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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문화 개방으로 일본 가수들의 한국 공연이
가시화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 팝 음악계에 새로운 별이
떠오르고 있었다. 'First of may'라는 타이틀의 앨범을
발표한 스키모토 시게루라는 신인 가수가 음반 판매량
500만 장을 돌파하며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것이다.
스키모토 시게루는 그 앨범 한장으로 일본의 모든
음악 순위 차트를 휩쓸면서 순식간에 데츠야 고무로와
B'z의 인기를 잠재워 버렸다.
그보다 어린 팬들을 타깃으로 하는 Smap까지도
심각한 타격을 입을 정도였다.
스키모토 시게루는 데츠야 고무로처럼 키보드를
주축으로 하는 밴드 구성을 선택했지만 음악은 상당히 달랐다.
테크노가 아닌 록을 선택한 그는 전기 기타의 강렬한
선율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데츠야 고무로 음악의
매력으로 평가되는 세련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문 연예 면은 연일 스키모토 시게루의 기사로 뒤덮였고
한국에서의 인기도 급격하게 치솟았다.
아이들은 엑스 재팬의 브로마이드를 떼어 내고
스키모토 시게루의 사진을 붙였다.
"이것 좀 들어 봐."
신철희는 들어서자마자 CD부터 꺼내 들었다.
대체로 침착한 편인 신철희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서태지는 시큰둥하게 CD를 받으며 말했다.
"나중에 시간나면 들어 볼께."
"도대체 이유가 뭐야? 왜 이렇게 처져 있는 거야?"
흥분해서 말하는 신철희와는 달리 서태지는 여전히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끔 그럴 때도 있지,뭘 그래.항상 유쾌할 순 없잖아.
그리고 지금은 좀 피곤하니까 나중에 얘기하자.제발
그렇게 해줘"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달리 어떻게 해볼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신철희는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뭔가 서태지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은
분명한데 그로서는 짐작 가는 데가 없었다.
웃는 얼굴로 신철희를 대하기는 했지만 사실 서태지는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자신의 가치관과 판단 근거들이 모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제까지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어 왔던 것에까지
심각한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거기다 도대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염세적인 발상이 꼬리를 물었다.
서태지에게는 이른바 슬럼프라는 것이 없었다.
항상 노력하고 음악만 생각했던 시간들.
그런데 지금은 그것들이 시지프스의 의미 없는 노동처럼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서태지의 마음 속은 폐허로 변했다.
제멋대로 내려앉은 돌덩이들이 바람에 날리는 것 같았다.
신철희는 신철희대로 생각이 많았다.
그는 알바트로스에서의 실패가 있은 후의,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올 결정을 하던 때의 서태지의 의욕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서태지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열정을 가지고
일에 매달릴거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돌아온 지 벌써 넉 달이 다 되어 가는데도
서태지는 아무런 의욕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전의 서태지는 휴식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상해져도 단단히 이상해졌어.'
신철희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서태지와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신문 배달원도 아닌데 왜 맨날 찾아와?"
서태지는 차갑게 말을 건넸다.
기분이 나빴지만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싸우기는 싫었다.
어차피 쉽게 얘기가 풀릴 거라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전생에 나는 서태지의 엄마였나 봐.그렇지 않고서야
이 꼴을 몇 년째 볼 이유가 없잖아?'
마음을 가라앉힌 신철희는 달래는 말투로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해봐.내가 도울 수 잇는 일이
있으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해줄께."
그러나 서태지는 고마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의 눈은,네 영혼이 그렇게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해?
라고 묻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신철희의 말투가 워낙 공손했던지라
험악하게 대꾸하지는 않았다.
"일단 모든게 지겨워졌어."
서태지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어갔다.
"모차르트 좋아해?"
"갑자기 무슨 소리야?"
"글쎄,모차르트를 좋아하냐구."
"물론 좋아해.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걸 묻지?"
"나도 좋아해."
"그게 다야?"
"내가 왜 모차르트를 좋아하는지 물어 봐 주겠어?"
"왜 좋아하는데?"
"모차르트는 말이지.내가 알기로는 창작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있던 유일한 천재야.베토벤이 귀머거리가 되면서까지
음악을 만들었던 것에 비하면 도대체 그에게는 고민이 없었어.
