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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 발사 광경
[ 영화, 아폴로 13 ]
<아폴로 13>은 1995년에 개봉된, 우주선 아폴로 13호에 관한 영화입니다.당시 아폴로 13호의 사령관이었던 짐 러블이 제프리 클루거와 함께 쓴 <Lost Moon: The Perilous Voyage of Apollo 13>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감독은 론 하워드, 주연은 톰 행크스, 영화음악은 제임스 호너가 담당하였습니다.아폴로 12호에 이어서 세번째로 아폴로 13호가 달에 착륙할 계획이었는데, 산소탱크 쪽에서 발생한 고장으로 우주선의 기능들이 하나하나 마비되어 갑니다.
우주공간 속에서 아무도 도와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상요원들과 조종사들의 필사적인 노력 끝에 사태를 하나하나 극복해가며 모두 무사히 귀환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달에 착륙하지는 못했으나, 이 일련의 사태로 주목을 받았습니다.영화의 장치상 몇가지 점이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거의 사실에 입각하여 제작되었다고 당시 아폴로 13호의 사령관이던 짐 러블이 인정했습니다.
다수의 장면을 실제 무중력에서 촬영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무중력 장면이 나오면 이런저런 눈속임과 CG를 동원해서 촬영하곤 하는데, 아폴로 13호는 아예 실제 무중력에서 촬영했습니다. 방법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나사가 보유한 무중력 실험기를 대여해 내부에 세트를 설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유낙하 상태에서 촬영했다는 겁니다.
물론 모든 장면을 이렇게 촬영할 수는 없으므로 지상의 세트에서 각종 눈속임과 장비를 동원해 연출한 무중력 장면과 이어붙이는 식으로 화면을 구성했습니다. 몇분 사이에 지상-무중력-지상-무중력 식으로 촬영장소가 엄청나게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기도 합니다.
이 방법을 사용한 덕분에 주스를 짜서 마시는 장면이라든가, 승무원들이 몸에서 떼어낸 계측 장비가 둥둥 떠다닌다던가 하는 장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이 곁들어졌는지 지금 봐도 영화의 완성도 자체는 상당합니다. 90년대 영화지만 자신이 NASA와 우주에 관심이 있다면 2010년대인 요즘 구해서 봐도 꽤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특히 러블을 비롯한 우주 비행사들의 심리상태가 매우 섬세합니다. 예를 들어서 영화 초반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 장면을 바라보다가 밖에 나와서 아폴로 8호에서 달에 갔지만 착륙하지 못했던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기고 달을 바라보는 장면, 달에서 원래 착륙할 예정이었던 장소를 바라보며 달에 착륙하는 상상을 하는 장면, 그런 와중에도 집에 가야 한다는 정신력을 되새기는 장면이 호평을 받았습니다.
다만 한글자막 번역이 당시의 짐 러블과 우주 비행사들의 선후배관계를 생각하면 서로 반말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 볼 수도 있습니다. 러블은 제미니 계획 시절부터의 베테랑이지만 프레드 헤이스와 켄 매팅리, 잭 스위거트는 처음으로 우주 나가는 새까만 후배들입니다. 당장 군 계급만 봐도 러블은 대령이지만 매팅리는 소령이었습니다.
* 홍역에 대한 면역이 안되어 있다고 탈락한 매팅리,사령실의
베테랑인 그는 사고가 난 후 관제센타에서 큰 역할을 수행합니다
물론 사적인 자리에서, 그것도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들끼리 낄낄거리는거야 그렇다 쳐도 기수관계에 익숙한 한국인의 시선으로 보면 적절치 못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사족이지만 실제 주인공인 짐 러블과 그의 아내 마를린 러블이 카메오로 출연합니다.
마를린의 경우 발사를 구경하러 올라가는 사람들 중에 섞여있고, 짐 러블은 마지막 장면인 바다에 착수한 우주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출동한 이오지마 함의 함장인 미 해군 대령으로 출연합니다.
톰 행크스와 론 하워드 감독은 이후 이 영화의 제작 장비와 노하우를 활용하여 다큐드라마 <지구에서 달까지>를 만들었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편집, 음향 등 2개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 간략한 줄거리 ]
여러 번의 우주비행을 해낸 노련한 42세의 우주비행사 짐 러블(톰 행크스 분)은 1969년 7월 20일, 동료 닐 암스트롱의 역사적인 달 착륙 장면을 TV로 지켜보며 ‘반드시 달에 가보고 말리라’는 자신의 꿈을 다시 한번 아프게 가슴에 새깁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뜻밖에도 일찍 그 기회가 찾아옵니다. 6개월 후에 발사될 아폴로 13호의 선장이 중이염으로 도중하차하게 되어 짐이 13호 탑승팀으로 교체 투입된 것이었습니다.
* 관제센터의 총지휘자 진 그란츠(에드 해리스 분)
노련하고 포용력 있는 선장 짐 러블과 연습 벌레이자 완벽주의자인 사령선 조종사 켄 매팅리(게리 시나이즈 분), 재치 있고 용의주도한 달착륙선 조종사 프레드 헤이스(빌 팩스턴 분), 세 사람은 6개월 동안 고통스러운 훈련을 감내하며 달에 갈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러나 발사 이틀을 남기고 예비 탑승팀에 홍역환자가 발생해 아직 홍역을 앓지 않은 켄이 전염됐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팀에서 제외됩니다. 대신 예비 탑승팀의 일원이며 신참내기인 잭 스위거트(케빈 베이컨 분)가 사령선 조종사로 팀에 새로 합류합니다. 지상에 남게 된 켄은 분루를 삼키며 허탈감에 빠집니다.
* 러블,매팅리,헤이스(매팅리는 탈락하고...)
드디어 발사 당일, 새턴 5호 로켓에 실린 아폴로 13호가 어마어마한 화염을 일으키며 하늘로 솟아오릅니다. 마침내 달 탐험의 여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지구 궤도를 이탈해 달을 향한 비행을 시작하고, 달착륙선과 도킹까지 무사히 마친 비행사들이 달 궤도 진입에 앞서 휴식을 취하려는 순간, 난데없는 폭음과 함께 우주선이 요동하기 시작합니다. 산소 탱크 안의 코일이 전기 합선으로 감전을 일으켜 폭발한 것입니다.
냉철하고 철저하기로 소문난 우주 관제센터의 진 크란츠(에드 해리스 분) 관제 본부장은 휘하의 기술진을 몰아치고 독려하며 신속히 사태수습에 나섭니다. 크란츠는 폭발로 기계선 엔진이 손상됐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즉시 회항’ 대신 달 인력을 이용해 우주선이 달 궤도를 돌고 나온 후 착륙선 엔진을 작동시켜 귀환 길에 오르게 한다는 ‘자유순환 궤도’ 방법을 택합니다.
* 무사 귀환한 우주인들
전력의 많은 부분을 상실한 사령선을 재진입시 활용하기 위해 사령선은 일시 폐쇄하고 착륙선을 구명정으로 삼아 지구 재진입 지점까지 운항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또 한번의 위기를 맞지만, 직원들이 기지를 발휘해 아슬아슬하게 넘깁니다.
탑승팀에서 제외된 후 실의에 빠져 있던 매팅리 역시 동료들의 소식을 듣고 팔을 걷어붙입니다. 며칠 동안 냉동 상태에 있던 사령선을 전류 20암페어만으로 재가동시키는 방법을 알아내라는 과제를 맡은 매팅리는 필사적으로 작업에 매달려 마침내 풀어냅니다.
* 무사히 착수한 러블
컴퓨터도 없이 수동조종으로 궤도 수정을 해가며 천신만고 끝에 대기권 진입 지점까지 오게 된 비행팀은 마지막 고비를 맞습니다. 방열판이 손상됐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대기권과의 마찰로 발생할 섭씨 2000도의 고열을 캡슐이 견디어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모두가 불안해하는 가운데 대기권 진입에 돌입하고, 통신 두절 상태가 시작됩니다. 3분이 지나고, 4분이 넘도록 비행사들로부터 응답이 없어 모두 포기하려는 순간, 관제센타의 화면에 낙하산 세 개에 매달린 우주선 캡슐의 모습이 들어옵니다. 짐으로부터 "다시 만나서 반갑다!"는 응답이 전파를 통해 전해지자, 관제 센터직원과 가족들, 그리고 온 미국민이 감격하며 환호합니다.
* 성공적인 실패
이렇게 하여 달 착륙에는 실패했지만, 극적인 귀환에는 성공한 아폴로 13호의 대 드라마는 '인간 승리'의 대표적인 사례로 역사에 기록된 채 그 막을 내립니다. 아래는 우주선장 팀 러블의 기록입니다.
