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이후 휴일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국민통합과 국정개혁을 위해 노심초사하시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필자는 대통령님께 한없는 신뢰와 존경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대통령님,
지금 우리나라가 안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모두들 어렵다고 합니다.
일부 언론에서는 의도적으로 위기감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 제 눈에도 훤히 보입니다만, 어떻든 약간 위태로운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되돌아보면,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는 어김없이 이름 없는 민초 중에서 수 많은 애국자가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에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친 수많은 의병, 독립투사, 의사, 열사 뿐 아니라 6.25 전쟁 때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전몰군경에 대한 고마움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애국자에게 그의 희생과 공적에 대해 정당하게 보은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국가적 위기를 맞았을 때 그 누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습니까?
제가 오늘 이렇게 로버트 김을 거론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통령님,
그런데 지금 이역만리 미국 땅의 차가운 감옥에서 20세기 마지막 애국자라고 불러도 결코 지나침이 없을 로버트 김(한국명 김채곤)이 90나이에 치매로 고생하시는 아버님을 그리며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1996년 당시 불편했던 한미관계의 틈바구니에 끼어, 엉뚱하게도 ‘간첩 공모 죄’ 라는 누명을 쓰고 말입니다.
고래로부터 풍수지탄(風樹之歎)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내버려두지 않고, 부모님께 효도를 드리고자 하니 기다려 주시지 않는 구나....." 라고 한탄 했던 옛 선비의 고사에서 나온 사자성구로 "효도를 다하지 못한 채 어버이를 여윈 자식의 슬픔을 이르는 말"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애국자 로버트 김에게 적어도 풍수지탄의 한(恨)을 심어주어서는 안되겠다는 절박감에서 이렇게 대통령님께 간곡한 호소문을 쓰고 있습니다.
이른바 로버트 김 사건에 관한 전말과 그의 신상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서 상세하게 쓰겠습니다 만, 어쨌든 그가 대한민국 무관(대령 백동일)에게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당시의 북한군의 동향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간첩 공모 죄'로 기소되었는바 '공모 죄' 라면 반드시 복수의 '범죄자'가 존재해야 함에도 왜 정보를 제공 받은 사람은 비밀리에 귀국하여 평소처럼 군복무를 하고 있었는데도, 유독 그만 혼자서 복수의 범죄자에게 적용되는 '공모 죄'의 희생양이 되어야했는가를 생각할 때, 이 '공모 죄'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이 무한 책임을 저야 하며 또한 로버트 김에 대해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커다란 부채를 지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로버트 김은 당시 미국 해군 정보국 문관의 신분으로 컴퓨터 전문가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1996년 강릉 해안에 무장공비를 태운 잠수함이 나타났을 당시, 미군 당국은 가까운 일본과 멀리 떨어진 호주 군 당국에는 모든 관련 군사정보를 제공하고 있었음에도 직접 무장공비 소탕을 책임진 한국군에는 일체의 군사정보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이유가 당시의 불편했던 김영삼-클린턴 양정부의 외교관계 때문이라고 미루어 짐작은 합니다만, 그 구체적인 이유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위치에 있던 로버트 김은, "시집온 신부가 항상 친정 걱정을 하는 심정"에서 소박한 '애국심'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군사비밀을 날마다 다루는 그의 시각에서 볼 때, 그가 넘겨준 자료는 이미 군사비밀이 아닌 단순히 '한국 측에 알려주지 않은 자료'에 불과했었습니다.
이제, 이글을 읽는 일반 독자들을 위해 로버트 김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 나중에 다시 이 문제의 해결 방안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버트 김은 누구인가?]
로버트 김은 1940년 1월 21일 여수에서 태어났으며, 한국 이름은 김채곤이다.
60년대에 한국은행 부총재를 지냈고, 70년대에 구 공화당 여수지역구 국회의원을 지낸 김상영(89세)옹의 4남 1녀(채곤, 형곤, 은정, 성곤, 영곤) 중, 장남이다.
동생은 15대 여천시.군 지역구 국회의원을 지냈던 김성곤 중앙청소년수련원장이다.
로버트 김은 여수 서 초등학교, 여수 서중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고를 거쳐 한양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했다. 66년 미 퍼듀 대학원에 입학했으며 69년, 미 항공우주국(NASA)에 취직해 4년간 근무했다. 78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미국 해군정보국(ONI)에 취업해 19년 동안 컴퓨터 전문가로 근무해왔다.
