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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에 색안경을 낀 사람이 박정희 의장, 오른쪽에서 화면을 반쯤 등진 사람이 케네디 대통령이라는 건 금방 아실 것 같습니다.
(이 사진에서는 잘 안 보이지만, 케네디 대통령은 흔들의자에 앉았다고 합니다.)
가운데 두 명은 통역관으로, 왼쪽이 한국 통역관인 한상국 중령, 오른쪽이 미국 대통령통역관인 폴 크레인 박사입니다.
양자는 총 1시간 15분 동안 회담을 가졌다고 하는데요.
충격적인 것은 자유분방한(?) 회담 분위기입니다.
박정희 의장의 오른손에 들린 희고 길고 가느다란 저것은 무엇일까요?
실내에서도, 회담 중에도, 박정희 의장의 트레이드마크인 색안경은 빠지지 않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흔들의자에 편안하게 한 팔을 기대어 한쪽 발을 꼬고 있네요.
박정희 케네디 재클린 케네디 여사
아무튼 이날의 회담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지원을 확인했고,
한국은 반공 강화와 박정희 의장이 1961년 8월 12일 발표했던
민정복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언약을 했다고 합니다.
이 때의 인연이 이어진 건지, 박정희 의장은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됐을 당시 직접 조문을 가기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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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의장, 케네디 미국대통령과 공동성명 발표
1961년 11월14일 박정희 의장은 오전 9시15분
숙소인 워싱턴의 한국 대사관저를 떠나 알링턴 국립묘지로 향했다.
無名용사비에 헌화한 朴 의장은 곧바로 미 국무부로 갔다.
7층에 집무실이 있는 러스크 장관은 1층 현관까지 내려와 朴 의장 일행을 영접했다.
이날 박정희·러스크 회담에서 박 의장은 對韓 원조의 증액을 끈질기게 요청했다.
박정희: “공산 침략의 가능성 때문에
한국은 60만 군대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경제를 발전시켜야 하는 조건에 놓여 있습니다. 1960년부터 미국의 한국군 유지비 원조 액수가 감소함으로써
한국 측의 부담이 늘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작성 중에 있습니다.
한국 측의 군사비 부담 증가로 경제개발에 큰 짐이 되고 있으니
5개년 계획 기간이 끝날 때까지 한국군에 대한 원조 수준을
1959년 수준으로 유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無償 원조가 줄어들 것이란 보도가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경제 계획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현 수준을 유지해주시기 바랍니다. 5개년 계획이 내년부터 실시되는데 우리는 해외 투자 차관을 유치하려고 노력 중에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귀측에 대해서 특별 경제 안정 기금으로 1억 달러의 차관과 7,000만 달러의 경제개발 차관 및 800만 달러의 기술 원조를 요청합니다. 이 액수는 너무 많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강력한 반공 국가와 60만 대군을 유지하는 데는 반드시 필요한 돈입니다.”
러스크: “정부와 의회는 지난 15년 동안의 해외 원조 실적을 돌아보면서
여러 가지 개선점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포함하여 많은 원조 수혜국들에서 원조가 효과적으로 쓰여지지 않았다고 판단됩니다.
그래서 의회는 장기 경제개발 원조란 발상을 내어놓고는 그 대신 군사 원조, 무상 원조, 단기 원조를 줄이려 하고 있습니다.
경제 개발과 관련하여 한두 가지 문의할 것이 있습니다.
군 병력을 건설공사, 통신, 보건부문에 이용할 수 없을까요.
한일 국교 정상화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대해서도 알고 싶습니다.
미국 정부의 원조 집행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법률적인 제약이 있으나
우리는 한국 정부와 함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여러 방도를 연구해 보도록 합시다.”
박정희: “미국이 무상 원조에서 장기 차관으로 정책을 전환한다고 해도
한국에는 그것을 너무 급격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몇 년간만이라도 미국의 원조가 계속된다면
한국은 장기 차관 체제를 위한 기초를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군 병력을 경제개발에 활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는 이미 그런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미국으로 오는 길에 도쿄에서 이케다 총리와 단독으로 만나
국교 정상화를 가능한 한 빨리 타결 짓는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러스크: “일본과의 국교 문제 해결은
미국의 對韓 원조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이 될 것입니다.”
박정희:
“장관께서는 내가 제기한 (원조)문제에 대해서 희망적인 답변을 줄 수 있겠습니까.”