“이 날의 감격적인 일은 '성공적인 실패'로 불렸다. 수개월간의 조사 끝에 폭발은, 산소 탱크 안의 불량 코일이 전기 합선으로 불꽃을 일으켰던 게 원인으로 밝혀졌다. 그것은 내가 탑승 배정을 받기 2년 전에 발생한, 사소한 결함이었다.
프레드 헤이스는 아폴로 18호에 탑승할 예정이었으나 예산 삭감으로 취소돼 그 후 다시는 우주비행을 못했다. 잭 스위거트는 항공 우주국을 그만둔 후 하원의원이 됐으나 의정 활동을 펴기도 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켄 매팅리는 아폴로 16호 사령선 조종사로서 달 궤도를 돌고 우주 왕복선에도 탑승했으며 그 후로도 홍역은 앓지 않았다.
진 크란츠는 비행 계획 국장을 지내다 얼마 전에 은퇴했다. 함께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관제센터를 떠났으나 일부는 남아있다. 내 얘기를 하자면 아폴로 13호 비행이 내 마지막 우주비행이 되었다. 그 후로도 동료나 후배들이 달에 갔다가 무사히 귀환하는 모습을 관제 센터나 휴스턴의 내 집에서 지켜보았다.
지금도 가끔 달을 올려다보며 행운의 여신이 함께 했던 우리의 긴 여정과 우리를 귀환시키기 위해 애썼던 수천 명의 사람을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언제, 누가, 다시 또 저 달을 밟을 것인가?“
* 탈락해서 슬픔에 잠긴 매팅리, 그는 후에 아폴로 16호에 승선합니다
* 금년 90세를 맞이한 러블
[ 아폴로 13호 사고 전말 ]
* 우주비행사
선장 : 제임스 러벨
사령선 조종사 : 존 스위거트
(원래는 켄 매팅리였는데 바뀌었습니다)
달 착륙선 조종사 : 프레드 헤이스
* 우주선 닉네임
사령선/기계선 : 오디세이
달 착륙선 : 아쿠아리우스
< 사고 및 귀환 과정 >
아폴로 13호는 시작부터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제2단 로켓 S-II의 중앙 엔진이 예정보다 빨리 연소가 멈췄습니다. 다행히 주위의 4기의 엔진이 자동적으로 연소시간을 연장하고, 궤도를 수정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습니다.
고장 원인은 공진에 의한 것으로, 엔진의 진동이 위험 수준에 도달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는 순조롭게 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구로부터 321,860km 떨어진 지점에서 기계선 2개의 산소 탱크 중 하나가 갑자기 폭발합니다.
* 폭발한 기계선 모습
비행사가 제2탱크의 스위치를 넣었을 때, 내부의 전선이 합선하면서 순간적으로 폭발한 것입니다. 우주비행사들은 그 당시에는 무언가와 충돌한 것이라 생각했답니다. 워낙 큰 폭발이었기 때문에 옆에 있던 1번 탱크에도 손상이 갔습니다.
계기판의 산소 잔량 표시는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고, 몇 시간 뒤면 기계선의 산소는 완전히 비게 되는 위험에 처했습니다. 기계선의 산소가 없어지게 되면 연료전지가 작동하지 않게 되고 새로 전기를 만들어 배터리를 충전할 수 없게 됩니다.
전기가 없으면 사령선은 무용지물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사령선에 있는 산소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기계선을 떼어낸 뒤 대기권 재돌입 시에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휴스턴의 관제센터는 일단 사령선의 기능을 완전하게 정지시키고 달 착륙선으로 피난하도록 비행사들에게 지시합니다.
이 피난은 이미 지상에서 훈련을 몇 차례 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아폴로 8호처럼 달착륙선이 없었으면 3명의 우주비행사는 지구로 돌아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사고로 인해 달 표면에 착륙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 달의 중력을 이용하기로 합니다.
달의 중력을 이용하여 자유 귀환 궤도에 오르면 그나마도 신속하게 지구에 귀환 가능하였기 때문입니다.
* 전력 부족
이렇게 귀환 방법이 결정됐는데 전력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전력이 지구로 귀환까지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의 최저한도까지 떨어뜨려야 했습니다. 연료전지가 정상 가동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남아있는 전력은 사령선에 있는 배터리와 달 착륙선의 배터리가 전부였습니다. 게다가 사령선에 있는 배터리는 추후 지구 재진입 절차를 고려하면 막 쓸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고 결국 최소한의 생명유지장치와 꼭 필요한 장비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장비를 꺼버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결국에는 항법 컴퓨터마저도,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는 꺼놓고 항로 수정이 필요할 때만 잠시 켜서 계산하는 식으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그나마도 나중에 재진입하기까지 전력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제시되자 자동조종장치도 꺼버리고 조종사들이 아예 손으로 항로를 계산하고 달 착륙선의 수동조종장치로 항로를 수정하는 지경에 놓였습니다. 어쨌든 관제센터와 우주비행사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지구로 돌아올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전력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달 표면에 최대한 접근한 뒤 2시간 후에 달착륙선의 강하용 엔진을 사용하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가 또 하나 생깁니다. 바로 전력 문제입니다. 전력이 지구로 귀환까지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의 최저한도까지 떨어뜨립니다.
* 이산화탄소의 방출
또 다른 문제는 이산화탄소의 방출이었습니다. 사람이 숨을 쉬면 이산화탄소가 나오는데 이산화탄소의 양이 많아지면 숨을 쉬기 곤란해집니다. 사령선에는 이산화탄소를 제거해주는 필터가 있었는데 정작 이 필터가 사령선과 착륙선의 규격이 달랐습니다.
결국 선내의 남아 있는 골판지나 비닐봉투를 껌으로 붙이는 등 난리를 치면서 임시 필터를 만들어내면서 이 문제는 간신히 해결했습니다.
* 임시 필터 모습
* 열악한 생존 환경
여러가지 산적된 문제들은 그럭저럭 해결되고 있었지만 우주비행사들이 노출된 열악한 상황은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승무원들은 하루하루를 핫도그 한 개와 물 3온스, 즉 90mL로 버텨야만 했습니다. 알기 쉽게 비유하면, 음료수인 비타500이나 미에로 화이바의 유리병 양이 100ml입니다. 하루 식수를 그 하나로 버텼다는 의미입니다.
* 달 착륙선 아쿠아리우스를 떠나 보내며...
결국 헤이스는 신장염을 얻게 되어 귀환 후 오랫동안 고생했습니다. 물은 워낙 중량이 많이 나가기 때문에 우주선에 직접 싣고 가지 않습니다. 대신 연료전지가 가동을 하면 수소와 산소가 합성되어 부산물로 물이 나옵니다. 즉, 우주인들은 이 물을 정수해서 마시게 되며 이게 정수기의 시초이죠.
그런데 산소가 부족하니 물도 부족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게다가 전력을 아끼기 위해서는 히터도 꺼야 했기에, 내부 온도는 영하로 떨어져 그나마 3온스의 물은 얼음으로 먹어야 했고, 당연히 방한 대책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추위에 벌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월면화를 신어서 발이 시려운 상황은 피할 수 있었지만 원래 달에 내려갈 사람이 2명이니 월면화도 2켤레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 명은 추위를 버티는 수밖에 없어 결국 헤이스는 우주에서 지독한 감기에 걸렸습니다.무엇보다 사고 후 며칠 동안의 고난으로 승무원들의 심신은 한계에 내몰려, 한때는 무력감에 휩싸여 생존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NASA 직원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이들은 마침내 4월 17일 지구에 재진입에 성공하고 무사히 귀환하기에 이릅니다.
< 사고 원인 >
우주비행사들이 돌아온 후 바로 사문위원회가 조직되어 시뮬레이터와 14호용 기계선에 의한 조사에 착수하였습니다. 조사 결과 폭발의 이유가 참 가관이었습니다.
원래 28볼트가 최대 수용가능 전력으로 설계되었던 산소 탱크 히터 부품에 아폴로 우주선의 통용 전압인 65볼트가 넘는 전압이 걸렸던 것입니다.
문제는 아폴로 우주선의 통용 전압이 65볼트라는 사실은 이미 아폴로 우주선이 제작되던 때 NASA가 제조사에게 통보했으며, 제조사도 이에 따라 각종 전기규격을 65볼트로 바꾸었지만, 탱크 히터의 온도조절장치와 부속된 전류차단장치 전압은 28볼트로 그냥 놔두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아폴로 13호 제작 당시, 작은 사고로 인해 해당 탱크가 금속선반에 충돌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실제로는 이 충격으로 인해 주입관이 벗겨졌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단순 사고가 있었다고 보고만 올리고 납품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통상적인 밸브 조절만으로는 탱크 내부의 액체산소를 배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때문에 다른 방법을 써야 하는 문제점을 만들었습니다.
