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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매너리
오늘의 유머에 연재했던 글이고...
퍼온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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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나는 서른둘, 지방대학교 시간강사다. 출신 대학교에서 일주일에 4학점의 인문학 강의를 한다. 내가 강의하는 학교의 강사료는 시간당 5만원이다. 그러면 일주일에 20만원, 한
달에 80만원을 번다. 세금을 떼면 한 달에 70만원 정도가 통장에 들어오는데, 그나마 방학엔 강의가 없다. 그러면 70만원 곱하기 8달, 560만원이 내 연봉이다. 박사수료때까지 꼬박 메꾼 학자금대출에서
한 달에 20만원 정도를 떼어 가고, 이런저런 대출과 공과금을
하면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한 달에 10만원이 고작이다. 이걸로
남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신용등급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 지 오래고, 전화가 오면 앞자리가 02-1588로 시작하는지 확인 후 전화기를
돌려 놓는다. 이런 생활이, 몇 ...년째고,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학생들에겐 허울 좋은 젊은 교수님이다. 그들은 내가 88만원 세대보다 더 힘들게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까.
1. 이 삶의 시작
나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해 많이 읽었다. 내가 살던 서울
강북의 가난한 산오름 동네에서는 저 집 아이가 그렇게 책을 좋아한다더라, 밥도 안 먹고 본다더라, 하는 오지랖 많은 아주머니들의 수군거림이 항상 있었다. 내 부모님은
그것을 무척 자랑스러워하셨고, 나도 싫지 않았다. 아버지는
퇴근길에 자주 교보문고에 들러 고심해 고른 책 한 묶음을 내게 건넸고, 나는 그것을 전기구이 통닭만큼이나
반갑게 받아 들었다. 하지만 책을 읽는 습관이 수학과 영어 점수까지 담보해 주지는 못했다. 중학 시절까지는 어떻게 버텼으나 수학1, 지구과학, 물리, 화학 등으로 이과 기초 과목이 분화되며 나는 거의 항복해
버렸다. 국어, 역사, 사회
과목만으로 대학을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자주 했다. 결국 수능 점수에 따라 꽤 먼 지방 대학교의 인문학부에 진학했다. 4시간
가까이 기차를 타고 내려가며 참 멀리도 대학을 간다, 싶었지만 ‘인문학’이면 아무 대학이면 어떠랴, 하고 말았다. 출신 대학이나 강의하고 있는 대학을 밝히고 싶지 않아 ‘A대학’으로 하겠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다. 인문학을 전공하면 행복할거야, 막연히 믿었던 내 과거를 부정하는 일은 할 수 없어서 이를 악물고 했다. 4년
내내 지각이나 결석을 하지 않았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업이 많았지만 한 학기에 하나 이상은 내게
자극을 주는 것들이 있어서 그런대로 즐거웠다. 공통영어 성적이 여전히 발목을 잡기는 했으나 2학기부터 8학기까지 나는 꾸준히 장학금을 받았다.
군대에 가기 전 지금은 내 지도교수가 된 분의 전공 강의를 수강하며, 나는 전에 없던 자극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10년 넘게 연구해 이룬 성과를 우리에게 ‘즐겁게’ 이야기했다. 들으며
나 역시 즐거웠다. 인문학이라는 것이 허울이나 허상이 아니라 이렇게 실재가 될 수 있구나, 싶었다. 그는 가끔 대학원생이 더 있으면 좋겠다, 고 덧붙였다. 나는 학기말에 이르러 그의 연구실을 찾아 대학원 진학에
뜻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대단히 반기며 선배를 한 분 추천해주셨는데,
교수가 전화기를 든 지 10분도 안 되어 대학원생 한 명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나는 저서 한 권을 선물로 받았고, 연구실을 나와 그 대학원생과
마주 앉았다. 그는 시내에서 밥을 먹다가 지도교수의 전화를 받고 택시를 타고 왔다고 했다. 그러니까, 밥을 시켜 놓고 한 숟갈 먹을까 하던 찰나에 지도교수의
전화가 온 것이고, 그는 수저를 내려 놓고 택시를 잡아 타고 연구동까지 온 것이었다. 그때는 그 급박함이 느껴지지 않아서 아, 네, 그러시군요, 하고 말았다. 그는
내게 와서 공부하면 좋을 것이라고 했고 몇 가지 읽어야 할 책을 추천해 주고 다시 밥을 먹으러 갔다. 그리고
나는 곧 군대에 갔다. 지금에 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도교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없었다면 그는 밥을 먹다 뛰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한 나는, 다시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그는 내게 새로 쓴 저서 한 권을 줬고, 내년부터 석사생으로 함께
공부하자고 했다. 마지막 학기에 그가 개설한 전공 수업을 들으며 나는 역시나 즐거웠다. 유일한 걱정은 입학비까지 500만원이 넘는 대학원 학비였다. 도저히 부모님께 대학원에 갈 테니 지원해 달라, 할 염치가 없었다. 나는 그후 대학원생들의 술자리에 한 번 간 일이 있다. 술자리는
시내 치킨집에서 간단히 맥주를 마시는 정도였다. 나는 그들에게 조심스레 학비가 얼마나 되는지, 생활은 되는지 물었다. 그중 한 대학원생이 조교활동을 하면 등록금이
해결되고 연구 인건비를 받으며 한달에 40만원 정도의 용돈이 생길 거라고 했다. 어라... 그러니까 조교로 학교사무실에서 근무하면 등록금이 나오고
교수에게 연구 인건비를 받으면 용돈까지 생긴다는 거였다. 나는 두 생각하지 않고 대학원 입학원서를 썼다.
집에 가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서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나는 두분이 놀라시기
전에 대학원 등록금부터는 직접 해결하겠다고 장담을 했다. 학부 때의 등록금은 300만원 정도였는데 1/3 이상 장학금은 빼먹지 않고 받았다. 그래도 나와 동생의 등록금은 아버지가 외벌이하시는 우리 가계에 큰 부담이었을 것이고, 나는 대학원부터 공부에 필요한 돈을 내가 마련하겠다고 한 것이다. 말하자면
독립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신 대학원 선배 둘과 한 방을 쓰게 됐으니 1년치 집세 150만원만 내달라고 부탁드렸다. 아버지는 두말 않고 150만원을 통장으로 부쳐 주셨다. 이렇게 나의 대학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2008년 봄, 26살인 나는 그렇게 이 삶을 시작했다.
2. 대학원 입학과 조교생활
2007년 12월, 대학원
입학이 예정되자 조교실장이 나를 포함한 그 해의 대학원 신입생 셋을 호출했다. 나는 학과사무실에서 함께
신입생이 된 K와 S를 처음 만났다. 둘은 나보다 한두살씩 어린 여학생들이었다. 어느새 서로 꽤나 친해져
있었다. 내가 인사하자 둘은 반갑게 맞아주기는 했으나, 뭔가
잘 어울릴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 아닌 것을 서로 알았다. K는 술자리를 주도하는 편이었는데, 어느날은 오빠 내가 오늘은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조용히 밥만 먹을게, 라고
하기에 나는 니가 조용하니까 참 좋다, 라고 말해 버렸다. 내가
원체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기도 했고 동기들과의 사이는 애초부터 별로 좋을 수가 없었다. 조교실장은 박사과정생으로
나보다 5살쯤 많았다. 박사과정생인 조교실장이 있고, 그 밑에 박사 석사 과정생들이 조교가 되어 학과 사무실의 행정을 보는 시스템이었다. (학과장이나 직원이 행정을 주로 책임지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이 그러하다.) 조교실장은
조교시스템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우리에게 반드시 조교 활동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미 조교 활동을 해야 등록금을
보전 받을 수 있다는 선배의 말을 들었기에, 의례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가 하는 이야기는 우리 셋을 무척 당황케 했다. 요컨대 주5일
근무로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급근무를 방학 내내, 2개월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 과하지
않은가 싶어서 신입생이 셋이니 로테이션으로 근무를 하면 안될지 물었다. 그러자 사무실 쇼파에 앉아 이쪽을
귀담아 듣고 있었던지, 2학기쯤 위의 여선배 하나가 나직이 쟤 지금 뭐라는 거야, 라고 했다. 조교실장은 이것이 대학원의 전통이라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대학원 측에서 신입생들에게 공부할 자리를 마련해줬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공부해라, 얼마나 좋으냐, 세상에
이렇게까지 해주는 대학원 선배들이 어디있냐, 이런 공간 내주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냐, 라고 꽤 긴 시간 동안 훈계했다. 동기인 K는 자신은 가족과 매번 3박4일의
휴가를 다녀오니 그때의 근무를 조정해달라고 했는데, 조교실장은 올해는 못가는 거지 뭐, 하고 무심히 답했다. 학과사무실에서 나온 우리 셋은 모두 짜증이
나 있었다. K와 S는 이게 말이 되냐고 입을 삐쭉 거리며
함께 어디론가 갔고, 나는 자취방으로 갔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렇게 대학원 조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학교에서 도보로 약 30분 떨어진 곳에 살았다. 대학원
석사과정생 형님 둘, B(30)와 L(28)과 같이 자취했는데, 두 분은 모두 차가 있었고 나는 자전거 한 대뿐이었다. 사실 나는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방을 얻으려 했으나 그들의 제안으로 같이 살게된 것이었다. B와 L 모두 학부 때 적당히 안면이 있는 선배들이기도 했고 거절할 명분이 딱히 없었다. 그들은 학교가 다소 멀기는 하지만 자신들이 매일 아침 7시면 일어나 8시 전까지 학교에 올라갈 것이니 아무 차나 골라타고 같이 가면 되지 않겠느냐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출근 첫날 둘은 8시가 가까워질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성격이 조금 부드러운 B를 먼저 조심스레 깨웠는데, 그는 짜증을 내며 돌아 누웠다. 그래서 L을 깨우자 그는 어쨌든 나를 8시 5분까지 데려다 주었다. 8시 5분에 사무실 문을 열자 동기 둘은 청소를 하고 있었고 조교실장을 포함한 선배 둘이 나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왜 늦었는지 내게 물었고, 나는 늦잠을 잤다고 답했다. 걸레를 빨며 잠시 이등병 생활이 떠올랐다. 나는 그 이후에도 몇
번 룸메이트들을 깨우다가, 나중에는 포기하고 7시에 일어나
씻고 짐을 챙기고 7시 반에 자전거를 탔다. 한 번은 자전거를
타고 노트북을 들고 눈길에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노트북이 박살나기도 했다. 그래도 8시까지 사무실 문을 열어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사무실 청소는 메뉴얼이 있었다. 문을 열어 소화기로 고정시키고,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일단 빗자루로 바닥을 '잘' 쓸고, 대걸레를
빨아 와 바닥을 '잘' 닦고, 걸레로 눈이 닦는 모든 곳을 '잘'
훔쳐내고, 교수와 강사들을 응대할 커피를 내리고, 컴퓨터를
켜 공문을 확인해 출력해 놓고, 화분에 물을 주고 등등, 지금은
잘 생각도 나지 않지만 적어도 두 배는 더 메뉴얼이 있었다. 8시에 청소를 시작하면 거의 30분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한 번은 청소를 하고 있는데 3학기 위의 석사과정생 J가 들어와 예전에는 흰장갑을 끼고 형광등
위를 훑어 보고 까맣게 되면 욕 먹었는데 세상 참 좋아졌다 그지, 하며 나가기도 했다. 대학원의 갑을 관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기보다는 그는 원래 좀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는 좋게 말하는 법이 없어서 그저 이렇게 저렇게 잘하면 된다고 말하면 될 것을, 이렇게 하면 죽는다, 라며 내게 눈을 부라리기도 했다. 이건 군대에 갓 들어온 이등병을 갈굴 때 선임들이 기를 죽이기 위해 주로 하는 수법이었다. 이런 것을 당하며 나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3. 등록금과 장학금
1학기 개강일이 가까워져 오자 조교실장이 장학금 회의를 소집했다. 대학원 과정생 조교들이
모두 모였다. 모두 합해 10명쯤 되었다. 조교실장은 장학금 시스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나는 입학 전 술자리에서 “조교 생활을 하면 등록금이 모두 면제, 연구비를 받으면 용돈까지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만 간단히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조교실장은 이번 학기에 적어도 300만원씩은 받을 수 있겠다, 고
했다. 나는 내색하지 못했지만 뭔가 몸의 피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이미
부모님께 생활비와 등록금을 모두 책임지겠다고 장담해 놓은 뒤였다. 이번 학기 등록금은 450인데 조교 활동으로 보전되는 비용은 300, 그러면 150의 현금을 당장 마련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의 설명은 이러했다. 교수님이 8분인데 대학원 조교는
10명이다. 그러니까 8분은 각 1명의 연구조교를 두고 350 정도의 장학금을 각각 줄 수 있는데, 그걸 모두 모아 2800만원을 만들고 10명에게 나누면 280. 그런데 조교실장에게는 등록금만큼의 장학금을
몰아주기 때문에 각 조교의 몫은 그렇게 할당된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과에서 개설하는 대형강의가 3개 있었는데, 각 조교비가 80만원씩 240만원이 나오는 것을 다시 10으로 나누면 각자의 몫은 조금씩
늘어난다. 이 대형강의의 조교는 당연히 신입생인 우리의 몫이었다.
조교 근무는 3월초부터 8월말까지라고 했으니까 6개월을 근무하고 300만원, 한달로
치면 50만원이 조금 안 되는 돈을 받게 된다. 이 돈이
내게 할당된 장학금이자 생활비이자 모든 것이었던 셈이다. 수업이 있는 주9시간을 제외하고는 아침 8시 30분부터
저녁 5시까지 사무실에서 조교근무를 서야 했다. 당연히 최저시급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조교근무를 하지 않으면 이곳 생활을 하기 힘들 것이라는 조언인지 협박인지, 그런 것에 이끌려 그저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회의를 마친 후 룸메이트인 L에게 교수님의 연구를 보조해 드리고 받을 수 있다던 연구
인건비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그는 기존 인건비는 받는 사람들이 받는 것이고, 신규로 연구 프로젝트를 따내면 순번에 따라 차례가 올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L에게 그도 연구비를 받고 있는지 물었는데, 그는 아직
순번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나보다 3학기 선배였다. 적어도 2년 동안은 나에게도 연구 인건비 차례가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1년에 버는 돈 600만원, 1년에 내야 할
등록금 900만원. 숨쉬는 비용을 제외하고도 300만원이 비었다. 나는 첫학기부터 학자금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생활비 대출 100만원까지 추가로 받아 그럭저럭 당장 생계를 해결했다. 부모님께는 교수님의 연구를 도와 드리고 충분한 생활비를 받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4. 대학과 패스트푸드점
내가 서른이 되던 해, 2012년 어느 여름날에 어느 교수님의
연구실 이전을 위해 여러 대학원생들이 모였다. 보통 연구실에는 5천권
내외의 책이 있다. 그것을 하나하나 노끈으로 포장해 밀차에 쌓아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나른다. 그리고 새로운 연구실을 깨끗이 청소하고, 예쁘게 책을 꽂아 넣는다. 책을 나르는 데만 한나절이 소요된다. 우리는 아침 일찍 모여 점심까지
책을 날랐다. 교수는 자신의 제자 중 한 명에게 연구실 이전을 책임지게 했고, 자신은 나오지 않았다. 점심이 되자 몇 판의 피자가 배달되었고, 우리는 먹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내 옆에 쌓아 뒀던 책
무더기가 내게 쏟아졌다. 두꺼운 양장본들이었다. 그 책들이
꽤나 높은 높이에서 내 다리를 향해 모두 쏟아졌다. 나는 일어나지 못했다. 마침, 내 3학기 윗
선배 S가 그 꼴을 보았는데, 그는 책을 급히 치우고 나를
부축했다. 나는 앉은 상태로 바지를 걷었다. 책에 찍힌 다리는
그 부분이 뭉개져 있었는데 빨갛다기보다는 하얀... 선배는 나를 보고 야 너 저거 뼈 아냐, 라고 외쳤다. 나는 황급히 그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책임을 맡은 강사를 찾아가 조금 다쳤으니 병원에 가겠다고 했다. 상처를
본 그는 놀라며 빨리 병원에 가야겠다고 했는데, 나는 일을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아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하고 연구실을 나왔다. 차에 올라 타 시동을 걸었다. 집
근처의 정형외과에 가는 길에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왔다. 이제야 피가 펑펑 나고 있었다.
정형외과엔 사람이 많았다. 양말로 상처 부위의 피를 막고 내 차례를 기다렸다. 응급실에 가도 되었겠지만 응급비용을 부담할 자신이 없었다. 의사는
내가 진료실에 들어가자마자 수술준비해, 라고 하고 나를 수술대에 눕혔다. 아마 10바늘 정도 꿰맸을 것이다.
대략 5만원 내외의 비용이 나왔던 것 같다. 나는
오른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자취방에 들어갔다. 어떻게 걸어야 할지 몰라 침대까지 기어가 간신히 누웠다. 다친 시간은 오후 2시, 집에
들어와 누우니 5시쯤 되었다. 그때까지 나에겐 한 통의 전화도
오지 않았다. 내가 다친 사실을 그 강사와, 선배, 그리고 그 자리의 모두가 대략은 알았을 것이다. 나는 둘에게 문자를
남겼다. 몇 바늘을 꿰맸고 당분간 연구실에 나가지 못할 것 같다. 마침
방학이어서 강의는 없었다. 둘에게 모두 답장이 왔다. 푹
쉬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S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과자와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적당히 사왔다. 나는 누구 같이
온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는데, 없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세탁기 안의 빨래를 좀 널어줘요, 하고 부탁했고, 그는 빨래를
널어주고 돌아갔다.
