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제가 여기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내용에서,월남파병이 비도덕적 전쟁이었다는 식의 논의는 일단 접어두고자 합니다.
단순히 베트남전쟁이 우리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거기에 관련된 몇가지의 사실만을 다시 이야기하고 싶을 뿐입니다. 부족하거나 잘못된 점이 있거나 이견이 있으시다면 지적과 비판을 부탁드리겠습니다.
1. 월남 파병은 미국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졌는가?
- 월남전에 관한 대표적인 상식 중 하나는 파병이 월남전에서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던 미국에 의해서 요청되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몇년전에 공개된 미국의 비밀문건이나, 이전의 군사 문건은 이러한 상식에 대한 의문의 여지를 제공해준다.
과거, 미국이 베트남전에 깊숙히 개입하기 이전인 1954년, 베트남을 다시 재 식민지화하고자 싸우던 프랑스를 돕던 미국에게 당시 한국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색다른 제의를 했었다.
그는 군사력을 20개 사단에서 35개 사단으로 증설시키는 재정적 지원을 미국으로부터 받는 대신, 한국은 베트남에 전투병 파병을 할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프랑스는 이를 거절했었다.
다시 시대가 지나서 1960년대가 되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는 케네디에게 정상회담 당시 한국군의 파병안을 제안한다.
그렇다면 그는 왜 한국군의 파병을 제안했었어야 하는 것이었을까?
우선 박정희 정권의 문제는 '정통성' 문제였다. 다시 말하자면 쿠데타로 집권한 정통성이 없는 정부에다가, 그러한 정통성을 보장한다고 소위 명목상으로나마 선전하는 미국정부에 있어서는 탐탁하지 않기까지는 아나더라도, 상당히 껄끄러운 존재였던 것이었다. 사실 혁명공약 1조에 '반공을 국시로 한다.'라고 표기한 것은 이러한 미국의 환심을 조금이라도 사기위한 것이었다.
여기에 악재로 더해진 것이 박정희의 과거 좌익경력인데, 미국정부 및 정보부는 이에 대해 끓임없이 경계를 하고 있었고, 더군다나 1961년 10월에 발생한 '황태성 사건'(박정희의 과거 동료였던 황태성이 김일성의 밀명을 받고 박정희를 포섭하려 했었던 것으로 의심되는 사건)은 박정희정권의 안정성에 커다란 치명타를 줄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제 3공화국 정권은 미국에 외교적 카드로 내세우려 했던 것이 바로 '월남 파병'이었던 것이다.
이에 더욱 문제가 된 것은 미국의 감군요구였다. 1960년대가 되어 제 3세계 국가들이 독립하고 국제적 긴장이 완화되는 가운데, 미국은 이들 국가를 포섭하기 위하여 '분쟁지역'에 대한 군사원조를 줄이는 동시에 제 3세계에 대한 '경제원조'를 늘리려 했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군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었던 미국은 한국정부에 감군을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었다.
사실 1960년대 초는 박정희 정권이 군부를 완전하게 확실히 장악한 시점은 아니었고, 따라서 이와 같은 감군요구를 받아들인다면 군부의 반발을 살 것은 뻔한 이치였다. 하지만 재정적으로 뒷받침해주는 미국의 요구는 무시할 수 없었으며, 때문에 한국군이 재정적 뒷받침을 받을 '밥값'은 한다는 것을 미국에 보여주기위해서는 '미국의 전쟁'이었던 베트남전에 병사들을 파견하는 것 만큼 좋은 해결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박정희는 케네디와의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너무 많은 부담을 지고 있다. 자유세계의 일원으로서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덜어준다.'라고 언급하며 베트남 파병을 제안했었던 것이다. 사실 미국의 요구에 못 이겨 파병한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베트남에 파병한 태국이나 필리핀과 같은 국가들처럼 깃발만 휘날리는 수준의 군대를 파병했지, 30만명이나 되는 인원을 적극적으로 파병한 것을 설명하기에 힘들 것이다.
2. 경제적 이득을 위한 것이었나?
사실 박 정권이 당시 베트남 파병을 경제적 이득을 사유로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외무장관 이동원이 "베트남은 전쟁터이지만 시장이기도하다.'라면서 미국으로부터 최대한의 좋은 조건을 이끌어내기를 권고했을때. 박정희 대통령이 "우방이 위험에 처해있는데, 이해만 따지기는 무리이지 않는가?"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베트남 파병이 무엇때문에 이루어졌는지 그 본질을 비교적 잘 드러내고 있는 일화이다.