밸브 조절로는 해당 탱크가 산소를 배출하지 못해서 산소를 공급하지 못한다는 문제도 이미 보고되었으나, 일정이 급해서 대체방법을 쓰기로 했으며, 그 방법이 바로 연료 저장 탱크의 히터와 팬을 가동해서 내부의 산소를 녹이고 흐르게 만드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미 대체방법을 써야 할 정도로 문제가 있는 탱크를 쓰는 것 자체가 문제였으나, 이미 이런 대체방법을 2번이나 사용해 본 케네디 우주 센터에서는 별로 큰 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 폭발광경, 상상도
편법이 자주 사용되면 어느새 위험성을 잊어먹는 것이죠.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점검할 때 해당 탱크의 탱크 히터 온도조절장치는 이미 설정된 온도인 27도에 도달해서 전류를 끊는 동작까지는 정상적으로 동작했습니다. 하지만 28볼트용으로 제작된 온도조절장치에 65볼트의 과전압이 걸린 결과 스위치와 전류차단장치가 녹아버렸고 결국 과전압이 계속 걸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장시간에 걸쳐서 최대출력으로 가열이 진행된 나머지 탱크의 중앙관 속을 달리는 동선다발을 피복하는 테프론제 절연체까지 녹아버렸고 이 절연체의 잔해는 후에 크게 문제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욱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케네디 우주 센터의 해당 탱크 점검장치의 온도 표시기는 27도까지만 표기가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 자체를 고려하지 않은 심각한 문제였으며, 탱크 내부 상태를 알려주는 유일한 관측수단인 센서가 불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탱크가 찜통이 되어버려도 외부 조작자는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사건이 터진 이후 제대로 된 온도 표시기로 검사한 결과, 이런 경우에는 탱크 온도가 무려 538도까지 오른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애초에 저 온도표시기만 상식적인 물건이었다면 탱크를 바로 폐기해버렸을 것이고 아예 사고도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해당 탱크는 내부가 어떤 상태인지 아무도 모른 채 그 상태 그대로 아폴로 13호에 장착되었고, 임무 개시로부터 56시간이 흐른 뒤에 수소의 압력이 저하되었음을 알리는 주 경고음이 들리자, 휴스턴은 통상적인 경우라고 생각하고 사령선 조종사 잭 스위거트에게 탱크의 히터 스위치를 켜도 좋다는 지시를 내립니다.
문제는, 앞서 케네디 우주 센터에서 점검한 결과로 인해 해당 산소 탱크 내부의 배선계통 피복은 다 녹아있었으며 액체산소 위에 불이 아주 잘 붙는 테프론제 절연체 쪼가리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여기에다가 정규 전압도 아니고 과전압을 넣었으니 <순산소+가연물질+전기 스파크>가 합체된 대폭발이 발생했습니다. 덕분에 엄청난 폭발로 인해 옆에 있던 정상적인 탱크 및 공용으로 사용하는 배관까지 박살나서 그야말로 우주선이 깡통으로 변해버렸던 것입니다.
* 관제센터, 왼쪽에서 두번째가 진두지휘한 진 그란츠
[ 미-쏘 우주개발 경쟁 ]
< 쏘련의 선공 >
*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 - 스푸트니크 충격
* 스푸트니크 1호
그 당시 미국 사람들은 장거리 미사일과 같은 무기체계와 과학 전반적인 기술이 냉전 체제의 적대국인 소련(러시아)보다 당연히 앞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예상을 깨고 소련에서 먼저 인공위성을 쏘자 매우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를 사람들은 "스푸트니크 충격"이라고도 합니다.
이 스푸트니크 1호 발사 성공의 자극을 받은 미국은 과학 교육, 군사, 기술 부문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선 자존심 만회를 위해 1958년 1월 31일 익스플로러 1호를 발사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 항공 자문위원회 NACA를 1958년 7월 현재의 미국항공우주국, 즉 NASA로 개편하고 지금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후 NASA에서는 머큐리 계획, 제미니 계획,아폴로 계획 등을 세워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하였습니다.
스푸트니크 호는 그 이후로도 계속적으로 발사되어 24호 까지 발사됩니다. 그 중에서 스푸트니크 2호는 세계 최초로 지구의 생명체를 우주 공간에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그 당시 기술로는 되돌아 올 수가 없어서 결국 이 생명체는 우주에서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 생명체는 바로 인류와 친숙한 개이며 이름은 라이카입니다. 스푸트니크 5호는 개 2마리, 쥐 40마리를 태우고 우주로 발사한 뒤 하루 만에 무사히 생명체를 첫 번째로 우주 비행시킨 뒤 귀환시킨 우주선입니다.
* 최초의 우주 개, 라이카
* 보스토크 프로젝트
이렇게 위성을 발사하여 발사기술과 재진입 기술을 확보한 소련은 '인류최초로 사람을 우주로 보내기 위한 프로젝트'를 계획합니다.
바로 '보스토크 프로젝트'였습니다.1960년 소련은 약 스무명의 우주비행사를 선발하여 훈련시켰는데, 이중 첫번째로 발탁되어 올라간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유리 가가린이었습니다.
* 유리 가가린
유리 가가린과 함께 훈련을 진행한 동료인 게르만 티포프는 96년 우주비행 35주년을 맞이하여 한 회고에서 "자신이 유리 가가린 보다 성적이 우수 하였으나, 유리 가가린이 첫 우주비행사로 뽑힌 이유는 다름 아닌 준수한 용모 때문이었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아마도 세계최초의 첫 우주비행사이니, 소련당국에서도 곧 쏟아질 전세계적인 관심에 맞추어 잘생긴 유리 가가린을 첫번째 비행사로 발탁하지 싶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외모 때문에 유리 가가린 한테 밀린(?) 티포프는 두번째 보스토크 호에 탑승하여 우주에 올라가게 됩니다.
* 보스토크 1호에 탄 유리 가가린
[ 미국의 반격 ]
소련이 1957년에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호 발사에 성공한 뒤로 우주는 미국과 소련이 경쟁을 벌이는 또 하나의 전장이 되었습니다. 소련의 위성이 지구 궤도를 돌면서 언제라도 머리 위에서 핵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생각에 미국인들은 불안하고 초조해졌습니다.
미국은 1958년에야 최초의 우주선 익스플로러 1호를 발사했습니다. 하지만 소련이 1961년 유인 우주선 발사에 성공하고 이어 지구 궤도에 올려놓자 미국인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자 케네디는 ‘60년대가 끝나기 전에’ 미국은 달에 사람을 상륙시킬 것이며 또한 그를 다시 지구로 데려올 것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62년 8월, 미국도 최초의 우주 비행사가 나타났습니다. 존 글렌이 ‘머큐리 프로젝트’에 따라 지구 궤도를 돌았던 것입니다. 1960년대 중반에 미국 과학자들은 우주에서 장기간 여행할 때 사람에게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시험하는 ‘제미니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 제미니 계획
라틴 어로 쌍둥이를 의미하는 제미니 호는 우주 비행사 2명을 태울 수 있었습니다. 이전의 머큐리 호에 비하면 1명 더 탈 수 있었지만, 뒤에 나올 아폴로 호에 비하면 탑승 인원이 1명이 더 적었습니다.제미니 호는 여러 차례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 제미니 우주선
1965년 8월에는 8일 동안 우주비행을 함으로써 최장기 우주 비행 기록을 세웠고, 1966년 11월에는 최초로 자동 장치를 통해 대기권 진입에 성공했습니다. 제미니 호는 또한 비행 중인 두 우주선의 도킹에 성공했으며 미국 최초의 우주 유영을 기록했습니다.
* 아폴로 계획
아폴로 계획은 케네디가 설정했던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1969년 7월,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달 착륙 현장을 지켜보는 가운데, 닐 암스트롱이 최초로 달 표면에 발을 디뎠습니다.그 뒤로도 아폴로 호는 여러 차례 우주를 날았지만, 많은 미국인들은 우주 비행의 가치와 효용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초에 다른 급박한 일들이 일어나자 미국은 우주 계획에 대한 예산을 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몇몇 아폴로 계획은 폐기되었고, 애초 2개였던 스카이랩 우주 정거장 건설 계획도 하나만 추진되었습니다.