[구속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미국 해군정보국(ONI)에 문관으로 근무하던 중, 미국의 국가기밀을 빼내 워싱턴 주미한국대사관의 해군 무관에게 넘겨줬다는 혐의(간첩 및 간첩음모 혐의)로 96년 9월24일, 미 연방 수사국(FBI)에 체포. 기소돼 현재 미 펜실베니아 알렌우드 연방 교도소에서 현재 6년 7개월째 복역 중이다.
그가 구속된 계기는 96년 9월 강릉 앞바다에 좌초된 북한 잠수정 사건이다.
한국은 북한 잠수정의 침투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좌초돼 떠오른 후에야 침투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미 해군정보국에 근무하고 있던 로버트 김은 미군이 사건 발생 3일전부터 북한 잠수정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컴퓨터에는 매 3시간마다 이동경로가 기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한국은 북한과 주변국에 관한 정보의 90%이상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며 "미국은 북한 잠수정의 이동사실을 알면서도 우방이라는 한국에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또 "모든 정보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조국의 현실이 답답했고, 남북이 서로에 대한 정보도 없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돌발적인 사건이 터질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매우 두렵게 생각했다"며,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았으며 가난한 친정을 도와주는 마음으로 정보제공을 요청해 온 주미 한국 대사관의 해군 무관 백동일 대령에게 알려줬다"고 밝혔다.
[로버트 김은 과연 스파이(?) 인가?]
그 일로 로버트 김은 구속되었다. 그에게는 단순한 기밀누설죄가 아니라 국방기밀 취득 공모죄(간첩죄)가 적용됐다.
기밀누설죄의 형량은 3년, 그러나 그에게는 징역 9년에 보호감찰 3년이라는 중형이 내려졌다.
정보를 미국 시민이나 일반인이 아닌 한국 정보장교에게 제공했기 때문이다.
같은 우방국이라면서도 막상 북한에 대한 정보를 독점해온 미국, 그 정보의 일부라도 얻고싶어 구걸하듯 로버트 김을 찾아간 한국의 정보장교, 가난한 친정을 돕는 마음으로 정보를 제공한 로버트 김, 이 얼마나 기구한 만남이었던가!
그러나 한국의 정보장교는 무사히 귀국했고, 미국은 국가안전에 어떠한 위협도 발생치 않았다. 오직 로버트 김만 9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이다. 한국 정부는 벌써 7년째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마치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이...........
[로버트 김 사건의 전개 과정]
로버트 김은 아무런 대가없이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로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북한 관련 정보와 군수물자 관련 정보를 우방국으로서 함께 나눌 수 있는 수준의 정보로 간주하고 이를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을 통해 조국에 제공했다. 그 대가로 미 형무소에서 9년형의 옥고 중 현재 7년째 옥고를 치르고 있는 그에 대해 한국정부와 대다수 한국 국민들은 직간접적으로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
사건 발생 초기에는 로버트 김의 지인들을 중심으로 '로버트 김 석방위원회'를 구성해 국내와 미국 교민들을 상대로 대미 정부 석방 촉진과 가족 돕기 운동을 활발히 전개한 바 있으나 기대하는 성과를 얻지 못하고 말았다.
한국정부는 사건 발생 초기에 정보 수혜자인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을 서둘러 철수시켜 버리고 이를 로버트 김 개인이 책임지게끔 발을 뺏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로버트 김 혼자 모든 멍에를 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한국정부의 무책임한 자세, 대다수 한국 국민들의 소극적 자세와 무관심 등으로 인해 로버트 김 석방운동은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감옥에서 쓸쓸히 환갑을 넘긴 로버트 김은 '고도절해(孤島絶海)에 갇힌 빠삐옹' 같이 줄기차게 스스로의 권익을 찾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서 고국에도 도움을 요청해 왔다.
2001년 9월 로버트 김은 변호사의 도움 없이 혼자 항고자료를 준비해 감형을 호소했으나 마지막 항고(抗告)마저 미 연방정부 법원에 의해 기각되고 말았다. 이제는 미 대통령의 정치적 사면에 의한 감형 및 조기석방을 기대해 볼 수밖에 없게 되는 처지가 되었다.