사실 제3 공화국 정부가 내세운 것은 경제적 이득보다도 다른 논리였다. 즉 첫째로 '보은론'과 둘째로는 '제 2전선론', 셋째로는 '국위선양론'이었다. 오히려 경제적 이득을 내세우는 것은, 당시 미국정부가 군수물자의 발주를 기대와는 다르게 한국이 아닌 일본에 의뢰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는 설득력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3가지 논리 모두 당시로서는 설득력이 없는 논의였다. 우리의 국력에 비전투원 파병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주장이 제기됨으로서 보은론은 스스로 폐기되다시피 하였고, 제 2 전선론 역시 휴전선에서의 남북 대치에서 한국이 북한에 밀리는 현실에 타국에 병력을 파견한다는 논리 역시 설득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국위선양론은, 바로 국제사회의 반응때문에 그 설득력을 잃었다. 즉 미국의 적극적인 동맹국인 영국,프랑스,캐나다와 같은 국가들마저 참전을 거부하면서 선양의 의미 자체가 의문시 되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제 3공화국 정부는 명목상으로도 경제적인 이득을 주장하지도 않았고, 실제적으로 그럴 의향도 없었으므로 경제적 수혜를 받아내는데에 있어 다소 미흡한 면이 있었다. 이는 다음장의 경제적 이득에 대해서 다시 설명하고자 한다.
3. 베트남전으로 한국이 얻은것 - 경제적 이득.
베트남전으로 인해 한국이 얻은 것은 사실 많았다. 우선 미국은 10억불 가량의 비용을 한국의 군대 현대화 및 지원 자금으로 지불했는데, 한일회담 성사로 한국이 받아낸 차관이 6억불임을 생각한다면 사실 엄청난 규모였다. 더군다나 베트남은 한국 상품의 최초의 시장이기도 했다. 실제로도 경제성장은 베트남전 이전과 비교하였을때 12%나 높게 상승했다. 그러한 점에서 베트남전에서 한국은 경제도약의 밑바탕을 마련했다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엄청난 성과(?) 중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밖에 없다. 즉 군대를 30만이나 파병하고 전사자를 미국 다음으로 많이 낸 국가로서, 그 만큼의 댓가를 확실하게 받아내었는가? 또한 굳이 베트남전에 참전하지 않았다고 해서 베트남 특수를 누리지는 못했을 것인가?
이러한 의문에 근거하여 다른나라들과의 비교를 통해 이러한 의문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대만은 베트남전 동안에 정보요원 및 통역관 등으로 20명의 인원을 파병했는데, 말 그데로 '깃발이나 펄럭이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미국으로부터 얻어낸 수익은 9억달러 정도로, 30만명을 대거 파병한 우리나라보다 1억달러 가량이 적은 금액이었다. 그리고 베트남전에 전투병은 커녕 비전투병 하나 파견하지 않은 일본은 우리보다도 더 많은 수익을 얻어낼 수 있었다.
또한 경제적 이익을 우방에게서 뜯어낼 수 없다는 논리때문에 한국군 장병의 봉급은 열악한 수준이었다. 미군의 6분의 1밖에 안되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태국/필리핀군의 4분의 1, 심지어는 자국 영토내에서 싸우는 남베트남군 보다도 더 적은 금액을 지불받았기 때문이다. 경제적 이득보다는 정치적인 동기가 파병의 주 요인이었으므로 한국군의 처우개선 문제나, 한국의 경제적 이득의 수혜는 밀려났을 뿐더러, 미국에 요구할 수도 없었다. (사실 그나마저 받는 봉급도 국가에서 횡령을 했다.)
한국이 얻은 경제적 이득은 명약관화하지만, 허나 제값을 치루었다고 이야기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베트남전 동안의 경제성장은 이전부터 추구해오던 경제정책의 산물이라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며, 베트남전만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기에는 힘들 것이다.