< 아폴로 계획 >
* 아폴로 1호
아폴로계획의 첫 유인우주선이었던 아폴로 1호는 1967년 1월 21일 훈련연습 도중 우주선 안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 사고로 유능한 우주비행사 그리섬, 화이트 2세 및 .채피의 목숨을 앗아가는 비극이 일어났고, 아폴로계획은 1년 반 이상 중단되었습니다. 이후 아폴로 계획은 7호서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 아폴로 7호
1968년 10월 11∼22일에 쉬라 2세, 아이셀 및 커닝햄 세 비행사에 의하여 260시간 체공(滯空)하면서 163회나 지구를 돌았습니다. 최초의 3인승 우주선의 기능시험이 주요목표였습니다. 유인우주선으로는 최초로 텔레비전 생중계를 실시했습니다.
* 아폴로 8호
1968년 12월 21∼27일에 달세계에 다녀왔습니다. 착륙은 하지 않고 달을 1회 주회하면서 보먼, 러벨 2세 및 앤더스 세 우주인은 달세계 상공(上空)에서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돌아왔습니다. 미국의 과학자들은 우주선을 달까지 보낼 수 있는 강력한 로켓과 우주여행에 있어서의 비행사들의 안전보장에 대해서 자신을 얻었습니다.
* 아폴로 9호
1969년 3월 3∼13일까지 지구를 152바퀴 도는 동안, 맥비트, 스카트 및 슈바이카트 세 우주비행사들은 사령선(司令船)과 착륙선과의 도킹 작업과정을 연습하였습니다.
* 아폴로 10호
1969년 5월 18∼26일에 스태포드, 영 및 서넌을 태우고 달까지 다시 갔습니다. 달을 31바퀴 돌면서 달착륙을 위한 마지막이자 총연습을 끝냈습니다.
* 아폴로 11호
10호가 달에 갔다온 지 불과 1개월이 지난 1969년 7월 16일에 지구를 떠나 20일에 드디어 닐 암스트롱, 올드린 2세 및 콜린스 3인이 달에 도착하였습니다.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달의 고요의 바다에 착륙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콜린스는 사령선을 타고 달을 주회하면서 대기궤도(待期軌道)상에서 달 표면 사진을 찍는 일을 맡았습니다. 이로써 인간이 역사상 처음으로 지구 아닌 다른 천체에 발을 딛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바로 1969년 7월 21일이었는데 이로써 우주원년(宇宙元年)이 시작된 것입니다.
* 아폴로 11호 우주인들(왼쪽부터 암스트롱, 콜린스, 올드린)
* 아폴로 12호
11호의 성공에 뒤이어 같은 해 11월 14∼24일까지 콘래드 2세, 고든과 빈 3인조로 폭풍의 대양에 착륙하여 7시간 35분간의 탐사 끝에 34kg의 월석(月石)을 채취하고 돌아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 아폴로 13호
1970년 4월 11∼17일에 러블, 헤이스 및 수위거트를 태우고 달세계를 향해 갔으나 우주선의 산소 탱크가 파손되는 사고가 일어나 달 착륙을 포기하고 지구로 귀환하였습니다.
* 아폴로 14호
1971년 1월 31일∼2월 9일까지 셰파드, 루사 및 미첼은 달의 프라마우로(Fra Mauro)지역에 착륙하여 9시간 25분 동안에 42kg의 월석을 채집하고 돌아왔습니다. 월석을 나르는데 최초로 손수레를 사용하였습니다.
* 아폴로 15호
1971년 7월 26일∼8월 7일까지 스커트를 선장으로, 한국에도 1972년 10월에 왔던 어윈 및 워든 일행은 달세계에 네 번째로 착륙하였습니다. 이 때 ‘로버’라는 월면주행차(月面走行車)로 착륙선에서 최대 9.6km까지의 거리를 탐사하였습니다. 또한 달세계를 도는 소형인공위성을 달세계의 중력 ·자력 분포 조사와 태양풍 측정을 위한 목적으로 발사하였습니다.
* 아폴로 16호
1972년 4월 16∼27일까지의 여정으로 영, 매팅리 및 듀크 2세 세 사람은 다섯 번째의 달세계 방문을 성취시켰습니다. 월면활동에는 역시 월면차를 사용하였습니다. 월면 활동시간은 20시간 14분이라는 최장시간을 기록하였고, 95kg의 월석을 채취하고 돌아왔습니다.
우주비행사 매팅리는 아폴로 13호 비행사였으나 홍역에 면역이 안되었다고 당시 탈락했던 바로 그 인물입니다.
* 아폴로 17호
1972년 12월 7일, 마지막 여정에 서넌, 슈미트, 이반스 의 세 우주비행사가 달세계에 올랐습니다. 슈미트는 유일한 민간인으로 지질학자였습니다. 그리고 생쥐 20마리가 달세계까지 무전여행(無錢旅行)을 하였습니다.
* 아폴로 우주선의 착수장면
< 우주왕복선 >
스페이스셔틀(space shuttle)이라고도 합니다. 한 번 사용하면 다시 쓰지 못하는 로켓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우주공간과 지구 사이를 반복해서 왕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유인우주선입니다. 80년대부터는 한번 사용하고 폐기해야하는 로켓을 대신할 우주왕복선 개발이 미국을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 우주 왕복선 컬럼비아호 발사
미국의 우주왕복선 개발 계획은 1972년 닉슨 대통령의 승인으로 시작되어 1977년 8월 12일 '엔터프라이즈호'의 실험 성공을 거쳐, 1981년 4월 12일 존 영과 크리프 2명의 우주비행사를 태운 최초의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가 발사되었습니다.
컬럼비아호는 이후 수십 차례에 걸친 항해를 하며 무중력 상태의 우주 공간에서 각종 과학실험을 수행했습니다.두번째로 개발된 우주왕복선은 챌린저호로 1983년 4월 4일 첫 비행에 나선 후 우주왕복선 사상 최초의 우주유영, 미국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 샐리 라이드 탑승, 최초의 흑인 우주비행사 기언 블러퍼드의 탑승 등 많은 화제를 낳았습니다.
* 마지막 우주왕복선 컬럼비아 호
그러나 1986년 1월 28일 7명의 승무원을 태운 챌린저호가 발사한지 1분 13초만에 폭발, 승무원 전원이 사망하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 때문에 2년간 중단되었던 우주왕복선 발사는 1988년 9월 29일 '디스커버리호'에 의해 재개됐습니다.
디스커버리호는 1990년 그 유명한 허블우주망원경을 우주공간에 띄운 우주왕복선으로, 지난 2000년 100회 우주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기도 했다. 허블 우주망원경은 138억년 전 우주가 빅뱅에 의하여 탄생되었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우주배경복사를 발견하여 유명해졌습니다.
1989년엔 애틀란티스호가 첫 비행에 나서, 금성 탐사선 마젤란 위성을 성공적으로 발사하고 돌아왔습니다. 애틀란티스호는 1995년에 러시아의 우주정거장 미르호와 사상 첫 도킹에 성공하기도 했습니다.1992년엔 엔데버호가 발사되었습니다.
첫 비행에 나서 궤도를 이탈한 통신위성 인텔새트 6호를 회수하는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귀환했으며, 이후 허블우주망원경 수리, 국제우주정거장 조립 등을 위해 비행을 했습니다. 2011년 7월 아틀란티스호의 33번째 우주비행을 마지막으로 1981년부터 2011년까지 30년 동안 진행되어온 미국의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이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 미국, 러시아, 중국 간의 우주 정거장 경쟁 ]
인류가 우주를 비행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우주과학자들은 우주에 정거장을 건설하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주에 정거장을 건설할 수만 있다면 편리하게 우주를 개발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곳에서 우주인들이 쉬기도 하고, 우주선도 수리하며, 달에도 가고 화성에도 갈 수 있을 것으로 말입니다.
우주정거장은 우주에 작은 기지를 건설하는 것이죠. 우주정거장 건설을 먼저 시작한 나라는 구소련이었습니다. 구소련의 유인 달 탐험 방식은 미국과는 달리 우선 지구 궤도에 작은 우주선을 발사한 후 그곳에서 결합해 큰 우주선을 만들고, 이 우주선으로 달에 갔다 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구소련은 일찍부터 우주에서 우주선끼리 랑데부하고 도킹하는, 즉 두 개의 우주선이 하나로 결합하는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구소련의 우주개발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우주정거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많이 건설한 나라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믿었듯이, 우주정거장을 먼저 건설하는 나라가 우주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 살류트(Salyut)
살류트는 러시아에서 발사한 세계 최초의 우주정거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이 달 착륙에 성공한 이후, 러시아는 달 탐사와는 다른 분야인 우주정거장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됐습니다.
