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대학원 석사과정에 재학 중인 여자 사람입니다.
나이가 꽉 찼으니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시험을 보려 합니다. (나이는 따로 안 밝히겠습니다. 논란 방지.)
그런데 꼭 된다는 보장도 없으니 플랜 B로 대학원을 다닙니다.
시험 아주 살짝 보다가 주변 권유로 들어왔습니다. 경력 인정 안 돼도 학력으로 나이 벌충하려는 이유도 있었고요.
백수 1년에 사회 생활 2년 좀 넘게 하고 왔더니 석사과정 진입이 늦어 박사과정 선배들이 저보다 어립니다.
올해 안에 안 되면 박사 과정 시작할 생각인데 박사도 사회 경력 없으면서 나이 많으면 일자리 구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여성은 취직한 직후 시집가고 그만둘까봐 안 써주는 곳도 있습니다. (레알;;)
고로 학위도 더 미룰 수 없어 휴학도 못합니다.
그래서 이번 학기 등록했습니다.
스케줄을 점검해 보았습니다.
학업에 들어가는 시간을 계산한 결과, 상상을 초월하더군요.
여기에 대학원 다니며 시험 준비할 생각하는 분들 많으시죠.
직업인의 재교육을 위한 특수대학원 아니고 전업 학생을 위한 '일반대학원'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 적어봅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오히려 회사 다니는 것보다 시간 내기 어렵습니다.
직장인은 비교적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만 전업 학생은 스케줄이 참 자주 바뀌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학기 3과목을 듣습니다. 이건 대체로 그렇습니다. 4학기 안에 졸업하려면요.
그리고 저희 학과 내부 세미나를 2개 합니다. 이건 거의 의무입니다. (안 하는 사람은 내부 커뮤니티에서 소외당합니다.)
일단 학교 생활에 쓰는 시간을 어림잡아 계산해 봅니다.
발제 소요 시간: 3과목 각 1회+1회+2회(수강 인원이 적은 과목이라 2번) 총 4회 * 최소 3일 준비= 12일
수업 준비 시간: 14회 강의(중간 기말 포함하면 16회인데 시험 기간 보통 수업 없음) * 3과목 * 1일= 42일
(아티클 자체를 읽는 건 2~3시간이지만 토론하려면 자료 조사해야 합니다. 영문 아티클이면 1일 이상 걸릴 수도)
세미나 준비 시간: 8회(16주 동안 격주 진행)* 2개 * 0.5일 = 8일 (상대적으로 수업 준비보다 헐거워 반나절이면 가능합니다)
연구 주제 선정: 텀페이퍼 쓰는 수업 2개 * 자료 찾아 제출하고 리젝트 되고 다시 보충하고 해서 대략 7일= 14일
텀페이퍼 작성: 2개 수업(참고로 첫 학기에는 4개 썼습니다;) * 최소 4일 = 8일
(4일은 정말 최소고 확정된 주제도 쓰는 과정에서 방향 바뀌기도 해서 더 오래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프로포절까지 쓸 때가 4일이지 풀 페이퍼를 써야 하면 설문지 돌린다거나 인터뷰하고 정리하는 데 10일,
팀플이라면 회의 시간 플러스 알파;;; 익숙해지면 빨라지긴 하지만 변수가 많고요. 저는 작성 속도가 조금 빠른 편
입니다. 2~3일 밤 새서 몰아 쓰니..;;;; 아무튼 대체로 저 정도 투자해야 성적 잘 받습니다.)
12일 + 42일 + 8일 + 14일 + 8일 = 84일을 학업에 쏟습니다.
이번 학기는 3월+4월+5월 = 92일입니다.....제게 남은 시간 92-84=8일은 아마도
학회 참석, 특강 참석, 대학원 행사 참석, 술자리 등에 바쳐질 겁니다. 이것들은 대체로 의무적입니다. 강의 대체 출석 인정 등.
술자리는 '정보' 교류의 시간이기 때문에 꼭 필요하고 또 권고됩니다. (어떤 때는 회사 다니던 시절보다 더 중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꼭 텀페이퍼 관련된 것 아니어도 소소하게 에세이를 쓴다든가 하는 작은 과제들이 있죠.
프로포절 자격 요건 얻기 위한 영어 시험과 전공 졸업 시험도 봐야 하고요.
물론 '일' 단위는 대략적인 것이라 비는 시간이 많죠. 그런데 그 남는 시간에는 최소한의 경제활동을 하게 됩니다. 알바, 과외 등.
경제활동 공공연히 못 하게 하시는 교수님도 있는데 하도 불황이다보니 부모님들 사정이 안 좋아서 대체로 몰래라도 합니다.
그나마 저는 조교 안 하지만 조교하는 친구들은 9시 출근 6시 퇴근입니다. 일 많습니다. 등록금 감면되는 대신에 대가가 큽니다.
조교도 여러 종류있는데 연구 조교 하면 연구실 매일 출근하고 졸업 전에 반드시 연구 논문 따로 작성해야 합니다.
학부에서 타전공 한 사람들은 '선수 과목'이라고 학부생들 듣는 수업도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언제 시험을 준비할 것인가!!!!!!!!
저 스케줄이 차례로 오는 것도 아니고 겹쳐서 닥치기 때문에 매주 2~3일 서너 시간씩만 자면 주말 하루 이틀은 낼 수 있습니다.