4. 베트남전으로 잃은 것 - 정치적 발전, 통일의 길
우선 제 3공화국 정부는 베트남전을 통하여 군부를 확실하게 자신의 편으로 두는데 성공하였다. 군부대 장성들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병사들의 공식 전투 수당을 횡령하거나, 미국으로부터 지원되는 엄청난 군수물자를 중도매각한다던지, 지원자금을 횡령함으로써 개인적인 치부를 할 수 있었을 뿐더러,
거기에 미국의 자금지원으로 오히려 국방력이 증대되면서, 감군에서 증군으로 방향이 급선회, 이에 수많은 군사고위직을 창출해 낼 수 있었고, 많은 군부의 요인들을 이 자리에 인선함으로서 금전적,권력적으로 군부를 만족시킬 수 있었고 심지어는 강화시키기까지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정치체계의 경직화였다. 제 3공화국 정권은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 파병을 필두로 하여 미국으로부터 신임을 얻는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에 제 3공화국 정권은 자신감을 얻고, 유신독재로 나아가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원래, 한국전쟁이 끝나고 경제회복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는 다소 설득력을 잃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베트남전은 이러한 반공이데올로기에 다시 힘을 실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남한사회에서 다시 '공산주의의 위협'을 강조함으로서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기재가 되었고, 동시에 이러한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구심점이 되야할' 역할로서 '강력한 지도력과 독재적인 권력'을 정당화시켰던 것이다. 즉 국가가 병영국가로서의 길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쟁을 통해서 권력의 강화를 노렸던 것은 박정희를 위시한 제3 공화국 수뇌부들만이 아니었다. 이것은 북한의 김일성도 마찬가지였다. 북한 역시 한국군의 파병을 '미제국주의자들이 북한을 노리는 단초.'라고 주장하면서 남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에 따른 강력한 지도력의 결집'을 요구하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기재로 이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적 분위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청와대 습격사건, 푸에블로호 납치사건등의 긴장적 행위를 촉발시켰다.
(남한 역시 북한에 이러한 긴장적 사건을 촉발시키지 않았으리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HID,실미도 사건등이 대략 짐작은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구체적인 자료는 없으므로 여기서는 부정하기로 한다.)
이러한 전쟁을 통한 권력의 일당독재화 및 이데올로기의 급진화는 이후 남북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긴장을 촉발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지금의 통일에 엄청난 지장을 초래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라는 점을 생각한다면...베트남전의 결산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것 처럼 긍정적인 영향만 끼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우방으로 생각했다기보다는 1960년대에는, 권력강화를 위해서 미국의 지원이 절실했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당시에 한국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카터행정부가 들어서고, 한국정부의 '정통성' 여부를 걸고 넘어지게 되면서 한-미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고 보고 싶습니다.
이런 1970년대의 한-미관계의 변화는..이전에 비해서 미국의 압력이 강화된데에 비해, 박정희정권의 권력은 오히려 안정되었기 때문에, 서로가 입장을 숙이지 않았고 그러므로 일어난 분쟁이라고 생각하며, 박정희의 미국에 반감은 이러한 분쟁의 산물이라 봅니다. 저의 짧은 소견이니 가르침이 있으시면 부탁드리겠습니다
공화국은 제헌, 개정에 따라 바뀐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이 1 공화국, 장면때가 2 공화국이고 박정희때가 3 공화국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노태우때였나, 그 때가 6 공화국으로 알고 있는데 그 후로 헌법은 개정되지 않아서 계속 6 공화국이라는군요. 문민 정부, 열린 정부... 이것처럼 정부의 수식어구는 바뀌지
그러한 점에서 3천여명 가량의 비전투부대인 비둘기부대의 파병이 이루어졌을때, 우리나라의 국력한계내에서 '보은'은 했다는 이야기가 대세였죠. 지금의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없을 뿐더러, 1960년대 반공시절의 사람들조차도 생각 안한 '보은'이라는 것을 지금에서야 다시 언급하시는 이유는 무엇이신지요?
제가 이 글의 서두에서 '한국지도부가 먼저 파병을 제안했다.'라고 이야기했음에도, '힘이 안되면 빚을 갚아야한다.'(즉 힘있는 미국이 요청했으니 힘없는 한국으로서 어쩔 수 없었다.라는 식의)라는 논지로 주장을 펼치시는 것은, 제글을 제대로 읽어주시지도 않고 비판하시는 것 같군요.
즉, 힘있는 쪽이 갚으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고, 힘이 되지 않는 쪽이 '자청'하고 나선 것이기 때문에, '힘에 밀리는 상황'자체가 성립이 안되었으므로, 힘이 있느냐 없느냐등의 님의 말씀들은 논제를 이탈한 것이라 보고 싶군요.(그리고 '빚'이라 부르기에 적합한지의 여부에도 이의가 있으나 논제를 벗어나므로 자제하죠.)