누군가의 일을 돕다가 크게 다쳤는데,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교수든, 강사든 나에게 전화해 많이 다쳤는지, 몸은 좀 어떤지, 자신의 일을 도와주다 그랬으니 정말 유감이라든지, 그러한 말을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나는 모든 치료 비용을 직접
부담해야했고, 여름 내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곳이 내 직장이라면, 내 청춘을 바치고 있는 곳이라면, 나에게 최소한의 도리를 해주길 바랐다. 군대에서 작업하던 이등병이
다쳐도, 일용직 노동자가 현장에서 다쳐도, 사람을, 노동자를, 이렇게 대접하지는 않는다. 내가 연구실 이전에 기꺼이 응한 것은 물론 그러한 ‘잡일’이 관행이기는 했으나, 제자의 도리라 생각했고 무엇보다도 학과 교수님들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 여름에 나는 너무나 외로웠다.
지금 나는 강의를 하며 주3일은 학교에서 떨어진 24시간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한다. 거기에서 '딜리'라는 업무를 한다. 아침 일찍 배달되는 냉동, 냉장 음식을 받아 창고에 올리는 일이다. 강의가 없는 날, 아침 7시에 출근해 점심까지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곳이다. 나는 며칠 전 냉동감자를 옮기다가 빗길에 넘어져 팔이 골절됐다. 팔꿈치가
갑자기 야구공 크기만큼 부풀어 올랐다. 그 자리에는 크루 동생들이 있었고 매니저가 있었다. 매니저는 침착하게 나를 근처 병원으로 데려갔고 모든 병원비를 부담해 주었다.
그리고 2주간 스케줄을 빼줄 테니 언제든 낫는대로 나오라고 웃으며 말해 주었다. 원한다면 산재 신청으로 70%의 임금을 받을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패스트푸드점의 대처에는 이처럼 노동자를 위한 ‘메뉴얼’이 있었다. 대학의 대처와 비교하며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대부분의 대학은 ‘대학원생’과 ‘시간강사’를 노동자로 대우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대학 행정과 강의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대단히
가혹한 처사다. 4대 보험에조차 관심이 없다. 대부분의 시간강사들은
지역가입자로 건강보험료를 온전히 부담해 낸다. 그런데 패스트푸드점에서는 월 60시간 내외를 일하고 있을 뿐인 내게 건강보험을 포함한 4대보험을
모두 등록해 주었다. 오히려 나를 사회적으로 보장해주는 명목상의 직장은 대학이 아닌 24시간 패스트푸드점이다. 지식을 만드는 대학보다 햄버거를 만드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오히려 나를 노동자로 대접해 준다.
나는 지금 한 달에 12000원의 건강보험료를 낸다.
30대 남성이 부담하는 액수로는 지나치게 적다. 내 주변을 기준으로 10만원 내외를 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에 퇴직한 부모님 두 분이
피부양으로 묶여 있다. 얼마 전 주민센터에 제출할 서류가 있어 건강보험료 납입액을 12000원으로 적었더니 어제는 전화가 와서 0을 하나 빼먹으신 듯
하다, 고 했다. 그래서 정확히 적은 것이 맞다, 고 하자 아... 하고 뭔가 횡설수설하다가 실례지만 직업이 어떻게
되시나요, 하고 물었다. 저는 대학교 시간강사이고 건강보험료를
등록해 준 곳은 맥도날드입니다, 아니 대학에서 건강보험이 되시잖아요,
죄송합니다 대학에서 안해줘요, 그럴리가요, 정말
그렇습니다.
시간강사들은 대부분 지역가입자로, 혹은 부모님의 피부양자로 건강보험에 등록되어 있다. 내가 흔치 않은 직장가입자가 된 것은 맥도날드에서 월 60시간 이상
노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3일, 7시부터 13시까지 맥도날드에 나가 냉동감자를 나르고 설거지를 하고
테이블을 닦는다. 아침 6시면 일어나 주섬주섬 아침을 챙겨
먹고 출근길에 나선다. 춥다, 더 자고 싶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온 몸을 감싼다. 그래도 매장에 도착해 일하다 보면 그저 감사하다. 최저시급 5210원의 육체노동이지만, 적어도 나를 사회적으로 보장, 보호해 주는 유일한 공간이다. 덕분에 나는 건강보험 직장가입자가
되어 월 50만원이 채 안 되는 월급에서 공제된 남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은 액수의 건강보험료를
낼 수 있게 되었고, 내 부모님까지 그 혜택을 받게 되었다.
내 부모님께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들어오세요, 하자 두 분은 무척 반가워했다. 대학에서 이제 건강보험을 해주는 거냐, 물으셔서 나는 지도교수님이
연구원으로 등록해 주어 그동안 건강보험료가 나올 거예요, 했다. 물론
거짓말이다. 도저히 저 맥도날드에서 일해요, 하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라도, 한 평생 열심히 일해 모든 가족을
피부양자로 든든히 품어준 내 아버지를 '부양'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쁘고, 서럽고... 그저 너덜너덜하다.
언젠가 12000원의 건강보험료를 내며 30대를
보낸 이 시기를 내 후배들에게 웃으며, 술자리 안주 삼아 할 수 있게 되기를, 그리고 내 후배들은 적어도 부모님의 든든한 부양자가 되어 웃으며 건배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5. 연구소 조교 생활
다시 2008년 3월, 석사 1학기 때로 시계를 돌려 본다. 보통 연구소라고 하면 실험실과 백색 가운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그건 공대의 경우이고, 인문대의 경우는 대개 “동양학민족연구소”, “한민족사회과학연구소”와 같은 거창한 이름을 내걸고 그저 책으로
가득차 있는 공간이다. 우리 학과에서도 작은 인문학 연구소를 하나 운영하고 있었다. 내가 석사과정에 입학하며 마침 연구소 조교를 맡고 있던 선배가 논문학기에 들어갔고, 내 지도교수가 연구소장을 맡게 되었기에 자연스럽게 내가 물망에 올랐다. 연구소
조교가 선임되는 과정에서 대학원생들의 의지가 반영될 여지는 당연히 없었다. 조교실장이 나를 불러 너는
오늘부터 학과조교와 연구소조교를 함께 맡을 것이니 7층에 있는 “인문학
연구소”(가칭)에 올라가 인수인계를 받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너는 참 좋겠다 석사 1학기부터 벌써 공부할 공간도 생기고, 연구소엔 책이 많으니 또 논문
쓰기는 얼마나 좋아, 게다가 연구소 장학금도 나오잖아, 하고
부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것이 나를 위로하기 위함이었는지 혹 정말로 내가 부러웠던 것인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나는 뭔가 좋은 기회가 온 게 아닌가 싶어
살짝 들떠 있었다.
인문학 연구소의 조교는 다른 세부전공 선배인 J였다. 그는
내가 연구소에 들어오자 목장갑을 던져 주었다. 그리고는 지금부터 연구소의 모든 책을 빼서 다시 정리할
것인데, 엑셀 파일에 책의 서지와 개수를 모두 파악해 3일내로
올리라고 했다. 연구소는 10평 남짓의 아담한 크기였다. 어디서 가져왔는지도 모를 폐급 책장이 가득했고, 간신히 앉아 공부할
만한 크기의 책상이 두 개, 누군가를 응대할 작은 쇼파가 두 개 있었다. 책은 모든 책장에 빽빽하게 꼽혀 있었고 자리가 없어 채 담지 못한 책들이 책장 위 박스에 가득 담겨 있었다.
3일간 모든 책을 책장에서 꺼내 각 책을 분류하고 다시 꼽았다. 중복되는 책을 골라 박스에
담아가며, 여러 학회지들을 호별로 정리했다. 책의 목록번호는
대략 3천번까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을 억지로 우겨 넣다가
한 번은 책과 책 사이에 책이 끼었는데, 손으로 잡아빼다가 도저히 안돼서 공구함에 있던 망치로 책을
꺼내기도 했다. 책의 잔해를 어찌할까 하다가 몰래 8층의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리고 목록번호를 하나 지웠다. 그렇게 일이 끝나자
J는 연구소의 쇼파에 나를 앉히고 연구소에서 해야 할 매뉴얼을 알려주었다.
근무 시간은 평일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고, 공부하고 싶다면 퇴근 시간은 너의 자유이다. 주말에 나와 공부해도
좋다. 그런데 24시간 언제라도 지도교수에게 전화가 와서
뭘 찾거나 너를 호출할 수 있다. 그때 만약 없어서 전화를 못 받았다,
뭐 네가 알아서 상상해라. 연구소에서 발행하는 학회지가 있는데, 그때마다 수백 권의 책을 정리하고 발송해야 한다. 학회지는 1년에 4번 발행되고 간간이 발행하는 단행본이 있는데, 그건 랜덤이다. 단행본을 전국으로 발송하는 일 역시 너의 몫이다. 연구소가 주최하는 학술회의가 있으면, 그것 역시 네가 처음부터 끝을
책임져야 한다. 연구소 회의가 있으면 네가 참석해 서기의 역할을 해야 하고, 정리된 회의록을 교수님들의 식대 영수증에 첨부해 산학협력단에 제출해야 한다.
연구소 평가는 1년에 1번 있는데 한 달쯤은
이걸로 밤을 새야 할 거다.
그가 말한 정말 굵직한 일들만 대략 정리해 봤다. 나는 학과 조교와 연구소 조교를 병행하게
되는데, 명목상 학과 사무실은 주 3.5일 정도, 연구소는 1.5일 정도 근무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사무실과 연구소를 쉴 새 없이 왕복했다. 여기에 9학점의 대학원 수업까지 생각하면, 석사 1학기는 내가 어딘가 뒤돌아볼 여유를 전혀 없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내가 받게 되는 연구소 조교 장학금은 한 학기 동안 60만원이 전부였다. 수업이 없는 방학에도 의무적으로 출근해야 했으니 6개월 간 60만원, 즉 한 달에 10만원이었다. 추가 수당이나 보수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국가장학금을 받는 학부생들은 100만원 가량을 받고 정확히 4달을 일했으니, 나보다 배 이상의 보수를 받았다. (그들 역시 최저시급은 못 받았다.)
나는 인문학 연구소에 3년 있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연구소장이 바뀌며 그만두게 되었다. 정말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생각나는 두 가지만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연구소 단위의 국가 프로젝트가 나오면 연구소 운영위원들이 모여 어떤 주제로 어떻게 지원할 것인지 회의를 하게 된다. 내가 석사 1학기 때 나왔던 대형 프로젝트 때는 무려 10여 번의 회의가 있었다. 10명의 교수들이 한 마디씩만 해도 회의
시간은 대략 3시간 가까이 되었다. 회의록을 정리하며 참
답답했던 것은, 다들 말하는 바는 참 이상적이고 훌륭했지만 이것을 대체 어떻게 보고서로 제출할지 내
눈에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회의가 5번쯤 거듭되었을
때는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심정이었다. 결국 떨어지고
남은 것은 100만원에 이르는 식대 영수증과 의미없는 회의록 더미가 전부였다. 지금도 종종 생각나는 어떤 장면이 있다. 첫 회의 때 모두 일어나
자기소개를 하고 내가 남았는데, 저건 누구지 하는 표정을 몇몇 운영위원들이 지었다. 회의를 진행하려던 연구소장은 아, 저기는 그냥 연구소 잡일 돕는
아이입니다 회의 시작합시다, 라고 했다. 잠시 호감의 눈빛을
보이던 운영위원들은 곧 아, 그런거였나 하는 표정으로 회의 자료를 들추었다. 그것으로 내 포지션은 확실히 정해진 셈이었다. “잡일 돕는 아이”, 그것만큼 내 석사 시절을 잘 나타내는 표현도 없었다.
연구소 조교 3년차가 되었을 때, 어느 학회와
연합한 큰 규모의 학술회의가 열렸다. 나는 발표자와 토론자에게 원고를 받아 그것을 자료집으로 만들고, 플랜카드를 제작해 게시하고, 테이블과 다과를 세팅하고, 명패를 만들어 각 교수들 앞에 놓고, 진행 중 사진을 찍고, 마이크를 하나하나 점검하고, 물컵을 채우고... 꽤나 정신이 없었다.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학술회의는 오후 5시에 끝났다. 학교
근처 고깃집에서 저녁을 먹고, 2차로 호프집, 3차로 노래방, 다시 4차... 선후배들은
대개 2차를 끝내고 돌아갔지만 나는 연구소의 조교였기에 언제나 끝까지 남았다. 술자리에서는 내가 이 대학원에서 얼마나 행복하게 공부하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노래방에서는 탬버린을 쳤다. 그날은 4차를 하던
새벽 2시쯤 비가 세차게 내렸다.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였다. 나는 조용히 빠져나와 학교에 들어가 우산 4개를 마련했다. 다시 시내에 갔을 무렵에는 자리가 거의 끝나 있었다. 나는 지도교수께
우산 하나를 드리고 서열과 성별에 따라 3개의 우산을 나누어 드렸다.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었기에 우산을 받은 교수들은 내게 무척 고마워했다. 나는 인사를 드리고
돌아가려 했는데 어떤 젊은 교수가 나를 슬쩍 부르더니 말했다. 아니,
아직 과정생일 텐데 시작부터 끝까지 참 고생이 많네요, 참 대단해요 허허. 그는 내가 무척 존경하는 연구자였다. 좋은 단행본과 논문을 기계처럼
써냈고, 성과물의 피인용 지수가 높았다. 나 역시 그의 논문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가 ‘대단하다’라고 표현한 것이 그때는 그저 도와줘서 고마워, 하는 식으로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 ‘대단함’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주말도 잘 거르지 않고 주5일 이상 꾸준히 출근했던 연구소에서 내가 3년간 받은 보수의 총액은 360만원이 전부다. 그런 나를 무척 슬프게 했던 것은 언젠가 내 지도교수가 내게 했던 말이다. 그는
어떤 술자리에서 내게 연구소의 보수가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그래서 나는 한 학기에 60만원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한 달에 60만원이면 생활할 만했겠구나, 했다. 나는 당황해서, 아니 선생님 그게 아니고... 하는데 그는 다른 교수의 말에 이미 응대하고 있었다.
선생님... 감히 말씀드린 적은 없지만 쉽지 않은 3년이었어요. 죄송합니다.
6. 어머니...
나는 살면서 무언가 강요 받아 본 기억이 드물다. 내 부모님은
좋게 말하면 ‘신뢰’로, 남들이
보기엔 ‘방임’으로 남매를 키우셨다. 학교에서 받아 온 가정통신문 장래희망란에 무언가 적을 때도 너 하고 싶은 거 해, 라고 하셨고 부모님 의견란에는 자녀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라고 쓰셨다. 심지어는 대학에 갈 때도 내가 어느 대학에 가면 좋을까요, 하고
여쭙자 네가 가고 싶은 학교와 과를 정하고 우리에게 말해주렴, 하고 대답하셨다. 그래서 나는 아무 고민없이 점수에 맞춰 원하는 대학, 원하는 전공을
선택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난 후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셨다. 아버지는 많지 않은
외벌이로, 하지만 어머니께 꼬박꼬박 네 식구를 건사할 월급을 가져다 주셨다. 내 어머니는 그것을 무척 감사하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월급을 받아
온 날이면 집안에 삼겹살 굽는 냄새나 돈까스 튀기는 냄새가 퍼졌다. 구김살없이 행복한 가정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내게 직장 의료보험이 되는지 물으셨다. 퇴임 후 두 분을 내게 피부양자로
등록하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좋은 대답을 드릴 수 없었다. 한
평생 한 가정을 훌륭하게 먹여 살린 내 아버지가 퇴임을 앞두고 계신데, 다음 세대인 나는 부모님을 ‘부양’할 아무런 능력이 없다. 나는
서른이 훌쩍 넘어서도 여전히 ‘피부양’ 상태이며, 내 부모의 보호자가 될 수 없다.
어머니는 이런 나를, 점차 측은하게 여기셨다. 그러한
분위기가 감지될 때마다 나는 티를 낼 수는 없었지만 당신에게 태어나서 정말 미안해요, 하는 마음이었다. 서로 실망과 죄송스러움을 티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안쓰러운 배려가
계속되었다. 자연스레 나는 공부를 핑계로 집에 잘 올라가지 않았다.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박사 2기 크리스마스 때였다. 나는 오래된
친구 몇과 함께 어머니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간단히 맥주를 마셨다. 고등학교 시절 천리안의 취미 동호회에서
만나 10년 넘게 모임을 가져 오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가끔
밤늦게 이 친구들과 함께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는 기꺼이 따뜻한 밥을 지어주시곤 했다. S는 은행 정규직이
되었고, Y는 디자인 회사에서 자리를 잡았고, T는 벤처회사에서
계속 살아남았고, D는 사법연수원에 있었다. 내 어머니는
친구들의 권유로 맥주를 몇 잔 드셨다. 그리고 일어나며 내게 휴, 이
할 일 없는 놈... 여기서 혼자 할 일 없는 놈, 하셨다. 내 어머니께 나는 “할 일 없는 놈”으로 규정되었다.
