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27:7~8, 환경에 따라 쓴 것도 달게 느껴지며, 인간이란 늘 정착지 없는 새와 같습니다. 2015. 11. 27. 금. 246장 나 가
[개역개정] 7.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8.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공동번역] 7. 배가 부르면 꿀 송이도 밟아버리지만 배가 고프면 소태도 달다.
8. 고향 잃은 사람은 보금자리 잃은 새와 같다.
[새번역] 7. 배부른 사람은 꿀도 지겨워하지만, 배고픈 사람은 쓴 것도 달게 먹는다.
8. 고향을 잃고 떠도는 사람은, 둥지를 잃고 떠도는 새와 같다.
[우리말 성경] 7. 배부른 사람은 꿀도 싫어하지만 배고픈 사람은 쓴 것도 달다.
8. 자기 집을 떠나 방황하는 사람은 둥지를 떠나 헤매는 새와 같다.
[NIV] 7. He who is full loathes honey, but to the hungry even what is bitter tastes sweet.
8. Like a bird that strays from its nest is a man who strays from his home.
본문은 모두 중심부의 반복이 있습니다.
곧 “사람”, “유리”입니다. 7절의 “꿀”(sweet)은 9절에서 다시 선택됩니다.
9절의 “친구”는 10절에서 반향됩니다.
본문에는 일련의 연속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연의 일치일 것입니다.
역설은 다시 나타납니다. 어떤 것이 쓴 것이 답니까?
여러분의 환경이 바뀌면, 쓴 것도 달게 먹을 수가 있습니다.
어제 목사님들이 모였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오고 갔습니다.
김창률목사님이 학교 다닐 때에는 어떤 교수님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고 했습니다.
저는 신학교 본과를 다닐 때에, 교수님들이 차를 타고 오면
신학생들이 굶주리고, 학비가 없어서 잠도 못자고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라가 혼란스러워 민주화 운동을 하던 때라,
교수님의 자가용을 뒤집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신학를 하신 웅곡교회 목사님은 학교 다닐 때에 어떤 신학생들은 벤츠니 그랜저를 타고 다녔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생각하는 것도, 환경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은 입을 옷이 없다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입을 옷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환경이 바뀐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짚신 하나만 있어도 살 것 같은데, 사람들은 방 하나를 구두 진열장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저는 양복 한 벌이면 1년을 살겠는데,사람들은 매일 양복을 갈아입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당하는 환경과 사람들이 당하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꿀은 누구나 달게 먹습니다.
그러나 배부른 환경으로 바뀌면, 정말 배 터지게 먹고 나면
물 한 모금 먹을 수 없을 만큼 목구멍까지 먹을 것이 가득 차게 되면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그런 지경에 이르면 아무리 맛나는 음식도 먹을 수가 없게 됩니다.
여기서 꿀은 최고의 음식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배부른 환경에 처하게 되면 최고의 음식도 먹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반대는 어떻습니까? 배가 고픈 환경에 빠지게 되면, 먹을 것만 있으면 그것이 쓰던지 달게 먹게 됩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1주일을 금식하게 되었습니다.
거의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기도했는데,
금식 기도가 끝나는 날, 교회 사모님이 죽을 끓여 오셨습니다.
그런데 반찬으로 신 김치를 가져 오신 것입니다.
그 때까지 저는 입맛이 좀 까다로워서 신김치는 먹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신 것보다는 막 담은 김치나, 겉저리를 더 좋아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제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거의 매일 겉저리를 담아 내야 하니까, 말입니다.
1주일을 금식하고나서 신 김치를 먹게 되니, 그런데 그 김치가 그렇게 맛나는 것입니다.
전에는 신내만 나도 코를 막고 그 냄새를 맡을 수도 없었는데, 그냥 좋은 냄새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환경이 사람을 좋은 쪽으로 바꿔 놓는 것입니다.
나쁜 환경 속에서도, 사람들은 잘 적용하게 됩니다.
7절, 비록 잠언이 꿀을 다룬다 할지라도, 잠언에서 자주 언급되어지는 음식으로써, 5:3, 16:24, 24:13, 25:16, 27, 이것은 사람이 과다하게 먹게 되는 어떤 좋은 것의 상징으로써 취해집니다.
꿀도 과하게 먹게 되면, 독이 됩니다. 돈이나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나 권력으로 배부르게 되면,
그 가치를 잘 모르고, 함부로 남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탐욕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탐욕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
모든 악의 원인이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악한 것입니까?
우리들 신앙인조차도 돈을 하나님과 대등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중히 여기고 재물을 경히 여기지만,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경히 여기고 재물을 중히 여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환경이 어떻게 바뀌던지 간에, 그 환경으로 말미암아 좋은 쪽으로 바뀔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난하게 되었다고 짚신 한 벌로 만족하며 살고 쓴 것이라고 달게 먹으면 되겠는데
어떤 가난하게 된 사람들은 도적질을 하고, 강도짓을 하고, 그래서 남의 것을 제 것인 냥
하는 그런 악인들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사람들은 이 잠언에서 예외가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돈이나 권력 따위에서 궁금해 합니다.
사람들은 또한 그들이 너무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분명히 어떤 일들에 대한 식욕이라 열정을 잃어 버립니다.
알론소 스콜켈은 주목할만한 예외를 지적합니다. 지혜 그 자체의 예외입니다.
나를 먹는 사람들은 누구나 더욱 갈망하게/굶주리게 될 것이다.
쓴 것은 잘 알려진 주제였을 굶주린 자 때문에 달게 될 것입니다.
다시, 환경은 상대적으로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8절, 떠도는 본성이 무엇이며, 새나 인간에게 속한 것입니까?
사 16:2, 모압의 딸들은 아르논 나루에서 떠다니는 새 같고 보금자리에서 흩어진 새 새끼 같을 것이라
우연이 떠나고 되돌아 오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뿌리채 뽑힌 것과 관련되어져서, 사람의 근원으로부터 떠나야 하고, 계속해서 거주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거처입니다.
여러분 집이 없어서, 절도 없어서도, 갈 곳이 없어서 떠도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정말 큰 불행이며, 저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들의 거처가 가나안 땅이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거처가 있습니다.
요즘 TV에 나오는 IS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리아난민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습니다.
어제 TV를 보니까, 시리아난민들이 바늘로 입을 꼬매 버렸습니다.
자신들은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본거지, 여러분의 세력의 기반이 되는 터전이 사라지게 된다면, 그것은 곧 재앙입니다.
여러분의 환경이 어떠하다 하더라고, 여러분의 본 거지요 세력의 기반은 곧 교회요, 하나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곧 죽은 인생입니다.
물을 떠난 고기가 죽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그 영혼이 이미 죽은 인생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배회하지 마시고, 어떤 일이 있어도, 환경이 바뀌어서 쓴 것을 달게 먹을 지라도,
짚신 하나 밖에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현대 문화는 그 잠언에서 추측되는 실제에 대한 동일한 방식으로 울러 퍼지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이사와 적어도 일시적인 해결이 단지 인생의 받아들일 수 있는 한 부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부 국가에서는 그들의 본거지/세력에 대한 고도의 인식이 있습니다.
이러한 감정은 이스라엘의 삶에서 훨씬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것은 또한 새의 유리함을 인간 존재의 변동과 모순/불일치의 상징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