‘불꽃놀이’란 뜻의 살류트 우주정거장은 미르와 국제우주정거장의 모체라 할 수 있습니다. 살류트는 1971년부터 1982년까지, 11년 동안 1호부터 7호까지 발사됐으며, 1991년 프로그램이 종료될 때까지 현재 사용되는 다양한 우주정거장 기술들을 습득하는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 미르(Mir)
미르는 러시아의 살류트 우주정거장 시리즈를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구소련이 해체된 후, 국제적인 협력이 가능해지자 우주왕복선-미르 프로그램이 진행됐고, 미국을 비롯한 다른 서방의 우주인들이 미르 우주정거장에 장기간 체류하고 방문할 수 있게 됐습니다. 미르의 건설 목적은 우주인이 거주 가능한 거대한 우주과학 실험실의 마련이었습니다.
미르와 우주왕복선이 서로 결합해 일시적으로 거주공간과 작업공간이 확대됐는데, 이는 우주정거장 역사상 세계 최대의무게(205톤)와 넓이를 기록한 것이었다. 미르는 2001년 3월 지구 대기권에 재진입해 피지의 나디 근처에 추락, 남태평양 속으로 가라앉으며 15년의 임무를 마쳤습니다.
* 스카이랩(skylab)
미국이 만든 스카이랩은 새턴 V 로켓 3단의 내부에 거주 공간을 만들어서 지구궤도를 도는 우주정거장으로 개조한 것으로 1973년 5월, 35km의 고도에 첫 발사됐습니다. 1973~1974년에 걸쳐 3회 동안 9명의 우주 비행사가 총 171일 13시간에 걸쳐서 우주에 체류했으며, 1973~1979년까지 지구 궤도를 2,000회 이상 주회한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지구·태양의 관측, 무중력 공간에서의 생리 현상의 연구, 무중력에서의 반도체·금속 결정의 생성, 생물·미생물의 활동 관찰 등 다양한 과학적 실험들이 행해졌습니다. 또한, 인간이 장기간 무중력에서 생활하는 것에 관한 조사도 많이 수행했습니다.
* 국제 우주정거장(ISS)
* 오른쪽이 국제 우주정거장입니다, 왼쪽은 미국의 스카이 랩
국제우주정거장(International Space Station/ISS)은 1986년에 쏘아 올렸던 러시아의 우주정거장 미르가 낡아 수명이 다하게 되면서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1998년 11월 20일 러시아가 우주정거장 전체 구조물의 한 부분인 자랴 모듈을 우주에 쏘아올림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미국, 러시아, 유럽연합,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 벨기에, 덴마크, 스웨덴, 스페인, 노르웨이, 네덜란드, 스위스, 일본, 캐나다 등 세계 16개국에서 참여하여 건설하였습니다.
현재 가장 큰 우주정거장으로 시속 27740km의 속도로 하루에 지구를 15.78회 공전하고 있습니다. 로켓에 실려 우주로 발사된 여러 장치들이 우주 공간에서 조립되고 있는데 현재 6개의 실험실을 갖추고 우주인이 7~10명 정도 머무를 수 있는 규모로 건설 중입니다.
2008년 4월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인 이소연이 이곳에서 머물면서 과학실험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우주정거장은 지구의 중력의 약 1백만분의 1정도의 중력을 가지므로 무중력상태라고 여겨도 무방합니다.
< 중국의 야망, 우주정거장 텐궁 계획 >
* 텐궁 1호
중국은 2011년 9월 29일 톈궁(天宮) 1호를 발사했습니다. ‘하늘의 궁전’이라는 뜻의 톈궁 1호는 중국의 미니 우주정거장 이름입니다. 이로써 중국은 미국과 러시아에 이어 세계 3번째로 우주정거장을 보유한 나라가 됐습니다.
중국의 실험용 우주정거장으로, 톈궁은 중국 4대 명저 중 하나인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천상의 궁궐(톈궁)에 올라가 소란을 떤 고사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길이 10.4mㆍ최대 직경 3.35mㆍ무게 8.5t이며, 실험모듈과 동력을 제공하는 2개의 모듈로 구성됩니다.
중국은 톈궁 1호의 발사가 성공하면서 뒤이어 무인우주선 선저우(神舟) 8호, 9호, 10호를 잇따라 발사해 우주 공간에서 도킹 실험을 했습니다.
이를 통해 2016년경부터 정규 우주정거장 모듈을 우주로 쏘아 올려 2020년 무렵이면 미국과 러시아 등이 주도하는 국제우주정거장(ISS)과 별도의 독자적인 우주정거장을 본격적으로 운영한다는 계획입니다. 그런데 중국은 왜 우주정거장을 가지려고 하는 것일까요?
중국은 이미 2003년 선저우 5호 유인우주선을 이용해 최초의 중국 우주비행사를 지구궤도에 진입시킨바 있습니다. 1명이 탑승한 이 유인우주선은 약 21시간 비행했습니다.
2005년에는 선저우 6호를 발사, 2명의 우주비행사가 약 115시간 32분이나 우주에 머물렀다. 그리고 2008년에는 선저우 7호에 3명의 우주비행사가 탑승하고 우주선 밖으로 나가 작업을 진행하는 우주유영을 실시한 바 있습니다.
이런 우주개발과정은 마치 과거 미국이나 러시아의 우주개발 과정과 흡사합니다. 미국과 러시아는 모두 1인승 우주선(머큐리, 보스토크)에서 시작해 2인승(제미니, 보스호트)으로, 3인승 (아폴로, 소유즈)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본격적인 우주활동을 대비한 우주유영은 두 나라 모두 1965년에 처음으로 실시한바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과 러시아가 확보하려한 우주기술은 2개의 우주선이 우주공간에서 조우하는 랑데부와 서로 연결하는 도킹기술이었습니다.
이런 우주비행기술은 1960년대 미국과 러시아가 치열하게 진행해 온 인간의 달 착륙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꼭 필요했습니다. 지구궤도뿐 아니라 달 궤도에서 착륙선과 우주선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면 우주비행사들은 살아서 지구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미국과 러시아가 실시한 우주유영의 다음 단계인 랑데부와 도킹의 우주비행 기술을 실험하는 것이 톈궁 1호의 가장 큰 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보통의 우주정거장과 달리 톈궁 1호에서는 장기간 거주할 수 없었습니다. 간단한 거주공간과 실험장치, 궤도를 유지하기 위한 추진장치로 구성된 톈궁 1호를 우주정거장이 아닌 우주실험실로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 텐궁 1호 추락 사건
한편 텐궁 1호는 2016년 3월까지 공식 임무를 수행했는데, 일반적으로 임무를 완수한 인공위성은 지상 관제에 따라 대기권에 재진입한 뒤 완전 연소되는 반면 톈궁 1호는 기계ㆍ기술적 결함으로 통제불능 상태가 돼 지상에서 조종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로써 추락이 예상되던 텐궁1호는 2년 뒤인 2018년 4월 2일 오전 8시 15분쯤(현지시간) 지구 대기권에 진입해 파편 대부분이 소멸됐으며, 오전 9시 16분쯤 남태평양 중부 지역으로 추락했다. 이로써 발령되었던 우주위험경보도 해제됐습니다.
< 중국, 우주정거장 톈궁 2호 발사 성공…2025년부터 세계 유일의 우주정거장 >
중국이 2016년 9월 16일, 두번째 우주정거장 톈궁 2호 발사에 성공했습니다. 톈궁 2호는 로켓과 분리된 뒤 10여 분 만에 예정된 고도 393km 궤도 진입에 성공했습니다.
톈궁 2호의 발사 성공을 계기로 중국은 2022년부터 본격적인 우주정거장 운영에 들어간다는 계획입니다. 특히 미국과 러시아가 공동 운영해 온 국제우주정거장이 2024년까지만 운영되는 만큼 이후에는 중국이 세계 유일의 우주정거장 보유국이 됩니다.
< 중국의 우주개발 계획 >
우주 공간을 선점하겠다는 중국의 야심 찬 우주 굴기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이 같은 사실 뒤에는 중국 로켓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첸쉐썬이 있었습니다.
첸쉐썬은 중국의 재미과학자였습니다. 중국 국비유학생으로 미국 MIT로 유학을 떠나 로켓 설계 전문가로 성장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정부 국방과학기술자문위 로켓 부문장을 맡았고 제트추진연구소의 설립에 도움을 준 전문가였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이념 갈등이 심해지자 그는 모든 보직에서 해임되고 가택연금을 당합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총리였던 저우언라이는 첸쉐썬의 능력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인질 교환을 통해 첸쉐썬을 귀국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이에 관하여는 아래에서 상세하게 소개합니다.