러스크: “(국제개발처) 해밀턴 처장과 그 문제를 논의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의장께서 떠나시기 전에 저도 이 문제로 한 번 더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하실 때도 이 문제가 거론될 것입니다.
저의 이 대답이 부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최근 한국 정부가 취한 사면 조치는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입니다.”
박 의장은 한 시간 반 동안의 회담을 끝낸 뒤
같은 건물 안에 있는 국제개발처(AID=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파울러 해밀턴 처장을 찾아가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이 요담을 끝낸 박정희 의장 일행은 백악관으로 향했다.
1917년생으로 박 의장과 동갑인 케네디 대통령은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차에서 내리는 박 의장에게 다가가 악수를 나누었다.
현관 계단을 올라간 두 지도자는 사진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했다.
朴 의장은 오찬에 참석할 수행원들을 케네디 대통령에게 소개했다.
朴 의장 일행이 로비로 들어서자 미 해병대 군악대가 아리랑을 연주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오찬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박 의장을 2층으로 안내하여 부인 재클린 케네디 여사를 소개했다.
박 의장은 이 자리에서 대통령에게는 족자를,
부인과 자녀들에게는 한복 한 벌씩을 선물로 내놓았다.
오찬에는 미국 측에서 러스크 미 국무장관, 맥나마라 국방장관, 렘니처 합참의장,
월트 W. 로스토 특별보좌관, 버거 주한 미국 대사, 폴 H. 니츠 국무차관보,
킬렌 유솜(USOM) 처장 등 요인들이 참석했다.
박정희 의장, 정일권 駐美 대사, 유양수 최고회의 외무 국방위원장, 최덕신 외무장관 등 한국 측 참가자 23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짤막한 환영사를 했고
朴 의장은 군사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답사를 했다.
朴 의장은 “우리는 국가의 생명을 건지고 이를 건전하게 육성하기 위하여
병든 기관을 제거해야 하는 외과 의사의 처지에 놓여 있다”면서
“직장 활동의 공정, 국가 건설에의 의욕, 국가에 대한 책임감,
이러한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적 요소가 우리의 국가 재건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1시간 40분간 계속된 이날 오찬에는
박정희 의장이 좋아하는 전복 요리가 특별히 등장했다.
朴 의장은 오찬이 끝나자 일단 한국 대사관으로 돌아왔다가 오후 3시30분 다시
백악관으로 케네디 대통령을 찾아갔다.
頂上회담은 오찬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매우 유쾌하게 시작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혁명 정부가 단행하고 있는 여러 개혁 조치를 환영하는 바이지만
우리로서는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다”고 했다.
“혁명 정부가 稅制 개혁을 단행하는 바람에
주한 미국 대사관 직원들도 그동안의 체납세금을 물어야 한다니 야단입니다.”
박정희 의장도 농담을 했다.
“미국에 와서 보니 카메라 기자들이 상전이더군요.”
“의장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신문기자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골칫거리지요.”
越南 파병 거론
1961년 11월14일 오후 3시30분부터 1시간20분 동안 이루어진
케네디·박정희 정상회담의 기록은 최근 공개되었다.
우리 쪽에서는 유양수 최고회의 외무·국방위원장, 최덕신 외무장관, 박병권 국방장관,
천병규 재무장관, 송정범 경제기획원 부원장, 정일권 주미 대사,
한상국 통역관이 배석했다.
미국 측에서는 러스크 국무장관, 맥나마라 국방장관, 새뮤얼 버거 주한 미국 대사,
월트 로스토 대통령 특보, 파울러 해밀턴 국제개발처(AID) 처장,
월터 P. 매카나기 극동문제담당 국무부 차관보, 킬렌 USOM 처장, 코렌 동북아시아문제연구소장, 클라인 통역관이 배석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미리 준비된 공동 성명서를 읽어 보고 만족한다고 말했다.
만약 박 의장도 동의한다면 이대로 발표하도록 하자고 했다.
박 의장도 동의했고 케네디 대통령은 그대로 발표하도록 지시했다.
케네디: “아까 박 의장과 오찬을 하면서 韓日 관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눈 바 있습니다.
한국 외무장관과는 월남 사태에 대해서 대화했는데
이 사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비망록을 작성해서 주시겠다고 하더군요.
