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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天葬)이 끝나고
일제히 날아오른 독수리 떼
허공에 무덤들이 떠간다
쓰러진 육신의 집을 버리고
휘발하는 영혼아
또 어디로 깃들 것인가
삶은 마약과 같아서
끊을 길이 없구나
하늘의 구멍인 별들이 하나 둘 문을 닫을 때
새들은 또 둥근 무덤을 닮은
알을 낳으리.
- 유하 시 '생(生)' 모두
1
사내는 결혼식에 간다 친구의 들러리를 서기 위해, (결혼에 관한 한 그는 늘 들러리 의식을 갖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우연히 신부 친구와 눈이 맞는다 (앤디맥도웰 같은 여자를 상상하면 좋겠다) 처음 본 그날, 사내와 여자는 돌발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사내에게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묻는다 우리 결혼하지 않을래요? 사내는 당황한다 우린 겨우 한 번 만났을 뿐인데...(사내는 결혼이란 두 개의 영혼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이라는,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여자의 얼굴이 일순 꺼졌다 켜진다 호호, 농담이었어요그녀에겐 "자유분방함"이라는 알리바이가 있다
그들은 다른 친구 결혼식에서 다시 조우하게 된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즉흥적인 정사, 사내가 묻는다 도대체 몇 명의 남자와 잤죠? 사내는 여자의 내부에 보일듯 말 듯한 컴컴한 다락방이 견딜 수 없이 궁금하다.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글세, 34명 정도? 그럼 나는? 당신은..(순간, 진한 아픔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32번째였어요 당신은요?...... 둘은 서로의 기억 저편에 닫아둔 다락방에 대해 묻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욕망이란, 서로의 뇌수 뚜껑을 열어 그 은밀한 다락방을 들여다보고, 그 공간을 완벽하게 지배하고픈 것일지도 모른다 그 다락방 조차도 햇빛 가득한 창문을 내고 자신의 살림살이을 들여놓고 싶다는 욕망,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이해될 수 있게, 다랑방을 털어 재빨리 케케묵은 상처를 윤색하고,비밀의 서랍을 정리해 보지만, 그래도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숨길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 아니라, 원래 침묵의 편에 서 있는 것들이다 ( 두 사람 사이엔 침묵의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지금 이 순간의 "불타오름", 그리고 나머지는 온통 무심한 어둠, 그 불꽃의 저편은 내 걱정의 영토와는 무관하다 그 어둠 속에, 내 불타오름의 "타인"인 내가 살고있고, 그녀의 불타오름의 "타인"인 또 다른 그녀가 살고 있다 이 순간의 불쏘시개가 될 수 없는 상처들은, 타인인 "나와 그녀"가 사는 세계, 어둠 그 자체로 그냥 남을 뿐이다 그 사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기에, 어린애의 칭얼거림으로 그 어둠의 세계를 들쑤시듯 간섭하거나, 아예 말문을 닫아버린다 그 "말할 수 없음"이 사내와 여자의 내면에 몇 개의 우주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 불꽃에서 보면, 먼 별 속에 서로의 소유가 될 수 없는 "저편의 아름다움"이 있다 불꽃의 매혹이 클수록, 그렇게 먼 그대, 타인됨의 아름다움이 고통스럽다 그 고통의 속수무책: 둘은 저 바다를 방관할 수 밖에 없는 소나무의 마음처럼, 서로를 그대로 두기로 한다 그 후로도 두번의 결혼식이 더 있었다.
2
그리고 한 번의 장례식, 결혼식 하객 한 명이 죽었다
그에게도 침묵의 성질을 타고난 미세한 상처의 흠집, 비밀들과 콤플렉스의 두개골, 그리고 몇 가지 삶과 사랑의 우주가 있었지만, 그것들은 이제 더 이상 그의 몫이 아니다, 물론 침묵의 몫도 아니다. 그의 내면에 존재하던 무수한 타인들은 하나로 겹쳐 지 지는게 아니라
재즈처럼 두서 없이 불연속적으로 소멸된다. 그를 사랑하는 자들만이 말없음의 강을 사이에 두고 괴로워할 뿐, (애도는 산 자의 공포를 잠시 위안의 무덤으로 인도 한다) 이윽고 산 자의 사랑은 몇 방울의 눈물을 징검다리 삼아 잽싸게 다른 우주로 이주해 간다. 한 영혼의 흠집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그 자리에 세상의 흠집만 깊게 남는다. 무덤은 사자의 모든 것을 포용하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여 사자의 은밀한 상처와 자의식들은 이제 완벽하게 흙의 무심함 속에 보존되거나 혹은, 완벽하게 허공과 몸을 바꾼다. 그가 생전에 마음의 눈길을 주었던 나무와 꽃잎만이 그 사라진 다락방의 움직임을 알고 있으리라.
3
두 남녀는 결혼식을 포기하고 그냥 같이 살기로 한다
다른 두 개의 하늘, 두 개의 태양 아래서 그리고 서로의 얼굴에 언뜻 스치는 먼 별빛의 아름다움을 귄태의 손가락으로, 가끔은 겸연쩍게 가리키며, 웃음짓는다. 불꽃의 에너지는 아직도 유효한 것이다. 불꽃이 살아 있을 동안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으므로,
- 유 하 시 ‘ 네 번의 결혼식 한 번의 장례식‘
―모든 악한 일을 삼가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고요함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이 불법이니라
예수나 불타나 공자의 말씀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기상천외한 술법이 아니라
나쁜 짓하지 말고
착하게 살자는 말씀인데
귀가 확 트일 신묘한 그 무엇을 갈망하는 자들에겐
뻔하디뻔한 말씀일 뿐인데
지금도 형형하게 살아서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다 듣는 귀를 가진 사람들 힘이구나
세살 짜리도 아는 얘기지만
여든살 노인도 행하지 못하는 진리를
버리지 않고, 명심해 실천해온
듣는귀를 가진 사람들 힘이구나
그렇지, 진정 듣는 귀란
깨달음을 행함 속에 있는 것
다들 귀가 크다는 것을 자랑하는 이 시절에
귓밥만 더 먹는 큰귀 아니냐고 비웃었지만
사소한 선도 실천하지 못하는 내 귀도
결국 뚫린 귀에 불과했구나
바람만 새는 바늘귀였구나
오늘도 내 귀를 지나쳐
사막으로 가버리는
수많은 진리의 낙타들
- 유 하 시 ‘바늘귀’
[무림일기], 중앙일보사, 1989.
지금 식으로 따진다면
자신이 내놓은 물건 값보다
더 신세를 지고 가던 사람이 있었다
검정 고무신 찰박찰박 장마 끝물로 와서
거시기 모다 있어라우, 찰옥수수 같은 잇속 드러내며 웃던
담바우 방물장수 아짐
대나무 참빗 달랑 하나 풀어놓고는
골방 아랫목 드러렁 고랑내 밤새 풀어놓으며
새비젓 무시너물 쩍국에 척척 식은 밥 한술 말아먹고
보리쌀 반 되 챙겨서 싸묵싸묵 새벽길 떠나가던
염치도 바우 같은 담바우 방물장수 아짐
그것만이면 진짜 양반이게
담바우 아짐 자고 간 날 이후론 온 식구 머릿속엔
영락없이 이가 바글바글 들끓었다
그 예편네 욕 직사허니 퍼대다가
그 빗살 촘촘한 참빗으로 득득 빗어내리면 와따
후두둑 후두둑 민경 위로 새까맣게
떨어져내리던 가랑이 서카래떼
장마 걷힌 하늘처럼 맑아오던 머릿속
그날은 온 식구 한데 모여 그놈 서카래 손톱으로 똑똑
장단 맞춰 터뜨려가며 곤시랑댔다
허허참, 그래도 담바우 아짐 참빗이
참말로 짱짱한 참빗이랑게
- 유 하 시 ‘ 참빗 하나의 시‘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문학과지성사, 1991.