이렇게 해서 첸쉐썬의 주도로 연구를 계속한 중국은 1970년 4월 24일, 로켓 창정-1호 개발에 성공합니다. 창정 1호의 성공적인 발사로 중국은 세계5번째 인공위성 발사국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이후 중국은 많은 실패와 도전으로 오늘날의 우주 강국이 된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지금까지 보다 앞으로가 더 무섭게 굴기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중국에서 1980년대 출생자를 가리키는 ‘바링허우 세대’들 중 10만 명에 이르는 이 신세대 과학자들이 새로운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우주개발에 뛰어 드는 이유는 바로 과학자에 대한 정부의 아낌없는 지원과 관심 때문입니다.
일례로 문화대혁명 당시 저우언라이 총리는 군부에게 첸쉐썬 박사를 비롯한 과학자를 최우선으로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고, 장쩌민과 후진타오 주석은 첸쉐썬 박사가 숨질 때까지 해마다 찾아가 깍듯이 인사했습니다. 이후 국가 지도자가 원로 과학자를 찾아가는 게 중국의 관례가 되었습니다.
* 말년에 후진타오 주석과...
현재 중국은 ‘천인계획’과 ‘만인계획’을 통해 해외에 나가 있는 고급 인재를 유치하고 있습니다. 개혁개방 이래 중국 유학생의 72.83%가 귀국했으며 해가 지날수록 돌아오는 유학생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들 중 3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습니다.
중국의 우주개발 과정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습니다. 정부주도의 일관된 정책, 대규모 투자, 인력 양성 등 그들의 화려한 모습은 모두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이것이 바로 중국의 우주굴기가 멈추지 않고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는 이유입니다.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첸쉐썬 ]
문혁이 한창이던 1970년 4월 중국은 최초의 인공위성을 쏴 올렸습니다. 발사 하루 전날 총리 저우언라이가 관계자들을 격려했습니다. 해산 무렵 첸쉐썬을 불렀습니다. 부탁이 있다며 입을 열었습니다. “제발 과로하지 마라.”
"2009년 10월 31일 첸쉐썬이 세상을 떠났다. 98세,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미사일과 로켓의 왕’이 눈을 감았다”며 중국 천지가 커다란 슬픔에 잠겼습니다.
* 칼텍 공대 교수 시절의 첸쉐썬
항저우에서 태어난 첸쉐썬의 첫 번째 스승은 바로 부친 첸쥔푸였습니다. 아버지 첸쥔푸는 항저우의 비단장사의 아들이었습니다. 박학다재하고 겸손하기가 이를 데 없는 애국자였습니다. 자손들에게는 집안 전통이라며 지나칠 정도로 엄격했습니다. 중국의 대문호였던 루쉰도 첸쥔푸 앞에서는 말을 가렸습니다.
첸쥔푸는 아들 첸쉐썬에게 고전과 역사공부 소홀히 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했습니다. ”중국 고전을 섭렵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민족의 특성과 인생관이 그 안에 다 들어있다. 조국의 역사를 제대로 정독하지 않은 사람에게 애국을 바라는 것처럼 허망한 일도 없다.”
첸쉐썬은 무슨 과목이건 1등만 했습니다. 교사 한 명이 “이 애는 공부의 신”이라며 ‘학신(學神)’이라는 별명을 붙여줬습니다. 별명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습니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첸쉐썬은 무슨 학과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첸쥔푸는 뒤로 빠졌습니다. “내게는 제일 마지막에 와라. 모두의 의견부터 들어봐라.” 수학 선생은 수학과를 권했습니다. “너는 수학의 천재다.” 국어 교사는 중문과를 가라고 했습니다. “네 문장을 읽고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장차 작가가 되라.” 예술을 택하라는 교사도 있었습니다. “너는 예술에 천부적인 자질이 있다. 회화나 음악을 전공해라. 화가나 작곡가가 네 체질에 맞다.” 모친도 의견을 내놨습니다. “아버지처럼 교육학을 해라. 난세에는 학교 선생이 제일이다.” 등등
* 애기 시절의 첸쉐썬, 안고있는 사람은 장차 그의 장인이 될 장바이리입니다. 아버지
첸쥔푸와 둘도없는 친구였고 당시 중국 최고의 군사가였습니다. 일본 육사를 1등으
로 졸업하고 많은 장군들을 길렀고 교육가로 명망을 떨쳤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첸쉐썬은 국부 쑨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쑨원은 중국이 쇠퇴한 원인이 교통 때문이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중국이 부흥하려면 교통이 발달해야 한다. 철도는 인체의 혈관과 같다.” 당시 중국은 철도 기술자가 부족했습니다. 우수한 학생들이 상하이 교통대학으로 몰렸다. 나중에 중국 공산당 주석이 되는 장쩌민도 교통대학 출신입니다.
첸쉐썬도 철도 공정사가 꿈이었습니다. 교통대학 기계공정학원에 입학했습니다. 3학년 때 일본군이 만주를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1932년 1월, 상하이 사변이 발발했습니다. 첸쉐썬은 일본군 전폭기의 폭탄 투하를 여러 차례 목격했습니다. 충격이 컸습니다. 철도보다 항공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서관에 있는 항공 관련 책을 깡그리 독파했습니다.
*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첸쉐썬
대학을 1등으로 졸업하자 미국 관비유학생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습니다. 아버지 첸쥔푸는 아들의 선택에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조국에 대한 감정이 없으면 충성도 불가능하다. 출국하기 전에 중국 고전과 역사 서적을 충분히 읽고 가라. 조국의 역사를 정독하며 인생관을 확립해라. 그런 바탕 없이 자연과학을 하면 국가에 해가 된다.”
* 카먼의 제자가 되다
1935년 8월 첸쉐썬은 MIT에 입학해 미국인들과 경쟁했습니다. 1년 만에 항공공정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문제는 실습이었습니다. 미국의 비행기 제조창은 외국인 출입을 금지시켰습니다. 실습이 불가능한 첸쉐썬은 진로를 놓고 방황했습니다. 그는 칼텍 공대에 카먼이라는 세계적인 과학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로 결심합니다.
첸쉐썬은 칼텍 공대 박사반에 입학했습니다. 입학 첫날, 지도교수 카먼이 부인과 함께 저녁을 사줬습니다. “빼어난 인재가 많은 곳이다. 경쟁하며 한걸음씩 나가라. 작은 걸음으론 창신(創新)이 불가능하다. 긴 보폭으로 빠르고 높게 뛰어야 한다. 남들이 생각 못하는 것을 생각하고, 남들이 말한 적 없는 것을 말해라. 그것이 바로 창신이다.”
그는 그곳에서 카먼의 지도 아래 공기 역학과 로켓의 원리를 공부했습니다.
* 귀국후 마오쩌뚱과...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했습니다. 1주일 후 독일군이 프랑스 북부의 발사장에서 로켓 V1을 영국으로 날렸습니다. 3일간 쏴댄 4361발 중 2500발이 영국에 떨어졌습니다. 연합군이 발사장을 점령하자 독일군은 네델란드의 헤이그 인근으로 장소를 옮겼습니다. 이듬해 3월 헤이그가 점령될 때까지 새로운 로켓 V2 1400발을 영국으로 발사했다. 517발이 런던에 명중했습니다.
이는 미국이 로켓에 관심을 두게 되는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1944년 12월 1일 펜타곤(미국 국방부)은 육군항공사령부 과학고문단을 발족시켰습니다. 단장에 카먼을 임명했습니다. 카먼은 첸쉐썬을 워싱턴으로 불렀습니다. 훗날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내 제자 첸쉐썬은 칼텍 공학원 로켓 소조의 창립멤버로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로켓 개발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 36세가 되도록 미혼이었던 첸쉐썬은 공인된 천재였다. 그의 연구는 미국의 고속 공기동력학과 분기추진 기술을 촉진시켰다. 나는 그를 고문단 단원으로 추천했다.”
펜타곤에 진입한 첸쉐썬은 미국의 최고 군사기밀에 접근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첸쉐썬이 펜타곤에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칼텍의 분기추진 실험실이 로켓 개발에 열중하는 동안 히틀러가 자살하고 독일이 무조건 투항했습니다. 이어서 일본도 백기를 들었습니다.
전쟁시절 연합국 일원이었던 미국과 소련 사이에 독일 과학자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두 나라는 종전 전부터 독일의 로켓 제조 기지와 과학자 명단 확보에 열을 올렸습니다. 일류 스파이들을 독일에 잠입시켰습니다.
