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53
8월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EBt0CYZSF1g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84109679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아침미사를 마치고 잠깐 마당으로 나섰는데, 잠시나마 참으로 특별한 광경이 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여기 저기 떠돌다가 저희 집에 정착한 슬기라는 고양이 녀석이 까치 한 마리에게 슬슬 쫓겨나고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몸무게나 공격성이나 여러 면에서 게임이 안 되는 까치인데, 아주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가서 ‘깍깍’ 있는 힘을 다해 외치며 고양이를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결사적인 까치의 공격 앞에 고양이는 슬슬 뒤꽁무니를 빼더군요.
도대체 왜 그랬을까, 생각에 잠겨있었는데, 잠시 뒤에 해답을 찾았습니다. 슬기라는 녀석이 까치집을 습격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안에 들어있던 부화 중이던 까치 알을 슬쩍해서 홀랑 까먹어버린 것입니다.
한 발 늦게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너무나 황당했던 어미 까치는 그렇게 목숨까지 걸면서 슬기를 뒤 쫒아갔던 것입니다.
어미 새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가끔씩 깜짝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정말 극진한 모성입니다. 새끼들이 알에서 부화하고 나면 그 뒤로는 완전히 자신을 잊습니다. 하루 온 종일 목숨까지 걸어가며 새끼 새들을 먹여 살립니다. 혹시라도 침입자가 새끼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그렇게 힘든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모님 역시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이후의 삶, 별반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앉은 성모님의 마음은 다른 어머니들보다 더욱 특별했을 것입니다. 더 조심스러웠고, 더 노심초사했고, 더욱 많은 신경을 쓰셨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날로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순간 순간 지켜보신 성모님, 혹시라도 나로 인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어떡하나 걱정이 태산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유년시절, 시절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헤로데의 유아 박해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로 피난까지 갔습니다.
잠잠해지니 또 다른 터전을 찾아 돌아왔습니다. 지금도 ‘이사’하면 깝깝한 생각이 먼저 드는데, 그때 당시 아기 예수님으로 인해 여러 번 터전을 옮겨야 했던 성모님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늘 묵묵히 아기 예수님을 위해 엄마로서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있는 곳에 늘 계셨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언제든지 응했습니다.
잠시도 떨어져있지 않고 예수님 주변만을 맴돌며,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만을 사랑하고, 예수님만을 연구하고, 예수님만을 관상했던 예수님의 사람이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성모님의 삶이 힘들기만 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구세주 하느님을 직접 내 팔에 앉았습니다. 구세주 하느님께 직접 젖을 먹였습니다. 구세주 하느님을 직접 내 손으로 키웠습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 내 도움에 힘입어 무럭무럭 성장해나갔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십자가 아래 서계시는 참혹함과 돌아가신 예수님을 당신 팔로 앉는 괴로움도 겪으셨지만, 고통보다는 기쁨이, 시련보다는 축복이 훨씬 많았던 성모님의 생애였습니다.
오늘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정말 큽니다. 나자렛의 시골 처녀 마리아,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지금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따뜻한 위로를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어머님으로 존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숱한 성인성녀들과 함께 우리를 내려다보시는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나를 보거라. 그저 예라고 대답하고, 그저 묵묵히 견뎌내며, 늘 예수님 주변을 떠나지 않고, 그분 얼굴을 바라보며, 그분 얼굴을 관상하며, 그렇게 살아온 내 얼굴을 바라 보거라.”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ni5yRn7BnV0
++++++++++++++++++
<하늘나라에도 경쟁이 있다>
오늘은 성모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당신 육신을 지니고 하늘로 승천하셔서 당신 아드님과 함께 사십니다. 이것을 기분 나쁘게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모님을 너무 신격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육신을 지니고 하느님 곁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무엇이 신격화라 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성모님은 원죄가 없으셨습니다. 원죄란 아담과 하와가 지어 인류에게 미친 죄입니다. 자아, 곧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나는 인간의 상태를 말합니다. 사랑은 자기를 내어주는 것인데 자아는 그것과 반대되는 욕구로 자기 먼저 살라고 합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원죄에 물드셨다면 그 인성을 그대로 받는 예수님도 원죄에 물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죄인이 되어 인류를 구원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성모님은 은총이 가득하신 상태로 준비되셔서 예수님께 죄에 물들지 않은 인성을 물려주셔야 했습니다. 인간의 몸이 죄 때문에 죽음을 보게 되고 썩게 되었다면, 죄 없는 성모님은 그 육신으로 죄 짓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의 상태로 에덴동산에 사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성모님이 이러한 상을 받지 않으셨다면 어떨까요? 우리 인간 중에 누구도 더 거룩해지기 위해 경쟁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늘 나라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하신다는 것 자체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성모님처럼 더 거룩하기 위해 경쟁을 하게 됩니다.
경쟁은 나쁜 것일까요? 물론 이 세상에서의 경쟁은 지옥을 만듭니다. 인도의 물소 달리기경기가 마을마다 축제였던 때가 있었는데 여기에 상금을 거니 자신의 경쟁자를 살해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경쟁은 나쁜 것일까요? 아닙니다. 경쟁은 좋습니다. 왜냐하면, 노력한 만큼 상을 받아야 정의로운 것입니다. 저도 어떤 피정에 가서 열심히 하면 1등을 할 수 있고 그러면 본당의 영광이 된다고 해서 열심히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1등은 없었습니다. 모두가 같은 영광을 받았습니다. 더 잘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보상을 받지 못하자 다음번 피정에는 대충하자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저만 성격이 못되어서 그럴까요?
등수를 주지 않으면, 혹은 낙제가 없다면 인간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원죄의 힘이 그만큼 강력한 것입니다. 지옥이 없다면 어떨까요? 다 대충 살 것입니다. 천국에서 서열이 없다면 어떨까요? 간신히 주일만 지키는 신자가 될 것입니다. 각자가 더 많이 받기 위해 더 노력하다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자아가 커지는, 그러니까 돈과 쾌락과 교만이 성장하게 하는 방향으로 경쟁을 시키기 때문에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겸손과 사랑을 증가시키기 위한 경쟁이 있습니다.
분명 세례자 요한도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보다 작다고 했고, 이 세상에서 작은 계명을 어기도록 가르치면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취급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늘 나라에도 분명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모 마리아와 같은 대접을 해 달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표정이 어떨까요? 한 만큼 받는 것이 정의입니다.