박사 3기에 접어든 나는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이 아니면 본가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한 번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올라왔다가 터미널에서 차가 끊겼다. 지하철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충분히 서울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강변역 화장실에 들어가서 앉았다. 7시간 정도만 버티면 터미널에서 첫차를 탈 수 있을 것이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문 닫습니다, 이제 나오셔야 해요. 막차가 끊기면
지하철 화장실도 폐쇄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밖으로 나와 여기저기 갈 곳을 찾지 못하다가 24시간 영업하는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시키고 눈을 붙였다. 그러면서도
그저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이었다.
며칠 전 어머니께서 내 자취방에 오셨다. 반찬을 조금 가져오셨고 어떻게 지내는지 묻고 아시안게임을
함께 보았다. 맥주를 한 캔씩 나누며 나는 왜 그랬는지, 요즘
다들 많이 힘들다네요 주변 친구들도 아직 자리 잡은 친구들이 별로 없고... 그래요, 했다. 어머니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아닌데... 엄마 친구 자식들은 다 좋은 기업들 가던데, 라고 하셨다. 정말이지 괜한 말을 했다. 내 어머니는 58년 개띠, 그저 평범한 베이비붐 세대의 한 사람이다. 아들 세대의 대부분이 아프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아프니까
청춘, 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내 어머니께는 아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무엇이든 감당하겠지만 내 어머니를 사회적으로 부양하지 못하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어머니는 내가 책에 빠져 살던 어린 시절, 종종 네가 원하면 언제까지나 공부할 수 있게
해줄게, 집을 팔아서라도 그렇게 해줄게 공부만 하렴, 하고
말했다. 나는 지금도 그 목소리를 사랑스럽던 마음, 질감
그대로 기억한다. 하지만 용돈을 못 드릴망정 더 이상의 희생을 강요할 염치는 없어서, 일그러진 얼굴로 저는 잘 살고 있습니다, 하는 것이 고작이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7. 어머니, 그리고...
내 할머니는 96세까지 사셨다. 나를 예뻐해서
나만 보면 사촌 누나들 몰래 용돈을 몇 만원씩 주머니에 우겨넣곤 하셨다. 내가 석사학위를 받아 왔을
때는 이제 우리 XX가 선상님이 된 거냐, 그런거냐, 하고 물으셨다. 나는 아직 학생이에요, 하고 답했다. 박사과정을 수료했을 때 할머니는 언제 선상님이 되는
거냐 힘겹게 물으셨다. 나는 곧 될 거예요, 하고 어렵게
답했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보고 너 그러다 늙겠구나... 하셨다. 그때 이미 귀가 어두워 몇 번이고 크게 반복해 말해야 했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와의 거의 마지막 대화였다. 할머니는 유일하게 예뻐했던 손자에게 용돈 한 번 못
받아 보고 돌아가셨다. 교통사고였다. 나는 병원에서 차게
식은 할머니를 붙들고 미안해 할머니 하고 엉엉 울었다. 무엇보다도, 선상님이
되어 만 원짜리 한 장 드린 바가 없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강의를 시작하기는 했으나 학자금 대출을
값는 것조차 버거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저도 손자 노릇할게요, 했던 것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할머니의 첫 성묘를 가는 길에 국화를
사 꽃잎을 뿌려 드렸다. 그것이 내가 할머니께 드린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다.
8.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 (1) - 친구들
석사 1기와 2기
생활을 하며, 나는 고향인 서울에 거의 가지 못했다. 주5일 내내 연구소와 학과사무실 조교 근무를 해야했고, 주말도 따로 없었다. 한 번은 수업이 없는 평일 오전에 조교실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서울에 좀 다녀오려고 했다. 물론 다음날 오전 8시에 차질없이 학과사무실의 문을 열겠다고 했다. 그러자 조교실장은 난색을 표했다. 학과사무실 근무라는 것이 언제
어디서 비상사태가 벌어질지 모르는데, 조교들이 30분 이내에
모일 수 없다면 조교라고 할 수 있겠나, 그는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
그에 따르면 학과사무실 대학원 조교라는 것은 '5분 대기조'나 다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비상사태'라는 것은 고작해야 교수가 대량의 복사를 맡기며 10분 후에 찾으러 올게, 한다거나 어느 교수가 연구실 책상 배치를
좀 바꾸고 싶다는데 남자 조교들이 필요해, 그런 것들이었다. 나는
명절, 부모님 생신, 혹은 정말 중요한 일이 있거나, 하지 않으면 대부분 학교 근처에 머물렀다.
고향에 갈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와 단절된다는 말과도 같다. 현재진행형이 될 수 있었을 여러 인연들과 나는 온전히 작별해야 했다. 서울과
서너 시간 떨어진 이 도시에서, 나는 참 많이도 외로워했다. 서울보다
면적이 몇 배나 큰 이 도시에서 내가 기댈 곳은, 몸담고 있는 대학원 사회 하나가 전부였다. 하지만 인문계 대학원에는 남자가 부족했고, 있다 하더라도 나와 '또래'인 이들은 거의 없었고, 더욱이
친구가 될 '동갑'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2008년부터 지금까지, 오늘 술 한 잔 하자, 내가 많이 우울한데 술 한 잔 사줘, 나 오늘 월급 받았어 술 한 잔 살게, 라고 말할 직장-지역 '친구'를 만들지
못해다. 대학원에서 나름 친해진 인연이 두엇 있었으나, P는
석사 과정을 버티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고, L은 자신의 여유가 허락할 때만 나를 만났다. L은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였다. 그래서 친구가 많았고, 나와 함께 자리에 있다가도 야 아는 형님이 부른다 우린 다음에 보자, 하고
일어났다. 내가 힘이 들어 오늘은 같이 술 한 잔 해줘요, 라고
해도 그는 자주 논문이 너무 바빠서 끝나고 내가 한 잔 살게, 하는 식으로 미루었다. 나는 그래서 혼자 소주를 두어병, 그리고 안주가 될만한 순대나 튀김을
적당히, 해서 지나간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혼자 먹고 취하는 일이 많았다. 술 잔 두 개를 가져다 놓고 속으로, 한 잔 받아 오늘도 수고했어, 너도 한 잔 받아 힘들었지, 하고 한 잔을 마시고 다시 한 잔을
마시고, 잔을 붓고 다시 한 잔을 부었다.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 없을까 해서 네이버에서 지역명을 치고 '친구'라는
키워드를 검색해 보기도 했고, 길에서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 지나가면 붙잡고 저랑 이야기 좀 해요, 제가 술 살게요, 무슨 일 해요,
힘들지 않나요, 하고 묻고 싶었다.
서울의 친구들과는 점점 멀어져 갔다. 서로 연락하다가, 서로
연락이 뜸해지고, 내가 몇 번을 먼저 하다가 그나마도 어색해지고, 나중에는
내가 죽으면 이 친구가 오기는 할까, 아니 알고 찾아올 수 있을까 싶은, 그런 사이가 많아져 갔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여전히
대학원생으로 자리를 지켰고, 친구들은 '사회인'이 되어갔다. 노동하고, 그에
준하는 월급을 받았다. 그 갭은 '친구'라는 단어로 쉽게 메꿔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함께 만나 적은
돈을 나눠 삼겹살에 소주 한 잔으로 즐겁던 녀석들이 갑자기 '좋은 회'를
먹자거나, '양주'를 먹자거나, 오늘 내가 살게, 하는 말을 꺼냈다. 처음 한 두번은 너 임마 좋은 직장 잡은 걸 보니 정말 좋다, 오늘은
내가 얻어 먹을게, 내가 교수되면 너희들 다 모아서 파티 한 번 할게,
하고 그 변화를 즐겁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어떤 벽이 점차 쌓여갔다. 그것은 오래된 친구이든, 좋은 친구이든, 막연한 친구이든, 가리지 않았다.
친구들은 직장에서 만난 새로운 인연들과 경쟁하듯 서로를 페이스북에 태그하기 시작했고, 내게는
서울에 언제 오는지 영혼없는 인사치레를 하다가 그만두었다. '나'라는
사람의 자리는 점점 잊혀져 갔다.
특히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몇, 그중 G와
멀어진 일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서울에 가면 꼭 고등학교 친구인 G를 만나 놀았다. 함께 단과 학원에 다니며 오락실에서 1945를 돈이 떨어질 때까지 하고, 새우버거를 하나 더 준다는 말에
한달 내내 롯데리아에서 함께 저녁을 먹기도 한 사이다. 그와는 언제나 저녁 6시에 만나 새벽 1시까지 술을 마셨다. 서로 성격이 비슷했고, 주량도 주취도 비슷해 죽이 잘 맞았다. 한 번은 술로 이겨보겠다고 국가대표 축구 경기를 보다가 골이 들어가면 술을 원샷하자고 정했다. 국대의 공격수가 김도훈이었던가, 골이 정말 들어가지 않아서 우리는
패스가 성공할 때마다 원샷을 하자고 했다. 우리 국대가 백패스를 즐겨하던 때다. 우리는 1분 동안 소주 한 병을 거덜냈다. 그러다 죽을 것 같아서 코너킥 때마다 한 잔 하는 걸로 룰을 곧 바꾸었다. 그러던
이 친구도 취업을 하고 연봉이 2천이다 3천이다 했다. 취업에 성공했을 때는 내가 이 친구의 회사 앞까지 찾아가 참치회를 한접시 얻어 먹었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고, 그래야 할 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자주 만나지도 못하던 어느날, 오랜만에 만나 내가 맥주를
한 잔 사고 G가 2차를 가자며 어디론가 갔는데, 조금 취하더니 한마디 했다. 야 그만 좀 얻어먹어 임마. 내가 산 맥주보다는 당연히 비싼 자리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자고
한 것도 아니었다. 농담이었는지, 취해서 생각없이 나온 말인지, 둘다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 이후로 G에게 차마 먼저 연락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G는 잘 연락하는 법이 없었다.
점점 다른 친구들에게도 술 한 잔 하자, 라고 말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최저시급도 안되는 나의 시급이 그들의 연봉과 맞추어 지고 있었다. 친구들이
보는 세상이 나와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친구들이 여전히 더 많았겠으나, 대학원생으로서의 자기검열과
방어가 점점 강해져 갔다.
그런 친구는 진정한 친구가 아니야, 하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이지만 나름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이에 조금씩 벽이 쌓여가는 듯한 그 위화감은, 나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누구나 쉽게 말로 '진정한 우정'을
과시할 수는 있지만 정작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세월과 거리가 벽돌을 쌓아가고, 그것을 치울 최소의 시간
여유나 물질 비용이 없는 쪽이 항상 나 자신이라면, 정말이지 끔찍한 외로움이 몰려온다. 석사1기부터 박사 4기를
수료하기까지, 참 많은 친구들이 내게서 멀어졌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살다 보면 그런 것이다. 아직도 내 곁에 있는
몇 안 되는 친구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비용을 대어 내가 보지 않는 사이에 눈 앞에 쌓인 벽돌을 치워주었다. 그마저도
내 자기위안일런지 모르겠지만... 감사한 일이다.
9.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 (2) - 시간강사와 사회인
2012년 봄, 나는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받을 수 있는 장학금의 근거가 없어짐과 동시에 학과 조교의 의무 역시 없어졌다. 50만원의 보수에 내 청춘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고 좋아하기에는, 어느새
갓 서른이 되어 있었다. 피어난 적 없는 내 청춘은, 이제
대학원 사회의 가장 밑 단을 넘어 '논문', '연구', '강의', 와 같은 아카데미의 정글에 던져졌다. 학진등재지에 논문을 게재해 좋은 평가를 얻으면, 강의를 하고 박사논문
인준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것이 쉽든 어쩌든, 잠시
접어두고, 좀 쉬고 싶었다. 이 시기의 나는 공부가 아닌
다른 세상에 여기저기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고 집주변을 돌다 보면, 내가 몰랐던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있었다. 서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여전히
연구실에 나갔지만, 논문이 급하지 않으면 집에서 저녁을 먹으려 노력했다. 그러다가 집 근처의 초등학교를 지나던 중, 체육관처럼 생긴 건물에
환하게 불이 켜진 것을 보았다. 호기심에 가까이 가보았는데, 삑삑
대는 운동화 마찰음과 건강한 웃음소리들이 새어 나왔다. 나는 체육관 문을 살짝 열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래 눈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 문틈 사이로는 새로운 세계가 보였다. 30대부터 50대까지의 남녀들이 모두 밝은 표정으로 어떤 운동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분위기에 취해 한참을 쳐다보다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생각해보면, 참 내성적인 성격인 내가 그렇게까지
했다. 그러자 운동하던 몇몇 사람들이 내게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나는 저도... 저도 같이 운동하고 싶어요, 해버렸다. 그들은 와 신입회원이다, 하며 나를 반겼고 그중 총무라는 사람이
내게 입회원서를 쓰게 했다. 나는 다음날부터 저녁 7시마다
츄리닝을 입고 운동하러 갔다. 마침 학진등재지에 논문이 통과되어 주
4시간의 강의를 시작하게 된, 2012년 가을이었다.
운동은 참 즐거운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이 내게 엄청난 에너지를
주었다. 말하자면, '사회인 동호회'라는 것이었는데, 그 운동을 좋아하는 그 지역의 젊은 사람들이 모여
만든 운동클럽이었다. 어느날은 야유회를 갔다. 버스를 타고, 잘 모르는 사람들과 근처 물가에 가서, 노래도 하고, 듣고, 술도 마시고, 놀았다. 그 경험이 눈물이 날만큼 감사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다. 클럽의 총무가 나를 따로 부르더니 '레슨'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운동을
할 공간이 부족한데 초보자는 레슨을 받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고, 그래야 기존회원들의 반발을 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레슨을 받겠다고 말했다. 레슨비는 주 2회, 한 달에 12만원이었다. 거기에 5만원의 월회비가 있었다.
비로소 무언가 하려면 돈이 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17만원이면 내 한 달치 밥값보다 많았다. 나는 그래도 레슨비를 만들어 입금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배우는 것이 없었다. 코치라는 사람은 자신의 폼을
보여주고, 내 자세를 교정해주고, 그걸로 끝이었다. 무얼 더 바라겠냐마는, 고작 10분도
안되는 시간을 봐주고 그만한 돈을 받아갔다. 두 달 정도 계속 레슨을 받다가, 아무래도 계속 받기는 힘들겠다 싶어서 총무를 만나 레슨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는 웬만하면 계속하는 것이 좋을 텐데, 라면서도 좋을 대로 하라고 했다. 도저히 돈이 없어서 그만두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클럽 사람들의 직업은 다양했다. 공무원이나 선생님이 가장 많았고, 대략 회사원, 공단 생산직, 자영업자의
순이었다. 직장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번은 술자리에서
그래 XX는 직장 어디 다니니, 해서 네 XX대학교에서 강의해요, 하고 말했다. 얼마나 버는지 묻기에 대답해 주었는데, 그때 그 분위기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모두 나보다 형과 누나들, 30대 중후반에서 40대 후반까지의 나이였는데, 40대 누님이 외마디 비명을 지른 것부터
시작해서 정색하고 나를 보거나 측은하게 보는 표정까지, 다양했다. 내
월급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왜 그들을 불편하게 했을까, 나는 친한 누군가 이외의 사람에게 내 직업과
보수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후 그들이 나를 대하는 것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레슨을 받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이 느껴졌다.
운동을 하며 친해진 형이 몇 있었다. U는 나보다 다섯살,
S는 여섯살이 많았다. 둘다 '공무원'이었다. 그들은 운동이 끝나고 나면 나와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아
함께 걸었다. 그러다가 종종 근처 슈퍼에서 시원한 맥주 몇 캔을 사서 같이 마시자고 했다.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고 처음, 누군가가 내게 술을 권했다. 그게 너무 좋아서 나는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들은 많이 바빠보였지만
운동을 꼬박꼬박 나왔고, 목요일이나 금요일이면 함께 술을 마시자고도 했다. 집 근처에 그렇게 맛있는 치킨집이 있었던 것도, 곱창을 파는 맛집이
있었던 것도, 처음 알았다. U는 장난스러운 구석이 많은
사람이었다. 단톡방을 만들어 나와 S와 어떤 누님을 한 분
초대해 아침이면 굿모닝, 하고 자주 자기 근황을 재미삼아 올려 분위기를 즐겁게 했다. 나는 동네에 그런 형이 생겼다는 것이 너무 좋아서, 괜히 단톡방을
열어 보고 웃고는 했다. 우리는 가끔이었지만 운동과 관계없이 술자리를 따로 갖기도 했다. S의 제의로 나이트에 가기도 했는데, 경험이 처음인 나는 여기가
어디지 나는 누구지 하면서 S의 주도로 함께 마시고 놀았다. 나이트를
포함해 처음 두 번의 술자리는 U와 S가 나누어 냈다. 나는 세 번째 술자리를 대접하고 싶어서, 근처 치킨집에 자리를 만들고
지난번엔 사주셔서 정말 잘 먹었어요 오늘은 제가 살게요, 했다. 그들은
아이고 고맙지, 라면서 좋게 술자리를 가졌다. 그런데 나가면서
계산을 하려고 보니 이미 U가 계산을 했다며 먼저 나와 있었다. 어
제가 산다니까 왜 그러셨어요 형님, 하니 아냐 뭘... 하고
웃고 서로 헤어졌다. 그런데 4번째 술자리에서 직장에 대한
이야기를 가볍게 하다가 내가 대학교에서 강의를 한다고 하니 U는 야 너는 뭘 가르치냐 혹시 뭐 공짜로
어디가서 얻어먹고 그런거 가르치냐, 라고 했다. 1년이 넘게
지난 일이지만 그 말이 아직도 토씨 그대로 머리속을 맴돈다. 나는 화장실에 간다며 일어나서 술값을 계산했고, 한 번 더 술자리를 갖자고 해 먼저 계산하고 나왔다. 다음날 단톡에서
나오고, 그뒤로 체육관엔 가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사회인'의 리그에 발을 들인 것이,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이었다. '사회인 동호회'라는 것은 애초에 성실한 '사회인'을
대상으로 한 모임이다. 내가 한 달에 얼마를 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했을 때 그들이 보였던 그 불편함은, 결국 내가 그들의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반사회적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고작
주 4시간을 일하며 월회비와 레슨비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근사한 2차, 3차를 가는 데 돈을 보태지 못하는 인간이 낄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적당히 나이를 먹고서도 제대로 사회인의 구실을 하지 못하는 볼품없는 인간에 불과했다. 그리고 '사회인'의 거리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문법'이 있었다. U와 S가 나를 기다리지 못하고 계산을 하고 나간 것도, 세련된 사회인이라면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미리 계산을 해 대접받는 이들이 불편없이 자리를 나가도록 배려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단순한 문법조차 모르고, 그들의 거리에
발을 들여 놓았다.