* 부인 장잉과...첸쉐썬의 아버지와 장잉의 아버지 장바이리는 어렸을 때
부터 두사람을 부부로 점찍었다고 합니다. 장인 장바이리는 중국 근대사
에 등장하는 유명한 교육자였습니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밀보를 받은 루스벨트가 즉석에서 지시했습니다. “인재가 제일이다. 두뇌가 영토보다 중요하다. 독일 본토에 진입하면 로켓 전문가부터 확보해라.” CIA는 폰 브라운을 비롯한 독일 과학자 체포 계획안을 짰습니다.
펜타곤도 독일 로켓 기지 조사와 전문가 심문을 위한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명단 첫머리에 카먼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첸쉐썬이 빠질 리 없었습니다.
* 독일에 들어가 ‘독일 로켓의 아버지’ 폰 브라운 설득
펜타곤은 독일에 파견한 심문조도 고문단이라 명명했습니다. 고문단은 군인으로 위장했습니다. 카먼은 육군 소장, 첸쉐썬은 소령 계급장을 달고 독일 땅을 밟았습니다. 로켓 기지는 소련군 점령지역이었습니다. 미군은 약정이건 뭐건 개의치 않았습니다.
* 유럽에 갔을 때...오른쪽에서 네번째가 첸쉐썬
로켓 기지에 밀고 들어가 과학자 492명과 가족 644명, 제작이 끝난 로켓 100여 개와 설계도면 등을 차량 300대에 싣고 사라졌습니다. 소련군은 6시간이 지나서야 부랴부랴 도착했습니다.
첸쉐썬과 카먼은 미군 막사에서 폰 브라운을 심문했습니다. V1, V2를 개발한 브라운은 한 살 위인 첸쉐썬의 심문에 순순히 응하며 자신의 연구 경력을 상세히 진술했습니다. 한 구절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우주여행이 꿈이었다. 스물두 살 때 첫 번째 로켓을 만들었다. 1800m까지 솟아 올랐다. 군의 관심 대상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실험실과 발사대 등 모든 시설을 만들어줬다. 1939년 스물일곱 번째 생일 날 히틀러가 발사대에 장착된 로켓을 참관했다. 원리를 상세히 설명하던 중 히틀러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당황했다. 로켓의 군사적 용도를 설명했다. 히틀러는 딴사람으로 변했다. 귀를 쫑긋거리며 두 눈에 빛이 났다.”
브라운은 카먼과 첸쉐썬의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미국행을 결심했습니다. 9월 16일 새벽 대형 수송선 한 척이 뉴욕항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선상에는 귀국 병사 수천명과 독일 교향악단으로 위장한 로켓 전문가 120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 MIT 개교 이래 최연소 종신교수가 된 첸쉐썬
첸쉐썬의 독일 체험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시야가 넓어지고 학문적으로 얻는 바가 많았습니다.
첸쉐썬은 칼텍을 떠나 MIT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MIT는 첸쉐썬을 존중했습니다. 정교수와 종신교수 임명장을 동시에 줬습니다. 37세, 개교 이래 최연소 종신교수였습니다. 아래는 카먼의 추천서입니다.
“첸쉐썬은 동년배 중 가장 뛰어난 과학자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다. 성숙한 인격과 조직능력도 갖췄다. 지식과 도덕에 대한 충성은 전심전력, 과학에 대한 봉헌을 가능하게 했다.”
1947년 여름, 첸쉐썬은 부친의 위장수술 소식을 접하자 일시 귀국했습니다. 중국은 국-공내전이 한참이었습니다. 장개석 정부는 첸쉐썬의 귀국을 반겼습니다. 여러 대학에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첸쉐썬은 모두 거절했습니다.
1947년 여름, 12년 만에 귀국한 첸쉐썬에게 모교 상하이 교통대학과 베이징의 칭화대학 등에서 강연 요청이 빗발쳤습니다. 베이징대학 교장 후스가 공학원 원장을 제의하자 교육부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언론기관에 첸쉐썬을 교퉁대학 교장에 내정했다고 발표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첸쉐썬은 모교와 베이징대학의 초빙을 미국에서 더 연구할 게 있다며 완곡하게 사양했습니다. 그는 내심으로 국민당 정부가 너무 무능하고 부패했다고 생각했으며 이런 정부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했습니다.
* 미국에 평생 머물 생각은 안해
미국 시민권자였던 첸쉐썬은 미국 시민권 취득 이유를 밝힌 적이 있습니다. 직접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추방당할 때까지 20년간 미국 생활을 했다. 초기 3년은 학생시절이었고 나머지 10여년은 일만 했다. 조국에 돌아와 동포들에게 충성할 준비기간이었다. 정치적인 문제로 한동안 미국시민이 된 적이 있었다. 국민정부가 대만으로 패주한 후에도 미국은 국민당을 지지했다. 나는 국민당 정부가 발행한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다. 대만으로 가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어찌나 집요하고 귀찮게 구는지, 미국 시민이 되는 것 외에는 피할 방법이 없었다.”
평생 미국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는 근거도 설명했습니다.
“미국인들은 퇴직 후를 위해 월급의 일부를 보험회사에 예치한다. 내게 예치 금액이 얼마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다. 한 푼도 없다고 하면 이상한 표정들을 지었다. 미국에 영주할 생각이 없었던 나는 이상할 게 전혀 없었다. 신중국 수립 소식을 접하자 귀국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1950년 6월 6일, 첸쉐썬은 평생 이날을 잊지 못했습니다. 칼텍 공학원의 연구실에 낯선 사람들이 들이닥쳤습니다. FBI가 신분증을 제시했습니다. 엄숙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 공산당원이라는 증거를 포착했다며 해명을 요구했습니다. 첸쉐썬은 부인했습니다. 곤혹스러운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 킴벌 - “첸쉐썬이 중국 가게 한 게 미국이 한 가장 멍청한 짓”
1981년 2월, 전 칼텍 총장 두브리지가 첸쉐썬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첸쉐썬은 미국의 매카시즘(공산주의 배척운동)이 중국에 보낸 거대한 선물이었다. 전쟁 기간, 우리는 각종 항공과 분기추진 계획에서 그가 필요했다. 그는 당분간 중국에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연구 환경이 좋은 미국에 한동안 머물 계획이었다. 국공내전이 중공의 승리로 끝날 조짐이 보이자 미국에 귀화했다. 비범한 사람이었다.”
6·25전쟁 발발 1개월 전, 첸쉐썬이 두브리지의 집무실을 방문했습니다. “중국에 연로한 아버지가 있다. 손자를 보고 싶어한다. 그간 국공내전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 휴가를 허락해주기 바란다.” 두브리지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다녀오라며 기간을 물었다. 첸쉐썬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정해진 바 없다. 아버지 건강만 회복되면 돌아오겠다. 몇 개월이면 족하다.”
첸쉐썬이 조국을 방문한다는 소문이 학내에 퍼지자 동료 한 사람이 해군 참모차장 킴벌에게 일러바쳤습니다. 킴벌은 첸쉐썬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절대 안 된다며 발을 굴렀습니다. “우리의 미사일 연구와 제조, 첨단무기 발전계획에 참여한 사람이다. 미국의 가장 우수한 로켓 전문가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중국은 우리의 친구가 아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지해야 한다.”
상원의원 매카시가 미 국무부 내에 200여 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며 명단까지 발표하는 바람에, 아인슈타인이나 미국 원자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까지 빨갱이로 몰릴 때였습니다.
* 중국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이 모두가 첸쉐썬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 FBI의 감시
FBI가 첸쉐썬의 행적을 추적했습니다. 칼텍의 마르크스 레닌주의 학습조 책임자 웨인바움을 체포했다. 웨인바움은 첸쉐썬의 추천으로 분기추진실에 들어온 화학자였습니다. 두브리지의 회고를 소개합니다.
“웨인바움은 미국 공산당원이었다. 첸쉐썬과 함께 엥겔스의 저작물을 읽으며 토론한 적이 있다고 실토했다. FBI는 첸쉐썬을 방문하기 전 내게 통보했다. 첸쉐썬에게 물었더니 그런 모임에 간 적이 있다고 했다. 순수한 사교 활동이었고, 어떤 방식이건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다며 웃었다.”
같은 날 오후, 칼텍은 미 6군단 사령부가 보낸 비밀문건을 수령했습니다. “이 시간 이후 군사기밀을 요하는 연구에 첸쉐썬의 접근을 엄금한다. 헌병사령부가 발급한 비밀취급 인가증도 회수해라.” 한마디로 연구에서 손을 떼라는 것이었습니다. 첸쉐썬은 마음이 급했습니다. 서적과 원고, 생활용품을 나무상자에 꾸렸습니다. 캐나다와 홍콩을 거쳐 아버지가 있는 상하이로 갈 심산이었습니다. 우선 짐부터 부쳤습니다.
