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할까? 가는 데마다 따라다녀 줄까.아님 혼자
내버려두고 보디가드처럼 원거리에서 사고 안 나게
보살피기만 할까."
"보살피다니 완전히 보모 같군.나는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해.
같이 다녀 주지 않겠어?"
"얼마든지.그럼 나중에 '서태지와 함께 보냈던 일주일'
이라는 제목으로 책 내는 것 허락해 주는 거다."
"질렸어.왜 사람들은 나만 보면 돈 생각을 하는 걸까."
"네 얼굴에 돈이라고 쓰여 있으니까."
"진심으로 하는 얘기야?"
"하하,농담.다만 네가 너무 까탈스럽게 구니까 소중한
기록들이 지나치게 적게 남아서 하는 말이지.
사실 막심 고리키 같은 소설가가 쓴 [레닌과 함께 했던 시간들]
같은 책은 사료로서 얼마나 소중하게 대접받는데."
"리키,나는 혁명가가 아니라 음악가야."
"그러니까 더 소중하지.사실 이제 우리의 삶에서
[레닌과 함께 한 시간들] 같은 책은 더이상 의미가 없어.
팝 스타는 현대의 신화이자 혁명가지."
"무슨 혁명가?"
"사람들의 지갑 부피를 바꿔 놓는 혁명가."
"그게 혁명가야.강도지.하여간 빈정거린 것이 아니길 바래."
"오! 무슨 섭섭한 말씀을."
리키는 서태지에게 편하게 이야기를 했고 서태지도 그게 좋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리키는 글도 쓰고 노래도 만드는 사람이었지만
서태지가 보기에 그의 음악은 공해였다.
글은 재미있게 쓰는 것 같았다.
리키의 집에는 자신의 창작 방향을 드러낸 표어가 붙어 있었다.
첫째, 고상한 척하면 쏴버리고 싶다.
둘째, 괴상한 척해도 쏴버리고 싶다.
셋째, 재미없는 얘기를 늘어놓으면 쏴버리고 싶다.
서태지는 리키야말로 혁명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그는 쏴버리고 싶은 것이다.
누구 말대로 '살아 있는 동안은 날마다 투쟁' 인 인간이다.
내게도 쏴버리고 싶은 것이 있었던가.
리키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한국에서 보냈던 시간이 고등학교 시절이었다는 것은
서태지와 리키가 친해지기 쉬운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리키는 언제나 한국의 학제를 놓고 초등 감옥, 중등 감옥,
고등 감옥이라고 불렀다.
서태지 역시 학교에 다닐 때는 몰랐지만 그곳을
뛰쳐나온 후부터는 그곳이 감옥인 줄 알았다.
서태지가 그 말을 하자 리키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럼 우린 탈옥자들이네."
리키 역시 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태지는 특별히 잘 먹는 음식이 없었다.
그러니까 특별히 싫어하는 음식도 없었다.
그저 삼겹살 정도가 그가 좋아하는 먹을거리였다.
리키는 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정종을 마셨다.
서태지는 콜라만 마셨다.
리키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체류 기간은?"
"한 일주일."
"체류 목적은?"
"노는 것."
"간단하군.좋아.일주일이면 놀기엔 적당한 기간이지."
"대신 원칙은 지켜줘."
"노 알코올! 노 섹스! 노 데인저 말이지?"
"그래."
"볼 때마다 하는 생각이지만 참 신기한 인간이야."
"이도 저도 아닌 인간보단 낫지 않나."
리키는 제법 술을 마셨다.
그는 자신이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체질이라고 했지만
그게 허풍이란 건 서태지도 알고 있었다.
정종 큰 잔으로 혀가 풀리고 두 잔이면 다리가 풀리고
세 잔이면 의식이 풀려 버리는 게 리키의 음주 성적표였다.
그렇다고 그가 아무 때나 과음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리키는 기분이 좋을 때만 술을 많이 마셨다.
그러니까 리키는 지금 기분이 좋은 것이다.
리키의 기분은 서태지에게도 금방 전염되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숙소를 정해 놓고 동경 시내를 거닐었다.
한국에서와는 달리 일본에서는 하루가 끝난다는 느낌이 없다.
한국에서는 새벽 한 시면 거리에 인적이 끊어지고 하루가
끝나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일본은 달랐다.
거리에는 밤새 인적이 끊이지 않았다.
하루 단위로 시간이 구별되지 않는 나라.
그것이 서태지가 느끼는 일본이란 나라의 특징 중 하나였다.
서태지는 새벽 두 시쯤 리키와 헤어졌다.
리키는 자기도 아예 서태지의 옆 방을 얻어
함께 지낼까 했지만 그것은 사양했다.
하루 중 얼마라도 완전한 혼자이기를 원하는 것이
서태지의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서태지는 신철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심을 시켜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신철희는 깨어 있었다.
그는 이미 서태지가 한국을 빠져 나간 것을 알고 있었다.
제법 화를 내는 척했지만 리키와 함께 있다는 말을 듣고는
하여간 잘 있다가 오라고 했다.