‘포크포크’라는 유튜브 채널에 ‘엄마 임신 소식 들은 5살 아들의 예상 못 한 반응’이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엄마가 임신을 했다고 하자, 5살 먹은 트레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이 엄마는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하며 엄마를 나무랍니다. 지금 있는 동생을 낳아서 자신의 사랑이 빼앗기고 있는데 또 낳으면 점점 자기 입지를 빼앗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경쟁자라고 여겼던 동생이 태어나자 아이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동생 둘을 아주 잘 보살핍니다. 그 이유는 부모에게 사랑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부모가 사랑해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사랑받는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는 부모가 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부모가 자신의 뜻을 더 따라주는 자녀를 더 사랑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사랑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경쟁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1등을 한 누군가를 모델로 세우셔야 했습니다. 그래야 나도 그 1등에 근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1코린 9,24)
얼마 전 일주일에 하루씩 와서 5년 넘게 저에게 따듯한 밥을 해 주시던 자매님이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좋은 곳에 갔다는 표징이 아주 많았습니다. 많은 분의 꿈에 나타나고 화장한 유골을 봉안당에 모실 때가 정확히 금요일 오후 3시이기도 했으며(그분은 자비의 기도를 열심히 바치셨습니다) 그때 갑자기 태양이 비추고 바람이 솔솔 불어 시원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새 한 마리와 나비 하나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례를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영성관에 와서 아마 처음으로 무지개를 본 것 같은데) 무지개가 영성관에서 시작하여 하늘을 뚫고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표징들은 저에게도 힘을 주었지만 남은 두 분에게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노력한 것에 대한 보답을 이렇게 받아야지 남은 두 분도 힘이 날 것입니다. 만약 열심히 봉사해도 안 좋은 일만 생긴다고 여기게 되면 남은 분들이 힘이 나겠습니까? 분명히 노력한 만큼 주님께서 은총을 주신다고 믿을 때 더 열심히 하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는 한 인간으로서 우리도 열심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따르면 그만한 보상을 받으니 게으르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성모 승천이 우리에게 주는 자극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8월15일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승천 대축일]
8월 15일은 광복절이며 성모승천 대축일이다. 성모승천에 대한 것이 성서에 나타난 근거는 없지만, 초대교회에서부터 이에 대한 신앙을 간직해 왔고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가 ‘대자대비하신 하느님’(Muniticentissimus Deus)이라는 칙서를 통해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다. 교회는 2000년간을 마리아의 승천을 기념했으나 정식으로 신앙 교리로 선포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교회는 오늘 하느님의 모친,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의 가장 큰 축일을 지내고 있다.
복음: 루카 1,39-56: 마리아의 노래
주님의 천사가 성령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전갈을 마리아에게 전한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그리고 불가능한 상황에서 아이를 낳게 하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을, 즉 남자가 없는 처녀가, 그리고 아기를 낳을 수 없던 엘리사벳, 노인 즈카르야의 아내가 아기를 가졌다는 것과 마리아도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보증해 주었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즉 하느님께 충실히 그 뜻을 받아들이고 있다. “말씀하신 대로”, 즉 하느님의 말씀대로(38절),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고 즉시 집을 떠나 엘리사벳을 방문하고, 도와주기 위해 서두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엘리사벳에게 인사한다.”(aspázomài).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한 마리아는 이제 성령으로 가득 차 있다.(35절) 그리고 엘리사벳이 당신 친척의 “인사”(aspamós)(36절)를 들었을 때, 먼저 당신의 태중의 아기가 성령으로 가득 차 기뻐하였다. 마리아의 방문과 인사는 엘리사벳에게 또한 성령의 충만함을 주었다(41절).
이렇듯 마리아는 첫 번째로 성령을 받은 분이셨으며, 엘리사벳은 두 번째 성령을 받으신 분이시다. 이분들은 바로 성령을 전달해 주는 분들이다. 이 두 여인은 함께 태어날 아기들에게 있어 주님의 공동체, 구원의 공동체, 위대한 왕의 거룩한 나라의(참조: 시편 47,3; 마태 5,35), 성령으로 준비된 성전의 처음의 중심인물이 된다.
(마리아 승천 축일의 의미)
오늘 축일은 마리아의 신앙과 삶의 승리와 영광을 드러내 주는 동시에 구원역사의 완성에 희망을 준다. 성모승천은 예수님 부활의 은혜를 입은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언젠가 성실한 신앙인 모두에게 주어질 부활의 영광을 마리아를 통하여 미리 앞당겨 이루신 사건이다. 즉 성모승천은 예수님 부활의 재확인이며 미래에 이루어질 우리의 부활의 보증이다.
여기서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는 스스로 당신을 비우시고 낮추신 하느님께 당신의 육체를 내어드림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 완전한 인간이 되게 하셨기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 이 완전한 인간인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원이시다. 우리도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생활하면 우리도 그 말씀을 세상에 다시 낳아주는 마리아가 된다. 마리아를 닮는 삶으로 우리가 모두 같은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
(마리아는 믿음의 여인)
이렇게 마리아를 보면 모든 것이 믿음에서 출발하여 완성에 이르는 모습이다. 즉 천사의 알림에서 십자가 사건 그리고 성령강림까지 믿음으로 가득한 분이시다. 아브라함보다 더 자신을 하느님께 내맡긴 믿음으로 아드님의 구원사업에 협력하신 분이시며, 하와의 불순종의 매듭을 당신의 순종으로 풀어주시고 세상에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한 새로운 하와이시다.
마리아는 우리에게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르쳐 준다.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역사를 인정하며,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게 해준다. 마리아는 단순히 예수님을 낳으신 그 혈연관계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신앙의 여인이었기 때문에 복된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생애에 언제나 칭송과 영광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분은 어머니로서 또한 많은 고통을 받으신 분이시다. 그러나 항상 하느님께 대한 변치 않는 믿음이 모든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우리 신앙인의 모델인 성모님께서 인간으로서 당신이 하늘의 영광에 첫 번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이 우리 모든 믿는 이들에게 마리아와 같은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준다.