욕 먹을 각오 하고 세미나도 절반은 안 들어갈 수 있고 페이퍼도 조금 성의 없이 쓸 수는...없습니다.
석사 이후의 삶은 교수에게 달렸고 나에 대한 교수의 판단에는 수업 결과물과 선후배 동기들의 평가가 반드시, 복합적으로 고려되기 때문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평판을 관리해야 한다는 거죠.
아무튼 스터디를 따로 할 처지가 못 됩니다. 다른 팀원들에게 피해를 줄 게 뻔합니다.;;;;;
저 스케줄이면 박사과정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실 수도 있겠네요.
일단 세미나 등 내부 스케줄이 없거나 적은데 대신 텀페이퍼에서 고퀄리티를 요구합니다.
생업이 따로 있는 분들의 경우 학교 오래 다닐 각오하고(등록금은 매 학기 내죠..) 한 학기 수업을 1개나 2개만 들으십니다.
팀플을 하면 사실상 거의 참여 못하시는 경우 or 개인 스케줄에 맞춰 혼자 다 쓰시고 기다려준 팀원의 이름을 함께 올려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퍼블리시가 기대되는 퀄리티의 페이퍼 아닌 경우 석사 과정들이 이해해 드리는 편입니다. '선생님'이라 불릴 정도로 나이도 많고 업계 경력도 긴 분들이시니까요. 물론 개인차가 크고, 성실히 임하시는 분도 매우 많습니다.
길게 썼는데.
사실 지금도 과제할 시간에 이러고 있습니다.
내가 왜 공부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 암시랄까요.
학부 시절.. 옛날 같으면 한숨부터 나오고 좌절했을 텐데 오히려 지금은 서늘하고 단단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더 이상 우왕좌왕할 시간이 없으니까요.
소설가 권지예의 '작가의 말' 한 구절이 생각나네요. 글은 "코 끝에 화약 냄새를 맡으며 뒷덜미에 예각의 서늘한 감촉을 느끼며" 쓰는 것이라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이 나이에 대학원을 다니는 이상 내가 앞으로 결혼은 못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집안 경제 상황이나 제 나이나 경력이나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때요. 인생을 바꾸는 투자란 말입니다.
다음 학기에는 학위 논문도 써야 하는데. 학기 초 프로포절이라 이번 방학에는 그 준비도 해야 하는데.
제가 올해 안에 붙는다면 기적이겠죠.
하지만 저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오래도록 방황한 만큼 아무것도 피하지 않고 맞서 보겠습니다.
언젠가 알찬 합격 후기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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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저는 이런 마음으로 대학원을 다닙니다.
아, 이상의 내용은 학교마다 개인마다 다르니 'just'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저의 넋두리가 일반대학원을 고려하는 여러 회원님들께 썩 괜찮은 참고 자료가 되면 좋겠습니다.
다들, 건승하시길.
첫댓글 완전 빡시네요.
두 마리 토끼를 잡기는 쉽지 않죠. 선택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큰 도움 되었습니다. 이런 실상(?)을 모르고 대학원 덜컥 진학했더라면 고생 무진장 했겠죠. 고맙습니다.^^
정말 공감합니다. 제 이야긴 줄 알았어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각오는 하고 들어왔지만 발제 하나 막아내기도 숨이 꼴깍꼴깍 넘어가네요. 지도 교수님께서 학업보다 취업을 우선 순위에 두라고 하셨지만...발제까지 면제받을 순 없잖아요. 제가 시간 안에 준비 안 해 가면 수업 진행 자체가 불가능하니ㅠ.ㅠ 이런 스케줄 보면 대학원은 정말 학문에 의지가 있는 사람이 들어와야 맞는 곳이란 생각이 들어요. 저도, 이래 봬도, 미약하나마 학부 때 소홀했던 전공 공부 다시 하는 즐거움이 있어 버티고 있답니다.^^
완전 공감합니다ㅠㅜ 화이팅해요!
저 이번 학기 수업 발제 6개 됐답니다..으하하하 본의 아니게 그 중 4개를 2주에 몰아 합니다 크윽. 역시나 화이팅입니다!^^
맞아요 저두 일반대학원 졸업자로서,,쉽게 생각하면 취업은 그 직업을 프로페셔널하게 가지려고 준비하는 것이라면, 일반대학원 역시 프로페셔널 학자, 교육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고 그런 학생들을 대상으로 만든 커리큘럼이기 때문에 절대 만만하지 않아요;;잘못들어왔다가 이도 저도 안되는 케이스 엄청 많습니다. 취업이 목표면 학부 졸업후 단기로 바짝 준비해서 취업하세요 ㅎㅎ특히 여자 석사졸업생은 괜히 서류통과만 어려워집니다 ㅜㅡㅠ
맞아요 좋은 말씀 하셨어요. 학자, 교육자를 직업으로 갖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말, 진짜 그래요. 일반대학원은 언론인의 꿈을 0순위로 놓고 학자나 교육자를 진지하게 1~1.5 순위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나 권할 만해요. 그렇지 않은 사람한테는 정말 고통스러운 과정일 겁니다. 저 위에 쓴 스케줄은 기본이고 학차가 올라갈수록 점점 압박이 커지는 걸 느끼거든요. 남녀 차이는 있겠지만 학부 졸업한지 3년? 안쪽인 사람이라면 저 역시 취업 준비에만 올인하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