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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우에
느릿느릿 밤새어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이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내리는가
- 이 용악 시 ‘그리움’
<1947년.협동>
바다 없는 항해에 피곤한
무리들 모여드는
다방은 거리의 항구......
남달은 하소를 미연에 감출여는
여인의 웃음 끔쯕히 믿엄직하고
으스러히 잠든 등불은 미구의 세기를 설계하는 책사?
주머니를 턴 커피 한잔에
고달픈 사고를 지지하는
......나....너......
휴식에 주린 동지여
오라!!
유연히 조화된 분위기 속에서
기약 없는 여정을 잠깐 반성해 보작구나
- 이 용악 시 ‘다방茶房‘
* 1936년 1월 17일자 「조선중앙일보」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모도 모른다
찻길이 뇌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 위 산을 마음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그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보냈다는
그날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 고양이 울어 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 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데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옥만 눈 우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뒤울 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 이 용악 시 ‘낡은 집‘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네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젠 무섭지 않다만
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궈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두 외로워서 슬퍼서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리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 줄께
손때 수줍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 이 용악 시 ‘전라도 가시내‘
손뼉칩시다 정을 다하여
우리 손뼉칩시다
노새나 나귀를 타고
방울소리며 갈꽃을 새소리며 달무리를
즐기려 가는 것은 아니올시다
청기와 푸른 등을 밟고 서서
웃음지으십시오
아이들은 한결같이 손을 저으며
떨어지는 나의 뒷모양 물결치는 어깨를
눈부시게 바라보라요
누구나 한 번은 자랑하고 싶은
모든 사람의 고향과
나의 길은 황홀한 꿈속에 요요히 빛나는 것
손뼉칩시다 정을 다하여
우리 손뼉칩시다
- 이용악 시 ‘노래 끝나면‘
* 낡은 집 /미래사
집도 많은 남대문턱 움속에서 두 손 오구려 혹혹 입김 불며 이따금씩 쳐다보는 하늘이사 아마 하늘이기 혼자만 곱구나
거북네는 만주서 왔단다 두터운 얼음장과 거센 바람속을 세월은 흘러 거북이는 만주서 나고 할배는 만주에 묻히고 세월이 무심찮아
봄을 본다고 쫓겨서 울면서 가던 길 돌아왔단다
띠팡을 떠날 때 강을 건늘 때 조선으로 돌아가면 빼았겼던 땅에서 농사지으며 가 갸 거 겨 배운다더니 조선으로 돌아와도 집도 고향도 없고
거북이는 배추꼬리를 씹으며 달디달구나 배추꼬리를 씹으며 꺼무테테한 아배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배추꼬리를 씹으며 거북이는 무엇을 생각하누
첫눈 이미 내리고 이윽고 새해가 온다응데 집도 많은 집도 많은 남대문 턱 움 속에서 이따금씩 쳐다보는 하늘이사 이마 하늘이기 혼자만 곱구나
- 이용악 시 ‘하늘만 곱구나‘
* 해금시인99선"너 어디 있느냐"/나남
잠잠히 흘러내리는
개울을 따라
마음 섧도록 추잡한 거리로 가리
날이 갈수록 새로이 닫히는
무거운 문을 밀어제치고
조고마한 자랑을 만날지라도
함부로 푸른 하늘을 대할지라도
내사
모자를 벗어 반갑게 흔들어주리라
숱한 꽃씨가 가슴에서 튀어나오는 밤이면
손뼉소리 아스랗게 들려오는 손뼉소리
멀어진 모오든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호올로 거리로 가리
욕된 나날이 정녕 숨가쁜
곱새는 등곱새는
엎디어 이마를 적실 샘물도 없어
- 이용악 시 ‘ 해가 솟으면‘
* 낡은 집/미래사/1991
큰 섬을 지나 작은 섬 굽이
앉으랑소나무를 우산처럼 펼쳐 쓴
선바위를 바삐 지나
항구로 항구로 들어오는 때
-민청호다
-민청호다
누군가 웨치는 반가운 소리에
일순 멈춘 순희의 가슴에선
파도가 출렁....
바다를 휩쓸어 울부짖는 폭풍에도
어제밤 돌아오지 않은 단 한 척
기다리던 배가
풍어기를 날리며 들어온다
밤내 서성거리며 시름져웁던
숫한 가슴들이 탁 트인다
그러나 애타게 기다리기야 아마
애타게 기다리기야 순희가 으뜸
이랑이랑 쳐드는 물머리마다
아침 햇살 유난히도 눈부신 저기
마스트에 기대 서서
모자를 흔드는 건 명호 아니냐
분기 계획 끝내논 다음이래야
육지에서 한바탕
장가 잔치 차린다는 저 친군
성미부터 괄괄한 바다의 사내
꼼베아의 발동은 그만하면 됐으니
순희야 손 한번 저어 주려마
방수복에 번쩍이는 고기 비늘이
비단천 무늬보다 오히려 곱다
평생 봐도 좋은 바다
한결 더 푸른데
뱃전을 스쳐 기폭을 스쳐
수수한 사람들의 어깨를 스쳐
시언시언 춤추는 갈매기떼 거느리고
바쁘게 바쁘게 민청호가 들어온다
- 이용악 시 ‘ 어선 민청호‘
*이 시는 이용악 시인이 1955년에 북에서 발표.
