기록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손마른 사람에게 첫째로 ‘일어서라’고 명령하시고 둘째로 ‘손을 내밀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3절과 5절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첫 번째 명령은 손마른 사람도 대소롭지 않게 기꺼이 할 수 있는 순종이었습니다. 손이 부자연스러운 것이지 다리가 불편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둘째 명령은 손마른 사람이 부담스러운 명령, 아니 어쩌면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손을 내밀라’라고 기록된 성경의 원문을 보면 “손을 펴라”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손을 내밀라’는 명령은 의심에 가득 찬 상태였다면 거부할 수 밖에 없는 명령이었습니다. ‘아니 내가 지금 이렇게 손이 부자연스러운데 어떻게 손을 내밀어’ ‘그게 가능하면 내가 지금까지 이런 모습으로 지내지도 않았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 명령에 순종하여 불가능한 일 ‘손을 내미는’ 행위를 시도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든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든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니 모두 순종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정말 할 수 없는 일, 말도 되지 않는 일을 명령하실 때가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막힌 요단강을 보며 요단강을 가를 것이니 발을 담그라고 하신 명령, 아직 홍해가 갈라지지 않았는데 홍해를 향해 지팡이를 내밀라고 하는 명령과 똑같은 것입니다. 분명 이건 말도 안되는 명령인데 그걸 먼저 해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 명령이시니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내 판단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내 계산법으로 손익계산을 하며 내 지식으로 될까 안될까를 판단해서는 결정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개념으로 오늘 본문의 손마른 사람은 예수님의 명령에 그냥 순종했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시키시지만 주님이 하라고 하시니 일단 한 번 ‘시도나 해보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손을 내밀라”는 명령에 “손을 펼 수 없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의심 없이 손을 내민 손 마른 자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속에서 믿음으로 예수님을 찾으니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믿음은 알고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믿고 행해보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을 찾아가는데 근처에 살고 있는 듯한 어느 사람에게 그 건물을 찾아가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가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내가 똑똑하다고 나는 잘 모르는 길도 내 스스로 찾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당신 말을 어떻게 믿냐?”라고 아예 그 가르쳐준 대로 가지 않는다면 그 길을 찾아갈 수 있을까요? 내가 완전히 알 수 있을 때까지 그 길은 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절대 찾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차피 나는 처음 온 길이라 알지 못하는 곳이 아닌가? 저 분이 이 곳에 산다고 했고 길을 정확히 가르쳐주었으니 일단 믿고 한 번 가보자” 그렇게 찾아갔더니 그 건물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모르는 길이었는데 가르쳐준대로 갔더니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알게 된 다음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고 찾아갔더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이 명령은 우리가 순종할 수 있는 명령이 아닙니다. 이 명령에 우리 스스로 자연스럽게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응답할 수 없는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영적 죄인인 우리 인간들은 절대 예수님이 누구인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 분앞에 자연스럽게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있도록 먼저 손을 내미시며 선포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런 베드로 고백에 대해 예수께서 뭐라고 가르쳐 주셨습니까? 이런 베드로 고백에 대해 예수님께서 “정말 너가 잘 알고 있구나” “너는 정말 똑똑하구나” 라고 칭찬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 밑에 있는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7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이 우리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일 자체가 기적입니다. 예수께서는 할 수 없는 일에 기꺼이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의 행동을 요구하십니다. 주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 주 예수를 깨닫고 우리의 삶을 드리며 구원을 받게 되는 것, 이것은 하나님 주권하에서 섭리 가운데 이뤄지는 일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할지라도 그 속에 우리가 해야 할 도리가 있고 책임져야 할 것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손 마른 사람을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과 할 수 없는 부분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일을 명령하실 때 우리는 바로 그 때 순종해야 합니다. 손 마른 사람도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명하였을 때 손이 낫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손말랐던 사람이 기적을 경험하고 손이 치유되었던 것처럼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아예 그 일을 따를 수 없는 불가능한 명령을 하실 때, 우리의 힘으로 도무지 행할 수 없는 명령을 주실 때, 주님께서 시킨 것이니 내 생각으론 불가능해 보이지만 한 번 해보겠다는 마음만 드리면 우리를 고치시고 새롭게 만드시는 하나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나는 할 수 없지만 우리 주님께서 해보라고 하는 명령을 듣고 순종할 때 우리를 고치시는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배를 통해 일어날 우리의 변화 셋째로, 모든 사역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마태복음 12장 12,13절을 보시겠습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오늘 본문의 손마른 사람을 고치는 사역을 했던 안식일 회당에서 사건에 가장 핵심적인 분은 누구일까요?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지난 주 말씀을 통해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안식일의 주인은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셨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실 때 우리 주 예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무엇보다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값을 대신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을 위해 죽어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구원사역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심령을 만져주시고 육체를 고쳐주실 때 가장 중요한 인물이 치유를 받은 사람이냐? 치유를 해주신 분이시냐?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정말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이기적인 인간은 내 문제가 해결받는 것이 더 중요하기에 병원을 찾고 은행을 찾고 여러 사람들을 찾고 해결해 줄 곳을 찾아다닙니다. 그리고 문제가 해결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해결책은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해결책 자체가 중요하고 그 곳이 있기에 또 문제가 생기면 찾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의 중요하게 살펴봐야 할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일까요? 영적 치유, 육적 치유일까요? 그게 아니라 ‘영적 치유’와 ‘육적 치유’를 해주실 수 있는 근원이 어디 있는 지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난 주 살펴보았던 안식일의 참된 의미, 안식일에 해야 할 일에 대한 논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사역이 안식일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면 바리새인들도 별 논쟁을 벌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안식일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앞의 본문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을 수 있지만 왜 안식일에 그렇게 했냐?”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손 마른 자를 고칠 수는 있지만 굳이 왜 안식일에 병을 고쳤냐?”고 묻습니다.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치유받고 자유하게 되는 것, 행복해 하는 것을 보면서도 유대인들은 치유사역보다 안식일이라는 날짜에 더 신경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10절입니다.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역사는 관심없고 그들이 지킬 안식일 예배형식과 안식일이라는 시간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기다리고 있었고 ‘언제 한 건만 걸려봐라’ 생각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앞에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발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바리새인들을 겁내지 않으시고 마땅히 고침을 받아야 할 불쌍한 사람을 위해 섬기셨습니다.
