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상징주의 화가 모로도 앓은 위암… 19세기엔 생전에 알 수 없는 병이었다
귀스타브 모로, 고대 그리스의 작가 소포클레스의 희곡을 바탕으로 그린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1864년, 캔버스에 유채, 206.4×104.8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1826~1898년)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이다. 성서 이야기나 신화를 많이 그려 이름을 날렸다. 상징주의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행한 예술 사조이다. 자연주의를 거부하고, 사실주의에서도 벗어났다. 주관을 강조하고, 대상을 상징화하여 표현했다.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아티카 적색상 도기, 바디칸 미술관.
오이디푸스스와 스핑크스(Oedipus와 Sphinx) : 오이디푸의 이름은 ‘부은(oide) 발(pus)’이라는 뜻을 가졌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가장 비극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장차 아버지를 죽일 운명으로 태어나 친부모에게 버려지고 양자로 자랐으나 결국에는 자신도 모르게 그 운명을 실현하고 마는 오이디푸스. 금기중의 금기 친부 살해와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이라는 실로 자극적인 소재로 이루어진 이야기이며, 특히 비극시인 소포클레스(Sophokles)의 [오이디푸스 왕(Oedipus Rex)]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비극의 모든 요건을 갖춘 가장 짜임새 있는 드라마”라고 극찬했을 만큼 최대 걸작으로 평가되며 후대의 문학과 미술에 표현된 오이디푸스 신화 장면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문학계의 상황과는 달리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다룬 미술 작품들은 19세기 들어서야 비로소 활발하게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모로는 30대 초반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신화적 인물을 통해 인간의 번민과 고통을 형상화했다. 38세 때 그린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Oedipus와 Sphinx)>로 큰 명성을 얻게 된다. 이 그림은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의 작품을 바탕으로 했다. 오이디푸스왕이 여행 중 스핑크스를 만나는 장면을 묘사했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올바르게 답해야 살 수 있었고, 실패는 죽음을 의미했다. 수수께끼는 “아침에는 네 발, 오후에는 두 발, 밤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였다. 오이디푸스는 “사람은 어렸을 때 네 발로 기어다니고, 어른이 되어 두 다리로 걷고, 늙어서는 지팡이를 사용한다”며 수수께끼를 맞혔고, 자유를 얻었다는 이야기다.
모로는 8000여 점의 그림을 남기고, 72세에 위암으로 사망했다. 위암은 기원전 1600년경 문서에 기록될 정도로 역사가 깊다. 20세기 초까지 대부분 사망 후 부검을 통해서 위암을 알았다. 위암 진단은 내시경으로 속을 들여다보면서 급속히 발전했다. 가느다란 관을 위 속에 넣는 지금의 위내시경 방식은 1960년대에 등장했다.
냉장고의 보급으로 염장(鹽藏) 음식 섭취가 줄면서 전 세계적으로 위암은 줄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한 해 2만명의 환자가 발생한다. 소금과 간장에 삭히고 절인 음식을 여전히 많이 먹는 데다, 위암 발병 주범 헬리코박터 파이로리(Helicobacter pylori)균 감염률이 높은 탓이다. 감염 양성으로 나오면, 제균 치료를 받는 게 좋다. 박찬혁 한양대구리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위암이 위점층에만 있고 림프절 전이가 없는 경우에는 수술이 아닌 내시경 절제술만으로도 완치가 가능하다”며 “그렇게 되려면 증상이 없더라도 최소 2년에 한 번 위내시경 검진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위암 문제는 존재하나, 이제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는 아니다.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1826-1898) 자화상,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
테오도르 샤세리오, 〈고대 로마의 미온 욕실〉, 1853년, 캔버스에 유채, 171×258㎝, 오르세 미술관, 파리.
귀스타브 모로는 신화와 종교에 관한 주제를 주로 다룬 19세기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로 주요 작품은 <환영>. 테오도르 샤세리오(Théodore Chassériau, 1819~1856)에게 배우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살로메의 춤> 등을 통해 신화적이고 이국적인 소재와 에로티시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캔버스를 긁거나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등 자유분방한 양식을 실험하여 후일 추상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앙리 마티스(Henri(-Émile-Benoît) Matisse)와 조르주 루오(Georges-Henri Rouault)등 야수파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살로메의 춤(Dance of Salome)〉, 1876년, 파리 모로 국립미술관.
〈환영〉, 1876-77년, 캔버스에 오일, 55.9×46.7cm, Harvard Art Museums.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조선일보 2024년 02월 28(목) [명작 속 의학(김철중 영상의학과 전문의, 논설위원 겸임, 의학전문 기자·안상현 기자)], 인터넷 교보문고, Daum·Naver 지식백과/ 글과 사진: 이영일∙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