우리의 생활이 마리아의 삶을 따를 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낳아줄 수 있다. 마리아로서 살도록 노력하자. 그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 할 길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전에는 ‘몽소 승천’(蒙召昇天)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승천(Ascensio, 상승, 올라감)은 능동적으로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오르신 것이고, 성모 마리아의 승천(Assumptio, 올림을 받음)은 수동성, 곧 하느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아 하늘로 올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비오 12세 교황께서는 1950년 11월 1일, 교황령 「지극히 인자하신 하느님」을 통하여 성모님의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하느님의 어머니,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께서는 지상 생활을 마치신 다음 영혼과 육신으로 천상 영광에 들어올림을 받으셨습니다”(신경 편람 3902항). “하느님의 고귀하신 어머니께서는 …… 마침내 당신 특전의 최상의 화관으로, 무덤의 부패로부터 더렵혀지지 않은 채 보존되셨으며, 또한 당신의 아들처럼 죽음을 완전히 이기시고서 육신과 영혼으로, 천상의 지고한 영광으로 들어올림을 받으시고, 거기서 세세 대대 불사불멸의 왕이신 당신 아들의 오른편에서 여왕으로 빛나실 것입니다.”(3903항)
성모 마리아 승천의 의미는 먼저, 하느님께서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이시며 성자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하늘로 부르시어 그 육신과 영혼이 천상 영광을 누리게 하심으로써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앞당겨 실현하신 것’(『가톨릭 교회 교리서』, 966항 참조)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모님의 승천이 언젠가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하여 예수님의 천상 영광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희망의 표지요 위안의 보증인 것입니다. 이 세상 순례의 여정에 있는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그 영광을 함께 누리기를 희망해야 합니다. 두 번째 의미는 “실제로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성모님께서는 이 구원 임무를 그치지 않고 계속하시어 당신의 수많은 전구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얻어 주신다.”(교회 헌장 62항)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어머니께서 하늘 나라에 계시기에, 우리가 매 순간 그분께 도움을 청할 때, 그분께서 언제나 자애로이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모 승천>
성모님의 ‘믿음’과 ‘신앙생활’은 모든 신앙인의 모범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인도해 주는 ‘빛’과 같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의 ‘승천’은 신앙생활의 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희망의 등대’와 같습니다. ‘승천’은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이고 희망입니다. <전에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종말론자들이 말했던 ‘휴거’는 ‘승천’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휴거’ 같은 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에 ‘들려 올라가’ 라는 말이 있긴 합니다.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1테살 4,16-17) 이 말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 때에 구원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을 상징적인 단어들로 표현한 말입니다. 여기서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라는 말은, 사이비 종말론자들이 말한 ‘휴거’가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의 승천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1)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만났을 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이라고 말하면서 성모님의 믿음을 찬양했습니다. 여기서 ‘행복하십니다.’ 라는 말은 원래는 ‘복되십니다.’이고, ‘하느님의 축복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라고 찬양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축복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라는 말에는 “믿음에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1) 성모님의 ‘믿음’은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메시아 강생’과 ‘메시아께서 하실 일’에 대한 예언은(루카 1,31-33),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 본 적도 없는 일, 확인하거나 증명할 수도 없는 일에 관한 예언이지만,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성모님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그 예언을 믿었습니다. <원래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믿음에 대해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20,29). 성모님은 바로 그 믿음, 즉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에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2) 성모님의 ‘믿음’은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 탄생을 예고하고, 또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하시게 될 일을 말하자, 성모님은 그 ‘말씀’을 믿긴 했지만,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루카 1,34) 이 말은 “저는 동정녀인데, 메시아 강생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 바로 요셉과 결혼해야 합니까?”라는 뜻으로 한 질문입니다. 그러자 천사는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라고 말하면서(루카 1,35), 엘리사벳이 임신한 일도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알려주었고(루카 1,36),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루카 1,37) 성모님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또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고, 말이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과학만능주의 사상에 빠져 있는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서는 바로 그런 믿음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3)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에서는‘주님의 자비’에 대한 성모님의 믿음이 특별하게 보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말한 것은(요한 2,3), 예수님의 자비를 믿었기 때문에 말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2,4) 이 말씀은 표현만 보면 ‘거절’처럼 보이지만, 예수님께서 곧바로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거절’은 아니고,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지만, 어머니께서 부탁하시니 무엇이든 해 보겠습니다. 무엇을 할까요?”로 해석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 대해서, ‘주님의 자비’에 대한 성모님의 믿음은 예수님의 계획을 앞당기는 힘으로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모님께 ‘우리를 위한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성모님께서 가지고 계신 바로 그 ‘믿음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2)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을 찾아왔을 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고 인사했습니다.(루카 1,28) 이 인사말에는 성모님의 ‘신앙생활’을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보증해 주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과 함께 계신다는 말은, 성모님 쪽에서도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또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라는 응답도 성모님의 ‘신앙생활’을 잘 나타냅니다. (이 말씀을, “주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살겠습니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성모님의 응답은 ‘말로만’ 해서 될 응답이 아니고, 인생 전부를 걸고 ‘온 삶으로’ 실행해야 할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어머니께 당신의 교회를 맡기기 위해서 하신 말씀도(요한 19,26) 성모님의 신앙생활을 보증하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신앙생활을 믿으셨기 때문에 안심하고 당신의 교회를 맡기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과 ‘신앙생활’에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성모님을 당신의 나라로 모시고 가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모든 신앙인들을 위해서 앞장서서 가신 일과 같습니다. 따라서 성모 승천 대축일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대축일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은 스승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이기도 하고,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뒤를 따라가는 자녀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을 향해서 무슨 길인지도 모르는 길을 걷는 어둠 속의 방랑이 아니라, 목적지가 어디인지 아는 상태에서 어떤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서 걸어가는 ‘희망과 기쁨의 여행’입니다. 그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가면,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계신 그곳에 도착할 것이고,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대단히 기뻐하시면서 우리를 맞이하실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오늘은 ‘성모승천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성모님에 대해서 깊은 사랑과 공경을 드려왔습니다.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도록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모님에 대한 믿을 교리 3가지를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머니는 천주(天主)의 모친이 되었다는 교리입니다. 교회는 새해가 시작되는 1월 1일을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잉태하셨기 때문에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교리입니다. 12월 8일을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은 원죄의 결과인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느님께로 갔다는 교리입니다. 오늘 8월 15일을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모님의 전구를 기원하며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은총에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는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엘리사벳은 먼 길을 찾아온 마리아를 축복하였습니다. 이에 마리아는 신앙인이 가야 할 삶의 기준을 노래하였습니다. 저는 성모님에 대한 믿을 교리도 중요하지만 ‘마리아의 노래’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고 기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영원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성모승천대축일을 지내면서 각자의 노래를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저는 가브리엘의 노래를 만들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저를 한국에서 미국으로 보내셨습니다. 제게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가톨릭평화신문을 맡겨주셨습니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하느님의 자비를 믿으며 좋은 지면을 만들고, 가톨릭평화신문을 전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에파타(열려라)’라고 하시면서 귀가 먼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영적으로 듣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은 예수님처럼 ‘에파타’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심어놓으신 보물을 찾아서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열리고, 우리의 귀가 열려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탈리타쿰(일어나라)’이라고 하시면서 죽은 소녀를 깨우셨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은 예수님처럼 ‘탈리타쿰’하겠습니다. 근심 때문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아있지만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거짓된 자아는 참된 자아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거짓에서 진실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사랑의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은 ‘탈리타쿰’하겠습니다.”
