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 -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1. 2. 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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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 -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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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6. 02:13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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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부석사가 자리한 봉황산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를 경계로 한 백두대간의 길목에 있는 산으로, 서남쪽으로 선달산ㆍ형제봉ㆍ국망봉ㆍ연화봉ㆍ도솔봉으로 이어진다. 부석사 무량수전 위쪽에 서 있는 삼층석탑에서 바라보면 소백산으로 이어진 백두대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일주문을 지나면 마치 호위병처럼 양옆에 서 있는 은행나무와 사과나무가 있고, 당간지주를 지나고 천왕문을 나서면 9세기쯤 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석단과 마주치며, 계단을 올라가면 범종루에 이른다. 범종루 아래를 통과하면 안양루가 나타나는데, 안양루의 안양(安養)은 극락의 또 다른 이름이다. 안양루를 지나면 극락인 셈이다.
안양루 밑으로 계단을 오르면 남북국시대의 석등 중 가장 우수한 것인 부석사 석등(국보 제17호)이 눈앞에 나타나고 그 뒤로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 건축인 무량수전이 있다. 1916년 해체, 수리할 때 발견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왜구의 침입으로 건물이 불타서 1376년에 중창주인 원응국사가 고쳐 지었다. 무량수전은 중창, 곧 다시 지었다기보다는 중수, 즉 고쳐 지었다고 보는 것이 건축사학자들의 일반적인 의견이다.
원래 있던 건물이 중수 연대보다 100~150년 앞서 지어진 것으로 본다면 1363년에 중수한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나이를 다투니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보아도 지나치지 않겠다. 이 같은 건축사적 의미나 건축물로서의 아름다움 때문에 무량수전은 국보 제18호로 지정되었다. 무량수전 안에 극락을 주재하는 부처인 아미타불이 있다. 흙을 빚어 만든 소조상이며, 고려시대의 소조불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2.78미터의 아미타여래조상은 국보 제45호로 지정되었다.
무량수전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 건축이다. 건축사적 의미와 건축물로서의 아름다움 때문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무량수전의 동쪽 높다란 곳에 있는 석탑을 지나 산길을 한참 오르면 조사당이 있다. 조사당은 국보 제19호로 의상을 모신 곳이며 1366년 원응국사가 중창 불사할 때 다시 세운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인 이 건물은 단순해서 간결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데, 조사당 앞에 의상의 흔적이 남아 있는 본래 이름이 골담초인 선비화가 자란다. 의상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으면서 “싱싱하거나 시듦을 보고 나의 생사를 알라”라고 했다는 선비화를 두고 이중환은 『택리지』에 “스님들은 잎이 피거나 지는 일이 없어 비선화수라고 한다”라고 하였는데, 그 나무가 지금의 나무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사람들의 손길이 타는 것을 막기 위해 철망 속에 갇힌 채 꽃을 피우고 그 철망 안에는 1000원짜리 지폐와 동전들이 나뒹굴고 있을 뿐이다.
한편 『택리지』에 나오는 취원루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순흥읍지』에 따르면 무량수전 서쪽에 있었다. 그 북쪽에 장향대, 동쪽에는 상승당이 있었고, 취원루에 올라서 바라보면 남쪽으로 300리를 볼 수가 있었으며, 안양문 앞에 법당 하나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일주문에서 1리쯤 아래쪽으로 내려간 곳에 영지가 있어서 “절의 누각이 모두 그 연못 위에 거꾸로 비친다”라고 하였다. 물에 비친 부석사의 아름다움을 상상해보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지만, 150여 년의 세월 저쪽에 있었다는 영지는 현재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으니 참으로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9 : 우리 산하,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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