마가복음 3장 5절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며 한 영혼의 구원을 생각하시면서 어떤 곤경에 처할 것도 감수하며 죽음의 위협속에서도 당연히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오신 목적대로 삶을 사셨습니다. 자신이 피해보며 자신이 손해보며 자신이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려고 하면 우리는 우리의 가진 것을 내려놓고 우리가 기꺼이 손해볼 각오를 하고 위협을 당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하루만 더 기다렸다가 안식일 다음 날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다면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발할 죄목에 걸리지도 않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급격하게 반대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든 아니든 지금 당장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고통을 안쓰러워하고 해결해 주셔야 하는 긍휼의 마음을 잠시 덮어놓는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의 사람에게 간절함의 해결을 해주셔야 하는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셨습니다. 그 영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닮았던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3,24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성령이 충만하였던 사도 바울은 분명 예루살렘에 돌아가면 결박당해서 사람들에게 시달리며 매일매일 조사를 받기 위해 끌려다니는 괴로운 인생 여정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성령님께서 가르쳐주시고 사람들도 그런 상황을 느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가지 않도록 요구함에도 이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처해 있는 어떤 위협도 두렵지 않고 생명을 빼앗기게 될 것 조차도 걱정하지 않고 담대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일예배와 우리의 사역을 통해 사람의 유익이 아닌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뜻을 깨닫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항상 유념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도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우리가 뭘 하고 살 것인가라기보다 우리를 통해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 지, 예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배의 주인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우리의 유익을 찾지 않고 주님을 발견하고 주님을 느껴야 합니다. 예수님을 체험하는 사람이 진정한 예배자이며 예수님을 통해 변화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배를 통해 예수님을 알아가고 예수님을 닮은 삶으로 변화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적 활동이 어떤 가치관으로 행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며 특히 예배를 통해 우리가 어떤 변화를 경험해야 하는 지를 말씀을 통해 발견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나와 우리 마음상태를 돌아보며 우리가 어떤 신앙적 기준을 살아가고 있는 지, 우리의 내적 상태는 어떠한 지를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함께 예배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서로서로 마음속을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 마음속까지 아시고 어루만져주시고 고쳐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자세하게 내놓을 수 없는 질병과 육신적 아픔들을 하나님께서 고쳐주시기를 기대할 때 기꺼이 부끄러움과 불편함을 감수하고 내어놓고 고쳐주시기를 기대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치유의 역사도 나타나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이런 영적 치유, 육적 치유가 우리의 유익으로 끝이 나고 그냥 회복되어서 감사하다로 끝이 나면 이것은 참된 신앙생활이 아닐 것입니다. 이 모든 사역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주인,그리고 복음 사역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매번 마을 주민들을 위해 각종 특별 행사를 진행해 왔고 이번에도 815고주리마을 섬김의 날행사를 하며 무료이미용사역, 점심식사대접과 마을잔치사역을 했습니다. 이런 일을 통해 분명 마을분들은 기쁨을 느끼고 행복한 시간을 가졌고 여러 좋은 혜택을 봤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까지도 그 선에서 만족하면 안 됩니다. 우리 사역의 핵심은 복음입니다. 우리 사역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그리고 이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이 이 모든 사역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이 모든 사역에 하나님께서 행하실 놀라운 열매를 기대하며 이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앞에 돌아와 영적 치유, 육적 치유를 경험하고 세상 가치관에서 신앙가치관으로 돌아오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소망하며 참 다운 예배를 통해 모두가 변화받는 역사가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