오늘 성모승천대축일에 가톨릭평화신문을 홍보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김문수 안드레아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퀸즈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 교우 분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코로나19로 1년 8개월 만에 처음 홍보를 하게 되었습니다. 신문의 구독 신청은 저와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에는 커다란 힘이 됩니다. 이미 신문을 구독하시는 분께서는 후원금을 주셔도 됩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저도 퀸즈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2)‘끌림과 떨림’은 비슷한 면도 있고, 다른 면이 있습니다.>
처음 본 사람인데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처럼 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격이나 취미가 비슷하면 더 끌리기도 합니다. 음식도 그렇습니다. 맛이 있는 음식도 있지만 입맛에 끌리는 음식도 있습니다. 술도 비싼 술이 좋지만 입맛에 끌리는 술이 있습니다. 저는 해산물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예수님께 마음이 끌린 사람이 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쳤던 소경, 깨끗해지기를 바랐던 나병환자, 부하의 병을 고쳐달라고 찾아왔던 백인대장, 딸의 병을 위해 찾아왔던 여인,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했던 자캐오, 예수님께 시중들던 마르타,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던 마리아가 있습니다. 세상의 욕망과 권력에 끌리기보다는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끌리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청혼하는 연인은 마음이 떨릴 것입니다. 서품식에서 바닥에 엎드려 성인호칭기도를 듣는 서품자의 마음도 떨릴 것입니다. 둥지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하늘을 나는 새도 떨릴 것 같습니다. 드디어 새집을 마련해서 입주하는 아내의 마음도 떨릴 것입니다. 처음 무대에서 노래하는 가수의 마음도 떨릴 것입니다. 저도 첫미사를 봉헌할 때 무척 떨렸습니다. 무서워서 떨리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벅차서 떨리는 것입니다.
하혈이 멈추었던 여인의 마음도 떨렸을 것 같습니다. 들것을 들고 걸을 수 있었던 중풍병자도 떨렸을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던 막달라 마리아도 떨렸을 것 같습니다. 다락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도 떨렸을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도 떨렸다고 합니다. 익숙함으로 소중함을 잊어버리기보다는 처음 성체를 모셨던 그 설렘과 순수함으로 신앙을 간직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성모승천 대축일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모님께서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느님께로 가셨다고 믿었습니다. 교리적으로는 성모님께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셨기 때문에 원죄의 결과인 죽음을 맞이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신학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인간이면서 하느님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성모님은 이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성모님께 대한 이 모든 찬사와 공경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우리는 그것을 천사 가브리엘과 성모님의 대화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께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이끄심이며 하느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면서 성모님께 대한 찬사와 공경은 시작된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들 모두 언젠가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의 표징입니다.
누군가 이야기 했습니다. 영원한 것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영원한 것은 채워짐이라고 했습니다. 희망이 채워지고, 사랑이 채워지고, 믿음이 채워지는 것이 바로 영원함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서 우리 모두는 사랑으로 채워 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 신앙인이 가야할 미래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충실한 응답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삶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자신보다는 이웃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다면 이 세상에 더 많은 평화가 이룩될 것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와 어려움들이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지혜롭게 극복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
[대구대교구 노광수 그레고리오 신부님]
성모님은 영혼만 아니라 그 육신도 부패 없이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많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일단 땅 속에 묻히고 썩게 마련입니다. 그 다음 부활과 승천이 따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마리아의 육신은 썩지 않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지? 도대체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사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가능하다면 오로지 하느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를 살려 낼 수 있는 분이시라면, 죽은 이의 육신을 썩지 않게 할 수 있음은 또한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내게도 그런 능력이 있다면 누구보다 우선 내 어머니에게만큼은 그렇게 하는 것이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마리아의 부활 · 승천은 예수님 부활 · 승천과는 분명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기에 스스로 부활 ·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 마리아의 부활 · 승천은 스스로가 아닌 그분에 의해 올림을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모 승천을 몽소승천(蒙召昇天)이라고 했습니다. ‘몽(蒙)’은 능동형을 수동형으로 나타내는 한자로써 ‘부름’을 뜻하는 ‘소(召)’ 앞에 붙어 ‘불리어졌음’을 피력한 것입니다. 즉 ‘몽소승천(蒙召昇天)’은 마리아가 아닌 하느님의 권능과 은총을 품고 있는 말입니다.
성모 승천을 설명하면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인간적인 면을 말했지만, 사실 이 육적인 이유만으로 마리아가 그런 영광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은 세상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복된 사람으로 마리아를 소개하는데, 그 아들은 살아있는 어미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마리아를 두고 ‘세상에서 가장 복된 어미’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입신출세한 아들의 어미가 정말 행복한 어미란 말입니까? 인간적인 면에서 생각할 때는 과연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짜로 복된 어미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어미’임을 예수님은 자신의 어머니 면전에서 분명히 천명하셨습니다. (루카11,28 참조)
그리고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켜낼 수 있었음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은 꼭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마리아의 신앙이었고 과연 ‘성모 몽소승천(聖母蒙召昇天)’의 복은 하느님 말씀을 믿고 실행했던 마리아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육신의 부패 없는 마리아의 부활 · 승천은 개신교가 생기기 훨씬 전, 4∼5세기부터 갑론을박되어 왔지만, 1950년에야 비로소 교황 비오 12세께서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는데, 이는 성모 승천이 ‘어느 날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통신앙의 틀 안에서 오랫동안 숙고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부활 · 승천은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마지막이 아님에 대한 계시지만, 하느님이 아닌 성모님의 부활 · 승천은 모든 사람의 부활과 승천을 확인시켜주는 사건이며 그래서 마리아의 신앙은 하느님을 향한 전교회 신앙인 것입니다.
오늘 8월 15일, 일본 식민지 생활에서의 해방을 넘어 원죄 조차 없으셨던 성모님을 본받아 우리의 일상 죄에서의 해방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
[마산교구 김국진 가우덴시오 신부님]
<영광의 어머니……!>
“공산 폴란드 치하에서 순교한 37살 사제가 순교 26년 만에 복자품에 올랐다. 지난 6월 1일로 정확히 만 100살이 된 노모는 시복식에 앞서 주송자로서 신자들의 묵주기도를 인도한 후 아들이 시복되는 현장을 지켜봤다. 시복식에는 14만 명이 넘게 참석했다. 6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필수드스키 광장에서 거행된 예르지 포피엘루슈크 신부의 시복식이 그랬다.”
