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에 일어난 신미양요 때 희생된 어재연(魚在淵) 장군을 비롯한 용사들을 기르기 위해 해마다 음력4월24일에 광성제가 거행됩니다. 강화군과 어재연 장군님의 후손분들이 오셔서 진행됩니다. 올해는 운이 좋아서 행사가 거행될 날(5/31)이 광성보 근무가 되어 나도 행사를 옆 볼 수가 있었습니다.
강화 부군수님을 비롯한 군, 인천시 관계자와 어씨 종친회 회장님들이 나오셨고 헌화를 하시고 어재연 장군님의 수자기가 게양되었습니다. 행사는 지금까지 쌍충비, 무명용사비 앞에서 이루어졌지만, 충장사(忠壯祠: 어재연 장군님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건립된 후에는 거기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1953년에 통상을 요구하여 일본에 왔었습니다. 그 당시 집권자 에도막부(江戸幕府) 책임자들은 협상을 위해 미군의 군함을 찾아가 그 무기 화력을 보고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본국내에서 개국파와 쇄국파로 의견이 분렬되었지만, 막부 최고책임자는 독단으로 불공평한 화친조약을 맺었습니다. 그 후에 일본은 그 불공평조약 개성을 위해 고생길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미국 국내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나 무기개발도 많이 하였다 합니다. 그러니 1871년에 조선을 찾아왔을 때는 미군은 세계최강부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합니다. 미국은 전쟁하러 온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불공평한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왔습니다. 설마 조선이 공격한지 꿈도 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두돈대(龍頭墩臺)를 지나가려고 한 미군에게 먼저 조선이 공격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국제법에 따라 미군은 반격하여, 어재연 휘하 약350명은 희생하였던 것입니다. 최신 근대무기를 가진 미국 앞에 조선은 상대도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전투장인 광성보 전투로 30분도 안 되고 승패가 결정되었다 합니다. 미군은 승리를 하였지만, 승리품이 수자기(帥字旗: 장군기) 뿐이었으니 패배했다고 하는 것이고, 현재 한국 교과서에 “신미양요는 조선이 이겼다” 고 나오는 것입니다.
미군을 후퇴시킨 가장 큰 원인이 따로 있겠지만, 조선병사들의 애국신도 하나의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미군의 어느 사령관이 일기에 “나라를 위해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민족을 처음 봤다.”고 감탄하여 “누구 한 사람이 이겼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썼다 합니다.
서양사람들은 물질적인 개발은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것을 뒤로 하였습니다. 조선의 정신문화는 당시 세계최고의 수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신력이 과학력을 이길 수가 있다고 증명하는 것이 신미양요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담이지만, 일본은 서구열강의 문명을 받아 과학기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시켰습니다. 거기에 조선의 정신적인 문화(하늘을 모시는 문화)와 하나가 되어 중국을 따라오게 하여 한중일이 하나가 되었더라면 서구열강을 충분이 격퇴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과 동등한 입장으로 마치 몸과 마음처럼 조선의 정신문화를 받아드리고 하나가 되었으면, 무적(無敵)의 힘을 발휘할 수가 있었는데…라고 늘 아쉬움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