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 앨리스 [김광명]
1
태어나면서 알았어
세상은 내가 발명한다는 것을
돋아나는 귀를 자르며 뛰어다니는 당나귀와 등으로 기
어 다니는 강물과 초침만 돌고 있는 시계탑과 퇴근하지 않
는 한낮
2
3월에는 붉은 열매가 하늘을 덮었지
봄이 누군가에게는 추억이겠지만 내겐 한 번쯤 나를 쌍
년이라 불렀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계절
이상한 나라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앞만 보고 걸을 때 욕
을 먹는 나는 자란다 다 자라면 손톱 때만큼 작다
작아도 토끼굴에 가려면 서걱서걱 소리가 나는 망막
이 어울리겠지
3
고양이가 사는 나무에는 잎이 달리지 않네
가지 사이로 노란 새들이 배를 부풀려 날고
지저귐에 맞춰 나를 물어뜯는
고양이는 혀가 뾰족한 해부학자
4
오늘은 지하철을 타고 칭찬을 먹으러 다녀왔지 심술 가
득한 미나리들이 눈폭풍처럼 휘몰아치네
어쩌면 세상은 하나같이 들통난 거짓말 같을까
나는 날마다 미술관에 가고 싶고 생트 빅투아르에 가서
할머니가 되고 싶어 손톱을 깨물 때 물감처럼 내가 번지면
좋겠어
지금은 살아서 지옥을 스케치하는 시절
5
이마를 짚으려고 키가 자랐지 하얀 프릴이 달린 앞치마
를 두르고
너무 자라면 북극에 닿을까 무서워
자른 머리통을 품에 안고 '밀과 보리가 자라네'를 불러
주었지
6
난미끄럼틀이 좋아
떨어져도 즐겁잖아
걱정 마 페티코트를 걸친 꼬마 아가씨
우린 모두
새소리에 찢어진 구두 한 짝
하늘엔 쪼아 먹다 만 붉은 열매들, 지상엔 내가 돌아갈
집이 모래처럼 널려 있지
* 앨리스 증후군: 자신의 몸, 물체 등이 다른 크기로 보이거나 시공간이 왜곡
되어 보이는 증상. 보통 두통을 동반함.
- 시로 여는 세상, 2023 가을호
* 김광명 시인은 2022년 '시와사상'으로 등단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많이 시를 읽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