지난 6월의 평화신문의 기사입니다. 저는 이 보도를 보면서 그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죽은 자식은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듯이, 그 어머니 역시 긴 시간 동안 잃었던 아들 때문에 고통의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이제 그 어머니는 신앙 안에서 큰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순교자의 어머니, 성인의 어머니, 영광의 어머니로 불리게 될 것이며, 많은 이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또 한 분의 어머니를 경축하고 있습니다. 이 분 역시 당신의 아드님 때문에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늘에 오르심으로 그 고난에 대한 보상을 받으셨습니다. 영광의 어머니로 칭송을 받게 되셨습니다. 그분은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하지만 성모님을 우리가 칭송하는 것은 단지 아드님이 예수님이셨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성모님의 삶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예수님을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하셨고, 따르셨고, 닮으셨고 또 하나가 되시기 위해 평생을 다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일생을 사시면서 한 인간으로서 누구도 이룩할 수 없는 것을 이룩하셨고,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도달하셨고, 누구도 올라갈 수 없는 곳에 올라가셨고, 누구도 실천할 수 없는 것을 실천하신, 예수님의 가장 가까웠던 이웃이요, 최초의 그리스도교 신자요, 사도였습니다. 그러기에 성모님은 예수님의 삶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셨고 사랑하셨으며 배우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일생은 예수님을 떠나서 존재할 수도,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분은 오로지 이 세상에 예수님 밖에 없으며 모든 것은 예수님과의 관련 안에서 보고 받아들여 평가하고 수행하신 분입니다.
즉 성모님은 모든 일을 오직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수행했습니다. 어머니의 존재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식을 위해서 있는 것처럼 모든 관심과 사랑이 온통 예수님에게 쏠려있는 것입니다.
일생 동안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눈을 뗀 적이 없습니다. 그분의 시선은 오로지 예수님에게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도 예수님과 같은 인생을 사셨고 함께 고난의 길을 걸으셨고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같이 못 박히셨으며 아들이 숨을 거둘 때 같은 마음으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렇게 성모님의 일생은 예수님의 삶처럼 파란만장하고 고난과 가시밭길의 연속이었습니다. 보통 엄마들이 생각하고 추구하는 안락하고 행복한 길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인생을 사시면서 아들이 억울한 죄인의 누명을 쓰고 죽음을 당한 사형수의 어머니, 한 죄인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사실로서 받아들이기엔 한 어머니로서의 고통과 슬픔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컸을 것입니다. 그분의 생애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이렇게 비극적이었고 처참했습니다. 인간적인 행복과 기쁨을 누리기는커녕 하느님 때문에 하느님을 위해 아들과 모든 것을 잃으신 분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분은 하늘로 오르심으로 그 모든 고난에 대한 보상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로서 우리를 보살피십니다.
우리의 삶이 비록 고난의 삶이라고는 하나,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일치된 삶을 이루게 된다면 우리 역시 그 어머니와 같은 하늘로 오를 수 있는 보상을 받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희망 안에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성모님을 축하드립시다.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축하드립니다. 오늘은 성모승천 대축일임과 동시에 우리 민족의 기쁨인 광복절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1950년 11월 1일, “성모님의 승천” 교리를 선포함으로써, 인간의 미래가 하느님 안에 있음을 천명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승천과 함께 우리 민족에게 베풀어진 기쁨인 광복을 기념합니다. 이 광복이 바로 우리에게 베풀어진 성모님을 통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마치 제1차 세계대전이 파티마 성모님의 전구로 종결되었듯이,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동란 역시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승천대축일에 종결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우리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와 축복을 찬미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날은 해방의 기쁜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북이 분단된 불행한 날이기도 합니다.
사실, 올해(2021년)는 해방 77주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분단 77주년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여전히 편협하고 경직된 사고로, 아직도 형제적 화해와 평화를 이루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와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구원을 노래합니다.이는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혁명의 노래입니다.
이는 첫 여인인 하와와 비교해 보면 잘 드러납니다. 두 분 다, 맨 먼저 먹는 일, 곧 식사에서 출발합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보고 탐욕을 부려 따먹고 자신이 높아지기를 도모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아채고 다른 이들이 마시고 즐거울 수 있도록 도모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와는 탐욕을 부리는 인류의 어머니가 되고. 마리아는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하와는 땅에 묻혀 한 줌 흙이 되어 사라졌지만, 마리아는 하늘에 올라 여전히 살아계십니다.
이토록, 자신을 배불리고 기쁘고자 한 자와 타인을 배불리고 기쁘게 하도록 한 분의 결과는 참으로 큽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님의 승천이 하늘에 올라 하느님의 오른 편에 앉아 계시고 여전히 살아계시며 우리와 함께 하심을 드러내주듯이, 성모님의 승천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돌보시며 함께 하고 계신다는 축복이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곧,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배려요 사랑이요 선물입니다.
그러니 성모님의 승천은 하늘에 올라감임과 동시에 우리에게로 되돌아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여전히 우리를 돌보심을 말해줍니다. 또한, 죽음을 이기시고 하늘에 오르심의 영광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가 죽음을 이기고 하늘에 오를 것을 보여줍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호의로, 당신의 은총이 얼마나 엄청나게 풍성한 지를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 보여주려고 하셨습니다.”(에페 2,6-7)
그렇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바로 이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성모님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일 뿐 아니라, 그 자비를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대한 찬미노래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성모님의 자애와 돌보심을 찬미해야 할 일입니다. 사부 베네딕도께서도 수도승들이 찬미의 생활을 하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루에 일곱 번씩 하느님을 찬미하기를 원하셨고(시전례 성무일도), 특별히 <수도규칙> 머리말에서는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미”(머리말 30절)하는 것을 하느님의 거룩한 장막 안에 머무는 길로 제시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제 막연한 주님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처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큰일(구원)을 이루시고 계시는 주님과 주님의 자비를 찬미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그분을 찾아 만나고, 그분을 찬미하는 일, 바로 그것이 다름 아닌 우리의 신앙생활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행복하십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가 1,45)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 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5)
오늘은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하늘로 들어 올림을 받으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모승천대축일'입니다.
'예!', 곧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라는 결정적인 순종으로,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으신 '하느님의 어머니',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십자가 밑에 서 계신 마리아 어머니와 사랑하는 요한 제자에게 하신 말씀, 곧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27) 라는 말씀으로 성모님은 또한 '우리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평생 동정을 간직하신 성모님은 한생을 아주 겸손한 모습으로 끝까지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영광인 하늘로 들어 올려 지심으로써, 우리 '신앙의 결정적인 모범'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부족함이 많은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와 연결시켜주시는 '전구자'로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 엄마를 공경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 엄마를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 엄마의 손을 잡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갑니다.'
'성모 승천'은 '위로와 희망의 표지'입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그리스도의 완전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는 '위로와 희망의 표지'입니다.
친척 엘리사벳의 칭송처럼 성모님은 가장 복되신 분, 가장 행복하신 분입니다.