빌딩들 사이에서 오백 원으로
급히 펼쳐든
푸른 비닐의 공간
난 오래 잊고 있었던 은행의 비밀 번호를
기억해낸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 순간
난 이 거대한 도시 속에서
유일하게 빗방울들의 노크 소리를 듣는다
푸른 비닐을 두드리며 황홀하게
나의 비밀 번호를 호명하는 물방울의 목소리
나는 열리기 시작한다
빗방울의 목소리를 닮은 사람이여
내게 예금이되어진 건
소낙비를 완벽하게 긋는 박쥐 우산이 아니라
푸른 비닐의 공간을 가볍게 준비할 수 있는 능력
비닐우산을 펴면
나는 푸른 비닐처럼 가볍게 비밀스러워진다
빗방울을 닮은 사람이
또박또박 부르는 비밀 번호 앞에서
천천히 열리는 꿈에 부풀기 시작한다
- 유 하 시‘ 푸른, 비닐우산을 펴면‘
두개의 은륜이 굴러간다
엔진도 기름도 없이 오직
두다리 힘만으로
은륜의 중심은 텅 비어 있다
그 텅 빔이 바퀴살과 페달을 존재하게 하고
비로소 쓸모 있게 한다
텅 빔의 에너지가 자전거를 나아가게 한다
나는 언제나 은륜의 텅 빈 중심을 닮고 싶었다
은빛 바퀴살들이 텅 빈 중심에 모여
자전거를 굴리듯
내 상상력도 그 텅 빈 중심에 바쳐지길
그리하여 세속의 온갖 속도 바깥에서
찬란한 시의 月輪을 굴리기를, 꿈꾸어왔다
놀라워라, 바퀴 안의 無가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희망의 페달을 밟게 한다
바퀴의 내부를 이루는 무가
은륜처럼 둥근, 생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
구르는 은륜 안의 무로
현현한 하늘이, 거센 바람이 지나간다
대붕의 날개가 놀다 간다
은륜의 비어 있음을, 무를 쓸모 없다 비웃지 마라
그 텅 빈 중심이 매연도 굉음도 쓰레기도 없이
시인의 상상력을 굴린다
비루한 일상을 날아올라 심오한 정신의 숲과 대지를 굴리고
마침내 우주를 굴린다
길이여, 나를 태운 은륜은 게으르되 게으르지 않다
무의 페달을 밟으며
내 영혼은 녹슬 결도 없이 自轉하리라
- 유 하 시 ’ 無의 페달을 밟으며 -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 1‘
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그대가 오리라
바람도 찾지 못하는 그곳으로
안개비처럼 그대가 오리라
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모래알들은 밀알로 변하리라
그러면 그 말알로, 나 그대를 위해 빵을 구우리
그대 손길 닿는 곳엔
등불처럼 꽃이 피어나고
메마른 날개의 새는 선인장의 푸른 피를 몰고 와
그대 앞에 달콤한 비그늘을 드리우리
가난한 우리는 지평선과 하늘이 한몸인 땅에서
다만 별빛에 배부르리
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빗방울처럼 그대가 오리라
그러면 전갈들은 꿀을 모으고
낙타의 등은 풀잎 가득한 언덕이 되고
햇빛 아래 모래알들은 빵으로 부풀고
독수리의 부리는 썩은 고기 대신
꽃가루를 탐하리
가난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세상이란 오직 이것뿐
어느 날 나의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지평선과 하늘이 입맞춤하는 곳에서
나 그대를 맞으리라
- 유 하 시 ‘어느 날 나의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
정신 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나는 짖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 버린다
꿀의 주막이 금세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
노란 꽃잎의 진동이 그 잉잉거림이
내 손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
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난 지금 그대 황홀의 캄캄한 감옥에 닫혀 운다
- 유 하 시‘사랑의 지옥’
체중계의 바늘이 0을 가리키는
내 몸무게에 깜짝 놀라
당장 시작한 벤치 프레스
하나 하나 늘려가는 바벨의 중량 덕분에
풍선 바람 나가듯 빠지는 살도 살이지만
신기하여라
그 무심한 쇳덩어리들이
손 시린 인생공부를 시킨다
새로운 무거움을 접하며
비로소 나는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다
전 단계의 무게에서
깔짝깔짝 역기를 농락하던 나는
얼마나 초라한 비계덩어리에 불과했던가
바벨을 하나 하나 늘릴 때마다
나의 자만은 살이 빠지듯
내 몸을 서서히 빠져 나간다
가령 바벨을 늘리지 않고
그 다음 단계의 무거움을
짐작하는 자들처럼,
살고 있는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 그들에겐 듣는 귀가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자신이 들어올리는
타성에 젖은 중량의 권위로
쉽게 잴 수 있다고 믿는 그들에게
새로운 중압감의 고통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일쯤이야
뻔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바벨을 하나씩 늘리다 보면,
세상에 뻔한 이야기란 없다
당장 올려놓은 낯선 쇳덩어리의 무게가 나를 압사시킬 듯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뻔한 것은,
조금만 무리하게 바벨의 무게를 늘려도
쉬 짓눌려 버리는 우리 자신들이다
지금 보잘것없는 무게에도 쩔쩔맨다고 하여 그를
무지렁이라 비웃지 말라
새로운 무거움의 고통을 감수하며
하나, 하나, 바벨을 견딜 수 있으리니
하나앗 둘……
하나아앗 두울……
- 유 하 시 ‘ 인생공부‘
[무림일기], 중앙일보사, 1989.