아마도 내가, 혹은 내 또래의 대학원생이나 시간강사들이 겪는 외로움의 근원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는 반(半)사회적인
인간이다. 학생도 아니고 사회인도 아니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번듯한 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나는 반(反)사회적인 인간이다. 다른 노동자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짧은 시간
표면적으로 노동하고, 사회가 원하는 소득과 소비 기준, 그
어느 것도 충족시키지 못한다. 일주일에 4시간 노동(강의)하고 월급을 받아 가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비난한다. 사회성의 결여, 사회에서 함께 동시하고 있으나 동시하지 않고 있다고
느끼는 동시성의 비동시성, 이러한 외로움은 연애나 우정이나 가족애 같은 것으로는 극복되지 않는다. '사회적'이지 못한 존재는, 외롭다. 나는 만신창이가 되어 연구실로 돌아갔다.
10. 꿈과 현실에 대한 이야기 - 친구 허벌에게
내 페이스북 계정은 돌보지 않은 지 몇 개월이 되어 간다. 석사 4기쯤이었던가, 2010년으로 기억하는데 박사과정 선배 S가 보낸 초대메일에 아 어쩌지 이건 뭔지 모르지만 초대에 응해야겠다, 생각하고
가입한 계정이었다. 막상 초대한 선배는 몇 번인가 근황을 올리는 듯 하다가 곧 빠져나갔지만, 나는 공부하는 근황을 올리거나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기록하는 용도로 종종 사용했다. 그러다가 SNS는 인생의 낭비다,
하는 퍼거슨의 명언을 떠올릴만한 일이 한 번쯤 벌어지고, 그러한 계기로 인해 결별하는, 평범한 수순을 밟았다. 아마 별 것 아닌 글에 대학원 선배 누군가가
반응했고, 술자리를 통해 행동을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계정을
닫거나 일부 공개로 전환했을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페이스북에 다시 접속한 것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왠지 친구로 등록된
같은 처지의 대학원생들이 공유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실제로 내 글이 공유되고, 좋아요를 얻고, 아픈 공감의 댓글을 적당히 얻고 있었다. 특히 누군지 궁금해하는 글들이 많았다. 우린 예전부터 친구로 등록되어
있었어, 하며 쓰게 웃고 있는데 친구요청이 한 통 도착했다. 연락이
끊긴 지 5년 정도 된 고등학교 친구, 내가 '허벌'이라고 부르던 녀석이었다. 이름이
허씨였는데, 첫 만남 때부터 그냥 허벌이라고 부르면 되겠다 싶은 부담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반가워서 정신없이 수락 버튼을 누르고,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바로 통화에 들어갔다. 서른이 갓 넘어 소원했던 친구에게 연락이
오면 보통 '결혼'이나 '돌잔치' 초대 같은 것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친구는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
것이고 내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소설을 쓰겠다고 항상 책을 가지고 다니며, 노트에 무언가 끄적였다. 쓰고 싶은 소재가 생기거나, 어떤 좋은 표현이 떠오르면 기록했다. 오답노트나 단어암기장 대신 습작노트를 곁에 두며 소설을 쓰고 여러 종류의 습작을 했다. 입학할 때 문과 3등 안에 들었던 성적이 어느새 반에서 3등으로, 그리고 다시 쭉쭉 떨어졌지만, 그닥 신경쓰지 않았다. 누구나 서울대를 꿈꾸겠으나, 나는 국문과라면 어디나 상관없겠다 싶었다. 국문과가 아니면 가지
않겠다고 중학교 때부터 마음 먹고 있었다. 고1때까지 의대나
법대보다 국문과의 입결이 더 높으리라 막연히 생각했으니, 철없는 국어사랑이었다. 내가 대학원에 진학한 것도 지도교수의 권유보다도 이미 나 스스로 생각하고 있던 바였다. 그런데 나와 닮은 녀석들이 한 교실에 몇 있었다. 내 뒷자리에 앉은 C는 음악을 하겠다고 했는데, 항상 음표를 그리고 이런저런 코드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했다. 나를 부를 때 야 작가, 하고
불렀는데 나는 그런 그가 좋았다. 한 번은 나를 지역 청소년 문화센터에서 지원하는 자신의 밴드 공연에
초대해 다녀오기도 했다. 내게 작곡을 부탁하기도 했는데, 뭔가
메탈한 음악이라고 하던가... 내가 해줄 수 없는 일 같아 그만둔 기억도 있다. 허벌은 만화를 좋아해서 만화책을 자주 보고 애니메이션 같은 것에 대해 잘 알았다. 그래서 만화를 그리겠다는 것 같더니 시 한 편을 읽고서는 갑자기 문학을 하겠다고 했다. 모교의 문학 교사인 정희성 시인이 자신의 대표 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직접 낭독해 준 일이 있는데, 그후 그는
문학이 가진 힘에 매료되었다. orphan2000이라는 아이디로 인터넷에 종종 습작을 올렸다. 이러한 친구들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은 내색하지는 않아도 무척 감사한 일이었다.
그때는 정작 몰랐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서로를 지탱해 주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고 추억, 혹은 미화된다.
허벌은 고등학교 졸업 후 한동안 소원했다가, 내가 대학원에 진입했을 즈음 연락이 왔다.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 공부 중이라고 했다. 그때 우리는 스물여섯이었다. 대부분의 또래들이 취업준비에 바쁠 때, 나는 대학원에 갔고 그는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갔다. 우리는 아직 어렸고, 삶에 지쳐
그만둔다고 해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것이었고, 그래서 큰 감흥없이 서로를 격려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다시 5년만에 그와 전화하며 물었다. 첫마디는 살아있냐, 하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아직도 하고 있냐, 하는 것이었다. 그는 당연히 아직 하고 있다, 고 대답했다. 나는 정말 기뻐서 야 이 미친놈아, 했고 만나서 더 이야기하자, 했다.
그 친구도 나에게 아직 글쓰냐, 해서 아직 쓰고 있다 하니 역시나 너도 미친놈이네, 했다. 서른둘이 되어 아직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건, 그 자체로 격려받을 만한 일이었다. 정말 많은 친구들이 나는 무엇을
하겠다, 저것을 하겠다, 취업은 가치 없는 일이다, 하고 호기를 부리다가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일반 기업의 신입사원이 되어 오히려 자신을 변호하는, 그런 것을 지겹게 보아왔다.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살다보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소설을 쓰겠다고 했지만, 대학 제도권의 우산 안에 들어와 연구하며 정해진 양식의 글을 쓰고 있다. 우리는
서로 근황을 조금 더 묻고 답하다가, 서른이 넘어 하는 여러 지키지 못할 약속 중 언제 밥 한 번 먹자, 는 것이 대표적이었지 싶어서 아예 달력을 가져왔다. 나는 수업이
있는 목요일이 아니면 언제든 시간을 낼 수 있었고, 그 친구도 딱히 직장이 있는 것이 아니니 아무때나
괜찮다고 했다. 참 만나기 쉬운 사이가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10월 8일, 한글날 하루
전에, '홍대입구'에서 만났다.
허벌이 소주 한 잔 사겠다고 해 홍대 기찻길 근처의 삼겹살 집으로 갔다. 생삽겹이 1인분에 만 원이 넘었는데, 그는
1인분에 5천원하는 벨기에산 냉동삼겹살을 시켰다. 나는
그게 정말 마음에 들었다. 마음이 편했고, 정말 친구를 만나는구나, 하는 느낌이 자연히 들었다. 허벌은 의외로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몇 년에 걸쳐 장편애니메이션을 한 편 만들었고, 그 작업이 얼마전
끝나서 어깨까지 내려오던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했다. 그 역시 '반사회적인
인간'이었다. 정해진 출근시간도 없고, 서비스 제공을 위해 대면할 사람도 없고, 무엇보다도 돈이 되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도 사실 학기 시작을 앞두고서야 머리를 단정하게 자른다. 학기가 끝날 때쯤 되면 머리가 좀 길다 싶은데, 방학 동안 강의가
없으니 그대로 기르다가 다시 새학기가 시작할 즈음에 머리를 손질한다. 1년에 두 번, 많아야 세 번 미용실에 간다.
그는 나에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자신이 직접 쓴 것이라고 했다. “허범욱, <창백한얼굴들 :
나는 왜 이 땅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는가>, 씨네21북스, 2013년 12월” 이게 뭐냐, 고 물으니 자신이 감독한 장편 애니메이션 <창백한얼굴들>이 곧 개봉 예정이며 그 책은 의례히 쓰는 '제작일기'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허벌은 계속해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했고, 결국 자신이 감독한 장편 애니메이션의 개봉을 앞둔, '감독님'이 되어 있던 것이다. 그간의
생활이 얼마나 혹독했을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루에 두 개 이상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림을
공부했다고 했다. 자신이 청춘을 바친 곳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성과를 내었다는 자체로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하지만 무엇보다 감사한
일은, 어찌되었든 그가 서른둘이 되는 동안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는 점이다. '버텨냄'처럼 힘든 것도 없다는 것을, 나는 지난 석사 1기부터 박사 4기, 수료 후 강사 생활 등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한 친구와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 정말 오랜만에 고양과 행복을 주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2011년에 통과시킨, 제일 마음에 드는 논문을
한 편 선물했다. 서로 무언가 청춘을 바쳐 얻어낸 어떤 결과물을 전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혹은 누군가 아직 마음에 드는 무언가를 줄 수 없다고
해도 크게 상관은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버텨냈고, 버텨내고 있으니까...
적당히 삼겹살을 2인분씩 먹고, 맥주를 한 잔
더 하러 갔다. 허벌은 내게 자신의 단골집이 있는데, 맥주가
무척 싸다고 했다. 아니 뭐... 맥주가 싸봤자 얼마나 싸고, 비싸봤자 얼마나, 아니 비싼 맥주는 한없이 비쌌던 것 같기는 하다. 그와 홍대를 지나 상수까지 걸었다. 고등학생 시절 교복 넥타이 휘날리며
함께 걷던 홍대 거리다. 이제는 영화감독이 된 녀석과 십 수 년 만에 다시 걸으니 비로소 감회가 새로웠다. 그는 어느 가정집 같은 곳으로 나를 안내했는데, 내가 여기 뭐 간판은
어딨어, 하니 요즘 촌스럽게 무슨 간판이야 하고 웃었다. 정말
가정집을 개조한 것 같은 그곳은 빈테이블 없이 손님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카운터 간이의자에 앉았는데, 일회용 커피컵에 맥주가 가득 담겨 나왔다. 한 잔에 1500원이라고했다. 안주도 5천원이
넘지 않았다. 예술인이 단골로 삼을만하네, 하고 웃었다.
그의 아이디는 앞서 이야기했듯 orphan2000 이었다.
orphan, 고아라는 뜻이다. 한동안 힘들었을 것이다,
외로웠을 것이다, 가끔은 죽고 싶었을 것이다. 100년
전에도 비슷한 아이디를 쓴 소설가가 있었다. <무정>을
쓴 이광수다. 그는 고아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홀로 유학했는데, 그의
필명은 항상 고주(孤舟), 외로운 배라는 뜻이었다. 그가 일본에서 겪었을 생활고와, 그에 따른 외로움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그는 그런 과정을 통해 1917년 <매일신보>에 소설
<무정>을 연재할 기회를 얻는다. <매일신보>는 당시 조선이라는 로컬에 존재하는 유일한 신문매체였다. 어째서
이광수가 그런 축복을 받았는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의 결과물을 생산하고 유통시켜 최초의 장편소설가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그즈음 그의 필명, 아이디는 '외로운배'에서 '봄의정원'으로 바뀐다. 춘원(春園), 급작스러운 태세전환이다. 그토록 외로웠던 한 인간이, 버티고 버텨 청춘의 결과물을 내 놓으며 그만큼 행복에 고양되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이광수는 조선 최고의 소설가로 우뚝 서고, 춘원은 그를 대표하는 아이디가 된다. 아마 허벌도 이제 '고아'라는
아이디를 고집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에게 이광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자 무척 재미있어 했다. 100년이라는 세월 이전의 인간과 이렇게 교감할 수 있는 청춘이라는 것도, 좋지
않은가 싶었다.
그래도, 앞으로도 외로울 것이다. 현실은 계속해서
돈으로, 세월로, 그 무엇으로 압박할 것이고 부모님의, 친척들의, 친구들의 눈치를 보는 것도 괴로운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자신이 만든 따뜻한 정원 안으로 모두를 초대할 날을 기다린다.
조금씩 나무를 심고, 돌멩이를 골라내고, 물길을
내면, 그렇게 논문을 쓰고, 좋은 강의를 하고, 혹은 그림 그리고, 시나리오를 쓰면 나의 정원이 완성될 것이다. 나무 하나만 덩그라니 있는 실망스러운 곳일지라도, 괜찮다. 계속해서 그곳을 가꿨다는 자체로 존경할만한 정원사다.
함께 꿈꾸던 친구들은 서른이 넘어 다시 만난 자리에서 보통 자신의 과거를 철없던 행동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여유가 생기면 다시 시작할 '취미'로 ‘꿈’을 격하시킨다. 괜찮다, 살다 보면 그런 것이다. 비난할만한 일도 아니고 오히려 '사회인'이 되었음을 축하해야 한다.
하지만 허벌과 같은, 혹은 제도권에 한 발 걸치고 있지만 여전히 반사회적 인간인 나와 같은
인간들과 대면했을 때, 그것을 철없음으로 여기는 일만은 없었으면 한다.
그것은 서로의 과거에 대한, 그리고 아직도 후진 기어를 넣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과거진행형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우리도 어쨌든 자신이 선택한 도로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다.
허벌과 나는 맥주 두 잔씩과 과일안주 한 접시를 먹고, 다시 작별했다. 영수증에는 만 원이 채 안되는 금액이 찍혀 있었다. 언제 다시 만날지는
기약이 없고, 서로 힘든 삶을 살아갈 것도 안다. 하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고, 다시 버텨낼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이 글을 허벌을 위해 쓴다 그가 계속해서 좋은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내고, 그의 정원에 나를 초대해주길
간절히 바란다. 나 역시 그러할 것이다.
11. 내가 잘못했습니다 - 연구비
2010년 여름, 나는 박사수료생 선배 R에게 갑자기 호출되었다. 나와는 나이도 학기도 꽤나 차이가 나는
그가 나를 왜 찾을까 궁금했는데, 그의 목소리가 몹시 좋지 않았다. 그날은
주말이었고 나는 약속이 있어 서울에 있었다. 오늘 좀 보자는 그의 말에 저녁 약속을 취소하고 터미널에서
버스를 탔다. 내려가는 몇 시간 동안 황당하고, 두렵고, 뭔가 싶은 여러 감정이 뒤섞였다. 무언가 짚이는 게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설마 싶었다.
R은 나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빈 강의실로 나를 데려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교수님이 연구비 안 챙겨준다고 선배에게 찾아가서 내 놓으라고 했다며, 미쳤냐. 내가 걱정했던 일이 맞았다. 불과 3일전 있었던 일이다.
대학원생은 조교 활동을 통해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지만 등록금의 반도 안 되는 금액이다.