서태지는 잘 있기는 하겠지만 돌아갈지는
모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 저쪽에서 신철희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피곤했지만 서태지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리키와 일주일 동안 지내며 놀기로 한 건 잘한 일 같았다.
리키는 편한 존재였고 그와 함께라면 얼마든지 떠들고
다녀도 부담이 없을 것 같았다.
가끔 자기가 작곡한 노래를 들려 주겠다고 억지를 쓰는 것
말고는 리키는 흠잡을 데가 없는 친구였다.
# 서태지가 결정한 첫 번째 방문지는 하라주쿠였다.
거기에는 자신의 청소년기를 떠올리게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어른들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곳에서는
하루 종일 거리 콘서트가 열렸다.
아마추어치고는 제법인 밴드도 많았다.
서태지와 리키는 길가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면서
아이들의 모습을 한참 동안 구경했다.
서태지가 보기에 일본처럼 '우리' 가 아닌 '나' 만이
존재하는 곳도 드물었다.
한국에서 듣던 것과 실재하는 일본은 전혀 달랐다.
동경을 세계에서 제일 깨끗한 도시 중 하나라고들 했지만,
질서와 청결은 아주 특별한 곳에서만 지켜지고 있었다.
거리는 지저분했다.
신사복을 빼입은 남자들이 거리낌없이 담배 꽁초를 집어 던졌고,
아무 데나 침을 뱉었다.
입에 침이 마르게 일본을 칭찬하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무얼 보고 간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서태지는
펑크도 아니고 하드 록도 아닌 이상한 음악을 연주하는
크레용 밴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밴드를 크레용 밴드라고 부른 것은 머리 색깔이
전부 각각이었기 때문이다.
"리키,요즘 일본 음악은 어때?"
"항상 그렇지.너무 보수적이고 편파적이고 일률적이야."
"왜 그렇게 생각하지?"
"항상 그래.왜 일보의 음악이 다양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마치 일본의 음악이 서너 가지 메뉴만 가지고 장사하는
식당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건 무슨 말이야?"
"사람들은 익숙한 것만 들어. 데츠야 고무로 아니면
B'z 혹은 V6이나 SMAP,그도 아니면 아무로 나미에 같이.
이번에 나온 스키모토 시게루 역시 마찬가지고.안전한 걸
좋아하거든.복잡하고 새로운 것을 찾는 건 극소수야."
"스키모토 시게루?"
"왜,몰라? 지금 일본에선 최곤데."
"음악이 좋은 모양이지."
"아니라니까.스키모토 시게루는 곡예하는 것처럼
데츠야 고무로와 B'z사이에서 줄을 타. 그러나 기본은
언제나 안전 제일주의지."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야."
"한국도 그래?"
"뭐라고 할까.한국에서는 이름만 다른 똑같은 음식이
나오면서도 자 오늘의 메뉴는 바로 이것! 하고 장난을 치지."
"재미있는데."
"사람들은 단지 열광할 대상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듯 쉽게
자기가 좋아하는 팀들을 바꾸지."
"네 팬들도 그래?"
"아니,그들은 날 정말 좋아해."
"참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지난번 그 앨범 좋던데?"
"[윤회]?"
"나는 아주 흥미 있게 들었어.근데........"
"근데 뭐?"
리키는 잠시 주저하고 있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음악에 대한 평가나
취약점을 말하는 것은 좋은 일이 못 된다.
특히 서태지처럼 자신의 음악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서태지는 진지한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리키가 계속 주저하고 있을 때, 서태지가 말했다.
"나,음악 그만하려고 해."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건 알 거 없고 그러니까 내게 편하게 얘기해 줘도 된단 말이야."
"[윤회]는 글쎄, 모든 것들이 잘 조화되어 있어.그런데
내 느낌은,굳이 비유를 들자면 마치 정박있는
배 같다고나 할까......."
"배?"
"그래,호화로운 짐을 싣고 외양도 화려하지만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 같은 느낌이었어."
"듣던 중 흥미 있는 분석이네."
"아니 그냥 내 생각일 뿐이야.마치 좋은 물건들이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것 같단 말이야.진열을 잘하거나 아니면....."
"무슨 말인 줄 알겠어.요는 스타일이 없다는 말 아닌가?"
"글쎄,그걸 스타일이라고 표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정리가 안 되어 있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에너지가
부족한 것 같아.혹시 그 노래들을 춤을 추며 불렀어?"
"아니,이번에는 춤은 없었어."
"본 적은 없지만 그럴 것 같았어.예전에 네가 부른 노래들은
춤 선수들과 함께 몸을 흔들며 부른다는 이미지가 있었잖아.
이번 것엔 그게 없더라구."
"차라리 그런 확실한 이미지가 낫다구?"
서태지는 리키에게 그 말을 들은 것 하나만으로도 일본을
방문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물을 보고 듣는 것은 누구나 똑같지만 리키는
그것에 대한 표현 방법이 남달랐다.