[한국 정부가 개입을 꺼리는 미묘한 정치, 외교현안]
로버트 김 사건은 1996년 김영삼 정부 때 발생한 미묘한 한미간 국방 및 외교적 사건이나 이러한 정보제공이 정권 유지 차원의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김대중 정부도 고민하면서 풀어야 할 국가 현안과제였다. 그러나 소위 국민의 정부로 스스로를 칭한 현 정부는 아무런 해결책도 강구하지 못한 채 또다시 노무현 정부에게 공을 넘기게 되었다.
정부는 초지일관되게 로버트 김이 미국인이고 이 사건은 미국법에 의해 처리된 결과이기 때문에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반면 피해 당사자인 로버트 김은 비록 미국적(美國籍)을 취득한 미국인 신분이나, 모국인 대한민국이 "군수 물자 관련 취급자들이 공명심에 들떠 막대한 국가 예산을 단순 정보에 의해 집행"하는 등 북한의 군사 및 국제적인 군수 관련 정보부족으로 우리나라 국방이 제대로 방향을 못 잡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이 여겨 정보를 제공했다고 자신의 정보 제공 동기를 밝히고 있다. 정작 대한민국 정부는 그로부터 정보수혜를 받고 그가 위기에 처하자 미국국민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로버트 김은 96년 한국에서 국방 관련 고위급 인사들이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내 주요 국방관련 기관을 방문하는 자리가 마련되었을 때 미 해군성 문관의 신분이라는 이유로 관련 고위인사들의 통역안내를 맡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장교들과 교류를 갖게 되고 그러한 과정에서 '젊은 정보장교의 애국심의 공백을 메워 주려는 충정'의 발로로 미 해군성이 보유하고 있는 군사관련 정보를 자발적으로 제공하게 된 것이다.
[무책임한 한국정부]
이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김영삼 정부는 "로버트 김은 귀화한 미국시민이니 미국 법을 따라야한다"라고 잘라 말했다.
로버트 김에게 정보 제공을 부탁한 사람이 한국의 정보장교였다는 것은 꺼내지도 않았다.
97년 2월 '로버트 김 석방위원회'가 발족돼 석방 서명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면서 100여명의 국회의원이 서명에 동참했지만 정부는 침묵했다.
김씨와 유사한 사건으로 86년 유태계 조너선 폴라드가 체포되었을 때 이스라엘 정부는 그가 자국의 스파이임을 인정했다. 그런 후 외교채널을 통해 구명운동에 나섰다. 총리가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는 자리에서는 항상 그의 석방을 직접 요구했던 것과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비록 그는 명백한 간첩죄를 범했기에 석방은 되지 않았지만, 세계 여론은 이스라엘 정부의 자국민 보호 의지를 높이 평가했었다.
반대로 로버트 김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는 한국정부에 대해 세계 여론의 비난은 매우 거세게 일었었다.
[로버트 김과 가족의 근황 ]
로버트 김은 현재 모범수로서 감옥이라지만 그래도 비교적 자유스러운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과 시간에는 히스패닉 계 이민자 출신 수감자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치면서 하루 빨리 사면이나 출옥을 하여 병상에 있는 아버님을 뵈올 날을 고대하고 있다.
그의 부인 장명희는 혼자 몸으로 두 자녀를 모두 출가 시키고, 한동안 교회 자원봉사자로서 최소한의 생계비를 마련하다가, 지금은 지병인 신경통이 재발되어 집에서 쉬고 있는 중이다.
그의 부친 김상영 옹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노환에 치매까지 겹쳐 지금 수원 근교의 유료 양노원에서 투병하고 있다.
작년 한 때는 사경을 헤매었으나, 지금은 위험한 고비는 넘겼으나 우리 나이로 90의 연세인데 어떻게 내일을 기약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살아생전에 아들을 꼭 보겠다는 의지 하나로 생명을 스스로 연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풍수지탄(風樹之歎)의 한(恨)'을 언급한 소이이다.