나머지 등록금과 기타 생활비 등을 충족해 주는 것이 바로 '연구비'다. 국가나 기관에서 연구 프로젝트 공모를 하면 교수들은 연구소나
개인의 업적을 정리해 연구계획서를 제출한다. 그것이 통과되면 사업비를 받아 연구를 진행하며 박사급 석사급
연구원을 둘 수 있다. 많으면 월 120만원 정도, 적으면 월 60만원 정도의 연구 인건비가 책정된다. 대형 프로젝트를 여러개 수주해 한도까지 인건비를 주며 많은 대학원생을 연구원으로 두는 교수들이 있다. 이런 대학원은 활기가 넘치고 연구성과도 꾸준히 나온다. 하지만 프로젝트에
관심이 없거나 혹은 인연이 없거나, 그러면 그러한 처지에 놓인 대학원생들은 당장 등록금을 내는 것이
막막해진다. 나는 불행히도 후자에 속했다. 2008년 3월 석사 1기가 된 이후,
2014년 10월 박사과정 수료 후 강의 2년차가
되기까지 그 어느 프로젝트에도 연구원으로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내 지도교수는 훌륭한 학자였으나 내가
대학원에 입학한 이후로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거의 진행하지 않았다. 석사 새내기 시절 한학기 선배인 L에게 조심스레 물어 알게 된 것은, 과거에는 대형프로젝트를 많이
수주해서 모든 대학원생들이 혜택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분위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인문학 관련 프로젝트가 상당히 줄었으며, 그나마 특정
학교에 집중되고 있는 것 같다, 고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석사 3기쯤 되었을 때, 조교실장이
나를 불러 물었다. 새로운 프로젝트가 진행될 예정이라 연구원이 두 명 필요한데 들어올 생각이 있느냐는
것이다. 내 지도교수가 아닌 다른 교수가 진행하는 것인데, 그쪽엔
이미 인건비를 다들 받고 있어서 다른 세부전공 대학원생을 연구원으로 등록하겠다고 했다. 생각하고 말고
할 내용이 아니라서 네, 할 수 있어요, 라고 했다. 그는 내게 외부에서 받고 있는 연구비가 있는지 물었다. 나는 당연히
없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어떤 선배들은 타 대학교의 교수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이름을 올려 연구비를
받고 있기도 했다. 그나마도 인맥이 있어야 가능했다. 조교실장은
내게 곧 연락이 갈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정말 기뻐서 그날 맥주 몇 캔을 사와 치킨을 먹으며
자축했다. 다음 학기에는 학자금대출을 받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그게 정말 기뻤다.
하지만 한 주가 지나고, 거의 한 달이 지나도 그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그래 연구비라는게 그렇게 쉽게 받을 수 있는게 아니겠지, 이름을
올리고 이것저것 서류상 작업을 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거야, 괜히 물어봐서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고
기다리자, 그렇게 생각했다. 기다리다 지쳐가던 무렵, 후배 P와 함께 맥주를 한 잔 하다가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가 우연히
나왔다. P는 지난달부터 한 달에 50만원씩 연구비를 받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순간 어라, 싶어서 그를 쳐다보았는데
그는 이런, 실수했다,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애써 웃으며 괜찮으니 누구와 함께 연구비를 받게 되었는가 물었고, 그는
자신의 동기가 1년짜리 연구원으로 함께 등록되었다고 어렵게 말했다. 석사급
연구원이 월 50만원을 받아봐야 1년에 600만원, 등록금의 반을 간신히 상회하는 정도다. 인건비로 책정할 수 있는 최소비용일 것이다. 어떻게 끝났는지 모를
술자리가 끝나고, 다음날 나는 조교실장을 찾아갔다.
몇 년이 지났지만, 그때 조교실장과 나눈 대화내용은 지금도 생생하다. 어제 P에게 들었는데 저번에 말씀하신 프로젝트 있잖아요 P와 D가 받게 된 건가요, 응
그런데 뭐, 제가 걔들보다 선배이고... 제가 받을 순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왜 그렇게 됐는지 싶어서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교수님들께서 알아서 하시는 거지
근데 너 나한테 지금 시비걸러 왔냐,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조교실장과의
대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사과하고 학과사무실 문을 닫고 나왔다. 그게 3일 전에 벌어진 일의 전부였다.
나를 호출한 선배 R은 꽤 긴 시간 동안 꽤나 상기된 얼굴로 나를 나무랐다. 요약하자면, 연구비는 선생님들께서 다 생각하고 책정하시는 건데 니가
뭐라고 거기에 왈가왈부하느냐, 어련히 챙겨주시기 않겠느냐, 넌
대학원에 다니는 이유가 돈을 벌기 위한 것이냐,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너에게 정말 실망이다, 하는 것이었다. 나를 세워놓고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의 주먹에 나는 그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가 나가고 혼자 남았다. 의자에 앉아 속에 응어리 진 한숨을 토해내는데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혼자 한참을 울었다.
집에 돌아가려는데 R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술
한 잔 하자는 것이었다. 난 아무 생각 없이 네 알겠습니다, 했다. 그는 내게 지금처럼 열심히 학과 일을 돕고 공부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내 잔에 계속 소주를 부었고, 나는 그저 묵묵히 네, 네, 알겠습니다, 하며
받아 마셨다. 어느덧 소주를 서너병 비워갈 무렵, 누군가가
들어왔다. 조교실장이었다. R이 부른 것이었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이해가 되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눈물이
다시 나서,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하고 몇 학기 위의 조교실장에게 울며 빌었다. 그렇게 “훈훈하게” 해프닝이
마무리되었다. 나중에 알게되었지만 그 프로젝트에는 학부생 연구원의 자리도 있었는데, 어느 학부생 둘에게 월 40만원씩이 지급되었다고 했다. 나는 쓰게 웃고 말았다.
그후 나는 학자금대출을 꼬박 한도까지 받았다. 등록금 반액 정도는 조교활동비로 충당되었으니, 등록금 반액 + 생활비대출 100만원을
더하면, 그럭저럭 당장 숨만 쉬고 살만은 했다.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느니, 연구원이 몇 명 필요할 것이라느니, 가끔 그런
이야기가 들려왔지만 그때부터는 흔들리지 않고 살았다. 그런 희망고문에 상처받거나, 괜히 연루되어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박사 4기, 햇살이 좋았던 어느날
점심, 나는 몇 년 전 내게 연구원 자리의 제안이 들어온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선생님과 식사를 함께 하고
있었다. 학과사무실에 앉아있는데, 그가 갑자기 들어와 자네
밥이나 같이 하지 내가 밥 때를 놓쳐서 말야, 했다. 마침
나도 밥을 먹지 못한 터라 감사한 일이었다. 교직원식당의 백반을 먹으며 그는 내게 이런저런 것들을 물었다. 조교생활도 거의 끝나가는데 힘들지는 않았는지, 앞으로의 계획은 어찌
되는지, 논문은 몇 편이나 썼는지,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내게 그래도 자네는 연구원으로 계속 등록되어 있었으니 좀 지낼만 했지, 하고 물었다. 나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아닙니다, 힘들긴요, 논문은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하고 말았는데, 연구비에 대한 부분에서는 숨이 막혔다. 몇 년 전의 일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아닙니다 선생님, 저는 연구원으로 등록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했다. 그러자 그는 그럴리가 있느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는데,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학자금대출 이자를 갚고 어떻게든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 물류창고 아르바이트, 중학생 내신 과외, 할 수 있는 것들을 다했다. 그러면서도 학과 대소사의 잡일은 언제나
나와 대학원생들의 담당이었다. 영수증 증빙을 위해 찍은 행사 사진의 한 켠에는 어김없이 내가, 그리고 내 또래의 대학원생들이, 귀퉁이의 어느 부분에서 후줄근한
모습을 하고 있곤 했다. 이런 내 생활을 교수들이 응원하거나 격려하고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서른이 다 된 제자의 이러한 삶에 연민과 동정을, 무엇보다도 내색하지
않는 공감을 마땅히 보낼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내게 돌아온 것은 그래도 자네 살만했지,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이 나를 지탱해 온 어느 한 부분을 사정없이
무너뜨렸다. 그다지, 살만하지 않은, 삶이었습니다... 정말로요.
제 욕심이지만 어느 날 제 손을 잡고 따뜻한 목소리로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선생님도 알아, 그래도 잘했어, 고맙다, 이렇게
한 마디 해주시면... 좋겠어요.
12. 대학원 수업 - 발표, 발표, 그리고 발표.
2008년 3월, 석사 1기 시절, 나는 3개 (9학점)의 대학원 수업을 들었다.
지도교수의 수업, 동일 세부전공 교수의 수업, 지도교수가
추천한 동일 세부전공 외부 교수의 수업이 하나씩이었다. 나는 약간의 설렘과 기대, 두려움을 함께 가지고 1주차 수업에 들어갔다. 수강생은 5명 내외였다. 수업은
교수의 연구실에서 진행되었는데, 교수가 8인용 테이블의 끝단에
앉고, 학기 순에 따라 차례로 앉았다. 나는 당연히 맨 끝이었다. 교수는 우리에게 수업계획서를 한 부씩 나눠주었다. 그에 따르면 1주차 수업은 수업계획 설명 및 강의전반의 이해, 2주차 수업은 수강생의
발표, 3주차 수업은 수강생의 발표, 4주차 수업은 수강생의
발표, 5주차 수업은 수강생의 발표... 6주차도 7주차도... 8주차는 중간고사 기간이라 휴강, 그리고 다시 9주차부터 15주차까지
수강생의 발표, 16주에 이르러 종강이었다. 수업계획서를
몇 번이고 훑어봐도, '수강생의 발표'만 눈에 들어왔다. 교수는 발표 순서를 정하자고 했다. 수강생이 5명이고 13주가 발표 수업이었는데,
1주 당 2명씩 발표를 해야 했으니 1인당 평균 5회 이상의 발표를 맡게 되는 셈이었다. 2주차 발표는... 하고 교수가 우리를 둘러보았는데, 눈을 피해야 하나 아니면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군대에서 이등병이 눈치껏 작업 나가듯 해야 하나 무척 고민스러웠다. 그때 내 바로 윗
학기 선배인 L이 제가 하겠습니다, 했다. 그러자 교수는 웃으며 L이 관심 있는 주제이니 잘 발표해줘, 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저도 하겠습니다, 하니 그래 L이 많이 도와주렴, 했다. 그 이후로 선배들의 눈치를 보며 정신없이 손을 들었다. 나머지 두
개의 수업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한 학기에 10번이 넘는
개인발표를 선물로 받아들었다. 외부 교수는 갓 박사학위를 받은 젊은 교수였는데도 커리큘럼을 수강생 발표로
가득 채웠다. 배운 게 없는데 어떻게 발표를 하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내가 받아든 첫 과제는 지도교수가 연구한 어떤 작품의 한계와 성과에 대해 발표하는 것이었다. 막연히
작품을 읽고, 지도교수의 논문을 읽고, 정리하면 되지 않을까
했는데 뭔가 대학원 수업이 주는 무게감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L에게 묻자 그는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다. 요약하자면 작품이 실린 초기 판본 자료를 구해서 읽고, 지도교수님이
쓰신 논문을 꼼꼼히 읽고, 그간의 연구성과를 함께 정리하고, 너의
견해를 덧붙여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자료를 어떻게 찾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L이 이번 한 번뿐이라며 원본 매체와, 지도 교수의 논문을 내 연구소
자리에 올려 두었고, 주목할 만한 연구자 몇을 메모해 주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학과 사무실 조교와, 연구소 조교와, 과목 조교와, 각종 잡일을 하느라 해가 떠 있는 동안은 과제를 할 시간이 없었다. 교수와
교직원, 정규직들이 퇴근하는 시간이 되면 자료를 읽을 시간이 났다. 대학원생의
과제와 연구는 행정실과 강의실의 불이 모두 꺼진 후에 비로소 시작된다. 3일 동안 거의 밤을 새며 첫
발표를 준비했다. 읽고, 읽고, 필요한 부분을 인용하고 다시 읽고, 생각하고, 썼다. 수업 당일에 함께 발표를 맡은 L과 학과 사무실에서 마주쳤는데, 그는 피곤함이 얼굴에 쉽게 묻어나는
스타일이었다. 다크써클이 정말이지 뺨을 덮을 만큼 내려와 있었다. 내가
웃으니 그는 너도 똑같은데 뭘 웃냐 들어가자,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첫 발표를 했다. 그런데 지도교수는 시작부터 끝까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뭔가 코멘트를 기대했지만 그저 발표문만 들여다 볼 뿐, 그리고 다른
선배들도 모두 뭔가 열심히 쓰고는 있는데 무엇을 하고 있나 싶었다. 그러다가 내가 선생님 이 부분은
제가 의미가 있다 싶어서 따로 인용을 했는데 한 번 봐주시면... 했고, 지도교수는 그 부분을 읽고는 음... 그래 잘 봤네 고생했다, 하고 한 마디 했다. 그렇게 내 첫 발표는 끝이 났다. 이어서 L이 발표했는데, 내가
쓴 것과 그다지 다른 점이 없어 보였지만 지도교수는 깔끔하고 꼼꼼하게 잘 보았다고 칭찬했고 다른 선배들도 칭찬일색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먹먹한 발걸음을 옮기는데 L과 S가 나를 불러세웠다. 그리고 자신들이 보던 내 발표문을 함께 내밀었는데, 여러 코멘트가 적당히 메모되어 있었다. 어떤 연구를 참조했으면 좋았겠다, 문장이 너무 길다, 이런 표현은 선생님이 싫어하신다, 하는 식의 것들이었다. 연구소에 돌아와 차근차근 살펴보니 그들이
고쳐 준 표현이 모두 내가 쓴 것보다 확연히 좋았다. 대학 제도권의
‘문체’라는 것이 있었고 그것을 익히는 게 우선이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석사 1기가 끝나갈 무렵, 나는 10번이 넘는 개인발표를 모두 성실하게 해냈다. 조교 활동과 대학원
수업을 도저히 물리적으로 병행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그래도 어떻게든 한 학기를 마무리 지었다. 외부교수는 10주차쯤에 이르러 내게 XX 씨 발표가 이제는 좀 들을만 하네 좋아요, 라고 했는데 그말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첫 주차에 그렇게 낯설었던 논문의 문체와 형식이, 질감이, 조금이나마 익숙해졌다. 그렇게
대학원생이 되어 갔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L과 몇몇 선배들에게
많이 조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니 누군가 석사 1학기
때 네 문장은 정말 소설 한 편 보는 것 같았어, 해서 모두가 웃었다.
반박할 것 없이 나도 공감하는 바였다.
석사 4기, 박사 4기의 대학원 과정 생활 동안 많은 대학원 수업을 겪었다. 돌이켜
보면, 석사 과정에 할당된 발표는 대부분 기존의 연구사를 요약하거나 간단한 자료를 보고 나름대로 정리하는
것이었고, 박사 과정의 경우는 주로 소논문의 각 챕터를 완성해 학기말에 완성된 한 편의 논문을 제출하는
것이었다. 수강생의 발표로 90% 이상의 수업이 구성되는
것은 어느 수업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기억에 남는 수업과 그렇지 않은 수업이 있다. 좋은 수업을 하는 교수는 수강생의 발표 수준에 맞춰 그에 따른 피드백을 해 준다. 분야의 권위자와 주목할 만한 신진 연구자를 소개해 주고, 학계의
최신 동향을 일러준다. 어느 부분을 수정하면 어느 학회에 투고할 만한 수준의 논문이 될 것이라는 것을
한 눈에 포착해 조언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교수가 더 많다. 그저
대학원생의 발표에 전적으로 의존해 수업을 진행한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의미 없는 발표가 이어진다. 제대로 된 피드백도 없이 그래 고생했어요 이 책은 다 읽어봐야죠, 하는
식으로 수업이 끝난다. 자신이 장악하지 못한 텍스트를 과제로 내고 함께 토론한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대학원생의
시각에 끌려 다니기도 한다. 이건 아래에서 주도하는 학술 세미나이지,
더 이상 학기에 5백만 원씩 지출하며 듣는 대학원 수업이 아니다. 내가 기억하는 최악의 교수는 자신이 쓴 논문과 관련 자료를 들고 와서 수업을 진행했다. 논문을 정말 못 썼던지라 석사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숨이 나왔다. 자신이
비싸게 주고 산 자료라며 바리바리 들고 와 만져보게 했는데, 이게 조선시대에 직접 유통되던 물목이에요, 했다. 그게 도대체 연구자료로서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는 종강할 때까지도
듣지 못했다. 조선시대에 새색시가 시집가며 치마저고리 두 벌 해갔다는 자료 한 줄에 흥분하는 건 좋은데, 그걸 수업 시간에 들고 와서 자랑하는 걸로 끝이라면 개인 박물관을 짓는 게 더 낫지 않은가 싶었다.
대학원 수업을 학부 수업보다 편하게 여기는 교수들이 많다. S는 대학원 수업인데 담배 한
대 태우면서 편하게 합시다, 하기도 했고 M은 지방대까지
출강이 힘들다며 격주로 수업하는 것이 어떤지 묻기도 했다. 이런 것은
‘편함’이 아니라 ‘우스움’이다. 학생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는 것이다. 석사 3기생만 되어도 첫 주차에 오간 몇 마디로 교수에 대한 내부
평가가 끝난다. 그가 해당 분야의 권위자인가, 주목할 만한
신진연구자인가, 혹은 그에 준하는 성과를 곧 낼만큼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우리와의 수업에 진지하게 임할 것인가. 둘 모두라면 진심으로 감사한 일이고, 하나만 충족해도 그런대로 좋은
일이고, 모두 아니라면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다.
내 지도교수를 비롯해, 양질의 수업을 성심껏 해 준 여러 선생님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인문학을 사유하는 방법론과 제도권의 문체에 익숙해 졌고, 무엇보다도
연구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웠다.