본인은 어떻게 하면 월남의 붕괴를 막을 수 있을지 걱정이 많습니다. 최후의 수단은 물론 미군 병력을 투입하는 것입니다만
진정한 해결책은 월남인 스스로가 외국 원조에 의존함이 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요. 월남은 단순히 미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박 의장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정희: “러스크 장관과 해밀턴 처장에게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만 미국이 너무 혼자서 많은 부담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세계의 각국들은 각자가 할 수 있는 부담을 나누어 져야 자유세계 전체의 힘이 증강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한일 국교 정상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反共 국가로서 한국은 극동의 안보에 최선을 다해 기여하고 싶습니다.
월맹은 잘 훈련된 게릴라 부대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은 월남식의 전쟁을 위해서 잘 훈련된 100만의 장정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승인하고 지원한다면 한국 정부는 월남에 이런 부대를 파견할 용의가 있고
정규군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지원군을 모집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조치는 자유세계가 단결되어 있음을 과시하게 될 것입니다.
출국하기 전에 이 문제를 가지고 한국군 지휘관들과 토의했습니다.
모두가 적극적이었습니다. 대통령 각하께서도 군사 보좌관들과 함께 본인의 제의를
의논해 보시고 저에게 결과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케네디: “참으로 감사한 말씀입니다. 미국은 베를린 장벽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구 전체의 짐을 지고 있습니다. 본인은 맥나마라 장관과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박 의장께서도 내일 맥나마라 장관, 렘니처 합참 의장과 한 번 더 만나서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필리핀 사람들과 이런 문제를 의논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군요.
프랑스 사람들이 (월남에서)확인한 대로 이런 상황에서는
서양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행동엔 한계가 있어요.”
박정희가 이 자리에서 월남 파병 용의를 밝힌 사실은 지금까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朴 의장이 월남 파병을 제의한 대목은 삭제한 상태로 외교 문서를 공개했기 때문이다. 삭제된 부분이 공개 문서에서 복원된 것은 1996년 미 국무부가 <미국의 외교>란 문서집의 <1961─63년 동북아시아>편을 발간하면서였다. 당시 미국의 원조를 받는 입장에서 케네디 대통령에게 들이밀 카드가 없었던 박정희 의장이 苦心 끝에 생각해 낸 것이 월남 파병이었다. 延 派越 병력 약 30만 명, 最多 주둔 병력 약 5만 명을 기록한
역사상 첫 해외 파병의 씨앗이 이때 뿌려진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예정에 없었던 정상회담을 한 차례 더 하게 되는데 이는 박 의장의 월남 파병 제의에 대한 심도 있는 토의를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월남 파병 용의를 밝힌 박정희의 논리는 ‘자유세계의 일원으로서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덜어 준다’는 것이며 파병에는 미국의 승인과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파병에 따른 여러 가지 경제적 이득을 계산에 깔고 한 발언이었다. 케네디는 대화를 對韓 원조 문제로 끌고 간다. 그는 미국이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 정책을 쓸 수밖에 없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박 의장은 한국이 희망하는 것은, ‘바이 아메리카’ 정책의 전면적인 철회가 아니라 특정한 상품에 대해서만 예외를 인정해 달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러스크 국무장관은 만찬 때 이 문제를 더 이야기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박정희: “본인은 혁명의 前과 後를 비교하여 혁명 정부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문서를 갖고 왔습니다. 본인은 이 주제를 가지고 러스크 장관, 해밀턴 처장과도 논의한 바 있습니다.”
케네디: “양국의 대사께서는 이미 혁명 주체 세력의 업적에 관해서 매우 설득력 있는 이야기들을 본인에게 해주셨습니다. 본인은 매우 감명을 받았습니다. 본인은 미국이 박 의장을 최대한 지원할 것임을 보장해 드립니다. 우리는 對韓 원조의 중요성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한국이 공산화된다면 일본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태평양 지역 전체가 자유를 잃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국은 우리에게 死活的인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는 곳입니다. 맥나마라 장관, 미국의 군사력에 대해서 의장께 설명해 드리시오.”
맥나마라 장관: “핵무기 및 재래식 무기의 증강 예산이 당초 계획보다도 60억 달러나 늘어났습니다. 1,700대의 핵무기 탑재 전투기 가운데 850대는 15분 내에 이륙할 준비를 갖추고 항상 비상 대기 중입니다. 핵무기 분야에서 소련이 최근 대기권 실험을 하고 있지만 미국은 양적으로는 3~8배, 질적으로는 그 이상으로 우세합니다. 소련은 200~300대의 핵무기 탑재 폭격기를 北美 대륙 상공으로 보낼 수 있을 뿐입니다. 대륙간 탄도탄의 경우, 우리는 핵탄두 미사일 80기를 장착한 다섯 척의 폴라리스급 원자력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케네디: “소련이 우리에게 선제공격을 가한다고 해도 미국은 그보다 훨씬 가공할 반격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골칫거리는 이란, 월남, 쿠바 등지에서 경험한, 성격이 많이 다른 분쟁입니다.”
