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갈장수 울엄마 / 김명복
농장에서 키운 배추로 김장을 하는 날이다. 멸치젓갈을 보니 어릴적 고향에서 어른들이 먼바다로 나가 위험을 무릅쓰고 고기잡던 모습이 떠오른다
고기를 가득 실은 배가 포구에 도착했다. 수백 마리 바다비둘기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왔다. 여인네들이 준비한 따끈한 김치국밥이 꽁꽁 언 어부들의 몸을 녹여 주었다. 한 겨울 추위를 이기며 양미리를 잡았다. 내가 어렸던 그 시절에는 고기잡이 기술도 부족했고, 어부도 많지 않아 고기가 많았다.
어촌에서는 멸치로 소득을 올렸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이른 봄이 오면 멸치가 풍성하게 잡혔다. 엄마는 아버지가 잡아온 고기를 읍내로 내다 팔기를 수십 년간 해왔지만, 성에 차지 안는지 봄에 많이 잡히는 멸치를 보고 무언가 결심을 하셨다.
아버지께 드럼통 열 개를 구해달라고 부탁드렸다. 뚜껑을 도려내고 내부를 깨끗이 씻은 다음 볏짚에 불을 붙여 그을렸다. 그러고는 내부를 흰 비닐로 감쌌다. 엄마는 열 개의 드럼통에 멸치를 넣고 소금을 뿌려 젓갈로 만들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면 잘 익은 멸치 젓갈이 되었다. 멸치 잡는 철이 아닐 때도 팔 수 있는 제품을 만들었고, 엄마는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으셨다.
돈을 벌어 모으는 첫 번째 목표는 스래이트 집을 고래등 같은 기와집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오랜 기간 읍내로 다니며 보았던 잘 사는 집들은 장사를 하는 사람들 이었다. 팔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려면 돈이 있어야 했고, 돈을 벌려면 장사를 해야 했다. 아버지 혼자서는 힘이 든다고 생각했기에 봄철에만 많이 잡히는 멸치를 젓갈로 담아 팔 생각을 하셨다.
하루는 엄마가 친구 세 사람을 집으로 불렀다. 본인이 생각하고 경험한 것을 이야기 하며 장사를 권유하였다. 멸치젓갈을 직접 담가주고 시장에서 구입한 국방색군인잠바 네 벌을 구입하여 검정색으로 염색하여 나누어 입었다. 젓갈 담을 양철통을 구입하고, 네 명이 본격적으로 장사의 길로 들어셨다. 엄마는 멀리 가려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요즘 같으면 장사의 신이라 부를 정도다.
마을에서 읍내까지는 8km거리이다. 가는 중간쯤에 ‘화투재’라는 재가 있다. 바닷가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이 재를 넘을 때는 아무리 강한 사람도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매섭게 불어오는 바다바람을 이기고 도착하면 반드시 쉬어가도록 되어있다. 바람도 한숨 돌리고 구름도 쉬어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까. 길손들이 오가며 하나 둘 쌓은 석탑 옆에는 여기에 돌을 쌓아야만 소원성취 할 수 있다는 푯말이 세워져있다. 읍내를 오가는 길목으로 사람들의 옷깃을 잡는다. 그중에 소장이 서는 날이면 소 팔고 돌아오던 어른들이 그 돈으로 노름을 하였기에‘화투재’라는 이름이 생기지 않았을까.
장사가 어느 정도 되면서 첫 번째 목표였던 새집 짓기 구상을 하셨다. 집 짓는데 필요한 자재를 새것으로 구입하면 돈이 많이 드니, 읍내에 있는 쓸만한 빈집을 구입하여 일부 자재는 재활용하고 중요한 기둥이나 상량등은 새것으로 구입하기로 하셨다. 대지 100평에 건평 30평의 집짓기가 3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준공을 하고 마을 사람들을 초대하여 지신밟기로 큰 잔치가 벌어졌다. 엄마와 함께 장사하신 분들도 모두 잘 살게 되었다.
두 번째 목표는 자식들 공부시켜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훌륭한 모습들을 보았고, 자식 공부에 대한 애착을 많이 느끼셨다. 읍내에서 장사를 하며 그래도 지위가 있는 기관장들집을 드나들며 하잘 것 없는 장사치에 해당하는 엄마를 대하는 마음이 배운 사람들의 모습이라 다르다는 생각을 하셨다.
엄마의 동적인 성격으로, 한 살 아래인 아버지는 아내이면서 엄마처럼 의지하며 지내셨다. 아버지 세 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기에, 얼굴도 모르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한 살 아래 아내에게서 느끼셨다. 약주 한 잔에 엄마를 찾으며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시면, 고추보다 더 매운 계모 밑에서 시집살이 하셨던 엄마는 거기 맞추어 한탄가를 부르니 온 집안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한참이 지나고 보면 아버지는 잠이 드셨고, 엄마는 부엌으로 식사 준비하러 가셨다.
밥상머리 교육을 강조하셨던 아버지는거짓말 하지 말고, 정직하게 살아라 하셨다. 엄마는 84세에 노환으로, 아버지는 그 다음해에 84세 생일잔치를 마치고 돌아가셨다.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으로 8남매의 삶이 윤택했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 죽음은 삶의 총아라고 했다. 이제 고희를 넘은 우리 형제들은 부모님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건강하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