13. 학위 논문을 쓰다 (1)
2009년 봄, 나는 석사 3기에
접어들었다. 선배들은 나를 만나면 논문 주제는 정했는지, 무엇에
대해 쓸 것인지 궁금해 했다. 덧붙이자면, 대학원의 석사과정은 4학기까지이고, 그 이후부터는 초과학기다. 4학기에 논문을 제출하지 못하면 '석사 수료' 상태가 되는 것이고, 논문을 제출해 심사에 통과하면 '석사 졸업'이 된다. (박사의
경우도 동일하다.) 석사졸업이 되어야 비로소 박사과정에 진입할 수 있다. 결국 논문이 있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시스템이다. 지도교수와, 그가 선임한 내부 교수 둘, 이렇게 세 사람이 논문을 심사한다. 모두가 기준 이상의 점수를 주면 논문이 인준된다.
석사논문은 보통 5학기에 제출하거나, 빠르면 4학기, 늦으면 7~8학기까지
가져가기도 한다. 논문의 제출 시기는 본인의 의지, 능력, 그러나 무엇보다도 학풍에 따른다. 내가 속한 문과대학에서 A학과의 경우 모든 석사과정생들에게 4학기까지 논문제출을 요구한다. 조금이라도 젊어야 교수인력시장에서 유리하다는 이유다. 하지만 B학과의 경우 6학기 밑으로는 논문을 받아주지 않는다. 거의 모두가 7학기, 늦게는 9학기까지도 석사논문을 쓴다. 쉽게 쓴 논문은 받아주지 않는다, 라는 내용이다. 무엇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다. 전공 특성에 따라 석사논문이 연구자로서의 첫걸음이 되기도, 그저
단계를 밟아가는 형식적 의미가 되기도 한다. 우리 학과의 경우 4학기를
권장하고, 늦어도 6학기까지는 모두 석사논문을 제출하게 했다. 처음에는 6학기 이상을 가져갔다고 들었으나, 최근 여러 학교에서 4학기 석사학위가 쏟아져 나오기에 불이익을 주지
않기 위해 방침을 바꾼 모양새다. 지도교수는 종종 석사논문은 앞으로의 연구를 버텨내기 위한 연습이다,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힘을 쏟지 마라, 그저 하나의 주제를 잘 정리해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것이다, 라고 했다.
나는 대학원에 입학할 때부터 'A'에 대한 것을 주제로 삼겠다고 마음먹었다. 'A'가 내 전공의 여러 분야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아 보이는데, 관련
연구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관련 논문을 찾아 읽으며 틈틈이 공부했다. 그리고 석사 3기 어느날 수업 시간, A에 대해 논문을 쓰겠노라고 연구계획서를 내밀었다. 지도교수와 선배들의
반응이 아직도 기억나는데 A는 무척 중요한 주제다, 하지만
연구자가 거의 없다, 다루기 힘들기 때문이다, 남들이 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평범한 주제를 잡으면 어떻겠느냐, 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주눅이 들어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했는데
수업 후 지도교수의 호출이 있었다. 굳이 하겠다면 한 번 해보라는 것,
자신은 A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생각하는데 어찌 되었든 쉽지 않을 것, 이라고 했다. 한 번 해보겠습니다,
하는데 지도교수의 책상 위에 있는 어떤 자료가 보였다. A에 대한 것이었다. 선생님, 저건... 했더니
아, 누가 새로 나온 자료라고 두고 갔는데 하편이 없어서 그다지 연구자료로서 가치는 없다, 고 했다. 하편을 찾으면 논문을 써도 되겠군요, 그렇지 근데 찾기가 쉽겠니 저걸로 논문을 쓴다면 아직 학계에 다뤄진 바가 없는 자료니까 학계 기여도가 높은
논문이 되기는 하겠지, 네 알겠습니다.
나는 지도교수의 방에서 본 자료 'B'의 하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전국의 도서관을, 몇 나라의 도서관을, A와 관련한 연구의 각주 하나하나를 검색했다. 당연하지만, 딱히 성과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직접 발품을 팔기로 했다. 조교실장에게 자료를 찾기 위해 이틀만 휴가를 내겠다고
했더니, 역시나 불가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그에게
지금까지 내가 조교생활을 성실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근무는 L이
바꿔 주겠다고 했으니 제발 이틀만 시간을 달라, 고 했다. 석사 4기쯤 되어 이 정도의 의뭉스러움은 갖게 됐다. 조교실장은 내게 학위논문과
관련한 것이니 특별히 허락하겠다고 했다. 옆에서 입을 삐죽이던 2학기
위의 여자 선배가 그런 법이 어딨냐고 나를 성토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 술자리에서 전해 들었다. 여담이지만, 함께 술자리에 있던
L이 너는 학위논문 안 썼냐, 적어도 그런 걸로 문제삼지는 말자, 고 했다는데 L에 대한 감사함을 그때처럼 느껴본 일이 없었다.
14. 학위 논문을 쓰다 (2)
석사 3기, 2009년
어느 늦은 봄날에, 나는 이틀간의 휴가를 내고 경기도의 작은 박물관을 찾았다. 석사학위논문에 쓸 자료 ‘B’를 찾기 위함이었다. 아직 발굴된 자료가 아니었고, 그에 따라 학계에서도 그저 이런 책이
있다더라, 하는 언급만 있었다. 하지만 내가 쓰고자 하는
주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자료였고, 만약 책을 발굴해 낸다면 무척 의미 있는 논문을 쓸 수 있을 것이었다.
보통 석사논문에는 누구도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학술적 기여도를 따지는 것은 박사논문부터이고, 그가 연구자의 깜냥을 갖추고 있는지, 요즘 젊은 연구자들의 경향이
어떤지를 참조하는 지표로 이용되는 정도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누구나 잘 쓰고 싶은 욕심이, 학계에서 한 번쯤 문제적인 논문이 되길 바라는 욕망이, 있다. 나 역시 그랬기에, 세상에 없는 책을 찾아보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괜한 시간낭비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 청춘을 바쳐 쓰는 한 편의 승부인데, 작은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박물관의 전경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A와 관련된 자료만을 소장한 개인 박물관이었기에 큰
규모가 아닐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예상보다도 더 작았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소녀의 기도 멜로디가 반쯤
울렸을 때, 중년의 여자가 누구세요, 했다. 누구, 라고 대답해야 할지, 이렇게
초인종으로 대면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기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잠시 정신을 놓았다가 네, 저는 모 대학에서 A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대학원생입니다, 논문을 위해 자료를 찾고 있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했다. 딱히 대답이 없다가, 몇 초의 시간이 흐른 뒤 문이 열렸다. 외부의 누군가에게 나는 언제나 타인의 입을 빌어 ‘잡일하는 아이’로 소개되었고, 이처럼 연구자로서 자기고백을 해보기는 처음이었다. 돌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무척 무거웠다.
중년의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적당한 경계심이 섞인 인사를 보냈다. 내가 인사하자
그녀는 어떻게 왔는가를 정식으로 물었다. 그래서 나는 석사학위논문을 준비 중인 모대학의 대학원생인데
어떤 책을 소장하고 계시면 도움을 좀 받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잠깐 계세요, 하고 ‘관장실’에 들어갔다. 아마 근무자는 그렇게 두 사람인 듯 싶었다. 나는 기다리며 박물관
내부를 천천히 살폈다. 대부분의 공간이 서가로 되어 있고, 내가
평소에 보고 싶어 했던 여러 책들이 가득 꼽혀있었다.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복사된 것만도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그런 책들이었다. 원본보다는
복사본이 많았지만, 복사본조차도 흔하지 않은 자료들이어서 나는 그저 그 자체로 무척 행복했다. 그러다가 그녀, J선생이 나에게 들어오세요, 했다. 나는 비로소 박물관장과 대면할 수 있었다.
대단히 나이가 많은, 팔순도 넘었을 거야, 싶은
노인이 힘겹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꽤나 큰 체구였고, 백발과
뿔테안경이, 그리고 정갈하게 갖추어 입은 양복이 인상적이었다. 그
뒤로는 3단짜리 책장이 하나 있었는데, 언뜻 봐도 밖의 자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치 있는 것들이었다. 특히, 오래된
책에서 나는 그 매캐한 냄새, 그것이 자욱하게 방을 채우고 있었다. 그래, 어떤 책이 보고 싶어서 왔다고 했나, 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지막하고 느리지만, 힘이 실려 있었다. 나는 정말이지 90도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는 A를 연구하는 대학원생인데, 그 관련 자료인 B를 찾고자 한다,
여기까지는 J선생에게 말한 바와 같았다. 하지만
한마디를 덧붙였는데, A는 아직 제가 공부하는 분야에서 다루어진 바가 없지만 저는 그것이 대단히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만약 자료를 찾는 데 도움을 주시면 꼭 A연구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대답을 기다리는데, 그가 웃었다. 소리 내어 웃은
것은 아닌데 분명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고 나는 기억하고 있다.
C관장은 내게 쇼파에 앉을 것을 권하며 먼저 마주 앉았다. 그리고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이북에서 내려올 때 이야기네, 그때는 나도 젊었고, 자네도 알만한 K선생과 동행했지,
함께 내려와서 자리를 잡았어.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몰래 휴대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도 그럴 것이 도저히 혼자 듣고 있을 수 없을 만큼, 사료적
가치가 있는 구술이었다. 내가 어릴 때, 아침에 눈을 뜨면
마당에 <매일신보>가 있었고, 나는 4면의 소설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지, 그때는 눈도 참 좋았어. 아쉽게도,
급히 누른 녹음버튼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그가 30여
분에 걸쳐 한 구술사는 그저 내 추억으로 남고 말았다. 그리고 끝내 그는,
그 자료는 아마 이 뒤 책장에 있을 것이네, 누가 찾아왔다고 보여주고 하지는 않는데 자네가
마음에 들어,
했다.
아, 그러니까, 아직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연구된
바가 없는 그 책을, 유일하게 소장하고 계신 것이고, 내게
열람을 허락하신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고양된 여러 감정들, 나는 이제 잡일하는 아이가 아니라, 연구자야, 이 책으로 좋은 논문을 써서 모두를 놀라게 해줄 거야, 하는 것들을
꾹꾹 눌러 담으며, C관장이 일어나 녹슨 열쇠를 들고 개인 서가로 다가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오래된 책 냄새 때문인지 코끝이 시큰거렸다.
C관장은 서가의 1단을, 2단을, 3단을,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살폈다. 내가 초인종을 누른 지도 어느새 2시간이 지나 있었다. 무엇을 하나, 하고 창문너머 곁눈질을 하던 J선생이 들어오며 관장님 식사하셔야죠, 했다. 그런데 C관장은 답이 없다가, 책이
없어졌어, 라고 했다. 얼굴이 무척 상기되어 있었다. 아마, 짧은 시간 내에 내 얼굴도 덩달아 꽤나 상기되었을 것이다. J선생이 내게, 선생님 잠시만요,
해서 관장실 밖으로 함께 나왔다. 그녀는 우선 C관장이
자료 열람을 허락했다는 데 놀라며, 자료 거의 안 보여주시는데... 했다. 그리고 책이 없어진 것은 정말 큰일이라고 했는데, 모아 둔 자료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만약 찾지 못하면 대단히 충격을 받으실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중풍이 심해지실지 모른다는
말을 덧붙여서, 나는 무척이나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괜히
자료를 찾겠다고 평온한 박물관을 들쑤신 것이 아닌가, 싶었다. J선생은
다시 관장님 식사하셔야죠, 했는데 여전히 답이 없자 나에게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내가 아니 그래도 관장님은 어떻게... 하자, 이럴 땐 아무 말도 안 들으시니 일단 우리라도 밥을 먹고 와서 찾아보자, 고
했다. 그래서 나는 J선생과 근처 식당에서 백반을 먹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녀도 A연구자였는데, 다른 전공인 내가 왜 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지
궁금해 했다. 내가 이유를 말하자, 관장님이 기분 좋은 이유가
있었네, 하고 자료를 꼭 찾아보자고 했다. 첫 인상은 B사감과 러브레터를 떠오르게 할 만큼 고압적인 데가 있었지만, 참
좋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밥을 먹고 돌아왔다. C관장은 그때까지 개인서가를 꼼꼼히 뒤지고 있었다. J선생이 우리는 지하실을 찾아볼게요, 하고 나와 함께 내려갔다. 지하실에도 책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우리 셋은 오후 5시까지 박물관을 정말이지 샅샅이 뒤졌는데, 성과는 없었다. 굳이 의미를 찾자면, 이 박물관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둘과 어찌되었든 깊은 인연이 되었다는 것, 이겠다.
다음날 오전 9시, 나는 근처 찜질방에서 잠을
자고 다시 박물관에 갔다. 정문 앞에서 조금 기다리자 J선생이 C관장을 모시고 출근했고, 함께 책을 찾기 시작했다. C관장의 안색이 어제보다 좋지 않아서, 이제는 내 논문은 뒷전이고
그저 이 책을 찾아야겠다는 일념이었다. 둘에게 정말이지 미안해서 간절하게 서가를 탐색했다. 얼마나 책과 책 사이를 돌아다녔을까, 아무런 제목이 없는 작은 단행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두꺼운 자료들 사이에서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듯 했다. 어, 이거 왠지... 하고
조심스레 빼냈는데, 아, 찾았다, 찾았어요,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J선생이 뛰어 왔고, 이게 맞나 하며 C관장에게 책을 들고 갔다. C관장은 살펴보더니 음, 이게 맞네... 하고 웃었다. J선생도
웃고, 나도 웃었다. 어느새 12시가 다 되어 있었는데 C관장이 내게 물었다.
자네, 혹시 삼계탕 좋아하나.
C관장을 모시고 식당으로 가는데 J선생은 어머, 정말
선생님이 사시는 건가요, 웬일이에요 어머, 했고 C관장은 다시 첫 날의 안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에어컨을 틀어
드리려다 실수로 라디오 버튼을 눌렀는데 C관장이 내게 아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방송인데 자네가 이걸 듣나, 했다. 사실 지역이
바뀌며 라디오가 제멋대로 전파를 잡아 평소에 듣지 않는 방송이 나온 것이지만, 굳이 아니라고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예 종종 듣습니다, 하고 웃었다. 그렇게, C관장이 즐겨듣는 라디오 방송이 울려 퍼지며, 모두가 저마다 행복했다. 백미러로 보니 C관장은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5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그날의 대화 하나하나가, 분위기가,
공기의 질감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C관장이 책의 열람뿐 아니라 복사까지 허락해 주어 나는 복사본을 들고 학교로 돌아왔다. 지도교수는
의미있는 석사학위논문이 가능할 테니 열심히 쓰라, 고 격려했고, 선배들은
그래도 계속 공부할 녀석이네 잘했다, 고 한마디씩 던지고 갔다. 이제
논문만 쓰면 되었다.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15. 학위 논문을 쓰다 (3)
석사 3기 과정이 끝나가고 막 여름방학에 접어들던 2009년 어느 초여름, 연구소에 앉아 자료의 첫 페이지를 조심스레
넘기던 때의 설렘과 뿌듯함을, 아직도 그 질감 그대로 기억한다. 내가 C관장의 후의를 입어 열람하게 된 자료 B는 그간 발굴되지 않은 것이었기에
연구자 웹DB에도 그 디렉토리가 없었다. 내가 쓰는 석사학위논문이
본격적인 첫 연구인 셈이어서 나는 무척 고무되어 있었다. 적어도 동시대에서 최초로 이 자료를 보는, ‘연구자’인 것이다. 단어, 문장, 페이지, 삽화, 광고, 여백, 그 모든
것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하게 다가왔다. 나보다 수 세기를 먼저 살았던 그 시기의 필자들이 내게 우리
잘 부탁해, 하고 손짓하는 듯했다. 비로소 ‘연구’라는 것의 무게가 실감이 났다. 내가 1차 자료를 어떻게 읽고, 분석하고, 결론짓는가에 따라, 이 자료의 연구 방향이 결정되는 것이다. 고작 석사학위논문일 뿐이지만 어떤 자료의 선행연구를 하겠다고 나선 만큼 내가 가진 포지션에 걸맞지 않은 무게감을
잔뜩, 짊어졌던 것 같다.
자료를 가지고 돌아온 그날부터, 나는 늘 그 책과 함께 했다. 보존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은 데다가 아주 작은 활자로 되어 있어 눈이 아팠다. 돋보기를 들고 뭉그러진 한자를 보며 이게 무슨 글자인지 한참을 고민하기도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읽어 나갔다. 한문학을 공부하는 후배 C가 큰 도움을 주었다. 도저히 알 수 없어 들고 찾아가면 그는 그
형태만을 보고도 음을 척척 짚어냈다. 나는 여전히 3과목의
수업을 듣고 학과 조교와 연구소 조교 일을 병행했지만, 억울해서라도 하루에 몇 페이지씩을 반드시 읽었다. 연구소에서 밤을 새거나 잠을 자기도 했는데 책상 두 개를 붙여 놓으면 그런대로 올라가 잠을 잘만 했다. 그러다가 어느 페이지에 어떤 글이 있는지 외울 만큼 책과 친해졌을 무렵, 이만하면
논문을 써도 되겠지 싶었다. 그래서 목차를 구성해 지도교수를 찾아갔다.