아브라카다브라
그 사람을 사랑하게 해주오
그이의 마음은 알고 싶지 않나니
아브라카다브라
눈먼 자의 손을 갖게 해주오
내 두 눈을 바치리니
아브라카다브라
눈먼 자의 손에 깃든 감각과 심장을 내게 주오
그 사람의 따뜻한 뺨을 만지며
우주의 두근거림을 느끼리니
아브라카다브라
귀먼 자의 눈에 담긴 환한 빛을 내게 주오
그 사람의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더운 바람의 시를 읽으리니
아브라카다브라
그 사람을 사랑하게 해주오
그이의 마음은 알고 싶지 않나니
- 유 하 시 ‘ 아브라카다브라‘
*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텅 빈 양재 천변 길, 오늘도 자전거를 달린다
밤새 내린 비에 없었던 지렁이가 보이고
송장 메뚜기 한 마리 풀쩍 잡초 속으로 날아간다
아내는 직장에 간 시간
나는 자전거나 타면서 고작 지렁이도 익사를 할까
쑥부쟁이는 쑥과 뭐가 다른가 따위의 사소함을 붙들고 있다
몇 년째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자전거 위에서 몇 편의 시를 구상했을 뿐
언제나 핵심을 피해왔다
시험 전날 만화방에 앉아 있는,
목적지를 놔두고 샛길에서 해찰하는 아이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자의 가슴엔 늘 쓸모 없는 것들만
다녀간다 가을 빛에 젖은 억새풀과 노란 은행잎 몇 개
길 옆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소학교에선 운동회가 한창이다
내 자전거엔 어느새 함성 소리처럼 날개가 돋아
유년의 운동회로 나를 데려간다
은빛 운동장 저편엔 젊은 날의 어머니가 있고
그녀와 이인삼각으로 달려가는 어린 날의 내가 있다
내 자전거는 해질녘이 되어서야 붉게 물들어
정적 속의 내게로 되돌아온다
세상을 삼킬 것 같았던 어제의 열망은 이제
나의 몸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노는 자여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예감했었는지도 모른다
집으로 저물어 돌아가는 나의 자전거가
텅 빈 가을 하천의 사소한 풍경을 완성시키고 있는 이 순간을
- 유 하 시 ‘自畵像‘
*『천일馬화』/ 문학과지성사
대나무숲, 휘파람새 둥지를 바라본다
저 바람 속 모든 새집은
새라는 육체의, 타고난 휘발성을 닮아있다
머물음과 떠남의 욕망이, 한순간
망설임의 몸짓으로 겹쳐지는 곳에서
휘파람 소리처럼 둥지는 태어난다
새는 날아가고
집착은 휘파람의 여운처럼
둥지를 지그시 누른다
매혹의 고통은 종종
새의 가벼운 육체를 꿈꾸게 한다
하여 나의 질투는 포기보다 가볍다
난 사랑하고 있으므로, 사라지고 싶은 것이다
휘파람새가 비상하기 직전의 날개,
그 소리없는 찰나의 전율을 빌려
난 너의 내부에 둥지를 튼다
- 유 하 시‘휘파람새 둥지를 바라보며‘
인생의 일할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아마 그랬을 거야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
그리고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법과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
그 중에서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도움을 준 것은
그런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
최대한 굴복시키는 법
- 유 하 시 ‘학교에서 배운 것‘
내 가슴엔 아직도 사루비아의 달콤함이 살고
여선생님 하얀 치아의 눈부심과 새 수련장
빠알간 색연필로 쓴 참 잘했어요가 산다
히말라야시다 오동나무 가지 사이로
놀러 온 햇볕도 다람쥐도 찌르레기도
어린 풍금 소리에 맞춰
가슴에 달린 손수건처럼 마음을 펄럭이던,
그래 생명의 모든 국민학교가 거기 있었지
아직도 내 입 안에 사는
철수와 영희, 아련하게 바둑이를 부르며
둥글게 둥글게
그 착한 영혼의 이름들로 충만한 운동장
아, 다시 가고 싶어라
환한 금빛,
모래알의 은하수
- 유 하 시 ‘시골 국민학교를 추억함‘
1
한 미남 청년을 짝사랑하다
바다에 몸을 던진 옛 그리스의 시인 사포
애기세줄나비,
학명은 Neptis sappho Pallas
불빛 속으로 날아드는 그 나비의 모습이
그녀를 연상시켰던 걸까
나비처럼 가벼운 영혼만이
열정 속으로 투신할 수 있다고, 노래하진 않겠다
나비는 불꽃이 자기를 태울 거라
생각진 않았으리라
혹, 불빛은 애기세줄나비에게
환한 거울 같은 건 아니었을까
2
조롱 속의 짝 잃은 문조,
그 안에 작은 거울을 넣어주었더니
거울에 비친 자기를 제 짝인 양
생이 다하도록 행복해 했다는 이야기
3
죽음을 걸었던, 너를 향한 내 구애의 말들
덧없음이여, 나는 나 이외에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내가 날아들었던 당신이라는 불꽃
오랫동안 나는 알지 못했다, 실은 그 눈부신 불꽃이
나를 비추는 거울이었음을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 유 하 시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오늘밤 나는 비 맞은 여치처럼 고통스럽다
라고 쓰려다, 너무 엄살 같아서 지운다
하지만 고통이여, 무심한 대지에서 칭얼대는 억새풀
마침내 푸른빛을 얻어내듯, 내 엄살이 없었다면
넌 아마 날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열매의 엄살인 꽃봉오리와
내 삶의 엄살인 당신,
난 오늘밤, 우주의 거대한 엄살인 별빛을 보며
피마자는 왜 제 몸을 쥐어짜 기름이 되는지
호박잎은 왜 넓은 가슴인지를 생각한다
입술을 달싹여 무언가 말하려다,
이내 그만두는 밑둥만 남은 팽나무 하나
얼마나 많은 엄살의 강을 건넌 것일까
- 유 하 시 ‘당신’
생선을 발라 먹으며 생각한다
사랑은 연한 살코기 같지만
그래서 달콤하게 발라 먹지만
사랑의 흔적
생선가시처럼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질 않는구나
나를 발라 먹는 죽음의 세상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내 열애가 지나간 흔적 하나
목젖의 생선가시처럼
기억해 주는 일
소나무의 사소한 흔들림으로
켁켁거려 주는 일
그러나 이 밤의 황홀한 순간이여,
죽음의 아가리에 발라 먹히는
고통의 위력을 빌려, 나
그대의 웃음소리로 잎새 우는
서러운 바람을 만들고
그대의 눈빛으로
교교한 달빛 한 올 만들어 냈으니
이 지상 가득히
내 사랑의 흔적 아닌 것 없지 않는가
땅의 목젖 내 한 몸으로
이다지도 울렁거리지 않는가
- 유 하 시 ‘사랑의 흔적’
달팽이 기어간다
지나는 새가 전해준
저 숲 너머 그리움을 향해
어디쯤 왔을까, 달팽이 기어간다
