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 편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낱말이 풍기는 냄새부터 대상자보다는 실무자의 편의를 고려하는 듯합니다.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 덕분에 여러 가지로 빠르고 손쉬운 방법들이 생깁니다. 인력까지 줄일 수 있으니 그 사용자는 일부러 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력 소모를 줄인다는 것은 한 마디로 비용 절감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더 많이 사용해야 합니다. 문제는 말 그대로 ‘행정 편의’가 중점이고 상대방이 되는 주민들의 입장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잘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함께 누릴 수 있는 편리한 점들이 많겠지요. 그러나 현대 기술을 능히 따라가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가 쉽게 경험하는 일입니다. 공공기관에 전화를 합니다. 안내 방송이 나오지요. 내가 필요한 사항보다 몇 배 많은 분량의 음성안내를 참고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기다렸다가 해당 번호를 누릅니다.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또 다시 기다려야 합니다. 몇 단계 거쳐서 혹시 상담원을 연결해 달라고 하면 지금은 상담자가 모두 통화 중이니 기다리거나 다음에 전화하라고 합니다. 기다렸다가 다시 전화합니다. 똑같은 순서를 반복해야 하지요. 행여 같은 결과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아쉬운 사람은 바로 ‘나’이니 또 기다려야지요. 기술이 발달한 현대를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우선 참고 기다리는 것부터 몸에 익혀야 하겠습니다.
담당 부처 간의 업무 연결도 필요합니다.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못하다면 당장 아쉬운 주민이 해당 관공서나 부서를 일일이 찾아다녀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디서든 자기네 하는 일만 고집합니다. 자기네 업무 지침만 따르려 합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해당 관청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으면 앞뒤 가릴 것도 없습니다. 그냥 탈락입니다. 아무리 개인 사정을 이야기해보려 해도 불통입니다. 직원의 입장에서는 귀찮은 일일 수 있습니다. 해줄 필요도 없지만 행여 거기에 시간을 내려 하면 상사가 가만두지 않습니다. 그러자고 너를 고용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할 것입니다.
의사로부터 ‘심장 발작’ 위험 때문에 당분간 일을 하지 말라고 당부를 받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머리도 이상이 없고 손발 사지가 다 멀쩡합니다. 얼마든지 일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일할 수 있는 상황에서 실업급여를 신청하기는 곤란합니다. 관공서 직원에게 그 사정을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른 길을 찾아주는데 오로지 인터넷으로만 신청이 가능하답니다. 여태 목수의 일만 해왔을 뿐 컴퓨터를 상대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급하니 일단 PC방을 찾아갑니다. 없는 돈 꾸려서 인터넷을 켭니다. 옆의 사람의 도움을 받아가며 난생 처음 신기술을 따라갑니다. 뭔가 되는가 싶으면 모자랍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다되지요.
관공서에서 개인 사정을 무시당하고 황당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비슷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아이 둘을 데리고 있는 젊은 엄마입니다. 그 지방에 갓 이사를 와서 지리도 어둡고 해서 찾아, 찾아 어렵게 달려왔는데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시간 늦었다고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아무리 사정 이야기를 해도 막무가내입니다. 그리고 외치는 것이 오로지 ‘원칙’입니다.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 하여 경비원까지 불러 쫓아냅니다. 아무리 보아도 이건 아니다 싶어 옆에서 보고 있던 ‘댄’이 거듭니다. 그런데 당신 일이 아니니까 나서지 말라고 밀쳐댑니다. 그래서 함께 쫓겨납니다.
어려운 사람끼리 이웃이 됩니다. 하기야 ‘댄’은 평생 남 해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일만 성실하게 해온 너무나 평범한 시민입니다.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가만있지 못하고 도와주며 사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이런저런 함께 하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같이 늙어가는 사람들도 있고 젊은 이웃도 있습니다. 아내와 함께 살다가 먼저 보내고 혼자 살고 있습니다. 일할 수 없게 되니 정부의 보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얼마나 번거로운지 모릅니다. 담당 공무원들은 또 왜 그리 까다롭게 따지는지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납니다. 당장 먹고살아야 하는 입장이니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입니다. 죽자 사자 끝까지 따라가려 애씁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역시 역부족이지요.
세상은 분명 좋아지고 있습니다. 기술도 복지정책도 좋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좋아지는 것을 좋아진 만큼 누릴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물론 많은 국민과 시민이 누릴 것입니다. 당연히 그것을 바라고 일을 추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열외에 서있는 국민도 있을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누구나가 다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지 뒤쳐지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올 수 있는 자만 따라오라는 식으로 행정을 추진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물론 그런 가운데서도 원칙과 제도를 넘어서 돕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대로 다행이지요. 힘든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을 만나면 행운입니다.
보는 내내 답답하고 화가 나고 가엾고 슬픕니다. 그들을 생각하며 화가 났고 현대기술을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을 생각하며 불쌍해지고 슬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어려운 중에도 함께 하는 이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지요.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았습니다. 보고 나서 년전에 일어났던 ‘송파 세 모녀 자살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사회 안에서도 계속 고쳐가고 있습니다. 아무튼 자기 편의만 생각하지 말고 대상자의 편의를 고려하는 행정을 펼쳐나가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