경제 개발 지원 요청
케네디 대통령은 박정희 의장에게 “38선을 통한 공산주의자들의 침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박정희: “그자들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 38선을 침투하려고 애썼지만 실패했습니다. 일망타진되고 있습니다.”
케네디: “북한 사람들의 사기와 정치 성향은 어떻습니까.”
박정희: “식량 소비량과 주민들의 생활수준은 매우 낮습니다. 물론 그들은 기반 산업과 지하자원에서는 남한보다 우월합니다. 북한의 電力 생산량은 110만kW입니다. 남한은 5개년 계획이 끝나는 해라야 전력 생산량이 103만kW 수준에 달할 것입니다.”
케네디: “원자력 발전소를 짓지 그랬어요.”
박정희: “건설비가 너무 비싸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웃으면서) 미국이 지원해 준다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육군과 해군 戰力은 남북한이 비슷합니다. 공군은 북한이 남한보다 네 배가 강합니다.”
러스크: “그 공군력이란 북한만을 말합니까 아니면 중공과 소련 공군력을 포함한 것입니까.”
박정희: “북한만을 가리킵니다. 한국과 일본 주둔 미 공군력을 포함시키면 북한과 대등해집니다. 북한은 지금 산업화에 매진하고 있고 남한은 낙후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본인의 가장 큰 당면 과제는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경제를 개발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경우가 그러합니다만 분단된 국가에서는 경제력이 서로 대등하지 않으면 일방은 다른 여러 부문에서 뒤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은 그런 처지에 빠지면 안 됩니다. 본인이 여기에 온 이유는 한국군의 병력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있어서 대통령의 긍정적인 뒷받침을 얻기 위한 것이며 경제 개혁과 재건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기 위한 것입니다. 공동 성명서의 취지는 그런 원조가 있을 것이라는 뜻인가요.”
케네디: “본인은 박 의장과의 사이에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이미 본인이 말했습니다만 한국의 안전이 미국에 사활적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두셔야 할 것은 우리가 올해에 원조 예산을 (미 의회로부터) 확보하는 데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의장께서는 우리가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 이해해주셔야겠습니다.”
박정희: “자유세계 개발도상국가들의 自立이 가장 중요하다는 본인의 소신을 거듭 천명하려고 합니다. 원조를 할 때도 최단시간 내에 최대한의 성과를 올릴 수 있는 나라를 중점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케네디: “본인도 동의합니다. 의회와 국민들도 원조가 가장 효율적으로 쓰이는 나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라오스에는 원조를 많이 했는데 낭비된 경우입니다. 실망스러운 것은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이 원조를 분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차관을 제공할 뜻은 있는 모양인데 年利 6%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베를린 위기에 관해서 말씀드린다면 (소련과) 타협이 만족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평화협정을 맺은 뒤에도 자유세계 측에서 베를린에 접근하기가 어려워질지 모릅니다. 우리는 베를린과 월남에서 동시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은 것 같습니다. 이제 작별해야겠는데 혹시 떠나기 전에 본인이 요청한 원조 건에 대해서 ‘기분 좋은 답’을 들을 수 없을까요.”
케네디: “우리는 실천할 수도 없는 약속을 하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것을 약속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실은 누군가가 본인에게 그런 ‘기분 좋은 것’을 주지 않을까 하고 기다렸는데 의장께서 월남 파병 건으로 본인을 기분 좋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아마도 의장께서는 미국이 우리 모두를 폭파시켜버릴 만큼 어마어마한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용기를 얻으셨을 것입니다. 본인은 의장께서 여기 오신 목적을 전혀 달성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떠나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의장께서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丁一權 대사께서 이 문제에 대해서 의장에게 잘 설명해주실 것을 바랍니다.”
케네디는 박정희와 헤어지면서 내일 한 번 더 만나자고 했다. 이것도 예정에 없던 호의였다. 박정희는 케네디와의 1차 회담 때 원조를 요청하면서도 무작정 달라고 하지 않고 ‘自立의지가 있는 나라에 우선적으로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란 식의 논리를 폈다. 박정희는 농민들을 상대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自助 정신을 강조하곤 했었는데 그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미국에 대하여도 당당하게 손을 벌리려고 했다.