달팽이 몸 크기만한
달팽이의 집
달팽이가 자기만의 방 하나 갖고 있는 건
평생을 가도,, 먼 곳의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걸
그가 잘 알기 때문
느린 열정
느린 사랑,
달팽이가 자기 몸 크기만한
방 하나 갖고 있는 건
평생을 가도, 멀고 먼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는
달팽이의 고독을 그가 잘 알기 때문
- 유 하 시 ‘ 느린 달팽이의 사랑‘
바람이 낳은 달걀처럼
참새떼가 우르르 떨어져 내린
탱자나무 숲
기세등등 내뻗은 촘촘한 나무 가시 사이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참새들은 무사통과한다
(그 무사통과를 위해
참새들은 얼마나 바람의 살결을 닮으려 애쓰는가)
기다란 탱자나무 숲
무성한 삶의 가시밭길을 뚫고
총총히 걸어가는 참새들의 행렬
(가시에 찔리지 않기 위해
참새들은 얼마나 가시의 마음을 닮으려 애쓰는가)
…… 난 얼마나 생의 무사통과를 열망했는가
그 열망 깊은 곳,
가시 무성하게 돋아난
선혈 낭자한 탱자나무 숲이여
- 유 하 시 ‘ 참새와 함께 걷는 숲길에서‘
미류나무 앙상한 가지 끝
방울새 한 마리도 앉았다 날아갑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로 그 자리
방울새 한 마리 앉았다 날아갑니다
문득 방울새 한마리 앉았던 빈 자리가
우주의 전부를 밝힐 듯
눈부시게 환합니다
실은,지극한 떨림으로 누군가를 기다려온
미류나무 가지의 마음과
단 한 번 내려앉을 그 지극함의 자리를 찾아
전 생애의 숲을 날아온 방울새의 마음이
한데 포개져
저물지 않는 한낮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도 미세한 떨림을 가진
미류나무 가지 하나 있어
어느 흐린 날, 그대 홀연히 앉았다 날아갔습니다
그대 앉았던 빈 자리
이제 기다림도 슬픔도 없습니다
다만 명상처럼 환하고 환할 뿐입니다
먼 훗날 내 몸 사라진 뒤에도
그 빈자리, 그대 앉았던 환한 기억으로
저 홀로 세상의 한낮을 이루겠지요
- 유 하 시 ‘그 빈 자리 ‘
아름다운 시를 보면
그걸 닮은 삶 하나 낳고 싶었다
노을을 바라보며
노을빛 열매를 낳는 능금나무처럼
한 여자의 미소가 나를 스쳤을 때
난 그녀를 닮은 사랑을 낳고 싶었다
점화된 성냥불빛 같았던 시절들, 뒤돌아보면
그 사랑을 손으로 빚고 싶다는 욕망이
얼마나 많은 열정의 몸짓들을 낳았던 걸까
꽃의 떨림과 떨림의 기차와
그 기차의 희망,
내가 앉았던 벤치의 햇살과
그 햇살의 짧은 키스
밤이면 그리움으로 날아가던
내 현 속의 푸른색
그리고 죽음조차도 놀랍지 않았던 나날들
그 사랑을 빚고 싶은 욕망이 나를 떠나자,
내 눈 속에 살던 그 모든 풍경들도 사라졌다
바람이 노을의 시간을 거두어 가면
능금나무 열매의 환한 빛도 꺼지듯
- 유 하 시 ‘ 그 사랑에 대해 쓴다‘
붉게 익은 과일이 떨어지듯, 문득
그대 이름을 불러볼 때
단숨에 몰려오는, 생애 첫 가을
바람은 한짐 푸른 하늘을
내 눈 속에 부려놓는다
마음 닿는 곳이 반딧불일지라도
그대 단 한 번 눈길 속에
한세상이 피고 지는구나
나 이 순간, 살아 있다
나 지금 세상과 한없는 한 몸으로 서 있다
그리움을 견디는 힘으로
먼 곳의 새가 나를 통과한다
바람이 내 운명의 전부를 통과해낸다
- 유 하 시 ‘그리움을 견디는 힘으로‘
수천의 파도가
몰려와 부서집니다
수만의 파도가 한꺼번에
산산이 부서집니다
부서진 파도들 비로소
편안한 어깨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나 어이할 수 없어라
그렇듯 뒷모습으로 돌아간 파도들
또다시 부서지러 몰려 옵니다
한번 부서져본 사랑
대단한 권세인 줄 알았습니다
그대여
내 사랑 더도말고
저 파도 같을 겁니다
- 유 하 시 ‘끝없이 부서지는 파도같이 ‘
내 몸 물처럼 출렁이는 꿈을 꿉니다
내 몸 그대에게 물처럼 흐르는 꿈을 꿉니다
나 그대 앞에서 물처럼 투명한 꿈을 꿉니다
물처럼 투명한 내 몸 속, 물처럼 샘솟는 내 사랑 보입니다
내 사랑에 내가 놀라 화들짝 물방울로 맺힙니다
드맑은 그리움 온통 무거워지면
물방울로 맺힌 내 몸 다시 흐르기 시작합니다
수만 가지로 샘솟는 길을 따라 내가 흩어져 흘러갑니다
그러나 물방울의 기억이 그대 눈빛처럼 빛나는 시냇가에
내 사랑 고요히 모이게 합니다
오오, 달비늘로 미끄러지는 내 사랑
갈대 밑둥을 가만히 흔들고 지나갈 뿐입니다
바위 틈에 소리없이 스미고 스밀 뿐입니다
내 몸 투명한 물이기에
이 세상 어느 것보다 낮게 흐릅니다
이 세상 모오든 것을 비켜갑니다 그대마저도 비켜갑니다
그 비켜감의 끝간 데, 지고한 높이의 하늘이 있습니다
놀라워라, 그 순간 그대 가슴속에 끝없이
범람하고 있는 내 사랑 봅니다
나 그대 몸 속에서 오래도록 출렁입니다
나 그대 시내 같은 눈을 보며 물의 마을을 꿈꿉니다
그 물의 마을, 꿈꾸는 내 입천장에서 말라붙습니다
내 몸 물처럼 츨렁이다 증발되듯 깨어납니다
오늘도 그대를 비켜가지 못합니다
- 유 하 시 ‘ 나는 물의 마을을 꿈꾼다‘
바람아 기억하는가
한때 나는 날개를 갖고 있었네
허공을 날며 사랑을 나누다
절정의 순간 몸이 터져 죽어버리는
수개미의 날개를
그러나 어느 날,
내 날개짓의 에너지였던 사랑은
태양의 지평선을 따라 사라지고
난 지금 암흑의 대지에 갇혀
떠나간 사랑에 대해 쓰네
이젠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진 날개를
조금씩 뜯어먹으며
생의 나머지를 견디네
- 유 하 시 ‘날개를 위한 시‘
잎새는 뿌리의 어둠을 벗어나려 하고
뿌리는 잎새의 태양을 벗어나려 한다
나무는 나무를 벗어나려는 힘으로
비로소 한 그루
아름드리 나무가 된다
- 유 하 시 ‘나무’
늦가을 강바람 속으로 매순간
힘없이 메마른 숨결의 손을 놓는 나뭇잎들과 같이
지금 돌연 내가 죽어 없어진다 해도
저 강물은 계속 흐를 것이다 간혹
물 위에 떠가는 낙엽이나 갈대 부스러기처럼
내 죽음이 쓸쓸히 노을의 저편으로 흘러가도
강은 이 자리를 지킬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바로 눈앞으로 흐르는
강물이란 강물 다 지나가버려도
강의 호흡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듯,
영영 떠내려가버릴 것 같은 죽은 나뭇잎들
푸르름의 기억을 되살려 나무의 뿌리로 되돌아오듯,
내 육신의 죽음이 진정 나를 죽게 할 수 있을까
나는 본다,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려 해도
그대로 온통 강물인 양수리의 삶을
뭐 하나 뾰족할것 없는 생의 굴레를
하여, 살아온 날들의 온갖 희희낙락과 절망들이여
살아갈 날들의 하릴없는 기대감들이여
그만, 잔잔하라 고인 물처럼 잔잔하라
강물이 끝내 강물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수백 생 동안 죽음의 진화 작용을 해왔을 내 모습
이제 그 깊은곳에 사는
마음의 참붕어 한 마리 보고 싶다.