카터행정부와 박통은 처음부터 사이가 안좋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친인권적인 카터정부와 반인권의 박통과의 어쩔수 없는 충돌이기도 했지만 과거 카터가 상원시절 방한 박통과 만나길 원했지만 당시 카터의 지지율이 낮다는 것을 이유로 박통은 카터를 따돌리고 푸대접해 보낸 전력이 있었죠..
뭐 하나 덧붙여도 될런지요..현대사수업들을때 배운건데요, 베트남 파병으로 인한 피해나 문제점은 정치적인 것말고도 많더라구요.. 첫번째로는 제3세계권으로부터 고립을 당했었다네요.식민지용병역할을 자처했다는..남의 싸움에 끼어든 그런.. 또 고엽제 피해 있잖아요..블루싸이공이란 뮤지컬을 본적있었는데..고엽제 피
해자의 모습을 그린 슬픈 내용이었죠..실제로 이 세상을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얘기라는 것도 가슴이 미어지죠. 이건 우리나라가 피해본 내용이지만 더 끔직한 피해를 당한건 베트남양민들이랍니다.전과를 보고하기위해 무고한 양민들을 죽였데요.우리가 미군의 양민학살에 분노하는 것만큼 그들에게도 상당히 가슴
첫댓글 박정희가 카터 대통령의 방한때 미국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 카터가 화났다던데 이때까지는 미국을 '우방'으로 생각하고 있던건가요?
우방으로 생각했다기보다는 1960년대에는, 권력강화를 위해서 미국의 지원이 절실했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당시에 한국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카터행정부가 들어서고, 한국정부의 '정통성' 여부를 걸고 넘어지게 되면서 한-미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고 보고 싶습니다.
이런 1970년대의 한-미관계의 변화는..이전에 비해서 미국의 압력이 강화된데에 비해, 박정희정권의 권력은 오히려 안정되었기 때문에, 서로가 입장을 숙이지 않았고 그러므로 일어난 분쟁이라고 생각하며, 박정희의 미국에 반감은 이러한 분쟁의 산물이라 봅니다. 저의 짧은 소견이니 가르침이 있으시면 부탁드리겠습니다
하마님께/유신체제는 제4공화국으로 지칭하는 게 어떨런지요. (그것도 공화국이라고 해야 한다면... -_-) 베트남 파병을 부정적으로 보았지만 전에 몰랐던 내용을 알게 된 내용이 많습니다. 고맙습니다.
흐음 그렇군요;; 제 글을 다시 읽다보니 용어 사용이 비일관적이네요;; 앞으로는 유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 ..))
인상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왜 나는 이런 생각을 글로 옮기지 못할까 하는 자책도..
(야사)베트남에서 울나라 군인 아찌들께서 미군들 눈을피해 에무십육에 탄약에 슐탄까지 날라왔다는 사실. 정말 눈물겨운 국방에 일조하려는 몸부림이었습죠. 첨엔 미군도 눈감아주다가 나중엔 제재에 들갔으나 이미 나갈만큼 나간 상태라 ㅎ. 실지로 빼온게 상당하다고 하더군요. 당시만 해도 거지나라라, 비참했던 과거.
부모님// 거시적 역사관이란 몇몇 눈물겨운 '감동스런(?)' 이야기는 참고로 하되, 전체적인 사실과 기타 제반사항을 따져봄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봅니다. 그리고 그 '눈물겨운'이야기만 바라보는 것은 역사관이 아니라 '감상'에 더 가까운 것이라 봅니다. ^^
잘 읽고 갑니다. ^^ 새롭게 따져보며 공부가 되는군요. 감사합니다.
공화국은 제헌, 개정에 따라 바뀐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이 1 공화국, 장면때가 2 공화국이고 박정희때가 3 공화국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노태우때였나, 그 때가 6 공화국으로 알고 있는데 그 후로 헌법은 개정되지 않아서 계속 6 공화국이라는군요. 문민 정부, 열린 정부... 이것처럼 정부의 수식어구는 바뀌지
만 말입니다.
네. 그러한 점에서 유선헌법으로 개헌을 시행했던 1970년대의 박정희 행정부는 제 4공화국이라 표기함으로서 용어의 일관성을 추구했었어야 하는데...지적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몰운대님, 매마다 보여주시는 관심에 역시 감사를 표합니다. ( ..))