그냥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음들을 악보에 옮기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난 모차르트를 좋아했어.그처럼 되고 싶었지."
"그런데?"
서태지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눈가에 몰려 있는 주름들은 그가 몹시 피곤하거나 몹시
귀찮다는 표시였다. 둘 중에 어떤 것일까.
후자가 아니라면 좋을 텐데.
"그런데 나는 모차르트가 아니었어.나는 항상 고민하고
힘들어했지.아닌 척했지만 내가 음악을 만들고 반복해서
고친 것은 머릿속에서 생각한 대로 음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있나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음악을
만드는 일은 즐거우면서도 고통스러웠어.그리고 외로운
일이었지."
"............"
"데뷔 초기에는 정상에서 밀려나게 되거나 대중들에게서
잊혀질까 봐 겁내기도 했었지.그러나 정말로 겁나는 건
그런 게 아니었어.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든지, 내 머릿속에서 음악에 대한
기호들이 모두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 어떤 날은
그게 무서워서 잠이 안 와."
신철희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서태지가 보내야 했던 불면의 날들을.
그건 창작의 주체가 되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일들이야 눈을 비벼가며 밤을 새면 가능한 것들이다.
그러나 뭔가를 만들어 내는 일은 다르다.
한 줄의 글을 쓰기 위해서 48시간을 보내는 때가 있는가 하면
다음에 이어질 한 소절의 음을 찾아내기 위해서
졸린 눈으로 밤새 커피를 홀짝여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소설로 읽었던 프로 야구 선수의 슬럼프 이야기가 생각났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한없이 어렵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떻게 시속 140km로 날아오는 공을
방망이로 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그는 한 번도 공을 맞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서태지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야.행복했던 건 그런 고통을
감수하면서 만들어 낸 결과물들이 마냥 예뻐만 보였을 때지.
그러나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면? 자신의 창작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정말 문제군."
"그래,나는 요사이 이런 생각을 많이 해.어쩌면 신은
나에게 얄팍한 재능을 안겨 주고 내가 그것을 가지고
이리저리 발버둥치는 것을 보면서 낄낄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불경한 생각이군."
"솔직히 말해 봐.그동안 내가 음악을 하면서 얻은 것은
무엇이지? 돈? 명예? 그것이 모든 것을 다 보상해 주나?
나는 이제 길거리도 마음대로 못 걸어 다녀.사생활이
없어져 버렸다구.그뿐인 줄 알아.내 청춘은 가고 있어.
시들어 가고 있다고."
"늙는 것은 누구나 무서워해.나도 죽는 것보다 늙는게
더 무서워."
"또 있어.도대체 언제까지 내가 사람들 귀에 솔깃한
음악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아주 오랫동안."
"아니,그건 틀린 생각이야.자만이나 오만이지.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음악이 안 되기 시작하면?"
"다른 일을 해야겠지."
말해 놓고 신철희는 자신의 이야기를 주워 담고 싶었다.
서태지는 심각하게 자기 고민을 이야기하는데 자신은
너무 편하게만 대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악 말고 다른 일을 하라니.그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신철희가 자신의 실언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는 사이에
이야기는 결국 랭보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랭보를 잘 알 거야.그는 작품을 많이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일찍 죽은 것으로 알고 있지.
그러나 그는 오래 살았어.스무 살 이후로는 시를 쓰지 않고
아프리카에서인가 장사를 하다가 오십 살쯤 되어서 죽었지."
"그래,잘 알고 있어."
"나는 랭보처럼 될 거야.음악을 그만두겠어.이제 한국에선
못 살아.북유럽의 오래된 마을로 가서 혼자 살 거야.
라디오도 없이."
말을 마친 서태지는 제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가 버렸다.
신철희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것 참 문제가 심각하군.그런데 왜 갑자기 북유럽?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군.서태지의 성격으로 봐서는
당장 내일이라도 자기 생각대로 하게 해 달라고 떼를 쓸 텐데.
걱정이네.하는 수 없지.당분간 아예 나타나지 않는 수밖에.
당장이야 펄펄 뛰겠지만 조금 수그러들면 그때 가서 다시
얘기를 해보는 게 낫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