*<2000,가을 계간 시평 창간호-’거미가 짓는 집'>중에서
1.
들창을 열면 물구지떡 내음새 내달았다
쌍바라지 열어 제치면
썩달나무 썩는 냄새 유달리 향그러웠다
뒷산에두 봋나무
앞산두 군데 군데 봋나무
주인장은 매사냥을 다니다가
바위틈에서 죽었다는 주막집에서
오래 오래 옛말처럼 살고 싶었다
2.
아히도 어른도
버슷을 만지며 히히 웃는다
독한 버슷인양 히히 웃는다
돌아 돌아 물ㅅ곬 따라가면 강에 이른대
영 넘어 여러 영 넘어가면 읍이 보인대
맷돌방아 그늘도 토담 그늘도
희부옇게 엷어지는데
어디서 꽃가루 날러오는듯 눈부시는 산머리
온길 갈길 죄다
잊어바리고
까맣게 쓰러지고 싶다
3.
참나무 불이 이글이글한
오지화로에 감자 두어개 묻어놓고
멀어진 서울을 그리는 것은
도포 걸친 어느 조상이 귀양 와서
일삼는 버릇일까
돌아갈때엔
당나귀 타고 싶던
여러 영에
눈은 내리는데 눈은 내리는데
4.
소곰토리 지웃거리며 돌아 오는가
열두 고개 타박 타박
당나귀는 돌아 오는가
방울소리 방울소리 말방울소리 방울소리
- 이 용악 시 ‘두메산곬 1~4‘
* 시집 『오랑케꽃』, 1947 초판본
삽살개 짖는 소리
눈보라에 얼어붙은 섣달 그믐
밤이
얄궂은 손을 하도 곱게 흔들길래
술을 마시어 불타는 소원이 이 부두로 왔다.
걸어온 길가에 찔레 한 송이 없었대도
나의 아롱범[1]은 자옥 자옥을 뉘우칠 줄 모른다.
어깨에 쌓여도 하얀 눈이 무겁지 않고나.
철없는 누이 고수머릴랑 어루만지며
우라지오의 이야길 캐고 싶던 밤이면
울 어머닌
서투른 마우재 말도 들려 주셨지.
졸음졸음 귀 밝히는 누이 잠들 때꺼정
등불이 깜빡 저절로 눈감을 때꺼정
다시 내게로 헤여드는
어머니의 입김이 무지개처럼 어질다.
나는 그 모두를 살뜰히 담았으니
어린 기억의 새야 귀성스럽다.
기다리지 말고 마음의 은줄에 작은 날개를 털라.
드나드는 배 하나 없는 지금
부두에 호젓 선 나는 멧비둘기 아니건만
날고 싶어 날고 싶어.
머리에 어슴푸레 그리어진 그 곳
우라지오의 바다는 얼음이 두껍다.
등대와 나와
서로 속삭일 수 없는 생각에 잠기고
밤은 얄팍한 꿈을 끝없이 꾀인다.
가도오도 못할 우라지오.
- 이 용악 시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
우리 집도 아니고
일갓집도 아닌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없는 최후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領)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마디 남겨 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만(灣)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깔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 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를 가르쳤다
때늦은 의원이 아모 말 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 이 용악 시 ‘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ㅡ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태를 드리운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ㅡ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 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미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 보렴 목 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 이 용악 시 ‘오랑캐꽃‘
* 제3시집『오랑캐꽃』<초판 아문각, 1947년 4월>
*머리태: 길게 타래진 머리털.
*도래샘: 빙 돌아서 흐르는 샘물.
*띳집: 띠(볏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지붕을 이어 지은 집.
*털미투리: 짐승의 털을 꼬아서 만든 짚신 모양의 신.
** 이용악(李庸岳): 1914. 11. 23, 함북 경성, 사망1971. 2. 15. 그의 시는 북국 유랑 체험과 가난, 노동으로 지탱했던 유학 체험이 바탕을 이룬다. 초기에는 일제의 수탈로 황폐해진 고향을 배경으로 한 〈북국의 가을〉(조선일보, 1935. 9. 26)·〈두메산골〉(순문예, 1939. 8) 등을 발표했고, 이어 만주 등지를 유랑하는 한민족의 피폐한 삶을 탁월한 시어로 형상화한 〈오랑캐꽃〉(인문평론, 1939. 10)·〈전라도 가시내〉(시학, 1940. 8) 등을 발표했다. 8·15해방 후에는 새나라 건설로의 열려진 가능성과 투쟁을 노래한 〈거리에서〉(신천지, 1946. 12)·〈빗발 속에서〉(신세대, 1948. 1) 등을 발표해 민족시의 다양한 진로를 모색하기도 했다.
월북 후 1952년 조선문학동맹 시분과 위원장, 1956년 조선작가동맹 출판사 부주필로 근무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실현한 유명한 서정시 〈평남관개시초〉(조선문학, 1956. 8)와 가사 〈땅의 노래〉(문학신문, 1967) 등을 발표했다. 그밖의 시집으로 북한에서 〈이용악 시선집〉(1957), 남한에서 〈이용악 시전집〉(1988)·〈북쪽은 고향〉(1989)·〈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1989) 등이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