글을 쓰기 때문에 그럴까.리키의 남다름은 길고 지루한
분석보다 명확하게 이미지를 전달해 주었다.
보석이 가득 들어 있는 출항하지 않는 배.
그것보다 [윤회]를 명확하게 설명하게 주는 것이 또 있을까.
앨범 작업을 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것이라면
좀더 많은 얘기를 나누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라주쿠에서 오후 시간을 다 보낸 두 사람은 다시
동경 시내로 돌아왔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리키와
헤어진 서태지는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어제부터 쌓인 피로로 몸이 무거웠다.
둘째 날에는 아키하바라와 신주쿠에서 전자 제품을
구경하는 것으로 소일했다.
쇼핑 계획은 없었지만 몇 가지 물건은 너무 예뻐서
그냥 나올 수가 없었다. 여행중에 짐을 늘리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리키가 놀렸지만 차마 그 예쁜 물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셋째 날엔 도시 외곽의 주택가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고
다음 날에는 숙소에 누워 하루 종일 TV만 보았다.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한국 프로그램과 비슷한 것이
많아 이해하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다섯째 되던 날은 일본 디즈니랜드에서 놀이 기구까지
타가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저녁에는 리키의
미국인 여자 친구인 앨리스까지 함께 맛있는 식사를 했다.
앨리스는 리키가 한국 최고의 뮤지션이라고 서태지를 소개하자
크게 흥미를 보였지만 [윤회]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서태지는 조금 섭섭한 느낌이 들었다.
서태지는 리키와 다음 여행지인 북유럽으로 어떻게
이동할지를 상의했다. 리키는 자기도 같이 가고 싶지만
일 때문에 힘들 것 같다면 혼자 떠나는 여행을 만류했다.
처음 가는 길이고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
어떻게 혼자 가느냐는 거였다.
불안하기는 서태지도 마찬가지였지만 여행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날 밤 서태지는 꿈을 꾸었다.
자신의 의식이 알골 카페를 방문한 것이다.
여자는 그대로 있었다.
아니 자신이 방문한 것이 아니라 서태지의 꿈속을
알골 카페가 찾아온 것 같았다.
여자는 여전히 그를 왕자라고 불렀다.
서태지는 반가움에 먼저 말을 걸었다.
"그렇잖아도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요. 지금 당신이 말한
북유럽으로 여행을 갈 생각이었거든요."
여자는 슬픈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당신에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나 봐요.
내 의도는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넓어진 마음으로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기 바랐던 것인데 말이죠."
"물론 나는 그 전보다 많은 생각을 해요. 그러나 내가
있었던 곳을 가 보고 싶어요."
"왕자는 결코 초라해진 모습으로 자신의 고향을 찾지 않아요.
그건 거지나 하는 일이죠."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나는 궁금한 건 못 참아요."
"그것 역시 거지나 하는 생각이죠. 방금 당신이 한 말은
마치 '난 배고프면 무슨 일이라도 벌일 수 있어'라고
하는 것과 같지 않아요?"
"............"
"부르지도 않는 곳에 찾아가지 말아요.왕자는 자기를
연호하는 곳을 화려하게 방문한답니다."
"그곳에서 나를 부른다구요."
"물론이죠.당신이 가진 재능이 당신을 그곳으로
가게 만들 거예요."
"그러나 난 지금 안정이 안돼요.고민이 많아지면서
음악을 할 수가 없다구요.그래서 혹시 그곳을 다녀오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죠."
"삶에 대해,사는 일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어떻게
저차원적이라고 생각하죠?"
"어차피 살아야 하는 인생에 대해 고민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아요."
"그래도 가겠어요."
"전에도 말했지만 지금 당신의 모습은 미래의 당신의 모습이
만들어 놓은 거예요. 단지 이 선에서 멈출 때만 가능하죠.
당신은 뭐가 정말 문제인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서태지는 여자에게 벙어리 소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여자는 차갑게 대답했다.
"연민과 자비도 지나치면 흉해져요. 그리고 그것은 결국
그 소녀가 바라는 게 아니에요.소녀는 당신에게 잠시지만
따뜻한 온기를 주었어요.그러나 당신이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소녀의 온기는 독이 되어 당신의 혈관을 뻣뻣하게
굳어지게 만들 거에요.그 소녀가 그걸 원할까요?"
"비약이 심해요."
"당신에게는 그 소녀 말고도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많아요.
그들에게 일일이 사랑을 주겠어요? 만나고 도와 주고 하면서?
당신이 할 일은 그것이 아니에요.당신은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즐거움과 사람을 줄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답니다. 아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거예요."
말을 마친 여자는 천천히 뒷걸음질쳐서 서태지의 꿈속을
빠져 나갔다. 여자의 어깨 너머로 알골 카페가 불에 타고
있었다. 카페는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서태지는 카페 쪽으로 달려갔지만 달려가면 갈수록
카페는 멀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마지막 바람이 그 흔적까지도 지워 버렸고
여자의 마지막 말이 들려 왔다.
'또 다른 당신의 협조자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 사람을 만나면 당신은 미래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될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