두브리지는 첸쉐썬이 미국을 완전히 등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습니다. 위싱턴에 가서 해군 참모차장 킴벌을 만나보라고 건의했습니다. 킴벌이 나서면 첸쉐썬의 신분을 회복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 감시당하던 시절의 첸쉐썬
킴벌은 노련했습니다. 걱정 말라며 변호사를 구해줬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겸손했습니다. 한숨을 돌린 첸쉐썬은 귀국 비행기표를 구입했습니다. 변호사는 질질 시간만 끌었습니다. 귀국 날짜가 다가오자 다시 킴벌을 찾아갔습니다. “비밀취급 인가증이 없으면 미국에 머물 이유가 없다. 6일 후 조국으로 가겠다.”
첸쉐썬이 돌아가자 킴벌은 어딘가 전화를 걸었습니다.
“첸쉐썬은 미국 미사일 제작의 핵심기밀을 꿰뚫고 있다. 한 사람이지만, 미국 해병대 5개사단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면 된다. 쏴 죽여 버릴지언정 붉은 중국으로 보낼 수는 없다.” 뒤통수를 친 것입니다.
5년 후 강금이 풀리고 첸쉐썬이 중국에 돌아왔을 때도 킴벌은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첸쉐썬이 중국에 돌아가도록 풀어놓은 것은 미국이 한 일 중에 가장 멍청한 짓이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미국 이민국은 민첩했습니다. 워싱턴에서 빈손으로 로스앤젤레스에 돌아온 첸쉐썬을 구치소에 가둬버렸습니다. 면회 다녀온 두브리지가 기록을 남겼습니다. “감옥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었다. 쾌적한 작은 방이었다. 전등이 딸린 책상과 식탁도 멀쩡했다. 구금이다 보니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미국을 위해 나름대로 봉사한 사람이다 보니 분할 만도 했다.”
중국 과학원과 과학자 동맹이 항의 성명을 내고, 두브리지와 카먼도 백방으로 구명을 호소했습니다. 14일 만에 풀려난 첸쉐썬은 자유를 상실했습니다. 도청과 서신검열은 기본이고, 가는 곳마다 FBI가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미국이라면 넌덜머리가 났습니다. 중국이 첸쉐썬의 귀국을 요청할 때마다 미국 측의 답변은 한결같았습니다. “귀국을 희망하는 중국인 유학생들은 보내겠다. 첸쉐썬은 미국 시민이다. 본인이 귀국을 바라지 않는다.”
그럭 저럭 5년이 흘렀습니다. 하루는 카먼이 보내온 과일 상자 밑에 깔린 중문판 화보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마오쩌둥과 낯익은 노인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그 노인은 당시 전인대(全國人民代表者大會) 부위원장인 천수퉁이었습니다 천수퉁은 아버지의 오랜 친구였습니다.
첸쉐썬은 천수통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주소를 알 턱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보낼 편지를 작성했습니다. 감시원들은 중국 주소에 민감했습니다. 벨기에에 있는 처제 생각이 났습니다.
* 중국의 텐궁 2호...이것도 첸의 제자들로부터...
* 미국 탈출 시도
1955년 6월 15일 밤, 첸쉐썬은 천수퉁에게 보낼 편지를 썼습니다.
“수년 전 저의 착오로 미국 정부에 구류된 지 5년이 흘렀습니다. 그간, 조국의 건설에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현재 제가 겪는 고충은 표현이 힘들 정도입니다. 미국은 귀국을 원하는 중국학생들은 모두 돌려보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정부는 이런 말들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저 외에도 조국에 돌아가기를 바라는 유학생들이 많습니다. 저의 뜻을 정부에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몇 년 전 뉴욕타임스에 실린 기사도 오려서 동봉했습니다.
“한때 칼텍 공학원의 저명한 로켓 전문가 첸쉐썬을 중국으로 추방하려 했다. 거의 동시에 이민국은 미국의 최고 이익에 불리하다는 이유로 출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연방수사국(FBI)은 중요 자료들의 중국 반출 기도 혐의로 첸쉐썬을 체포했다. 조사 결과 비밀 자료는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벨기에에 있는 처제 장화의 주소는 부인 장잉이 왼손으로 애들 글씨를 모방해서 썼습니다.
첸쉐썬이 발송 방법을 난감해 하자 장잉이 꾀를 냈습니다. “마을 인근, 대형 상점 찻집에 우편함이 있는 걸 봤다.” 장잉과 함께 상점에 간 첸쉐썬은 문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부부가 장 보러 왔을 때, 남자가 상점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미국에서는 정상이었습니다.
뒤따라온 FBI 요원들은 첸쉐썬의 행동만 주시했습니다. 상점에 들어간 장잉은 주위를 살폈습니다. 보는 사람이 없자 민첩하게 우편함에 편지를 투입했습니다. 편지는 별 탈 없이 벨기에까지 갔습니다.
장화는 상하이에 있는 형부의 아버지 첸쥔푸에게 형부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첸쥔푸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옛 친구 천수퉁에게 아들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천수퉁은 총리 저우언라이를 찾아가 첸쉐썬의 편지를 보여줬습니다.
저우언라이가 황급히 외교부에 지시했습니다. “중·미 회담이 열리는 제네바로 이 편지를 보내라. 미국이 중국인의 귀국을 방해하는 증거가 이 안에 있다.”
* 은사 카먼 박사, 항거리에서 망명온 유대계입니다
1954년 4월, 19개국 대표들이 제네바에 집결했습니다. 흐지부지 끝날 무렵, 중국 대표단이 기자간담회를 자청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우리 교민과 유학생들을 무리하게 억류하고 있다. 미국과 직접 담판하고 싶다”며 대사급 회담을 제의했습니다. 미국 측도 동의했습니다. 중국은 폴란드 대사 왕빙난을, 미국은 판문점 회담에도 참여했던 체코주재 대사 요한슨을 대표로 지명했습니다.
1955년 8월 2일, 중·미 대사급 두 번째 회담에서 요한슨이 중국 측에 억류된 미국 교민과 군인 명단을 내밀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조속한 시일 내에 미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 바란다.” 왕빙난이 입을 열었습니다.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쌍방의 성의가 중요하다, 중국에 있는 미국 교민들은 중국 법률만 준수하면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중국 경내에 거주하며 합법적인 직업에 종사할 수 있다. 형사나 민사 사건에 관련되지 않았다면, 언제 건 출국이 가능하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래 미국 교민 1485명이 중국을 떠났다. 현재 남아있는 극소수는 간첩이나 파괴활동으로 체포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오늘 받은 명단은 충분히 검토하겠다. 다음 회담 때 미국에 억류 중인 중국인 유학생 귀국 문제와 함께 답하겠다.”
* 막후 교섭
세 번째 회의에서 왕빙난은 첸쉐썬을 거론했습니다.
“신 중국 성립 소식을 들은 첸쉐썬은 조국의 품을 그리워했다. 미국 정부는 그를 억류하고 위협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보호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요한슨은 미국 법률을 거론했다. “한국전쟁 기간, 미국은 로켓과 원자탄 제조에 관련된 중국인의 출국을 법률로 금지한 바가 있다”. 왕빙난도 맞받았습니다. “무리한 규정은 폐기시켜야 한다.”
첸쉐썬이 천수퉁에게 보낸 편지를 전달받은 왕빙난은 요한슨에게 비밀 접촉을 제의했습니다. 제네바의 조용한 카페에서 요한슨을 만난 왕빙난은 첸쉐썬의 편지를 읽어줬습니다. 며칠 후 대사급 회담이 열렸습니다.
* 귀국후 유소기와...
시작과 동시에 왕빙난이 성명서를 읽어내려 갔습니다. “중국 정부는 미국 간첩 11명을 석방하기로 했다.” 다음날 회의에서 왕빙난은 미국에 억류 중인 중국인 명단을 요한슨에게 전달했습니다. 첸쉐썬의 이름이 맨 앞에 있었습니다.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첸쉐썬은 베이징의 천수퉁이 보낸 전보를 받았습니다.
“네가 보낸 편지는 잘 받았다. 제네바 주재 미국 대사가 너에 대한 모든 금지는 취소됐다고 우리 측에 통보했다. 귀국 날짜를 알려주기 바란다.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바로 연락해라.”
스승이며 동료였던 카먼이 제일 기뻐했습니다. “너는 학문적으로 이미 나를 추월했다. 조국에 돌아가면 더욱 분발해라. 과학은 국경을 가릴 필요가 없다.”
훗날 저우언라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중·미 대사급 회담은 세계 외교사에 남을 마라톤 회담이었다. 15년간 136차례 열렸다. 실질적인 성과는 없었지만, 첸쉐썬을 돌려받은 것 하나 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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