그리고 동생인 김성곤 원장, 필자 본인(이강인), 사건의 당사자였던 백동일 예비역 대령, 로버트 김 관련 글을 쓰고 있는 신기섭교수, 묵묵히 로버트 김 가족에게 후원금을 모금해서 송금해온 박성현사장 등 5인이 지난 1월부터 오늘 현재까지 수시로 모여, 로버트 김의 구출과 출옥 후 후원 사업자금 마련을 위해 '로버트 김 후원회 창립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조용히 그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그의 무죄 주장이나 무조건 석방을 요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경위야 어찌되었든지, 일단 미국 실정법을 어긴 것으로 사법적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가만 두어도 2005년 9월이면 만기 출소를 하게 된다. 그러나 출소 후 감당해야 할 3년간의 '보호감찰 기간'이 로버트 김의 마음을 지금 억누르고 있다. 해외여행의 자유가 박탈당하는 3년은 또 다른 '창살 없는 감옥'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4년 5개월 이후가 되어야 그리운 아버님을 뵈올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여기에 바로, 필자가 노무현 대통령님으로 하여금 이번 5월 방미 길에 미국 부시 대통령에게 로버트 김의 사면, 석방을 요청하도록 이 호소문을 쓰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5년 후에야 한국에 올 수 있다면, 과연 그때까지 90 노옹께서 살아계실 수 있을까?
나는 절대로 불가능 하리라고 확신한다.
[로버트 김의 소박한 꿈]
로버트 김은 지난 1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에게 사신을 보낸 바 있다.
언론을 통해서도 공개된 그 편지에 다음과 같이 한국으로 영주귀국후의 자신의 포부를 밝히고 있다.
"(전략)... 저는 형(刑)이 끝나는 대로 조국으로 돌아가서 정부와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가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우한 청소년소녀들을 모아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기숙사와 학교를 설립하여 일반교육과 정신교육을 병행해 그들에게 애국, 애족, 겸손한 인성과 최신 국제감각을 가르친 후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교에 진학시키려고 합니다.
과거 문교정책의 실패로 공교육이 자리를 잡지 못하게 되어 우리나라의 청소년소녀 교육개선이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한국에서도 할 수 있는 영어교육도 검증받지 못한 조기유학의 유행으로 외화를 낭비하고 있는 가족은 두 집 살림하고 아동의 한국어와 국사 동부 그리고 정서 교육을 배울 기회가 없어지니 조국의 미래가 걱정됩니다. 자식은 부모 밑에서 커야 좋은 자식이 되고 키운 부모도 좋은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조기유학의 꿈도 꿀 수 없는 청소년소녀들을 가르쳐 그들이 장성하여 사회에 나가서 국가를 위해 쓰임 받을 수 있는 좋은 인재들을 배출시키는데 저의 여생을 바치려고 합니다. 이 교육에 계속 관심 가져 주시 옵고 지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는 차기 대통령님께서 말씀하신 소외계층에 따뜻한 나라를 만드시겠다는 계획의 일부도 되는 것입니다. ....(후략)."
위에서 보듯이 로버트 김은 귀국 후에 '조그만 기숙학교'를 세워서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애국, 애족 교육'과 '영어 교육'을 무료로 실시하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다. 한국 정부는 물론 우리 국민들도 그의 꿈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도움의 손길이 미치기를 소망한다.
다시, 대통령님께 호소드립니다. 지금까지 장문의 글을 읽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글을 마치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취임 초기에 '북핵 문제' 등으로 잠시 동안 불편했던 한미 관계는 이번 '이라크 파병동의안 국회통과'로 다시금 50년 한미 혈맹관계를 복원했습니다. 그리고 금년은 한국인의 미국 이민 100년을 맞는 뜻깊은 해가 됩니다.
물론 아직도 '북핵 문제'는 초미의 '한미 현안'입니다.
따라서, 이번 방미 시에 논의될 '어젠다(Agenda)'에는 로버트 김 사면, 석방 촉구문제가 정식으로 포함되기에는 국가 안보상황이 그렇게 한가롭지 않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님,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일수록, 대통령이 '애국자'를 기억해내고 그를 위해 조그만 보은을 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대통령님께서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마치기 전, '커피 브레이크(휴식 시간)'에라도 '애국자 로버트 김'의 조속한 사면 및 석방을 요청해 주시기를 앙망합니다.
애국자를 돌보지 않는 국가라면, 나라가 또 다시 위기에 처했을 때 어느 국민이 자신의 목숨을 나라에 바치기를 기대하겠습니까.
대통령님의 대미 장도에 건강과 행운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3/04/10 오후 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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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동향.... 나는 뭘하고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