- 유 하 시 ‘ 마음의 고기 한 마리 - 양수리에서‘
은행잎에 그대가 물들었습니다
그대 노란 눈부심으로
거리를 떠나갑니다
온 산에도 그대가 물들어갑니다
산을 내려온 그대 물든 걸음
사뿐 강물이 받아줍니다
강물 위에 그대 떠내려갑니다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그대 떠내려갑니다
지금껏 난 흘러가는 그대 붙잡으려 했습니다
지친 매미 울음처럼 붙잡으려 했습니다
아아 온 천지에 그대 수없이 물들고 나서야 비로소
그대 떠내려가는 모습 내게 눈부심이었습니다
그대 떠나보내야 내 사랑 자란다는 걸 알았습니다
은행잎 하나에도
그대 얼굴 물드는 시간입니다
은행나무처럼 나 이제 그대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그대 노란 눈부심으로 나를 떠나갑니다
떠나는 그대 눈부신 명상입니다
잔잔한 강물 같은 명상입니다
- 유 하 시 ‘ 눈부신 명상입니다‘
눈이 내린다 눈빛이 내린다
난 멀디먼 눈길 뒤에서 굴뚝새처럼 헤매었다
눈물 다 흘리고 아린 눈으로 바라보던
그 무심한 눈발 그때 알아버렸다
컴컴하게 눈먼 하늘이 각혈하는 눈보라가
두고두고 이 세상 내 험한 눈길 속으로 가져다줄 눈빛을
그 눈시린 고통과 황홀의 눈빛을 그 후로
난 오래도록 잠들어 있었다 꿈속에서도 깨지 마라
깨지 마라 눈은 쏟아지고 눈뜨면 감은 눈 위로
거대한 설원이 기다림처럼 쌓이는 꿈을 꾸는 나를 보았다
아, 눈과 눈의 사랑 난 기어이 깨어났다
이 천지의 가믈고 가믄 숨소리 눈보라가
내 무거운 눈꺼풀을 벗겨갔다 난 보았다
그 무수한 눈송이가 무수한 눈물로 바뀌는 것을
눈은 땅으로 곤두박질치지만
눈물은 마침내 허공에 설원을 이룬다
눈발과 눈물의 가슴 시린 부딪침, 사랑
눈이 쌓인다 눈빛이 쌓인다 밤새
나는 잠들지 못하리라 저 황홀한 눈빛이
내 눈에 영원한 고통을 족쇄 채웠다 눈이 펑펑 내린다
나는 눈빛 쌓인 설원을 저물도록 떠돌아야 하리라
눈은 녹지만 끝끝내 당신, 눈빛은 녹지 않는 설원을
눈이 내린다 눈물이 솟아오른다
- 유 하 시 ‘ 눈을 위한 시 ‘
까치 한마리 나뭇가지를 물고 숲속으로 날아가네
한 마음의 뭉클함이여, 나 그대를 불러보네
새가 둥지를 짓기 위해 첫 나뭇가지를 얹어놓듯
그대라는 이름으로 불러보는 무수한 들꽃과 풀잎
그대 깃들이지 않은 곳 없네 저 휘파람새 울음
붉은 산수유 열매, 토끼풀꽃, 갈대의 흔들림
새들은 내 눈빛들의 메아리를 물어 온 숲에 둥지를 틀고,
나 빠른 시간의 물살 바깥에서 따스한 알로 정지하네
그토록 느린 저녁의 산책이여, 송진 내음의 사랑은
가슴에 환한 명상의 불빛을 밝히고, 나 그대의
이름들과 함께 이 저녁의 넓이를 한없이 키워가네
그대는 느린 달의 속삭임, 빛의 울타리로 나를 가두네
사람의 마을로 떠밀려가던 생은 멈추고,
기나긴 산책의 오솔길에서 나 그대를 불러보네
이 저녁 그리움 위에 첫 나의 미명에
- 유 하 시 ‘느림’
나 그대를 느끼네
한순간 햇살에 찔려.
그대,
내 몸이 아니기에
이 아픈 매혹이여.
나 그대를 느끼네
입 안에 맴도는 휘파람처럼.
그대,
소멸하지 않는 흥얼거림이여.
나 그대를 느끼네
한순간 물살에 두 무릎 꺾이듯.
그대,
흘러가도 흘러가도
마침내 그대로인
강물의 움직임이여.
- 유 하 시 ‘느낌’
*시크리드라는 이름의 물고기는
갓 부화한 새끼들을 제 입 속에 넣어 기른다
새끼들의 안전한 보금자리로
그들은 자신의 입을 택한 것이다
어린 자식들을 미소처럼 머금은
시크리드 물고기
사람들아, 응시하라
삼킬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머금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물을 머금은 눈동자
이슬을 머금은 풀잎
봄비를 머금은 나무
그리고
끝내 삼킬 수 없는 노래의 목젖,
나도 한세상
그곳에 살다 가리라
- 유 하 시 ‘ 삼킬 수 없는 노래‘
* 시크리드: 시크리드과 물고기는 대다수가 아프리카 호수에 살고 있으며, 마우스 브리딩, 즉 새끼들을 입 안에 넣어 기른다.
여의도로 밀려가는 강변도로
막막한 앞길을 버리고 문득 강물에 투항하고 싶다
한때 만발했던 꿈들이 허기진 하이에나 울음처럼
스쳐간다 오후 5시반
에프엠에서 흘러나오는 어니언스의 사랑과 진실
추억은 먼지 낀 유행가의 몸을 빌려서라도
기어코 그 먼길을 달려오고야 만다
기억의 황사바람이여, 트랜지스터의 라디오 잡음같이 쏟아지던
태양빛, 미소를 뒤로 모으고 나무에 기대 선 소녀
파르르 성냥불처럼 점화되던 첫 설레임의 비릿함, 몇 번의 사랑
그리고 마음의 서툰 저녁을 불러 모아 별빛을 치유하던 날들
나는 눈물처럼 와해된다
단 하나의 무너짐을 위해 생의 날개를 그토록 퍼덕였던가
저만치, 존재의 무게를 버리고 곤두박질치는 물새떼
세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기에
오래 견디어낸 상처의 불빛은
그다지도 환하게 삶의 노을을 읽어 버린다.
소멸과의 기나긴 싸움을 끝낸 노을처럼 붉게 물들어
쓸쓸하게 허물어진다는 것,
그렇게 이 세상 모든 저녁이 나를 알아보리라
세상의 모든 저녁을 걸으며 사랑 또한 자욱하게 늙어 가리라
하지만 끝내 머물지 않는 마음이여, 이 추억 그치면
세월은 다시 흔적 없는 타오름에 몸을 싣고
이마 하나로 허공을 들어 올리는 물새처럼 나 지금,
다만 견디기 위해 꿈꾸러 간다.
- 유 하 시 ‘ 세상의 모든 저녁 1 ‘
나 홀로 저녁의 강가를 걸었네
그녀와 이 길을 걷던 날들은
강물과 함께 흘러가고
나는 열두 개의 달을 생각했지
우리들 산책가의 태양이었던 그 달을
그녀와 내 두 눈에 담긴 네 개의 달
강물에 내려앉은 달
한 마리 살랑대는 은어의 눈동자를 비추던 달
그리고 저 솔숲 부엉이의 두 눈과
그녀의 눈물에 고이던 노란 달빛
돌아올 수 없는 강물을 따라
흘러가버린 그녀, 긴 머리칼의 향기
우리들 산책가의 태양이었던
열두 개의 달도 사라졌지
그 옛날 바다를 끌어당기고 밀어내던
위대한 달의 힘도
나는 잊었네 아득히 잊었네
- 유 하 시 ‘ 열 두개의 달’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에게 휴식이란 없다
그는 늘 고통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며
외출을 한다
벌새의 분주한 날개를 타고
상처받은 사람의 영혼은
언제나 몸 밖을 떠돈다
상처보다 깊은
어둠의 노래와 함께
하여 어느 날, 그대를 찾아온
죽음이라는 영원한 휴일도
그대 영혼을 만날 수는 없었으리
- 유 하 시 ‘슬픔이여, 좋은 아침 -빌리 할리데이에게
소니 롤린스, 뉴욕의 한 강가에서
밤이면 삶에 취해 색소폰을 불던 사내
쿨재즈라든가, 하드밥
그래, 인생의 반은 120%의 cool한 영혼,
나머지는 격정적인 하드밥의 육체
차디찬 영혼의 냉장고를 메고
하드밥의 리듬으로 날아가는 나방이여,
혼자서 상처의 끝까지 가보리라
별빛과 달, 나의 유일한 재즈 카페
호화 객석도 청중도 없다, 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난 연주하고 연주할 뿐,
저 강물이 수만의 귀를 일으켜세울 때까지
- 유 하 시 ‘ 재즈‘
운명이여,나를 내버려두게나
즉흥적으로 이 세상에 와서
재즈처럼 꼴리는 대로 그렇게 살다 가리니
난 마음의 불협화음을 사랑하게 됐어
계획되고,요약 정리될 수 있는 인생이란 애초에 없
었던 거야
대체 난 누굴 사랑했던 걸까
연주할 수 있는 상처가 남아 있다는 것,
그게 삶을 끌고 가는 유일한 힘일지도 몰라
내 사춘기의 스승은 세운상가였지
태양 아래 새로운 환락은 없다고
소니 티브이 화면의 그 금발 포르노 여배우가 그랬어
말린 지네와 해구신,그리고 페트하우스의 거리
욕망한다는 것,
그 자체가 쓰레기의 끝없는 재활용일 뿐이야
외설의 대폭발을 겪은 자만이
명상할 자격이 있어라?
