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더 귀한 것
눅12:13-21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가치관은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느 때는 유익하게 작용하지만 어느 때는 엄청난 잘못된 결과를 맞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바른 가치관은 모든 이들에게 유익하게 작용하지만 잘못된 가치관은 모든 사람에게 고통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우리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할 것인가를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들에게 설교하실 때에 어떤 청년이 와서 자기네 형제간에 재산 나누는데 분쟁이 생겼으니 공평하게 처결해 달라고 제소하여 왔습니다. 형의 횡포에 억울함을 당한 아우의 진정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의 풍속에는 무슨 분쟁사건이 생기면 그 동리 장로들의 집안 마당이나 큰 길가에 무리를 모아 놓고 시비곡직을 가리어 판결하는 예가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민간재판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덕망이 높으시고 말씀을 잘 하시는 동네 장로들보다 월등하게 생각한 동민 중의 한 청년이 이렇게 부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하시고 곧 이어서 교훈하시기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엄히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재물보다 인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비유 중에서 생명 중심의 종교를 발견하고, 생명의 가치를 온 천하보다 귀중하게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의 제목을 "보다 더 귀한 것"이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재물보다 사람이 더 귀한 것입니다.
오늘의 읽은 본문 눅12:15의 말씀에 보면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고 하였습니다. 본문의 탐심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것은 본문 눅12:13의 말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는데 말씀에 보면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물질 문제로 형제와의 관계에 다른이를 개입시키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처사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이 바로 탐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탐심을 골3:5의 말씀에서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라 하였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지리 않는 것이 탐심이요, 세상에서의 욕심을 탐심이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기에 재물보다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신앙이요, 믿음이요, 은혜입니다. 형제간이나 부자간, 또는 부부간에 재산으로 인하여 고소, 고발하는 일이 동서고금에 많이 있습니다.
물질이란 있다가도 없어지기 쉽고, 없다가도 있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잃으면 다시 얻기 어려운 것은 사람관의 관계입니다. 인간의 윤리가 재물보다 귀중함을 모르는 곳에 무슨 도덕이 있고, 인간의 행복이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물질보다 사람을 도 사랑하고 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신앙그것이 참 신앙이요. 믿음인 것입니다.
둘째로는 육신보다는 영혼이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유일하게 소개된 특별한 비유입니다.이 비유에서 먼저 주어진 교훈의 내용을 검토하여 본다면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는 부자의 행복이란 오히려 염려와 위험과 불행이 따른다는 점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누군가가 자기의 재물을 빼앗고 자신을 해칠까 밤낮 염려하며, 소유한 재물 때문에 위험을 당하고 위험을 만날 때가 많기 때문이며, 부하기 때문에 비명횡사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로 어리석은 부자는 물질만 생각하고 영혼은 생각지 못하였다는 것이며, 셋째는 어리석은 부자는 사람보다 물질을 더욱 중요시하였고, 하나님 보다도 물질을 더 중요시 한 것입니다. 넷째는 어리석은 부자는 물질의 원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그런가하면 다섯째는 어리석은 부자는 현세의 생에 치우치고 내세의 생을 생각지 못하였으며, 여섯째는 생명이 하룻밤 즉 순식간에 끝나는 것을 몰랐으며,일곱째는 사후에 생각은 전혀 해 보지 못했으며, 여덟째는 하나님의 선고가 내리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 말씀들은 사람의 귀중성은 그 육체에 있지 않고 그 영혼에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권력이 있고 잘난 체 하여도 사람의 영혼은 어찌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10:28의 말씀에 보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시하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장하는 것이지 사람이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주장하고 계신 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육신의 생살지권이 이런 인간에게 있는 줄로만 아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도저히 그 머리털 하나라도 건드릴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욥의 역사에서 배우게 되는 사실은, 사단이 제아무리 욥을 괴롭게 하고, 심지어는 죽이려고 하여도 하나님이 승인하시지 않으시니 못 하였다는 것입니다. 또, 그 자녀와 종들은 일단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니 죽었다. 그런고로 우리의 육신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속한 줄 알고 사람 앞에서 언제나 담대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순교자 {헛스}는 박해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내 육체는 결박해도 내 영혼은 결박할 수 없으며, 너희가 내 신체는 불사르나 내 신앙은 불사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고로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해 육신보다는 영혼이 더욱 귀중한 것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인간의 영혼보다도 예수님이 더욱 귀합니다.
오늘의 읽은 눅12:20-21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하였습니다.이 말씀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물질보다도 사람이 더욱 더 귀하고, 인간의 육체보다 영혼이 더욱 귀하고, 인간보다 예수님이 더욱 귀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선악과를 따먹고 당장에 죽지 않고 그들은 930년이나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죽을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의 한 예를 든다면 마치 소나무나 잣나무 같은 원목을 베었으나 한 달쯤은 입이 푸르른 채있지만 그 나무는 벌써 죽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법률적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죄수는 벌써 죽었습니다. 다만 집행하는 시간적 여유가 있을 뿐입니다. 중병환자는 잔명이 붙어 있으나 의사의 진단은 며칠간 생존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죽고 말 것입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는 물질이 풍성하여 그 육체의 안락과 먹고 마시는데 몰두 하였고, 사후에 그 영혼 문제가 전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생각하지 못하였으니 미련한 부자입니다. 이 세상에 귀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 그리고 인간의 취미, 오락, 연구 결과, 육체적인 향략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잠시 뿐이요, 또 피상적이요, 육체적일 뿐이니 보다 더 귀한 것을 찾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중요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 보다 더 귀한 분입니다. 찬송가 102장에 보면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습니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습니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주 예수는 우리의 생명이시며, 함께 영원히 살 소망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은 현실적인 삶에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보다 나은 것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바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특성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현세에는 3대주의가 있습니다. 첫째는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짖는 유물론의 물본주의임며, 둘째는 민주주의자들이 말하는 인간존중의 인본주의이며, 셋째는 인본주의를 초월해서 살아야 할 신본주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물질주의인 공산주의 보다, 인간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인 인본주의가 났고, 인간중심의 인본주의 보다 인본주의를 초울한 신본주의 삶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기에 이 세상에서 아무리 물질이 귀해도 인간 윤리만 못하고, 눈에 보이는 인간의 육체는 그 인간의 영혼만 못 하고, 이 세상의 그 어떤 인간보다도 예수님이 더욱 더 귀중하신 존재이심을 확실히 믿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크신 은혜가운데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좋은글로 섬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온전히 드려지는 주일 맞으시길 기도합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크신 은혜가운데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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