‘自助 정신의 發揚(발양)에 의한 自立 경제의 건설, 自立 경제에 뿌리를 둔 自主 국방, 자주 국방을 할 수 있어야 진정한 통일 국가도, 독립 국가도 될 수 있다’는 自助─自立─自主─독립·통일의 논리는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유지한 국가 근대화 전략의 철학적 기반이었다. 박정희는 이런 생각을 새마을운동 등 근대화 작업에 그대로 적용했다. 새마을 사업을 할 때는 가장 가난한 마을을 먼저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自助 정신이 가장 강한 마을을 먼저 지원하여 경쟁을 붙였던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과 頂上회담을 끝낸 박정희 의장은 한국 대사관저로 돌아오자마자 정일권 대사가 박 의장을 위해 마련한 리셉션에 참석해야 했다. 워싱턴 주재 외교관들과 렘니처 합참의장 등 군인들이 많이 참석했다. 박 의장 일행은 도중에 리셉션장을 빠져나와 백악관 근처 블레어 하우스(대통령의 국빈이 머무는 영빈관)로 갔다. 러스크 국무장관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박정희는 인사말에서 “본인은 미국에 와서 세 가지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서두를 꺼냈다.
“첫째 고통은 미국과 한국의 시간 차이 때문에 오는 것이고, 둘째 고통은 환대가 너무 정중하여 서너 시간씩 부동자세로 서 있자니 허리가 아픕니다. 셋째 고통은 수많은 기자들의 습격입니다.”
영원한 작별
워싱턴에 도착한 지 사흘째인 11월15일도 박정희 의장은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오전 8시 정각에 케네디 대통령 군사고문 맥스웰 테일러 대장이 박 의장이 머물고 있던 대사관저로 찾아와 조찬을 함께 하면서 한국군의 현 수준 유지와 현대화 문제를 의논했다. 오전 10시 朴 의장은 프리먼 농무부 장관을 방문하여 국토 건설 사업과 이를 지원할 미국 잉여 농산물 도입을 의논했다. 오전 11시에 朴 의장은 다시 맥나마라 국방장관을 찾아갔다. 여기서는 전날 朴 의장이 제의했던 월남 파병이 주로 토의되었다. 이 회담은 점식식사로까지 이어져 계속되었다. 오후에 박 의장은 하지스 상무장관을 방문했다. 63세의 하지스 장관은 박정희가 기자들에게 불만이 많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 농담부터 했다.
“기자들 등쌀에 불편이 많다고 들었는데 좋은 예방법을 가르쳐드릴까요.”
그는 책상 서랍에서 작은 검정고양이 塑像(소상)을 하나 꺼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걸 드릴 테니 기자들을 만나거든 이놈을 쓰다듬어 주십시오. 그러면 기자들은 말썽을 부리지 않을 겁니다.”
박 의장은 선물로 받은 검정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박 의장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설명하고 민간 투자 유치에 대한 하지스 장관의 협조를 요청했다. 朴 의장은 오후 4시 백악관으로 케네디 대통령을 찾아갔다. 朴 의장은 “5개년 계획이 시작되는 내년이 가장 어려운 해가 될 것 같다. 해외 차관의 형태로 특별한 도움을 요청한다”고 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검토해 보겠다”고 했다. 케네디는 박정희가 제의했던 한국군의 월남 파병 건에 대해서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이때는 미국 정부가 아직 군대를 보내지 않고 있을 때였다).
“월남에 대한 우리의 원조는 당분간 경제적 지원, 그리고 장비 통신 같은 부문에 한정될 것 같습니다. 이 이상의 원조가 필요할 것인가 아닌가는 월남 국민들이 정부를 지지하는가, 자유를 위해 싸울 각오가 되어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만약 월남 국민들이 정부를 지지하고 자기 몫들을 다한다면 박 의장이 제안한 것과 같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박 의장의 월남 파병 제의에 대해서 일단 “지금 단계에서는 필요하지 않다”는 태도를 보인다. 그 2년 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기 한 달 전에 일어난 고 딘 디엠 월남 대통령에 대한 군부 쿠데타와 이후의 정치불안이 미국을 수렁으로 끌어들인다. 고 딘 디엠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월남 군부의 쿠데타 모의를 알면서 지원했던 미국은 고 딘 디엠을 대체할 만한 강력한 월남 지도자를 끝내 발굴하지 못하고 월남 정부를 대신하여 공산 게릴라와의 전쟁을 떠맡게 된다. 이때 비로소 박정희의 월남 파병 제의는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작별 인사를 하기 전에 박정희에게 다음날로 예정된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의 연설에 대해서 충고한다.