썩지 않는 몸이란 없겠지,일상의 신비가 다 걷히면
부패가 결국 삶을 구원할 거예요
난 이미지의 노예야,......하지만
그리움이,더 이상 삶의 에너지가 아니길 바래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에
견딜 수 없이 내가 짓눌릴 때,
영혼에 구멍을 뚫고 색소폰을 불고 싶어
- 유 하 시 ‘ 재즈1’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문학과 지성사 시인선172
나이를 먹을수록
욕망은 역한 하수구 냄새를 풍긴다
그러므로 나는 시를 더 잘 쓸 수 있으리라
난 모든 종류의 학교를 경멸해
한데 왜 아직도 모범답안의 미소 안에
갇혀 있는 걸까
두서 없는 재즈의 육체가 부러웠어
너를 사랑한다, 말한 순간
너는 늘 거기에 없었지
헛세상, 헛마음, 헛기침
운명은 그저, 우주가 들려주는 소박한 선율이야
죽음은 좌절과 차원이 다른 것 같아
언제나 아픔은 살아 남은 자의 몫이지
그러나 나는 결코,
삶이 죽음의 아류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네
저녁의 막막함을 통과한 자만이
아침 햇살에 눈멀리라 믿어
가장 더러운 암흑은 자기 몸 안에 있지요
난 영원히 거기에 충실할 거야
- 유 하 시 ‘재즈2’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1995 문학과지성사
옛사랑이란 노래가 있지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거야...
때론 그렇게, 시보다 시적인 노래가 있지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들
세상은 왜 그만큼만 비유가 허용되는 걸까
내 맘보다 더 내 맘 같은 하늘
내 눈보다 더 내 눈 같은 별
내 노래보다 더 내 노래 같은 바람
돌아보면, 옛사랑
나는 개미처럼 절실했어
그래, 절망에 꿀을 입혀 꿀떡 삼킨 사랑
내가 사랑한 건 결국,
네가 아니라 그리움이었어
난 막연한 니힐리스트가 아니야
그림자보다 더 그림자다운 나를 분명히 보았거든
그리고 턴테이블의 거듭 튀는 음반처럼
나 지금 생의 한가운데를 걷고 있어요
- 유 하 사 ‘ 재즈3’
재즈 아티스트 쳇 베이커는
빌딩 위에서 투신 자살했다더군
마이 풀리시 하트,
그렇다고 재즈 같은 삶이 완성되었을까
죽음에 훌쩍 몸을 던지는
그 즉흥적 멜로디에 난 몸서리치지
마약 중독자와 삶의 중독자는 무엇이 다른가
삶에 중독된 만큼 난
땅에 뿌리박은 풀잎의 기쁨을 연주하고 싶어
난 마음의 질병과 함께 살아갈 거야
그가 마침내 나를 지겨워할 때까지
삶은 거대한 관악기
음악이 되고 싶은 자만이,
더운 바람의 절규가 되어
그 길고 어두운 울림통 속을 뚫고 들어가지
죽음이 과연 삶의 완결판이라 생각해?
들어봐,죽은이가 남기고 간 음성은
육체도 목숨도 없이, 저렇듯
산 자보다도 더 간절하게 삶을 노래하고 있는 것을
- 유 하 시 ‘ 재즈4’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문학과 지성 시인선172
한때 유행했던 것들
통기타와 포크송,올디스 벗 구디스
리칭과 진추하,박원웅과 함께
서금옥의 이브의 연가 아드리느를 위한 발라드
해도 잠든 밤하늘에 나는 못난이......
몸 또한 유행가를 닮아 있다는 생각,
지나간 유행가에도
한때 환희의 절정이 있었겠지?
그래,그 '한때`라는 의미가
모든 종류의 유행가를 구원하고 있는지도 몰라
몸 안에 격렬하게 머무르는 그 무엇,
유행가는 어느 순간 사라짐으로써 자신을 완성하지
그러니까 한창 유행될 때
소멸과 정답게 악수하자구
난 가끔은 바흐보다 조덕배에게 위안받고 해
놓쳐버리는 게 많으니깐 말야......
살맛이 나,가수는 노래하고 세월은 흐른다던
독일의 허수경이 보고 싶기도 해
그녀 말대로 모든 인연이란 비통한 거야
몸 있을 때,
부디 서로서로를 애창해주길 바래
- 유 하 시 ‘ 재즈5’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문학과 지성사 시인선172
해운대 백사장을 걸었다
무너지기 직전의 노을
오늘도 하루의 세상이 용서받는다
노을 같은 마음으로 살리라
내가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나를 낳았다는 생각,
욕망이 또 하루분의 나를 낳을 때,
파도의 운명을 생각했다
끊임없이 몰려오고 또 몰려오지만
결국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삶의 모래사장 위에 글씨쓰기
지우개처럼 몰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고작, 글씨체가 불만스러웠다
노을이 마지막 손길을 저어 물었다
네 상처의 색깔도 나와 같니?
난 아직 멀었고 했다
인생이라는 뻔한 내러티브의 드라마
나는 한치 앞만을 내다보며, 웃는다
- 유 하 시 ‘ 재즈6’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문학과지성사.1995.
세상은 내게 더러움을 선물로 주었지만
나는 그 더러움으로
생명의 하프를 뜯지요
나의 관객은 태양이야
어쩔 수 없이 변해간다는 것,
(예쁘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행복한 건 없겠지)
난 그레타 가르보의 심정을 이해해
내 마음의 스피커는 재즈 전용인가봐
추억의 건반,희망의 소프라노 색소폰
사랑의 베이스와 증오의 드럼이 뒤죽박죽 터져나오는
우린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라는 고정관념을 추억하지
동남 샤프 흑백 티브이의 철인 28호
우주의 왕자 빠삐,그리고 박정희
그 70년대의 객관적 상관물들
내 지나온 꿈에선 왜 낡은 만화책 냄새가 나는 걸까?
