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침묵 20241220 신물결
“하나님, 저는 당신을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렵습니다. 저에게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거를 주세요. 아니면 영적인 경험으로 확신을 주세요.”
나는 때때로 하나님께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왜 자신을 과학으로 증명될 수 있게 하지 않으실까? 나에게 기독교의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시킬 완전한 논리, 혹은 과학적인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안타깝다. 또한 하나님은 왜 내게 영적인 체험을 주지 않으실까? 수련회에 갈 때면 나는 기쁘게 찬양하거나 울며 기도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말뚝처럼 서 있을 뿐이다.
내 가느다란 신앙은 이리저리 흔들린다. 하나님을, 심판과 구원을 믿는다면 하지 않을 행동을 습관처럼 하는 나 자신을 볼 때면 마음속의 의문과 좌절은 커진다.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확실한 방법으로 설득하지 않으시고 나 자신을 죄로 더럽히도록 내버려 두실까? 하나님은 어째서 침묵하실까?
“하나님, 왜 침묵하십니까?”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의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의 절규다. 그의 질문은 나의 질문과 결이 조금 다르다. 로드리고 신부는 포르투갈 예수회 소속으로, 1638년, 가톨릭 박해가 지독하던 일본에 두 가지 목적으로 왔다. 첫째, 자신의 스승 페레이라 크리스트반 신부가 나가사키에서 “구멍 매달기” 고문을 받고 배교를 맹세했다는 암울한 소식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일본에서 33년간 선교한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했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에게 충격이었고, 그의 인자함과 깊은 신앙을 직접 본 로드리고 신부에게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다. 로드리고 신부는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의 사정을 정확히 알기 위해 일본에 왔다. 두 번째, 그리고 어쩌면 더 중요한 이유는 뜨거운 태양 아래 누렇게 말라가는 새싹처럼, 정부의 박해 아래서 막 품은 신앙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일본 성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함이다. 로드리고 신부는 관리들에게 체포당할 것도 각오하며, 고문과 죽음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전하고 그를 배반하지 않겠다고 결단한다.
하지만 선교는 로드리고 신부가 마음에 그렸던 반듯하고 단정한 모습이 아니었다. 박해 전, 당당하게 항구에 들어섰던 신부들과는 다르게 그는 깜깜한 밤, 이름 모를 해변에 남겨진다. 그리고 관리들을 피해 산속 오두막에 숨어, 마음껏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근처 마을 사람들에게 의지해, 그들이 주는 구운 토란으로 연명한다.
다행히도 가톨릭 신도인 것을 감추며 살고 있었던 마을 사람들은 로드리고 신부를 환영한다. 신부는 마을 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듣고, 교리를 가르치며 큰 보람과 기쁨을 느낀다.
그것도 잠시, 로드리고 신부는 ‘기치지로’라는 일본인 신도의 배반으로 관리들에게 붙잡힌다. 잡혀 처형당할 것을 각오했던 신부는 두려워하면서도 담담하다. 하지만 순교 또한 그의 생각과 달랐다. 로드리고 신부가 난생 처음으로 경험하는 순교는 자신이 아닌, 일본인 신도의 것이다. 배교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일본인 신도는 태양이 후덥지근하게 내리고, 매미가 단조롭게 우는 마당에서 짧고 가볍게, 아무것도 아닌 듯 도살된다. 그리고 근처 산에 묻힌다. 그의 죽음에는 영화나 나팔 소리 따위는 없다. 여전히 태양이 후덥지근하게 내리고, 매미는 단조롭게 운다. 이어서 세 명의 일본인 신부가 죽임을 당한다.
이후 로드리고 신부는 배교할 것을 권유받는다. 그는 배교하지 않고 버틴다. 그리고 그가 버티는 동안,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동안,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동안,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동안, 오물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린 일본인 신도들은 입과 코에서, 그리고 머리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피를 흘린다.
“하나님, 왜 침묵하십니까?” 발 곁에 성화를 두고 로드리고 신부는 부르짖는다. 그가 선교와 순교,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품었던 아름 한 그림은 완전히 망가졌다. 왜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 더럽고 더딘가?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고통스럽고 잔인하게, 소리 없이 죽임당하는 성도들을 하나님은 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바라만 보시나? 왜 자신을 전하는 자들에게 힘을 주지 않으시며, 권력을 놓지 않으려 악착같이 신도들을 죽이는 자들을 내버려 두시는가?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나?
로드리고 신부의 질문에 대한 답은 그를 밀고했던 기치지로의 고백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요? 저희들은 나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 모키치는 강해요. 논에 심는 강한 모종처럼 강하지요. (...) 나는 그렇게 강하지 못한 걸 어쩝니까? (...) 나를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강한 자 흉내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 저는 배교자죠. 그렇고말고요. 그렇지만 10년 전에 태어났다면 선량한 가톨릭 신도로서 천국에 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박해받을 때 태어났기 때문에. 원망스럽습니다. 저는 원망스럽습니다. (...)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약해요. 마음이 약한 자는 순교조차 할 수 없어요. (...) 아아, 왜 내가 이런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나요?”
기치지로는 박해 이전에 태어났다면 평범한 신도로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좋은’ 신도가 되어 풍부한 수확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마을 사람들과 모여 예배하고, 가톨릭교를 전하고, 언젠가 천국에 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랬다면 기치지로는 꼭두각시나 다름없다. 고통이 없는 믿음은 나의 것이 아니다. 고통은 곧 선택의 기회다. 고통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 거기 계시냐고 소리 지르게 한다. 고통 속에서는 하나님을 버릴 선택지가 있다. 평안만 있다면 하나님을 버릴 수 없다. 고통이 없고 만족스럽기만 한 삶은 내가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를 사랑하는지 확인할 기회가 없는 삶이며, 애초에 선택의 기회 없이 강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삶이다.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신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나는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하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내 사랑이 온전하다면, 나는 상대가 나를 사랑하도록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강제로 사랑하게 하는 사람의 사랑, 강제로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 모두 사실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신다. 그렇기에 고통을 주신다.
“모키치는 강해요. 논에 심는 강한 모종처럼 강하지요. (...) 나는 그렇게 강하지 못한 걸 어쩝니까? (...) 나를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강한 자 흉내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연약한 기치지로는 칼날 앞에서 배교한다. 자기 자신과 아우성치며 싸우고 괴로워하면서도 배교한다. 우리도 기치지로와 다를 바 없다. 고통 속에서 결국 하나님을 배반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통을 주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 자유를 주시고, 우리가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하시며, 우리가 결국 그분의 얼굴을 밟을 때 가만히 밟히시며, 그 배반의 대가를 자신이 치르신다. 하나님은 왜 침묵하실까? 우리의 모든 고통과 배반을 어깨에 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과학적인 증거, 영적인 체험으로 설득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를 믿어버리게, 사랑해버리게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죄를 짓고 하나님을 배반한다. 그러면서 증거를 달라고 요구한다. 이런 나를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 여전히 기다리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