“기자들은 통상 그랬던 것보다는 아마도 박 의장에게 우호적으로 나올 것 같군요. 네루 총리도 곤란을 겪었고 흐루시초프의 경우에는 기자들이 스탈린에 관한 질문을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화가 나서 방문 일정을 중단할 뻔했거든요.”
케네디 대통령은 “1951년에 잠시 한국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사실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면서 “이번에 박 의장께서 미국을 방문하시는 바람에 한국에 대해서 이해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박 의장은 케네디의 訪韓을 초청했고 그는 “동북아시아로 가는 기회가 있으면 꼭 들르겠다”고 했다. 케네디는 박 의장의 승용차까지 따라와서 작별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케네디가 박정희보다 여섯 달 먼저 태어나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16년 간격으로 현직에 있을 때 암살됨으로써 生을 마감했다.
박 의장은 국무부 건물 안에 있는 국제개발처에 들러 해밀턴 처장이 마련한 다과회에 참석했다가 한국 대사관저로 돌아왔다. 저녁 7시부터 한국 대사관저에서는 박 의장이 미국 요인들을 초청한 만찬회가 열렸다. 러스크 국무장관, 하지스 상무장관, 맥나마라 국방장관, 매카나기 국무부 차관보, 그리고 5·16 때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를 진압하려고 했던 당시 유엔군사령관 매그루더 장군(퇴역), 6·25 전쟁 때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이 참석했다. 만찬이 끝난 뒤 응접실에서는 한국 대사관 무관 安光鎬(안광호) 준장의 딸 정숙 양이 한국 고전 무용을 선보였다.
다음날 박정희 의장은 대사관저에서 케네디 대통령의 경제고문인 로스토 박사를 맞아 아침식사를 함께 했다. 하버드대학 경제학 교수 출신인 로스토 박사는 후진국 개발론에 밝은 사람이었다. 한국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하여 관심도 많고 대통령에게 정책 조언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인물이었다. 朴 의장과 함께 배석한 천병규 재무장관, 송정범 경제기획원 부원장, 정일권 대사는 로스토 박사와 두 시간이나 이야기했다.
워싱턴을 방문하는 외국 지도자들이 시험을 치는 기분으로 가는 곳이 내셔널 프레스 클럽이다. 미국 기자협회인 이곳에서 국가 지도자들이 기자들을 상대로 연설하고 질문을 받는데 자유 언론에 노출된 적이 없는 흐루시초프 같은 독재자들은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내셔널 프레스 빌딩 13층에 있는 회견장에 박 의장이 도착한 것은 정오. 존 코스크로브 회장은 朴 의장을 안내하면서 우선 방명록에 서명하도록 했다.
박 의장이 ‘1961년 11월16일’이라 쓰는 것을 보고 코스크로브 회장은 “아, 오늘이 바로 혁명이 일어난 지 여섯 달 되는 날이군요”라고 했다. 박 의장이 빙그레 웃자 그는 또 “아, 웃으시는군요. 의장께서는 웃음을 모르시는 분이라고 들었는데 사실이 아니군요”라고 했다. 박 의장은 웃기만 했다.
실수
1961년 11월 16일 박정희는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군사혁명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어떤 사업가도 뇌물을 주지 않고는 일을 해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관료주의가 비대하여 비능률성을 야기시켰습니다. 입법부는 국가에 대한 책임감을 도외시하고 절망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노동단체는 정치적인 악당으로 이용되었고, 많은 신문이 매수되고 타락되고 또는 공산주의에 감염되었습니다. 본인도 농민의 아들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농민들이 연간 10할에 달하는 이자까지를 물고 高利私債業者(고리사태업자)의 마수에서 헤어날 희망도 없을 정도로 많은 부채를 지고 있는 窮境(궁경)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위험천만한 것은 일부층에서 주창한 북한 괴뢰와의 협상론이었습니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의 직접적인 침략보다도 오히려 우리나라를 내부로부터 전복시키려는 공산주의자들의 흉계로 인하여 더 큰 위협을 받았습니다. 여러 달에 걸쳐 나는 10여 명의 혁명 핵심 세력을 확장시켜서 약 220명의 청렴하고 헌신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혁명 기간 세력을 확보하였던 것입니다. 혁명 후 우리는 국회를 해산하고 노동조합 등 사회단체의 활동을 정지시켰고 언론에 대해서는 약간의 선도를 강구함이 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긴급한 水路(수로) 공사와 造林(조림) 사업, 개간 사업에 착수하여 수만 명에게 일자리를 주었습니다. 복잡한 행정 절차를 시정하고 稅制를 개혁하였으며 중소기업의 진흥을 위해서 자금을 많이 방출했습니다. 밀수품은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국민 각자는 자진해서 의복, 음식, 혼례식, 장례식을 간소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또 오는 1월부터 시행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작성하였습니다.”