두 살인마 친구의 '우정`에 걱정하던 시절
90년대는 그렇게 기억될 거야
이제 진실은 어여쁜 키치의 이름으로나 불러지곤 하지
존 콜트레인이 연주하는 마음의 나라에서
언어를 버리고 실컷 울었어
절망만이 유일하게 나를 충전시켜주었지
내가 행복했다면,아마 달빛의 현을 보지 못했을 거야
- 유 하 시 ‘재즈7’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문학과 지성사 시인선172
겨울 아침,슬픈 붕어의 눈을 닮은
한 소년에게 이끌려 붕어빵을 한 봉지 샀다
붕어빵의 지느러미를 한 입 베어먹으며
내가 그에게 이끌렸던 이유를 생각했다
저 소년은 얼마나 세상의 절구통 속에 자신을 짓이겨
마음의 '앙코'를 만들었을까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앙코를 만드는 이와
앙코를 먹으치우는 이
난 참회하는 심정으로,덤덤한 표정의 붕어를 타고
그 앙코의 공장으로 가고 싶었다
이 세계의 허공에도
붕어빵 기계는 있다
내안의 이미지는 거기에서 찍혀서 나온 것이다
나를 부풀렸던 이스트 같은 꿈들
그가 텅빈 내 가슴속에
자신의 앙코를 덤으로 넣어주었다
- 유 하 시 ‘ 재즈8’
..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늙고 초라하여져서
먼지 투성이 국도에서 사과를 팔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을 뿐이야. 그것도 형편없이 푸
른 사과를. 저녁이 되어 아무도 이 푸른 사
과를 사러 오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확실해
질 때까지
-배수아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마음의 진창, 그것은 내 유일한 여정
나는 아무것도 깨닫지 않으리라
그리고 내게 주어진 시를 쓰며
기를 쓰며 살아가기, 느낌의 여성성에 기대어
세월의 불안, 경멸과 모독 기다림 따위들을 견디며 난
길 위의 먼지 묻은 사과를 , 형편없이 푸른 사과를
산다
이 세계엔 시금털털한 푸른 사과만큼의 희망이 있고
난 아무것도 깨닫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그것을 만지작 거린다, 모텔 카사블랑카 가는 길
난 섹스보단 그것을 향해 가는 스피드가 더 맘에 든다
스피드 속엔 멈추지 않는 황홀의 현재, 정지된
엑스터시의 지평선만이 존재하므로, 세상의 모텔은
거울로 가득 차, 나의 사랑은 너무도 흔하다
나의 언어는 작곡이 아니라 연주에 불과한 것
카사블랑카, 그 흔한 이미지들의 백화점이여
그대라는 하나의 총알, 그리고 나머지는
일상의 러시안 룰렛,
세상은 낡은 음악을 따라 서서히 붕괴해가고
난 머나먼 진창의 행로를 희망만한 크기의
푸른 사과를 만지작이며 걸어간다
- 유하" 모텔, 카사블랑카" 전문.
* 1995.<세운상가키드의 사랑> ..
내가 사는 동네 세탁소의 아가씨는
옷 수선을 아주 잘하죠
헐겁거나 꽉 조이는 바지들을
감쪽같은 맞춤복으로 고쳐놓지요
군더더기 없는 문장을 음미하듯
나는 그 옷을 입어요
솔벤트 내음 가득한 세탁소에 가면
그녀는 하얀 치아를 살짝 보이며 말하곤 하죠
세상을 떠돌다 돌아온 옷들에게
나는 많은 걸 배운답니다
그들에겐 새옷이 지닌 오만과 편견이 없지요
더러움의 끝에서 다시 순백의 빛을 보았으니까요
그녀의 세탁소의 갈 때면
그래요, 그녀의 세탁소에 갈 때면
난 그녀의 손길처럼 아름다운 문장을 꿈꾸어요
어둠의 끝에서 다시금 흰눈처럼 빛나는
옷들의 영혼을 꿈꾸어요
- 유 하 시 ‘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노르망디 해변,
금빛으로 익는 드넓은 초원 위로
양떼들은 구름과 더불어 놀고
젖은 바람의 외길을 따라 걷다 보면
저 멀리 물이 끝나는 곳
자그만 바위산 위에 세워진 수도원이 보여요
밀물이 들고 어둠이 내리면
그 몽생미셸 수도원은
거대한 水晶이 박힌 듯
별보다 시리게 빛나는 섬이 되지요
저 중세의 수도원은 얼마나 소중한 걸 간직해야 했길래
사람들 발길 닿지 않는 머나먼 곳에서
스스로 섬이 되어야 했을까
하지만 알고 싶지 않아요
(지나간 중세의 욕망은 한갓 뭉게구름일 뿐)
멀어서 아름다운 것들은
먼 대로 놔두어요
내 마음 아주 먼 곳에도
수정의 섬으로 빛나는 것이 있지요
다만 멀어서, 간직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
다가갈 수 없기에 영원히 존재하는 그 무엇
그 이름을 聖 그리움이라 부를까요
* Mont-Saint-Michel.
- 유 하 시 ‘몽생미셸* 가는 길’
[천일 馬화], 2000,Nov 문학과지성사
- 불의 폭포
대학 시절 난 겨울만 되면 울려퍼지는 크리스마스 캐롤을 마카로니 웨스턴의 주제가로 비유한 시를 쓴 적이 있다 이 땅의 크리스마스 문화가 가짜 서부극 같다는, 일종의 풍자 돌리기를 시도했던 것인데 실패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시거를 문 매키한 표정을 묘사하는 데 너무 흥분했던 것이다 문화적 거리 유지를 위해 차라리 별 감흥 없는 테렌스 힐을 소재로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긴 성탄절과 관계된 것치고 되는 일이 없었다 이브날 여자에게 선물 사들고 메리 메리 뛰어가다 무단 횡단으로 짭새에게 걸리질 않았나..... 性탄절답게 여관이 만원 사례이질 않나 그렇다고 텔레비에서 새로운 영화를 하나 성의나 데미트리아스 필름은 이제 걸레가 될 만도 한데 난 어릴 적 예수가 검투사 출신인 줄 알았다 화면마다 온통 타이슨 닮은 검투사 검투사 내일이란 말이 있을 수 없는, 마치 내일부터 영영 그녀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절박함으로 무단 횡단하던 내 모습? 종소리 울려라 회개할 시간이 많지 않다. 유황불과 휴거의 시간이 개봉 박두했음을 외쳐대는 전도사, 내 영화적 상상력은 늘 그의 엄지손가락에 가 있었다.
교회의 십자가도 내겐 엄지손가락, 내릴 것이냐 올릴 것이냐 사자와의 대결을 앞둔 검투사의 심정처럼 만판으로 흐드러지는 이 땅의 눈부신 불빛, 일회용 검투사 문화, 엄지손가락 문화 시는 실패했지만 지금도 나는 캐롤송에서 돌아온 장고의 주제 음악을 듣는다, 유황불을 뿜기 전 장고의 기관총구에 감도는 귀따가운 정적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내세만 있을 뿐, 오늘 젖 먹던 힘을 다해 찍싸자 하여, 그 누가 저 은총의 도시 가득 무진장 쏟아져내리는 불의 폭포수를 보며 폭포가 말라버린 내일의 암흑 따위를 생각하겠는가 엄지손가락만 내려지만 너도 나도 뜰 세상, 불의 폭포 밑 황홀찬란 온갖 색욕의 발전기가, 무단 횡단처럼 숨가삐 돌아간다
참, 그때 짭새에게 걸린 뒤가 궁금한 자를 위해 한마디. 은근히 환락의 휴거 당하기를 기대하던 성탄절 이브.....바람맞혔다고, 여자는 네로 황제처럼 엄지손가락을 내리더군 찍쌌지 뭐,
- 유 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7‘
자갈밭을 걸어간다
삶에 대하여 쉼없이 재잘거리며
내게도 침묵의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갈에 비한다면...