학위 논문의 지도와 심사는 전적으로 지도교수의 몫이다. 주제선정부터 목차와 챕터 구성, 논문의 방향에 이르기까지 그의 허락이 필요하다. 지도교수는 목차를
보고는 연구 주제와 대상이 명확하고 뭘 해야 할지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열심히 써서 다음 학기에 다시 보자, 라고
했다. 방학 동안 적어도 본론 두 챕터를 완성시켜야 석사 4기에
본심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많은 지도를 부탁드립니다, 하고 나왔다.
좋은 자료를 구했고, 목차가 완성 되었고, 지도교수의
허락도 받았다. 논문을 쓸 모든 준비가 갖추어진 셈이고, 이제
쓰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쓴다’라는 일이 너무나 어려웠다. 나는 그때까지 글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아본
일이 거의 없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습작을 했고 내 글에 대한 자부심이 언제나 있었다. 그런데 논문을 쓴다는 것은 전혀 다른 작업이었다. 이 반복되는 표현들을
어찌해야 할지, 어떠한 수사를 사용해야 할지, 과거시제를
쓸지 현제시제를 쓸지, 이 단어가 여기에 들어가도 맞을지, 글쓰기의
기초부터가 흔들렸다. 문단은 커녕 문장 하나를 쓰는 일도 힘들었고, 이
단어가 내가 알던 단어인가, 싶을 만큼 단어 하나를 선택하는 것마저 두려웠다.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답답해서 옥상으로 올라가면 나처럼
멍한 얼굴로 하늘을 보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하는 문과대학
대학원생들이 항상 몇 있었다. 한 학기 선배인 L도 자주
그 무리에 끼어 있었다. 그와는 꽤 오랜 시간 논문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는데, 둘다 입으로는 논문을 참 쉽게 잘도 썼다. 어떻게 구성할지, 새로 찾은 자료에는 어떤 의미있는 내용들이 있는지, 술술 나왔다. 하지만 모니터 앞에만 앉으면 손가락이 굳었다.
간신히 밤을 새서 A4 용지 반 쪽 정도를 쓰면, 다음날
열어 보고 하 뭐 이런 쓰레기를 글이라고 썼지, 하며 모두 지워 버렸다. 그리고 다시 밤을 새서 한쪽을 쓰고 다음날 모두 버리는, 그런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반복됐다. 말할 수 없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래도
그렇게 꾸역꾸역 글을 써 나가니 석사 4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간신히 한 챕터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챕터를 쓰는 동안, 논문의 문어체적 수사가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맴돌기만 하던 이야기들을 정갈하게 텍스트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서툴렀고, 다음날 다시 어제의 글들을 휴지통에 넣기는 했으나, 이제는 버리는 글의 양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표현이 자유로워지니 이제는 논문의 전개가 발목을 잡았다. 아무리 자료를 읽어도 내가 풀어낼
수 있는 수준에는 한계가 있었다. 고작 석사과정 3기의 경험으로는
연구 주제와 시기에 대해 도저히 통찰해 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여러 책들을 내 앉은 키 높이만큼 쌓아
두고 키보드에 손을 얹고 있는데, 나아갈 방향이 보이지 않는다. 새벽이
밝아 오고 어느덧 9시가 되어 학부조교가 출근하며 아니 형님 또 밤새셨어요, 한다. 나는 대답할 기운조차 없다.
어느날은 눈물이 주룩, 떨어져서 한참을 엎드려 있기도 했다. 심지어는 내가 이 자료를 얻게 된 것이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다, 싶었다. 좀더 좋은 연구자에게 이 자료가 들어갔다면 대단히 의미있는 논문을 썼을 것이다, 나는 왜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들고 스스로 무너지고 있나, 해서
서글퍼졌다.
예비심사를 앞두고 지도교수를 찾아가 선생님 논문이 많이 힘듭니다, 했다. 석사학위논문의 인준은 10월의 예비심사와 12월의 본심사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지도교수는 지금처럼 쓰면 예비심사는
무리 없이 통과하겠고 본심사도 크게 문제는 없겠구나, 하며 어떤 해답을 제시해 주었다. 답은 자료에 있을 테니 자료를 더 읽어라, 정말 그렇게 한 마디
했다. 그래서 나는 모니터를 끄고 ‘읽기’를 시작했다. 내 머리로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그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러다보니
무언가 조금씩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다지 잘난 것 없는 내 머리로만 논문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기대야 할 곳은 내 머리가 아닌 ‘그들’의 목소리였다. 첫날 내게 잘 부탁해, 하고 웃었던 그들이 잘 돌아왔어, 하며 다시 나를 반겼다. 그때부터 조금은 보람 있게 밤을 새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스스로 즐겁고 행복했다.
밤을 새다 보면 새벽 5시쯤, 더 이상 한 단어조차
더 이상 읽을 수도 쓸 수도 없게 되는 어느 순간이 온다. 정신적 한계가 오는 것이다. 그런데 한 시간 정도를 버텨내면 다시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한 숨을 푹 잔 것처럼 다시 반나절을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이틀 밤을 새고 집에 들어가면
온 몸이 후줄근했다. 무엇보다도 배가 고파서 나는 라면 두 개를 끓여 찬밥을 두 주걱쯤 넣어 참치와
김치와 계란과 섞어서 정신없이 먹고, 침대에 쓰러져서 잤다. 몸이
축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논문이 조금씩 완성되어 가는 것이 그저 좋았다.
한 번은 논문의 핵심부분에서 서술이 막혀 3일 정도 진도가 나가지 못했다. ‘그들’이 왜 그랬을까, 하는
것을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논문의 방향을 모두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목이
타들어갔다. 어느날도 자료를 보다가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꿈에 필자가 나와서 뭐라고 한 마디하고 사라졌다. 나는 비몽사몽 필사적으로 뭔가를 메모하고 다시 잤는데, 일어나서
보니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걔들도 힘들었대, 하고 적혀 있었다. 이게
뭐야, 하고 잠에서 깨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그것이 그런대로 답이 되어 다시 논문을 쓸 수 있었다. 그만큼 간절하게
살아갔다.
예심은 지도교수의 연구실에서 진행되었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니 지도교수를 포함한 세 교수가
쇼파에 앉아 있었다. 지도교수를 제외한 다른 교수들이 이 정도면 괜찮죠, 하니 지도교수도 네 괜찮은 논문입니다, 했다. 예심은 그걸로 끝이었다. 함께 예심을 본 동기들은 30분씩 시간이 걸리기도 했는데, 나만 그렇게 일찍 끝이 났다. 예심을 본 동기 몇과 함께 학교 앞에서 소주 한 잔을 하며 나는 나대로 이게 무슨 심사야, 하고 불만이 있었고 30분이 걸린 동기는 동기대로 논문을 이번 학기에
쓰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하고 불만이 있었다. 나는 다시
논문을 썼다. 12월의 본심은 예심의 데자뷰와도 같았다. 대신
지도교수는 나를 따로 불러 여기저기 포스트잇을 붙인 본심원고를 주었는데, 문장 표현 같은 것들의 지적이
주가 되어 50여 군데쯤 되었다. 그것들을 꼼꼼히 고쳐 최종제본을
맡겼다. 내 동기들도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좋은 논문을 완성했다.
2010년 봄, 나는 제본된 논문을 들고 서울 본가를 찾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께 한 권씩, 내 이름으로 된 석사학위논문을 드리며
이거 2천만원짜리 책이에요 고맙습니다, 했다. 대학원 학비와 생활비는 조교활동과 아르바이트와 학자금대출을 더해 내가 부담했다지만, 부모님이 나를 믿어주지 않았다면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다시 집을 찾았을 때 아버지 서가의 가장 좋은 자리에 내 논문이 꼽혀 있었다. 내가 그걸 보고 있자
어머니는 아버지가 저거 며칠 동안 정말 열심히 읽으시더라, 하셨다. 나는
어려워서 읽다 말았어, 하지 않으셨더라면 감동이 좀더 오래 갔을 것이다.
논문을 쓰는 동안 C관장을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다. 그것이
못내 죄송해 논문을 드리며 삼계탕을 꼭 대접하고 싶었다. 박물관에 전화를 걸자 여보세요, 하는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저
XX입니다, 하자 J선생은 아니 그동안 왜 이리
연락이 없었어요 잘 지냈나요, 했다. 학위논문이 통과됐으니
다음주에 찾아가 논문을 직접 드리려 한다, 고 하자 J선생은
C관장님이... 돌아가셨어요, 했다.
나도 모르게 네? 하고 크게 반문했다. J선생은
말을 이었다. 그래도 XX 선생이 찾아올 때만 해도 기분이
좋으셔서 박물관도 자주 나오시고 했는데... 나는 그저 죄송합니다, 하는
말만 연신 했다. 전화를 끊고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노환으로 불과 한 달 전쯤 돌아가셨다는 기사가 몇
건 나왔다. 논문을 들고 박물관을 다시 찾았지만 J선생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보고 싶은 자료가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요, 라고
했지만 도저히 다시 찾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논문을 쓸 때마다 C관장의
연구를 인용하려 노력하는 것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바쁘다는 핑계로 한 번 찾아뵙지 못하고, 가시는 길에 인사조차 드리지 못한 것이 언제나
아프고 죄송스럽다.
논문을 쓴 과정을 무척 거창하게 서술했지만, 지금 내게 석사학위논문은 ‘부끄러움’ 그 자체다. 아마
내 논문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그다지 잘쓴 논문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할런지도 모른다. 그 당시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하고 썼지만, 지금 다시
보면 ‘선행연구자’로서의 몫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뿌듯함은 잠시이고 부끄러움, 아쉬움, 안타까움, 이런 감정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A와 관련한 연구에 3번 정도 내 석사학위논문이 피인용된 것을 보기는
했으나 그것이 확인했을 내 한계에 그저 민망하다. 하지만 연구소에서 밤새 시공간을 넘나들며 '그들'과 대화하던 석사 시절의 경험은 너무도 행복하고 소중한 것이고, 지금도 나를 버티게 해주는 가장 큰 힘이다. 내가 대학이라는 제도권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도 A를
주제로 몇 편의 논문을 쓰고 있다. 누구나 정규직을 원하고, 교수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연구자가 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때까지는 계속... 대학에 있을 것이다.
16. 내가 만난 학부생, 학부조교들 - 나는 비겁한 인간이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학부생 조교들과 함께 일했다. 학기마다 학과사무실에 2명, 연구소에 1명이
배정되었으니 내가 대학원생 조교로 근무했던 2008년부터 2012년까지를
헤아려 보면 대략 30여 명에 이른다. 재주가 많아서 사무실에서
비트박스를 선보이던 09학번 D, 남자친구가 과사무실에 쳐들어와
장미꽃 100송이를 바치게 만들었던 07학번 J, 내가 우울해 보였는지 오후 2시에 술 한 잔 하러가요 형님... 했던 04학번 S (그날은
나도 에라 될 대로 돼라 하고 연구소 문을 닫고 2시부터 술을 먹으러 갔다. 3년 간 단 한 번의 일탈이었다), 끊임없이 책을 나르던 중 이게
똥이지 책인가요... 했다가 결국 박사과정 선배에게 욕을 들어 먹었던
03학번 C, 아프리카 사람에게 꼭 시집가겠다던 10학번 K, 그렇게 저마다 사연도 많고 개성 넘치는 아이들이었다.
학부생 조교가 하는 일은 사무실과 연구소의 업무 보조, 예컨대 수업 자료를 복사하고,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고장난 컴퓨터를 고치고, 메뉴얼에 따라 청소하고... 말하자면 온갖 ‘잡일’이었다. 좀더 풀어
말하면 대학원 조교가 잡일을 ‘담당’하고 학부생은 잡일을 ‘보조’하는 모양새다. 그렇게
한 학기 동안 9시부터 5시까지 모든 공강 시간에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80만원의 근로 장학금을 받는다. 선발권은 학과장이
가지고 있고, 그 기준은 그때그때 다르다. A교수는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우선 뽑았고, B교수는 자신이 좋게 본 학생을 아예 내정했고, C교수는 조교실장에게 선발을 위임하기도 했다. 연구소 조교의 경우는
연구소장이 내게 마음 맞는 학부생이 있으면 추천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학부생 조교로 선발된 학생들은
모두 진심으로 기뻐했고, 자신들이 선택 받은 것에 대해 무척 감사해 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성실하게 일해 주었다.
2008년 봄, 석사 1기 시절, 나는 학과 사무실의 대학원생 막내였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의무적으로 학과 사무실이나 연구소에서 근무했다. 그런데 학부생 조교들 역시 공강 시간을 제외하고는 사무실에 몸이 매여 있었다.
학부생 조교들은 평균 15∼20학점을 들었으니 일주일에
20시간 이상 근무했다. 그러면 한 학기가 16주인데
중간고사 기말고사 기간에는 근무가 없으니 대략 13주, 도합 260시간 넘게 일하고 80만원을 받아가게 된다. 지금도 이러한 시스템이니 최저시급 5210원에는 한참 못 미치는
액수다. 나는 조교실장에게 조심스레 학부조교들이 일하는 시간을 모두 합해 보면 최저시급도 못 받는 것
같네요, 했다. 그는 알아,
그런데 우리는 뭐 받고 일하냐,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고 당연히 또 그렇게 하는 거지, 하고 답했다. 그의 말을 요약해 보면 대학원생도 같은 처치이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고, 그러니까 당연하다, 라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에 동의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는 구조의 밑바닥에 있는 ‘개인’이었고, 조직의
관행과 싸울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어서 그저 아 그렇네요, 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지, 하는
조교실장 역시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우리 학과는 형편이 나았다. 계절학기까지 알뜰하게 출근시키는 학과도 적지 않다고 해서, 나는
욕이 튀어 나왔다.
나는 학부 시절 친하게 지내던 04학번 S를
연구소 조교로 추천했다. 그리고 그를 만나기 전에 학생복지처에 들러 학부생 조교 근로규정집 같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교직원은 아 그거 인터넷 게시판에 있으니 다운 받으세요, 했다. 대략 3∼4쪽
되었던 것 같은데, 여러 가지 규정들이 세밀하게 나와 있었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학부조교의 한학기 근무 시간은 N시간으로 정한다, 라고
명시되어 있는 부분이었다. 모든 직장에 근로규칙이 있는 것처럼 대학에도 근로장학생규칙이 있었다. 대략 계산해 보니 우리 관행대로 그들을 부리면 중간고사 이전에 근로 시간을 모두 채워 퇴직시켜야 했다. 무척 화가 났다. 이렇게 근로규정집이 있고 최대 근로시간이 명시되어
있는데, 그 누구도 이것을 찾아보려 하지 않고 지키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명백한 노동 착취이다. 대학원생 조교들 역시 같은 처지에 놓여 있지만,
학부생 조교들과의 관계에서는 ‘중간관리자’의
입장이다. 적어도 그들이라도 지켜주는 것이 옳다.
S에게 근로규정집을 보여주고 우리 연구소의 근로방침을 함께 말해 주었다. 나는 근로규정에
따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공강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근무를 서야 한다는 관행을 이겨낼 수가 없다, 그래서
너에게 최저시급 이하의 근무를 강요할 수밖에 없다, 싫다면 그만두어라,
미안하다, 했다. S는 공강 시간에 딱히 갈
데도 없고 연구소에서 공부하며 근무를 서겠다고 쾌활하게 말했다. 나는 그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고, 글을 쓰는 지금 2014년에 와서 돌이켜 보면 몹시
부끄럽다. 잘못된 것을 알고도 그 어떤 저항도 하지 못했고, 나를
믿고 함께 일하겠다고 온 학부생 조교에게 관행을 강요했다. 조금 한가한 날 오늘은 일찍 퇴근해,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결국 나도 비겁한 인간인
것이다.
웃으며 들어왔던 S는 웃으며 나가지 못했다. 이렇게
일이 고될 줄 몰랐다고 했다. 여러 일들이 있었는데, 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를 전국 대학으로 발송할 때는 S와 함께 밤늦게까지 야근을 했다. 책이 도착하면 주차장에 내려가서 7층 연구소까지 들고 나르고, 학교 마크가 있는 봉투에 이중 포장을 하고, 라벨지를 하나하나 붙이고, 시내 우체국에 가서 전국으로 발송했다. 남은 책을 담아둘 박스를
항상 구해야 했는데, 우리는 함께 편의점, 카페, 학생식당 등을 찾아다녔다. 박스를 질질 끌고 다니는 것을 본 후배들이
오빠 박스 주우러 다니세요, 하니 S는 연구소에 들어와 저
이제 학교 어떻게 다녀요 좋아하는 애였는데 진짜 책임 질 거예요, 하고 반쯤 진심으로 화를 내기도 했다. 그렇게 야근을 하고 나면 나는 그와 함께 치맥이나 삼겹살에 소주를 한 잔 했다. S는 함께 술을 마시며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원에 진학하는 일은 없을 것, 이라고
항상 말했다. 조교 근무를 겪은 학부생들이 자연스레 대학원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꿈꾸어야 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처우 개선이 우선될 때 가능할 것이다.