이날 朴 의장은 원충연 최고회의 공보실장이 적어준 원고를 읽어내려 갔다. 이 원고는 양면에 걸쳐 씌어 있었다. 박정희는 한 면을 빠뜨리고 연설문을 읽어 가다가 문맥이 이어지지 않아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실수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다행인 것은 한상국 중령이 통역의 속도를 조절하여 이 실수가 외국 기자들에게는 눈치 채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연설을 녹음하여 한국을 향해서 방송하게 되어 있었던 ‘미국의 소리’ 방송이 문제였다. 한국 사람들이 들으면 박정희의 실수가 드러날 판이었다.
訪美(방미) 선발대장으로 먼저 와 있었던 육군 방첩부대장 김재춘 준장은 ‘미국의 소리’ 방송을 진행하는 黃材景(황재경) 목사에게 부탁하여 편집을 한 후 방송하도록 손을 썼다. 박 의장이 이런 실수를 한 것은 너무 빡빡하게 짜인 일정과도 관계가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과 두 번째 회담을 하고 대사관저로 돌아온 박정희는 만만한 김재춘을 부르더니 불평을 털어놓았다.
“글쎄, 이놈들이 일정을 어떻게 짰는지 이거 뭐 수학여행 온 것도 아니고 아침에 일어나 세수할 시간도 없으니….”
유양수 최고회의 외무·국방위원장이 밤늦게 다음날 일정을 위한 대책회의를 소집했지만 수행원들도 녹초가 되어 심사숙고할 처지가 못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는 연설문을 한번 읽어볼 시간도 없었던 것이다. 이 실수로 해서 원충연 공보실장은 박 의장의 신임을 잃게 된다.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는 연설이 끝난 뒤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문: “한국 신문인의 투옥과 언론 자유의 탄압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답: “민족일보 사건에 관해서 묻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사건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들은 공개 재판 결과 신문인을 가장한 공산주의 간첩임이 입증되었다. 그들의 운영 자금은 일본 조총련을 통해 북괴로부터 공급되었으며 이들은 북괴의 지령에 따라 행동하였을 뿐 아니라 사실은 북한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이들은 사실상 언론 자유를 남용한 것이다. 신문인이라 할지라도 국법을 어겼을 때에는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문: “북한은 소련, 혹은 중공, 어느 쪽에 예속되어 있는가.”
답: “나는 북괴가 소련, 중공 양쪽에 다 예속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쪽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가는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문: “한국의 민간 정치인들에게 그토록 치욕을 준 뒤에 민간 정부로 복귀한다고 해도 국민들은 과연 그들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박 장군과 동료들은 1963년에 민간인이 되어 선거에 입후보하려고 생각하고 있는가.”
답: “민간 정치인들의 체면 손상은 자업자득이다. 나 자신을 비롯한 우리 군인들은 민간 정부가 들어서면 본연의 임무로 돌아갈 것이다. 양심적인 민간인들의 출마를 희망한다.”
문: “한국동란 때 유엔군은 맥아더 원수의 주장대로 압록강 너머로 진격했어야 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답: “한국인으로서 나는 당시 그 안에 찬성했으나 이에 대한 올바른 판단은 먼 장래의 역사가 해결할 것이다.”(청중들이 박수)
문: “각하의 견해로는 외몽고를 자주독립 국가로 보는가. 그렇지 않으면 소련, 중공의 예속국으로 보는가.”
답: “사실 나는 외몽고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외몽고도 북괴와 비슷한 처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문: “플라스틱 젓가락 사용 이야기는 그만두고라도 목재난을 어떻게 해결하려는가.”