무수한 사람들이 나를 밟고 지나갔다
무수하게 야비한 내가 그들을 밞고 지나갔다
증오만큼의 참회, 그리고
새가 아니기에 터럭만큼 가벼워지지 않는 상처
자갈밭을 걸어간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우리는 서로에게 자갈이 되어주길 원했다
나는 지금, 자갈처럼 단련되려면 아직 멀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난 알고 있다, 저 단단한 자갈밭을 지나고 또 지나도
자갈의 속마음엔 끝내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상처는 어찌할 수 없이, 해가 지는 쪽으로 기울어감으로
정작 나의 두려움은
사랑의 틈새에서 서서히 돋아날 굳은 살,
바로 그것인지 모른다
- 유 하 시 ‘ 자갈밭을 걸으며‘
술 한잔의 시여,
밤 하늘은 문득 낮아져 나는
별의 강물에 몸을 담근 채
바람이 낳은 늑대의 푸른 갈기와
온갖 열매들이 간직한 우주를 노래한다
가끔은 내가 보고 느낀 세상의 울타리 밖으로
나를 훌쩍 던져버리는, 이 따뜻한 취기
은하수에 사는 애인아
나이 먹는 일이 슬프지만은 않구나
술처럼 익어가는 내 눈동자는
아련히 감지한다. 진홍빛 술에 담긴
마법의 세상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포도나무, 분주한 꿀벌들
지상의 언어들을 다 읽고 돌아온 바람과
그 바람들에 즐겁게 마음을 내주는 포도알들
햇살의 지혜로 이루어진 수액과
생명의 폭포인 수액의 움직임,
한때 나는 술을 마셧으나
이젠 술의 처음을 마신다
한잔의 술이 떠나온 그 모든 삶의 풍경들을,
따뜻한 취기가 데려다준 이 마법의 세상은
바로 그 곳으로부터 왔다
- 유 하 시 ‘한때 나는 술을 마셧으나‘
시집 :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서른셋, 갈수록 멀리 쓸려가는 삶
재즈처럼, 예정된 멜로디의 행로 바깥에서
한참을 놀다, 아예 길을 잃었네
잠파노처럼 모래알을 부여안고 울기엔
너무도 이른 나이, 나만의 이름 모를 샛길에
토마토를 심고 아무도 찾지 않는 열매를 위해
하모니카를 불었지 바람의 입술을 빌려,
멜로디의 길을 읽은 연주자에게, 알 수 없는
그리움만이 나침반이 돼주었어
당신....... 독약의 감미로운 향기
사랑이 나를 즉홍적으로 변주할 뿐이었네
마음은 그냥 샛길의 연못에 남아 놀고 있는데
육신이 뒤꿈치의 끈으로 북을 두드리며
세월을 떠밀고, 차가운 심장의 하모니카여
나 상처 없이, 내일도 없이 흘러가리
무덤도 잡을 수 없는 저 나비의 발길로
- 유 하 시 ‘재즈처럼 나비처럼 -리 오스카, (나의 길)‘
*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오래 전 내가 홀로 기거했던 아파트를 지나칠 때면
옛 애인의 전화번호를 바뀐 줄 뻔히 알면서 다이얼을 돌려보듯
그 방을 올려다보곤 한다 밤새
불을 밝힌 채 누군가를 기다리며 술잔을 기울이던 그 방안의 나
그 생생했던 현실감을 텅 빈 실루엣으로 바라보다 그런 생각을 한다.
얼마나 나를 지나야 나를 만날 수 있는가
구겨진 회수권처럼 세운상가를 떠돌던 제복의 음울함이라든가
이태원 디스코텍 라이브러리의 사이키 불빛 아래
심해어처럼 發光하던 내 몸짓, 그 어느 순간도
나라는 현실감의 絶頂에서 비껴나 있어본 적이 없었으나
오늘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기껏 양파 껍질처럼 벗겨져 사라져버린
무수한 내 현실감의 절정들을 추억하는 일일 뿐
한 사람을 사랑하여 죽음을 생각하던 고통
그 사람을 위해 아흔아홉 편의 연시를 쓰던 손가락의 떨림도
이제는 내 것이 아니다
허물 벗는 양파처럼 나는 나를 허물 벗으며 간다
함부로 내뱉었던 숱한 사랑의 말들도
진실보다 거짓이 뜨겁게 진실했던 욕정도
청춘이 생의 전부인양 늙음을 박대했던 한 시절도
벗어놓은 허물처럼 사라졌다
얼마나 나를 잃어야 나를 만날 수 있는가
나는 매일 나의 낭떠러지를 살고 있다
한 발짝 걸음을 옮기면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그 캄캄한 生의 허방 앞에서, 어제의 내가 그랬듯
한갓 양파 껍질이 될 현실감의 절정을 붙잡고 뒹굴고 있는 것이다
그 껍질의 독한 향기에 취해
한때 저 방안에 살았던 헛것의 구체성을
살덩어리의 따스했던 감촉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 유 하 시 ‘ 오래 전 내가 살던 방을 바라보며‘
꽃 피는 소리, 민들레의 음표들,
브라스 밴드 행렬로
나무를 타고 오르는 나팔꽃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바람의 종달새 울음
그리고, 내 수만의 몸들을 빠져나와
달려가는 영혼의 바람소리
그대가 받은 이 生도
아주 우연한 음악
- 유 하 시 ‘ 우연의 음악’
** 유 하 ; 1963년 전북 고창 출생, 세종대학교 영문과 및 동국대 영화과 졸업. 1988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 김수영 문학상 수상. 현재 '21세기 전망' 동인. 첫 시집 <무림일기>에서 '무림이 곧 삶의 세계'가 된다는 간단하면서도 중층적인 인식을 통해 대중문화와 키치문화를 시라는 장르에 멋들어지게 접목했다. 이 시집의 제목부터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왜곡된 상황을 강하게 풍자하기 충분했고, 무척이나 쉽고도 재미있게 읽히는 이 시집을 통해 그는 문단과 대중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선 물질적 ·성적 ·정치적 욕망이 뒤엉켜 들끓고 있는 타락한 우리 사회에 대항하기 위한 풍자와 희화의 언어 번제(燔祭)를 지낸다. 시인은 그 욕망의 집결지를 '압구정동'으로 상정하고 있다. 시인은 작금의 요란 ·소란 ·현란한 사회의 대척점에 '하나대'라는 훼손되지 않은 원형적인 상징 공간을 배치한다. 압구정동이 체제가 만든 욕망의 통조림 공장이라면, 하나대는 "오, 정글어가는 한 마을이/저 모든 것들을 오래 오래 길러온 어머니"('정글어가는 하나대를 바라보며')의 품속과 같은 고향이다. 그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은 '압구정동' 거리이지만, 그의 눈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멀리 있는 '하나대'이다.
그는 도시의 '무서운 아이'라기보다는 농경 문화가 침투시킨 순치되지 않는 '도시 게릴라'에 가깝다. 그가 룩스 높은 찬란한 문명의 빛이 '광명'이 아니라 '죽음'이 될 수 있음을 규지(窺知)하는 연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21세기, 삶의 무수한 불빛 속에서 나는, 지금 무슨 빛을 그토록 열심히 좇아가고 있는가?!.. 의심하자.
시집) [천일마화] 문학과지성사,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열림원,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문학과지성사,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