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옥자 동기님께
박옥자 동기님, 그간 안녕하십니까?
저는 춘천에 살고 있는 5반 이학원입니다.
부산 동기회 모임에서 두 해 연거푸 들려준 아름다운 목소리의 노래는 참석한 우리 동기 모두를 즐겁고 기쁘게 해주었습니다.
우리 동기 8반 박옥자님은 겨울철 흰 눈을 이고 있는 탐라국의 한라산을 닮아있었습니다. 부산교대 재학시절 박옥자님의 눈길이 이성적이고 차거운 느낌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지난번 노래하시고 친구들과 이야기 하는 모습을 뵈니 그렇게 따뜻하고 부드러울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따뜻한 눈길을 갖고 계신 줄을 옛날엔 미처 몰랐습니다.
제가 박옥자 동기님께 들려드리려는 이 이야기는 두 해 전 동기들이 제주도 여행갈 때 동기들에게 들려주려고 준비했던 이야기입니다. 그 때 저는 형편이 되지 못하여 동참을 못 했는데, 마침 동기님께서 그 곳 제주도에 머무시면서 풍광을 즐기고 계시니 멀리 떨어져 외롭게 살고 있는 이 춘천 동기의 이야기를 한 번 들으시고 짬이 나시면 제주대학교 뒤 언덕에 자리 잡은 내 할아버지의 유적지에 가족들과 함께 소풍을 다녀오시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습니까? 제 이야기가 좀 깁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4회(Ⅰ, Ⅱ,Ⅲ,Ⅳ)로 나누어 보내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제주도는 참으로 풍광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 곳에서 편안한 여생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2013년 7월 16일, 춘천에서 이학원 배.
어느 청백리 후손의 단상
이학원/강원대학교 명예교수
Ⅰ
한 집안이나 어느 지역에 존경할만한 분이 계신다는 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내가 봉직했던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 입학생들 중에는 명문 여고인 강릉여고 졸업생들이 많다. 이들이 입학하여 대학생활을 하거나 학업을 마친 후, 사회에 진출하여 사는 것을 보면 공통점이 있고 주목할 만한 일이 많다. 제자들은 자기 자신이 마치 신사임당이나 된 것처럼 언행을 하고, 예의를 갖추며, 자식 교육에 철저하고, 자기 계발을 위하여 온갖 힘을 기우리는 것은 물론, 생활력이 강하고, 가정도 반듯하게 잘 꾸려 모범 가정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강릉, 그 곳은 신사임당이 율곡을 키우며 지냈던 문화적인 지역 전통이 있는 고장이다. 강릉 출신 여인들에게는 신사임당이라는 위대한 어머니상이 항상 가슴에 자리잡고 있으며 일상생활에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제자들은 자신이 강릉 출신 여인이고, 자기 자신이 바로 살아있는 신사암당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진주(경남 진주)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진주 출신의 사회 지도층 인사가 못된 짓을 하여 국가나 민족에게 큰 해를 입혔거나 피해를 준 자가 극소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왜 그럴까? 진주도 사람 사는 평범한 지역이고, 다른 곳에 비하여 특별히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임진왜란 초기 진양성을 사수하던 진주 목사 김시민과 그 곳 성내 백성들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왜군의 침략으로부터 국내 최초로 성을 굳건하게 지켜낸 애국애족의 충절의 역사정신이 있는 곳이고, 기생이던 논개 마저도 적장의 목을 껴안고 푸른 남강에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하려 했던 절개와 충절의 역사가 있는 향토가 아니던가. 아마도 진주라는 지역이 갖는 애국애족의 뿌리 깊은 정신문화적인 요인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말과 행동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정신문화적인 요인이 가장 큰 영향을 준다고 하지 않았는가.
춘천에서 연 2회 정도 진주 출신들의 「남가람」이란 친목회 모임이 있다. 강원대•한림대 교수들과 검찰청의 판검사, 세무서, 정보부, 영관급 이상의 군인들이 주축을 이룬 모임이다. 필자를 보고 건배사를 하라고 하면, 나는 늘 위대한 여인 논개의 절의를 드높이는 건배사를 한다. “기생 논개님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우리가 남이가, 어떻게 다른가. 어디서 무엇을 하던 푸르게 흐르는 진주 남강 물을 항상 기억하며 살자. 똥오줌 퍼부은 드넓은 벌판을 지나 왔음에도 불구하고, 늘 맑고 푸르게 흐르며 절개와 충절을 담아 끊임없이 흐르는 남강 물을 영원히 잊지 않는 진주 사나이들이 되자”고 건배사를 한다. 언젠가 내 건배사를 들은 어느 젊은 검사가 선배님의 이 건배사를 한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대가 먼 훗날 한국의 검찰총장이 될 것”이라고 덕담을 해주었다. 그랬더니 그는 정말로 잘 나가는 검사가 되어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갖게 한다.