답: “나무젓가락 금지 문제는 우리에게는 웃을 이야기가 아니다. 목재난이 하도 심해서 (플라스틱) 위생저의 사용을 의무화한 사정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박정희 의장은 짤막하고 군더더기 없는 답변으로써 많은 기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박 의장은 기자회견을 끝내면서 “많은 외국 지도자들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혼이 났다고 이야기 들었는데 오늘 여러분들은 부드럽게 대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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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은 의외로 외교도 잘했습니다.
강할 때는 강했고 양보 할 때는 과감히 양보했어요.
그분은 외교를 배운바 없는데도 마치 노련한 외교관 같이 우리의 이익을 극대화했습니다. 박대통령의 외교 스승격인
전 외무장관 임병직에게 들은 이야기를 씁니다.
1960년 임병직은 민주당 정권의 유엔대사직을 사직하고 뉴욕에 거주합니다. 1961년 5.16이 나고 조국의 혼란이 진정되는게 기뻣는데 혁명정부로부터 귀국하여 박장군을 만날 것을 요청받습니다.
박정희의 첫인상은 대추방맹이 같이 땅땅(임병직의 표현)했습니다.대화를 나누면서 엘리트라더니 역시 기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장군은 미국과의 관계정립에 많은 도움을 요청했고,특히 케네디와의 만남 전과정을 컨트롤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임병직은 미국으로 건너가 그동안의 지인들과 접촉하여 혁명 세력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대폭 전환시켜서 혁명군 지도자 박장군이 케네디와의 만남이 우호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조율했고 만남 전과정을 감독했습니다.
우리가 요즘도 박장군과 케네디의 만남 장면을 보는 사진이 그 당시의 사진입니다. 검은 안경을 쓴 까만콩 같은 땅땅한 박장군이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낀 모습이 아주 인상작인 장면이었지요.
박장군의 검은 안경과 담배등이 임병직의 연출인데 그게 케네디와 미 언론에 혁명군 지도자로서 당당한 카리스마로 비쳐저서 회담이 우호적이고 순조롭게 끝납니다. 케네디는 그날에야 혁명을 인정합니다.
(미국언론은 한국의 박정희, 쿠바의 카스트로, 팔레스타인의 아라파트,를 체제를 뒤엎은 3대 혁명가로 매김하고 그들이 개인적으로 품어내는 카리스마를 인정했습니다.
문적이 처음 미국을 방문했을 때, 막강한 박근혜 정부를 뒤엎은 혁명가라며 위의 3명 같은 카리스마가 있을 것으로 예상 했는데, 문적이 미국에서 보인 지리멸렬한 작태를 보고 크게 실망해서 문적의 첫 미국방문을 1단 기사나 아예 기사로 다루지 않았습니다.그후 미국 정부와 언론이 문적을 대하는 태도는 그 때 결정된 것이지요.)
그후 박대통령의 요청으로 임병직은 귀국해서 대통령의 외교고문격(당시는 특보가 없었을 겁니다)으로 많은 대화를 하는데 이승만 박사의 외교비사를 집중적으로 대화했습니다.
그 영향인지 박정희 대통령의 외교스타일은 이승만 박사의 외교 스타일과 많이 닮았습니다. 항상 당당했어요.
당시는 미국의 원조금이 정부예산의 반이 넘었는데, 돈을 받으면서도 미국측에 “이 원조금은 동북아를 공산국의 침략으로부터 방어를하는 미국의 부담금”이라며 당당히 말했어요.
대통령이 지방시찰 때 기차로 갈 때는 꼭 임병직과 동행해서 기차에서 24년의 나이차이를 극복하고 국가경영에 대한 많은 대화를 했습니다. 그 때의 이야기는 틈틈이 쓰겠습니다.
# 임병직은 17세에 미국으로 유학가서 그 때부터 이승만 박사 곁에서 50년을 함께한 최측근입니다.
케네디 대통령 부처와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모습.
박정희 의장은 케네디와 첫 번째 만남에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제안했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적극적으로 베트남 파병을 서둘렀다.
쿠데타 승인을 위해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베트남 전쟁과 관련해 미국에 협력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이에 대해 케네디 대통령은 감사의 뜻을 밝히고
이후에 차차 검토해 나가자고 말을 흐렸다.
당시 케네디는 베트남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과 전면 철수,
두 가지 방안을 놓고 고민하는 중이었다.
결국 케네디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1963년 달라스에서 암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