학과 사무실과 연구소가 이렇게 학부생 조교를 ‘착취’하는
동안 학교의 각 대학 본부 사무실 역시 그에 뒤지지 않았다. 어느 부처를 가도 먼저 인사하는 것은 학부생
조교들이다. 이걸 이 아이들이 왜 하고 있지, 싶은 일도
한다. 도서관의 서가마다 책을 나르고 정리하는 역할 역시 학부생들이 도맡는다. 사무실, 연구소, 기숙사, 대학의 어디를 가든 학부생 근로 장학생들이 있다. 결국 값싼 학부생의
노동력으로, 대학 사무의 최전선이 지탱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대학원생의 몸값은 환산하기 민망할 만큼 더욱 저렴하다.
대학은 기업보다 한 발 앞서, 비정규직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구축해 냈다. 더 이상 정규직 교직원을 선발하지 않는다. 조금 젊은 얼굴이 보인다
싶으면, 예외 없이 2년 계약 비정규직 이다. 작년에 안면을 튼 동갑내기 교직원이 있어서 함께 밥을 먹었는데, 그는
내게 여기 20대 30대 교직원 중엔 아무도 정규직이 없더라고요, 했다. 입사한 지 몇 주 되지도 않았는데, 그는 벌써 이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교수 선발에 있어서도 정년트랙, 비정년트랙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일컫는 대학가의
신조어다. 정년을 채운 교수들이 퇴임하면 기다렸다는 듯 그 자리를 지우고 비정년트랙 강의전담교수를 채워넣는다. 그리고 ‘해임’한다. 대학은 나름대로의 신자유주의적 생태계를 구축해 가고 있는 것이다. 학부생과
대학원생, 심지어는 졸업생의 값싼 노동으로 행정의 최전선을 채운다.
4대보험이나 퇴직금 명목조차 없는 4개월짜리 계약서를 받아든 시간강사들이, 2년짜리 비정년트랙교수들이 강의의 대부분을 책임진다.
그리고 그 물결 안에서 나는, 함께 일한 학부생 조교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나는 피해자인 동시에 방관하는 가해자였고, 학부조교들은 온전히 피해자의
몫을 떠안았다. 수료 후 시간강사가 된 지금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용기를 내지 못한다. 나는... 비겁한 인간이다.
17. 학자금 대출, 미안해 꾸마우더리.
지금 돌이켜 보아도, 한국장학재단의 학자금 대출 제도가 없었더라면
나는 공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입하고 클릭 몇 번만 하면 학자금 전액을 지원해 주는 감사한 제도다. 추가로 백만 원의 생활비 대출까지 받을 수 있어서, 그것 역시 늘
함께 신청했다. 내가 대출받을 때의 이율은 6% 정도 되었다.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대출이면 3% 정도의 고정이율이 적당하지 않은가, 싶지만 그때는 그게 비싼지 싼지 고민도 없이 그저 원리금, 원금, 균등납입, 어쩌고 하는 용어들을 휙휙 넘겨 버리며 대출 버튼을 눌렀다.
한 학기 등록금이 5백 정도 되었으니 생활비 대출 1백을
더하면 6백, 1년에 1천2백씩 고스란히 빚으로 쌓였다. 그렇게 석사 과정 4기, 박사 과정 4기를
수료하고 내 나이 스물아홉, 학자금 대출 원금만 5천만 원에
이르렀다. 한 달에 몇 천 원씩 나가던 이자가 곧 몇 만 원이 되고,
십 몇 만 원이 되고, 어느새 이십 몇 만 원까지 늘었다.
한 번에 그런 금액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한 달 내내 어느 날은 만 원, 어느 날은 오천
원, 그리고 갑자기 오만 원, 이렇게 통장에서 돈이 빠져
나갔다. 지금은 얼마 안되는 월급이 들어오면 그간 밀렸던 학자금 대출 이자가 한 번에 상환되는데, 출금을 알리는 뱅킹 알림이 휴대폰 화면을 가득 채우곤 한다.
학자금 대출 이자 상환이 자주 밀리자 언제부턴가 문자가 아닌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상환을
독촉하는 것도 아니고 3일 후에 이자 납입일이니까 준비해 두세요, 하는
식이었다. 박사과정이 거의 끝나가던 어느 늦은 가을날로 기억하는데,
3일 후에 이자 납입일이니 꼭 신경 좀 써주세요, 하고 전화가 왔기에 네 알겠습니다 자주
연체가 되어 죄송합니다 그런데 얼마를 준비하면 되죠, 하고 물었더니
네, 1600원이에요, 하고 답했다.
나는 혹시 금액을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서 두 번을 재차 확인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네 1600원이 맞습니다 고객님, 했다. 나는 1600원 때문에 이렇게 전화까지 하시는 건 좀... 너무 하잖아요... 고작 이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연구동 옥상에 올라가서 한참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너무도
초라한 인생이다, 싶었다. 메뉴얼에 따라 일괄적으로 전화하며
벌어진 일이겠지만, 그래서 전화주신 분께 대한 원망은 전혀 없었지만,
그저 조금 서글펐다. 서른이 넘은 한 인간이 1600원의
이자 때문에 독촉전화를 받는 것은 아무래도...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인생인지 의심스러워서, 사실 ‘좀 많이’ 서글펐다.
연구실에 돌아온 나는 굿네이버스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나는 석사과정 수료 후, 2년 넘게 네팔의 ‘꾸마우더리’라는
어린 아이를 정기후원해 왔다. 치킨 한 마리 덜 먹으면 되지, 하는
생각이었다. 대출 이자가 밀려도 후원금만큼은 제 때 내기 위해 노력했다. 2년 동안 몇 번이고 내게는 사치스러운 자기 위안이다 싶어서 후원 중단 버튼을 클릭할 뻔 했지만, 어떻게든 참았다. 연구실 책상 한켠에 붙여둔 아이의 사진과 언젠가
온 그림 편지를 보면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학자금대출 독촉전화가 걸려왔던 2011년 어느 날,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고 몇 번의 클릭을
하는 것으로 2년간 이어왔던 일방적인 인연을 역시나 일방적으로 단절해 버렸다. 어떤 이유로 후원하시나요, 라는 질문에 아 뭐라고 적지, 하고 정말이지 2시간을 고민하다가 저를 위해서 후원합니다, 라고 적었던 기억인데, 어떤 이유로 후원을 중단하시나요, 하는 질문에 그저 미안해요, 하고 짧게 남기고 창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아이의 사진과 편지를 떼어 책상 깊숙한 곳 어딘가에 넣었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후원을 받았다면 아이는 좀더 자랄 때까지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감당하지
못할 내 욕심 때문에 지구 반대편 어느 아이가... 아팠다. 그날은
혼자 술을 많이도 마셨다. 많이 미안하다, 꾸마우더리.
18. 수료, 그리고 대학원생의 몸.
2010년 봄, 나는 석사 학위 논문을 인준 받고, 박사 과정에 진입했다. 4학기, 총 2년간의 분투였다. 내 모습은 대학원에 발을 디뎠던 2008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거울을 보면 그간 무슨 일이 있었지, 싶을 만큼 낯선 인간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앳된
외모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우선 탈모, 학위 논문을 쓰며 머리를 쥐어뜯었더니 눈에 띄게 머리숱이 줄어들었다.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으면 머리카락을 움켜 뜯는 오랜 버릇이 있었는데, 밤새
논문을 쓰고 일어나면 책상 여기저기에 머리카락이 수북했다. 지금도 내가 많이 참조한 논문이나 책들의
여러 페이지에서 내 머리카락이 책갈피를 대신하고 있다. 머리숱이 많은 편이어서 아직 그닥 티가 나지는
않지만 박사 학위 논문을 쓸 때쯤엔 어떤 모습이 될지, 두렵다. 연구실을
청소하다 보면 논문을 쓰는 사람들의 자리에서는 예외 없이 쓰레받기를 가득 채울 만큼의 머리카락이 나온다. 학회에
가보면 삼십대 젊은 연구자들 중 대머리인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처음에 나는 그들을 안쓰럽게 바라보았으나
이제는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기에 저렇게 머리가 다 빠졌지, 하고 존경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비만, 라면이나 샌드위치 같은 것을 먹고 정신없이 쓰러져 자고 일어나는 일상이 반복되니
점점 살이 붙었다. 간짬뽕 두 개를 끓여 계란과 참치를 풀고 찬밥을 한 공기 양껏 덜어 쓱쓱 비벼 먹는
것이 내가 가장 좋아한 야식이었다. 자주 밤을 새니 얼굴은 핼쓱해져 가고 배가 나왔다. 나중에는 맞는 바지가 없어서 아예 츄리닝을 입고 다녔다. 지금은
만성이 된 과민성대장염이 이때 시작됐고 역류성식도염이 심해졌다. 심할 때는 하루에 10번 이상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연구소에서 밤을 새다 보면 화장실에 가는 일이 가장 신경 쓰였다. 새벽 4시에 불꺼진 복도를 더듬어 지나며 홀로 화장실에 가는 길은 매일이 여고괴담이었다. 생리 현상을 해가 뜰 때까지 꾹 참았더니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부끄러운 증상이 나타났다. 검색해 보니 중년 남성들에게 나타나는 어떤 기능 감퇴라고 했다. 화장실
딸린 연구실을 갖는 것이 소원, 이라고 노트 한 귀퉁이에 적기도 했는데, 그때는 정말이지 진지했다.
어느날은 허리가 너무 아팠다. 허벅지부터 발끝까지가 심하게 저려 왔다. 정형외과에 갔더니 추간판이 두 개쯤 죽었다고 했다. 엑스레이 사진을
보니 정말 디스크 두 부분이 까맣게 변색되어 있었다. 의자에 너무 오래 앉아 있어 걸린 허리디스크라고
했다. 의사가 혼잣말로 이 정도면 군대 4급으로 빠질 텐데, 해서 몹시 얄미웠다. 불과 몇 년 전에 현역 1급으로 군대에 다녀온 몸이 대학원 4학기만에 보충역 4급으로 바뀌었다. 내가 운동선수도 아니고 공부하며 이렇게 몸이 망가질
수도 있을 줄, 상상하지 못했다.
석사 과정생 때는 밤을 새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는데, 박사 과정생 때는 그것이 조금
어려워졌다. 그리고 지금은 웬만해서는 밤 새는 일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만큼 체력이 떨어진 것이다. 몸이 망가진 만큼 좋은 성과를 많이
내었는가 생각해 보면, 내 몸에게 그저 미안하다.
학위논문을 인준 받을 때쯤, 많은 대학원생들이 망가진 자신의 몸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등산이나 헬스를 시작하기도 하고, 드물게는 유도나 권투 같은 것을
배우기도 한다. 처음에는 모두 즐겁게 시작하지만, 반 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대개 그만둔다. 그것을 온전히 즐길만한 금전적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건강을 위한 취미조차 즐기지 못하는 많은 연구자들, 힘내요 우리.
19. 안녕, 나의 모든 것.
어느 추운 겨울 날, 지도교수와의 술자리가 끝난 후 집에 돌아오다가
문득 정이현의 소설 <안녕 내 모든 것>이 떠올라, 펑펑 울었다. 읽은 지 오래되어 주인공의 이름이 세희인지 세미인지도
어렴풋한 그 책의 짧은 제목이 너무나 아프게 가슴을 헤집었다. ‘연구자’라는 알량하고 모호한 이 한 단어의 인간이 되기 위해 무엇과 작별하며 살아왔는가, 생각하니 비로소 한없이 부끄러웠다.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면, 안녕 나의 모든 것, 하고 용서를 빌며 너의 손을 잡을 것이고 안녕히
나의 모든 것, 하며 아카데미의 삶과 온전히 이별을 고할 것이다.
2014년 9월 어느 날, 오늘의유머 싸이트에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글을 올린 것을 시작으로, 오늘 19번째 마지막 에피소드를 쓴다. 어느덧 2014년의 마지막 날이다.
내 삶이 제대로 된 것인가 의심스러워 한 번 뒤돌아보고자 올린 글이 생각보다 멀리까지 왔다. 생각지
못한 과분한 관심을 받아 부끄럽다. 수백 개의 댓글을 하나하나 곱씹어 읽으며 큰 힘을 얻었기에,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그간 대학원생과 시간강사의 삶은 언론을 통해 몇 차례 단편적으로 다루어 졌다.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큰 반향을 불러오지 못했다. 죽음(자살)으로 자신의 삶을 증명해 낸 선배강사들도 있었으나, 잠시 사회적 관심을
받는 데 그쳤다. 이 글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학’은 (아카데미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괴물이다. 대학원생-시간강사로 이어지는 착취의
구조는 이미 공고한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가속화 해 온 우리 사회의
전반에 걸친 문제다. 그런데 대학은 스스로에게 숭고함과 신성함이라는 환상을 덧입히는 동시에 그 어느
집단보다도 기민하게 자본의 논리에 영합해 왔다. 흔히 대학은 그렇지 않을 거야, 하고 생각하지만 대학은 그 어느 기업보다도 노동권의 치외법권지대에 있다. 동네
편의점도 노동청의 눈치를 보며 최저시급과 주휴수당을 챙겨주는 형편임을 감안하면, 어떤 면에서 대학은
편의점만도 못하다.
지방시, 어느 후배가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그와 같이 줄여 말했는데, 명품 같고 좋네, 해 주었다. 지방시를 쓰며 나는 대학이 가진 맨 얼굴을 한 번쯤
내어 보이고자 했다. 동정이 아닌 공감을 이끌어 내고 싶었고, 허울
좋은 ‘교수님’이나 ‘연구자’가 아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사회인’이자 ‘노동자’로 인정받고
싶었다. 내부 고발이나 처우개선 요구와 같이 거창하거나 감당 못할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이렇게 살아가는 한 세대가 있음을 기록하고자 했다. 그러면
한 발 더 나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만일 내가 지방대 출신의 강사가 아니었더라면, 조금은 더 많은 사람들이 대학의 현실에 공감했을지
모른다. 나는 평범하거나, 혹은 그 이하의 인간이다. 투고한 논문들의 인용지수가 그다지 높은 편도 아니다. 내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훌륭한 논문을 쓰는 좋은 대학의 연구자들이 너무나 많다. 이런 연구를 어떻게 했지, 하고 감탄하거나 나는 언제쯤 이렇게 쓸 수 있을까, 하고 패배감을
느끼는 것이 나의 일상이다. 하지만 여전히 읽고, 쓰고, 다시 읽고, 쓴다. 나는
성골, 엘리트, 천재, 그런
뛰어난 인간은 못되지마는 오늘도 버티어 냈다. 평범한 연구자로서 연구실과 강의실에서 스스로 당당하다면
그것으로 내일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내 삶을 증명해 나가려 한다.
지방시의 이야기는 이것이 마지막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모두에게
부디 건투를, 그리고 나에게도 부디, 건투를.
20. 에필로그 : 내 자리로 돌아가기
며칠 전 서울에서 A일보의 기자와 만나 1시간 정도 '지방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터뷰 제의에 한참을 망설였지만, 나
스스로 마무리를 확실히 해두고 싶은 부분이 있어 그 기회로 삼고자 어렵게 응했다.
마지막 연재분에서 정리해 두었지만, 1. 지방시는 고발이나 투정이라기보다, 내 세대성의 기록이다. <미생>도 <아프니까 청춘이다>도
모두 기성세대 주도의 '힐링'이었다. 정작 내 세대는 온전히 아픔을 감내해 왔고, '힘들다' 말할 기회를 갖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내가 기록한 아카데미의 청춘이
내 세대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길 바랐고, 그것이 가능하다면 2.
대학원생과 시간강사의 삶이, 함께 시대를 살아가는 '노동자'이자 '사회인'으로 비추어질
수 있을 것을 기대했다. 대학에서는 '노동자'로, 사회에서는 '사회인'으로 살아갈 어떤 근거를 스스로 마련하고자 했다. 그에 더해 3. 글을 쓰며 나는 학과 교수와 동료 연구자들을 전에 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나를 아프게 한 것은 주변이 아닌 대학이 만들어낸 구조 그 자체에 있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내 처지와 생계에 대해 도움을 줄 만큼 여유 있는 노동자는 대학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을'로서 살아간다. 원망도, 아쉬움도 모두 버리고, 먼저
손을 내미는 다정한 삶을 살기로 다짐했다. (살갑게 행동할 수 있는 성격의 인간이 아닌지라 우선 마음만이라도...) 마지막으로, 4. ‘내가 이후에 어떠한 삶을 살아가든 나의
과거를 미화하거나 추억하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썼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기자께서 한 발 더 나아가실 생각이 있나요, 하는 의미의 말을
했다. 내가 정확히 어떻게 답했는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다시
평범한 지방대 시간강사로 돌아갈 거예요, 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지방시
이전과 이후의 내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내 주변의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따뜻하게 대하며, 조금 더 열심히 강의하고 연구하려 한다. 그러면 모두의 의식에 내면화 된 어떤 ‘괴물’이 균열을 보일 때, 함께 싸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동료 연구자들의 삶이 조금이나마 나아지기를, 후속 세대가
좀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기를, 그리고 모든 청춘이 더 이상 아픔을 강요받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파도 되는 청춘은 없으니까, 모두 아프지 않기를, 그리고
이처럼 아팠음을 모두 기억하고 바꾸어 나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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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유머에서 퍼온글입니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잘 봤습니다. 재산, 학벌, 인맥 없는 사람이 배고픈 학문하며 겪는 아픔, 희열 등을 잘 쓰셨네요. (인문학자라 그런지 글이 정말 깔끔하고 읽기 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