우리도 지금부터 행복한 사람이 되고, 마침내는 영원히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성모 엄마 손 꼭 잡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 십자가의 길, 사랑의 길을 기쁘게 걸어갑시다!
그래서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늘로 들어 올려져, 성모님과 영원히 함께 삽시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직과 이미>
루카 1,39-56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마리아의 노래)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아직과 이미>
하느님은
아직에서 이미로
부르시는 분
아직 땅에서
이미 하늘로
아직 없음에서
이미 있음으로
아직 비천함에서
이미 거룩함에로
아직 버려짐에서
이미 받아들여짐으로
아직 밟힘에서
이미 솟구침으로
아직 갇힘에서
이미 풀림으로
아직 슬픔에서
이미 기쁨으로
아직 절망에서
이미 희망으로
나는
아직에서 이미로
발 딛는 사람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언젠가 어느 형제님 두 분이 언성을 높이며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딱 들어 보니 정치적인 이야기입니다. 진보와 보수의 다툼처럼 보였는데, 서로가 자신의 말이 맞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근거가 다 인터넷 유튜브 영상입니다. 요즘 인터넷 소셜네트워크의 알고리즘은 우리를 비슷한 사람들과 짝지어 주고 우리의 취향 및 의견과 가장 잘 맞는 매체나 뉴스를 연결해주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같은 유튜브에 들어가 있지만, 자신이 보는 것은 상대방과 전혀 다를 수가 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반대편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연결로 실제 우리나라에서도 ‘촛불혁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 두 형제님의 다툼에서 볼 수 있듯이 연결이 오히려 분열이 일어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이 무조건 틀렸다는 생각 자체를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단지 다른 것임을 인정하면서 더불어 더 많이 공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분열이 아닌 일치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일치의 하느님을 우리 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바로 주님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께서 하느님에게서 받으신 영광을 찬미하는 날입니다. 이런 성모님이 부러워 보이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영광을 받아 승천하셨으니 얼마나 좋을까요?
갑곶성지 봉안당을 운영하면서 거의 매일 죽음을 보다 보니, 죽음을 건너뛰고 하늘로 오른다는 것은 정말로 부러워 보이는 일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영광은 단 한 번의 결과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잉태 순간부터 예수님의 죽음 때까지 성모님께서는 엄청난 고통을 당신의 가슴으로 안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 고통에 대한 답답한 마음이었을까요?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엘리사벳 성녀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성모의 노래’라는 찬미의 노래를 부르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처녀가 아기를 가지면 간음죄로 공개적으로 돌에 맞아 죽어야만 했던 때였습니다. 이런 어려운 순간을 주시는 하느님 곁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음을 아시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이 우리 모두의 부러움을 받을 수 있는 영광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어떠한가요? 하느님과 철저하게 일치되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찬미의 노래를 힘차게 부를 수 있습니다.
++++++++++++++++++
<올해는 휴가를 가겠습니다>
신부가 되고서 사실 휴가라고 해서 쉬어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분명 교구 규정집에는 1년에 20일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일반 사람들도 휴가를 잘 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차마 저만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다가 이런 내용을 보았습니다. “휴가를 전부 찾아 쓰는 사람이 인간관계에서 20% 더 만족하고, 전반적인 행복감이 56% 더 높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용한 휴가 일수는 지난 30년 동안 꾸준히 감소해왔다.”
처음에는 열정이 넘쳐서 휴가를 가지 않았지만, 이것이 몸에 배서 쉬면 죄를 짓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쉬지 않으면 그만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해서 사람들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올해는 진짜 휴가를 한 번 다녀와야겠습니다. 그리고 행복감을 느끼고 이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겠습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희망을 주시는 어머니>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세주의 어머니를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어머니를 통하여 우리의 필요를 전구해 주시도록 안배하셨습니다.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을 맞이하여 성모님의 전구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울러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길에 있어서 성모님을 모범이요, 안내자요, 동반자로 모실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광복절을 맞이하여 겨레의 평화와 분열과 미움을 버리고 용서와 화해, 더 큰 사랑을 추구하는 마음의 광복을 위해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가 임신한 엘리자벳을 방문하였을 때 엘리자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참으로 마리아는 복된 여인입니다. 참으로 행복한 마리아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 어디서 왔느냐 하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믿음에서 왔습니다. 루카복음 11장 27절, 2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그리고 결국 구원의 역사는 믿음의 행위로 시작되고 또 열매 맺게 됩니다.
마리아는 남자를 모르는 여인이었지만 천사가 전한 소식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처녀인 마리아였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세주를 낳을 것이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구세주를 낳았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 큰 믿음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원합니다.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놀라운 열매를 맺게 합니다.
성모님은 당신의 겸손과 순명의 삶으로 모든 사람에게 모범이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마리아의 노래를 보면,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비천함을 굽어보시고 큰일을 하신 주님께 초점을 맞추는 겸손함을 만나게 됩니다. 그 겸손은 주님의 뜻을 철석같이 믿고 실천하는 순명을 이어가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잔치 현장에서 첫 기적을 행하셨는데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마리아님의 마음을 헤아려 여섯 개의 물독에 물을 가득 채워 포도주로 변하게 하여 그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요한 2,1-12) 성모님은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2,5). 하시며 몸소 순명의 모범과 함께 다른 이들을 순명의 삶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성모님을 통하여 은총을 구하십시오. 성모님을 통하여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하고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성모님의 마음을 여러분의 것으로 삼아 잘 활용하십시오. 그분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거기에 견주어 여러분의 마음을 성찰하고 그분을 닮지 않은 것이면 무엇이나 다 마음에서 몰아내십시오”(가경자 메리 포터).
