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읽는 오늘의 詩 〈1859〉
■ 두보나 이백 같이 (백석, 1912~1996)
오늘은 정월(正月) 보름이다
대보름 명절인데
나는 멀리 고향을 나서 남의 나라 쓸쓸한 객고에 있는 신세로다
옛날 두보(杜甫)나 이백(李白)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먼 타관에 나서 이날을 맞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 고향의 내 집에 있는다면
새 옷을 입고 새 신도 신고 떡과 고기도 억병 먹고
일가친척들과 서로 모여 즐거이 웃음으로 지날 것이언만
나는 오늘 때 묻은 입든 옷에 마른 물고기 한 토막으로
혼자 외로이 앉아 이것저것 쓸쓸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옛날 그 두보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이날 이렇게 마른 물고기 한 토막으로 외로이 쓸쓸한 생각을 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어느 먼 외진 거리에 한 고향 사람의 조그마한 가업집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이 집에 가서 그 맛스러운 떡국이라도 한 그릇 사먹으리라 한다
우리네 조상들이 먼먼 옛날로부터 대대로 이날엔 으레히 그러하며 오듯이
먼 타관에 난 그 두보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이날은 그 어느 한 고향 사람의 주막이나 반관(飯館)을 찾아가서
그 조상들이 대대로 하든 본대로 원소(元宵)라는 떡을 입에 대며
스스로 마음을 느꾸어 위안하지 않았을 것인가
그러면서 이 마음이 맑은 옛 시인들은
먼 훗날 그들의 먼 훗자손들도
그들의 본을 따서 이날에는 원소를 먹을 것을
외로이 타관에 나서도 이 원소를 먹을 것을 생각하며
그들이 아득하니 슬펐을 듯이
나도 떡국을 놓고 아득하니 슬플 것이로다
아, 이 정월 대보름 명절인데
거리에는 오독독이 탕탕 터지고 호궁(胡弓) 소리 뺄뺄 높아서
내 쓸쓸한 마음엔 자꾸 이 나라의 옛 시인들이 그들의 쓸쓸한 마음들이 생각난다
내 쓸쓸한 마음은 아마 두보나 이백 같은 사람들의 마음인지도 모를 것이다
아무려나 이것은 옛 투의 쓸쓸한 마음이다.
- 2003년 이동순 편 <백석 시전집> (창작과비평사)
*오늘은 음력 1월 15일로 정월 대보름날입니다. 예전부터 대보름날은 우리 고유의 중요한 세시풍속 절기로 오곡밥과 나물 반찬을 차렸으며, 부럼과 귀밝이술 등을 먹었습니다. 또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마을 가운데 모여서 줄다리기나 윷놀이를 하기도 하고, 저녁에는 아이들끼리 모여서 몰래 집집마다 들어가 밥을 훔쳐 먹기도 하고 쥐불놀이를 하며 즐거워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풍속은 어느덧 거의 사라져 버렸고, 시골에서도 별다른 행사 없이 보름을 지내고 있더군요. 우리 동네에서는 그래도 올 보름, 가가호호 백설기 떡을 돌리는 것으로 갈음했습니다만.
이 詩는 고향을 떠난 화자가 먼 이국에서 대보름 명절을 보내며 느끼는 쓸쓸한 정회를 드러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시인은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 땅에서 대보름날을 맞이하며, 즐거웠던 고향에서의 명절 모습과 타국에서의 외롭고 고달픈 처지를 대비하며 자신의 쓸쓸한 심정을 애잔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국땅에서 느끼는 쓸쓸함을, 중국 당나라의 대시인 두보(杜甫, 712~770)와 이백(李太白, 701~762)이 고향을 떠나 방랑과 은거의 삶을 살아갈 때 느꼈을 고독이나 쓸쓸함과 같은 마음일 것으로 여기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모습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자신도 이백과 두보에 못지않을 조선의 시인이라는 높은 자부심도 은연중 나타나고 있을 것이고요.
이 詩를 읽다 보면, 낯선 중국 땅에서 대보름을 보내는 시인의 쓸쓸하고 지친 모습이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듯하군요. 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