나는 새로운 세대의 수많은 신사임당을 배출해 내는 강릉의 문화를 좋아한다. 그리고 김시민과 논개의 충절을 담아 굽이굽이 흐르는 진주 남강의 역사를 사랑한다. 위대한 조상이 있는 가문과 위대한 역사를 창조했던 지역은 또다시 위대한 인물을 잉태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간다. 강릉 신사임당은 아들 율곡을 천재로 길렀다. 대제학과 판서를 지낸 율곡 이이는 10만 양병설을 주창한 혜안의 미래 전략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8세 때 지은 화석정 시(花石亭 詩)는 많은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하였다. 강릉 연인들은 자기 자녀들을 모두 율곡과 같은 위대한 인물로 키우고 싶어 한다. 화석정 시는 위대한 어머니 신사임당의 자랑이기도 했고, 후대의 우리 모두가 아끼고 사랑하는 시가 되어 전해온다.
화석정 시
숲 속 정자에 가을이 벌써 깊어
시인의 생각은 끝이 없어라
먼 강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 받아 더욱 붉어라.
산은 외로이 둥근 달을 토해내고
강물은 멀리 바람을 머금고 있네
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지
저녁 구름 속으로 그 소리 사라지네.
임정추이만 소객의무궁(林亭秋已晩 騷客意無窮)
원수연천벽 상풍향일홍(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산토고륜월 강함만리풍(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색홍하처거 성단모운중(塞鴻何處去 聲斷慕雲中)
강릉에서 자란 여인들은 저마다 마음속으로 신사임당이 되려고 노력하고, 그곳 남정네들은 율곡을 닮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표정들이다. 율곡을 닮은 가장 최근의 강릉 남자는 소천(少泉) 조순(趙淳) 선생이다. 선생은 1928년 2월 1일, 이곳 강릉시 학산리에서 출생, 경기고와 서울대 상대 전문부, 미국 보오든(Bowdoin) 대학, 캘리포니아 주립대학(Berkeley)•대학원을 졸업,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상대 교수와 한국은행 총재, 서울시 시장,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 한나라당 초대 총재, 민족문화추진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명성이 높아지자 강릉인(江陵人)들은 선생을 율곡의 반열에 올려놓고 강릉이 배출한 율곡을 닮은 남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강릉의 아들들이 모두 소천과 같은 정열과 학구열로 열심히 공부하여 나라의 동량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강원도 사람들은 율곡의 어머니이신 신사임당을 겨레의 영원한 스승으로서, 당당하고 기품 있는 영원한 겨레의 어머니상으로 남기고자 여러 가지 기념사업을 하고 있다. 경포대 공원에 사임당상을 건립하고, 강릉 오죽헌에 사임당 수련원을 건립하였다. 강원도 여고생이면 누구나 이곳에서 2박 3일간의 수련을 통해 사임당의 교육과 헌신, 봉사정신을 배우고, 그녀의 일생을 통하여 자신을 뒤 돌아보며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갖는다. 또한 사임당의 얼을 후손에 널리 선양하고 강원 여성의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해마다 어진 인품과 부덕을 갖춘 여성을 선발하여 신사임당 상을 시상하고 있다. 이런 기념행사는 이 지역 주민들뿐만 아니라 이 나라 여성들 모두에게 자긍심과 자존심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고, 사람을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는 도덕성 유발의 원동력을 제공해 주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2009년 6월 23일부터 사용하고 있는 한국은행권 최고액 지폐인 오만원권에 신사임당상이 들어가 있다. 당시 오만원권에 들어갈 인물을 선정하는데 말이 많았다. 유관순 누나와 김구 선생, 광개토대왕이 거론 되었으나, 결국 국민여론 수렴으로 신사임당으로 결정이 났다. 대제학과 판서를 지낸 아드님상이 들어 있는 오천원권 지폐보다 10배나 높은 가치 있는 지폐가 되었다. 못난 후손들이 그 가치를 10배로 높게 책정은 했지만, 어디 10배로 끝날 일인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은 것이 부모와 스승의 사랑과 은혜라고 하지 않았는가.
가정이나 가문에서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 나오면, 그 가족 구성원과 가문 자손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대단히 크다. 때로는 그 영향력이 가정과 가문의 경계를 넘어 사회와 국가 전체의 발전에 보탬이 되고, 더 넓게는 세계와 인류 발전에 기여하는 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