성모님은 믿음의 어머니, 순명의 어머니,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시는 어머니이십니다.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님은 예수님을 잉태하실 몸이었기에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힘입어” 원죄로부터 보호를 받아 당신 자신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특별한 은총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남김없이 봉헌 하시어 “평생동정”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외아들의 삶의 여정에 함께하여 누구보다도 철저히 주님을 뒤따랐던 마리아님을 성자 예수님께서 누리신 영광에 동참할 수 있도록 “몽소승천”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천상영광을 누리고 세상의 모든 이를 위한 전구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성모님의 삶의 여정은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님의 믿음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는 고백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드님과 함께 영욕을 나누었고, 아드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는 가슴으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끝까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시며 믿음 속에 그 고통과 아픔을 다 감내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바로 이 믿음의 결실입니다. 우리도 승천하신 성모님을 기리며 그분처럼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구원을 받기를 원하는 이는 믿음으로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구지 성모님을 통하지 않아도 되지만 통하지 않으면 그만큼 “전구하심” 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모님께 의탁함으로써 더 큰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로 효과적으로 나아갈 수 있고 마침내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됩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어머니의 믿음을 닮은 삶을 통하여 우리도 하늘에 오를 수 있다는 확신을 지니게 됩니다. 성모님과 같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굳게 믿을 때, 성모님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의 길을 걸을 줄 알 때, 성모님과 같은 영광을 입게 될 것입니다. 성모님 본받아 구원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이루어질 것임을 믿어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믿고 맡기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승천의 여정>
-승리의 삶, 희망의 삶, 기쁨의 삶-
입추가 지난 후로는 완연한 가을입니다. 줄기차게 맹렬히 울어대던 매미들 찬미 소리도 주춤해지고 과일도 점차 익어 꼴을 갖춰 갑니다. 어제는 서늘한 오후 풍경이 흡사 어머니 자연 품처럼 푸근 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며칠전 강원도에 있는 수녀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어머니 흙같은 어머니 품에서 잘 자란 듯한 참 크고 잘 생긴 감자 형제들을 보면서 언뜻 하늘 아버지에 흙 어머니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래저래 자연 어머니를 통해 우리 어머니들이 많이 생각나는 기도와 수확의 계절 가을이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어머니들중의 어머니인 우리 믿는 이들 모두의 참 좋은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요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님이십니다. 비오 12세 교황은 1950년 11월 1일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을 통해 성모님의 승천을 믿을 교리로 장엄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오늘은 1945년 8월15일 우리나라가 일제의 35년 동안 식민통치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제76주년 광복절이기도 하니 하느님의 섭리가 참 오묘합니다. 성모님과 우리나라의 깊은 인연에 또 감격하게 됩니다. 가톨릭 교리서의 성모님 승천에 대한 요약된 가르침이 은혜롭습니다.
“마침내, 원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시어 티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는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치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을 받으시고, 주님께 천지의 모후로 들어 높여지시어, 군주들의 주님이시며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당신 아드님과 더욱 완전히 동화되셨다. 거룩한 동정녀의 승천은 당신 아들의 부활에 특별히 참여한 것이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앞당겨 실현하신 것이다.”(교리966)
어제 성무일도시 성모 승천 대축일 제1저녁기도시 성모님이 하늘에 올리셨음에 대한 승리의 기쁨을 한껏 노래한 가사들과 찬미가도 참 은혜로웠습니다.
“기뻐하라, 오늘 동정녀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도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리시는도다.”
“동정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도다. 거기에 왕중의 왕께서 별빛 찬란한 옥좌에 앉아 계시는도다.”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으니 천사들이 기뻐하며 주를 찬미하는도다.”
참 아름답고 기쁨 가득 선사하는 후렴들도 좋고 다음 찬미가 역시 좋습니다. 두 절만 소개합니다.
“세상의 기쁨이여 하늘의 샛별, 창조주 어머니신 동정 마리아
손길을 펼치시어, 버려진 이와 빗근길 가는이들 도움주소서.
하느님 지어내신 사다리시며, 이세상 지존께서 내린 사다리
우리를 당신통해 올려주시어, 천상의 귀한선물 얻게 하소서.”
오는 성모 승천 대축일은 평생 헌신의 사랑을 쏟으며 사시다가 세상을 떠나 성모님과 함께 승천하신 우리 어머니들 역시 천상 생신날이라 저는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이 되면 오늘 영명축일을 지냈던 이미 16년 전 작고하신 저의 모친이 생각납니다. ‘어머니를 그리며’ 란 돌아가시기 두 달 전에 썼던 자작 고백시 후반부를 나눕니다.
-“그 흔한 종교나 신앙없이도 한결같이 사셨던 내 어머니
삶자체가 기도였고 종교였고 스승이셨다
이리저리 감정에 연약하게 흔들렸던 분이셨다면
그 험한 세상 세월에 다섯 남매 어떻게 키웠을 것인가
‘외롭다’ 거니 ‘그립다’ 거니 감정 표현 없이도
따사로운 남편 사랑 없이도 흔들림 없이 꿋꿋이 가정을 지켜오신
전형적인 조선 여자 같았던 우리 어머니
내 수도원 들어올 때도 극구 만류하셨다
‘왜 이제 살 만하게 되었는데 늦은 나이 서른 넷에 또 고생길에 접어드냐'고
참 안타까우셨을 어머니
그러다 하루 지나 내 방에 들어오셔서
‘얘, 수철아, 네가 좋아하면 수도원 들어가라’고 허락해 주셨다
이불 둘러쓰고 온종일 누워있던 자식이 참 딱했을 것이다
사실 어머니는 은연중 막내인 나와 살고 싶어 하셨다
지금은 극도로 쇠약해 지셔서 온 종일 방에 누워 계신 내 어머니
정신은 여전히 맑으시고 마음도 깊고 고요하시다
그냥 계시기만 해도 마냥 좋은 어머니
‘신 마리아!’
오래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나도 이제 나이 들어 철이 들었나 보다”-2005.3
가을 문턱에 들어선 자연 어머니같은 분위기에 맞이하는 성모 승천 대축일이 참 평화와 위로를 줍니다. 영적 승천의 여정중인 우리들에게 영적 승리의 삶을 살도록, 또 희망과 기쁨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북돋웁니다. 그대로 오늘 강론 제목이자 성모 승천 대축일에 주시는 주님의 가르침이자 깨달음입니다.
첫째, 승리의 삶입니다.
날마다 영적 승리의 삶중에 날로 영적 승천의 여정중에 날로 하느님께 가까워지는 우리들입니다. 자꾸 자기속으로 들어가지 마십시오. 지옥의 길이요 영적 패퇴의 길입니다. 반대로 날로 하느님을 향해 자아초월의 삶을, 영적 승천의,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은 영적전쟁이요 우리 믿는 이들은 예외없이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구체적으로 믿음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입니다. 영원한 도반이자 주님이신 주님이 함께 계시기에 천하무적, 백전백승의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를 장엄하게 고백합니다.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할 원수는 죽음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
최종 죽음에 대한 승리의 열쇠는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아드님의 승천에 참여하신 성모님도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전구하고 계십니다. 승천하심으로 언제 어디서에나 영원히 살아 계셔서 우리의 어머니가 되고 계신 성모 마리아님이십니다. 우리의 영적 전의를 북 돋우시는 주님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ㄴ).
둘째, 희망의 삶입니다.
희망의 반대는 절망입니다. 희망없는 절망의 곳이 지옥입니다. 정말 대죄는 자포자기의 절망입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말이 절망입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 성모 마리아님은 우리 궁극의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이 백절불굴의 인내의 믿음을 가능하게 합니다. 희망보다 더 좋은 영약도 없고 주님의 전사들에게 우선적 갖춰야 할 자질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희망이 없음에도 희망하는 것이 진짜 희망입니다.
돌아 갈 곳이, 본향집이 있다는 희망이 얼마나 고마운지요! 요즘 몇권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영성의 정상에 도달한 대가의 경지에 이른 분들인데 소스라치게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아, 이들은 돌아갈 집이 없구나! 문패가 없구나!” 승천하신 성모님을 통해 하늘이 상징하는 바 우리 궁극의 희망인 본향집 아버지의 집입니다.
아주 예전에 읽은 일화가 생각납니다. 곱게 차려 입힌 수의를 입은 친구의 시신을 보며 탄식처럼 외쳤다는 어느 분의 고백입니다. “옷은 잘 차려입었는데 갈 곳이 없구나. 어디로 가나?” 아마 영원한 목표의 지향없이 살아 오다 불의의 죽음을 맞이했던 분인가 봅니다. 희망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님은 오늘 하느님의 위업을 통해 희망을 고백합니다.
“전능하신 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 묵시록도 그리스도의 승리가 우리의 희망을 고무시킵니다. 새삼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 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그 때에 나는 하늘에서 큰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승천하신 성모님 역시 영원한 희망의 표징이 되는 바, 바로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 바로 희망의 표징인 성모 마리아님을, 순례 여정중인 우리의 교회를 보여 줍니다. 화답송 후렴 역시 희망의 표징인 성모님을 노래합니다.
“오피르 황금으로 단장한 왕비, 당신 오른쪽에 서 있나이다.”
셋째, 기쁨의 삶입니다.
영적 승리의 기쁨이요 희망의 기쁨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물론 오늘 승천하신 성모 마리아님 역시 기쁨의 샘입니다. 기쁨과 감사, 찬미는 진정 영적 삶의 빛나는 표지입니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입니다. 찬미하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님 말 그대로 기쁨의 어머니, 감사의 어머니, 찬미의 어머니입니다.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성모 마리아님과 함께 오늘 복음의 찬미와 감사의 마니피캇을 저녁 성무일도때 마다 노래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참 영원한 참 기쁨은 찬미의 기쁨, 감사의 기쁨뿐입니다. 이런 기쁨은 하느님의 힘이자 우리의 힘이 됩니다. 잘 먹어서 힘나는 것이 아니라 찬미와 감사의 기쁨이 참 힘의 원천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일컬으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이런 찬미의 기쁨보다 영육의 치유에 좋은 명약도 없습니다. 성모님의 영적 도반인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역시 기쁨의 여인이었음을 봅니다. 성모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의 기쁨, 만남의 축복임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영적 승천의 여정중에 날로 하늘 하느님께 가까워지는 우리들입니다. 날마다 평생, 승리의 삶, 희망의 삶, 기쁨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참 좋은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성모 승천 대축일 함께 기뻐하며 축하드립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성모님을 통해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 주십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의 별로 된 관을 쓴 여인"(묵시 12,1)
묵시록에 등장하는 여인의 모습에는 영광의 광채가 가득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셔서 세상을 비추게 하신 빛 물체들과 함께, 곧 해를 입고 달을 밟고 찬란히 빛나는 별들로 머리를 꾸민 자태는 하느님 특은으로 충만한 성모님의 위상이 드러납니다. 마리아는 그 잉태부터 승천까지 하느님의 총애를 입은 분이시라고 교회는 고백하지요.
"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묵시 12,2)
그런데 여인에게 찬란한 영광만 머무르는 건 아닙니다. 크고 붉은 용이 상징하는 악이 그녀를 노리며 구세주의 도래를 저지하려 하지요. 출산 후 광야로 달아나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로 몸을 피하는 그 여인은 영혼이 날카로운 칼에 꿰찔리는 아픔을 감내하신 고통의 어머니, 성모님을 보여 줍니다.
성자를 이 세상에 오게 하신 구원의 탁월한 도구, 마리아는 성자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받아들이신 수난과 죽음의 고통을 고스란히 함께 겪으셨고, 마리아의 믿음과 인내와 순종의 온전한 봉헌을 기꺼이 받으신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하늘에 올려 주셨습니다.
복음은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와 사촌 엘리사벳과의 만남의 장면입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8)
마리아는 당신의 처지를 겸손히 인식합니다. 마리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하느님 모상인 까닭에 어떤 피조물보다 고귀하면서도, 창조주 하느님 앞에서는 비천한 종에 불과하지요.
하느님은 인간의 비천함을 은총으로 바꾸어 주는 분이십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처한 실존적 고통과 결핍이 그분의 마음을 움직이고 연민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아직 어린 소녀였지만 마리아는 그런 하느님의 자비를 참으로 야무지게 꿰뜷고 있던 지혜로운 여성이었지요.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구원경륜을 통해 우리에게까지 주어진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께 속한 이들입니다."(1코린 15,22-23)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 역시 부활을 꿈꿉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께서 당신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 모두를 당신과 같은 모습으로 일으키시고 변모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저 나약하고 부족하며 비천한 존재에 불과한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른 믿음 덕에 그분의 영광을 나누어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승천 역시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성모님께서 우리 모든 피조물을 앞서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신 것이니까요. 우리는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믿음과 인내, 순종의 덕으로 영혼을 가꾸며 언젠가 누리게 될 부활의 은총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여기 지상 순례 여정 안에서 겪는 내외적 어려움과 고통에 무너지지 않고, 또 자신의 죄악과 부족함에 발목 잡히지 않으면서, 꿋꿋이 믿음을 견지하며 나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영광의 어머니이시면서 고통의 어머니신 분, 누구보다 우리 눈물과 두려움을 잘 아시는 마리아께서 천상에서 늘 우리를 위해 전구하시며 길을 안내해 주실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9IgZdZksXk0&feature=youtu.be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 49)
성모님의
승천(昇天)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대축일이다.
우리 삶에는
승천이 있다.
영혼은
하느님을
노래한다.
자아에서
빠져나와
마침내
하늘로
승천하신다.
승천은
우리 모두의
소명이다.
사람이
가야 할
사람의
길이다.
오를수록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이다.
사람은
하느님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삶은 신비의
영역이다.
말씀으로
시작된 삶이
사랑으로
승천하신다.
성모님은
우리 인생을
뜨겁게
일깨워주신다.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사랑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다.
이 사랑으로
가장 먼 길이
가장 가까운
하늘이 된다.
우리모두는
하느님에게서
왔다.
그래서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하느님 사랑이
승천이다.
말씀이
시작된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승천은
하느님께
바쳐지는
삶이다.
말씀이
길이 되고
말씀의 삶이
오늘
승천하신다.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성모 승천
대축일이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