국제관계도 은원이 잇지요 우리는 625의 미군참전으로 미국에 대해정치적 군사적 채무가 잇지요 국제고나게에서 그런건 치명적이지요 임진왜란의 명군참전 으로 생긴 채무을 아세요
그채무덕에 광해왕은 15000천의 대국은 만주에 파견해야햇지요
또 용병이라고 욕하는거 우리역사책에 조선조정이 처의 강요에의해 러시아와 청과의 국경분쟁에 지우너군을 파병한 것을 우리국사책은 나선정벌이라하지요 그러면서 자랑스럽게 서술하지요 ,자국사를 비하하는것은 못된버릇이지요
청과 명과 같은 나라의 관계와 조선의 관계가 지금의 한미관계와 같습니까.. 그리고 요즘 누가 나선정벌을 좋게 기술합니까.. 오히려 효종의 북벌정책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으로들 말하는데요.
^^ 완암님. 님께서 말씀하시는 '보은론'은 1960년대에서도 '잠깐' 나온 이야기 였습니다. 그리고 그때 당시의 우리나라의 여론은, 국력면에서나 국방측면에서 파병은 무리이거나 수천명 단위의 파병만이 가능하다는 여론이 대세였고.
그러한 점에서 3천여명 가량의 비전투부대인 비둘기부대의 파병이 이루어졌을때, 우리나라의 국력한계내에서 '보은'은 했다는 이야기가 대세였죠. 지금의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없을 뿐더러, 1960년대 반공시절의 사람들조차도 생각 안한 '보은'이라는 것을 지금에서야 다시 언급하시는 이유는 무엇이신지요?
ㅋ 너무 글자가 많이 틀렷군요 (나선정벌 아 그런가요 보은이 아니랍니다 힘에 밀리는거지 고구려 같은경우는 청이나 왕망의 신나라의 출병요청을 단호하게 거부햇지요) 힘이 안되면 빚을 갚아야하는거고 힘이되면 채무도 탕감받는게 국제사회이지요
제가 이 글의 서두에서 '한국지도부가 먼저 파병을 제안했다.'라고 이야기했음에도, '힘이 안되면 빚을 갚아야한다.'(즉 힘있는 미국이 요청했으니 힘없는 한국으로서 어쩔 수 없었다.라는 식의)라는 논지로 주장을 펼치시는 것은, 제글을 제대로 읽어주시지도 않고 비판하시는 것 같군요.
즉, 힘있는 쪽이 갚으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고, 힘이 되지 않는 쪽이 '자청'하고 나선 것이기 때문에, '힘에 밀리는 상황'자체가 성립이 안되었으므로, 힘이 있느냐 없느냐등의 님의 말씀들은 논제를 이탈한 것이라 보고 싶군요.(그리고 '빚'이라 부르기에 적합한지의 여부에도 이의가 있으나 논제를 벗어나므로 자제하죠.)
청천님// 카터가 화났던 것은 정상간에 회담에 있어 전에 내용과 수위에 있어 어느 선까지 할 것인지 미리협약하는데 이를 박통이 일방적으로 어기고 혼자 미군철수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고 합니다.. 이에 카터는 딴청을 하며 두 정상의 자리는 갈때까지 가게됐죠
카터행정부와 박통은 처음부터 사이가 안좋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친인권적인 카터정부와 반인권의 박통과의 어쩔수 없는 충돌이기도 했지만 과거 카터가 상원시절 방한 박통과 만나길 원했지만 당시 카터의 지지율이 낮다는 것을 이유로 박통은 카터를 따돌리고 푸대접해 보낸 전력이 있었죠..
뭐 이런 개인감정이 당시 정상회담이 뒤틀린 이유가 될수는 없을지 몰라도 어느정도 영향을 끼치긴 했을거라 생각됩니다
당시 미국이야 당연히 우방이었지만 카터가 주한미군철수 내지 축소 지향했고 박통은 막무가내로 막아보려 한거죠
뭐 하나 덧붙여도 될런지요..현대사수업들을때 배운건데요, 베트남 파병으로 인한 피해나 문제점은 정치적인 것말고도 많더라구요.. 첫번째로는 제3세계권으로부터 고립을 당했었다네요.식민지용병역할을 자처했다는..남의 싸움에 끼어든 그런.. 또 고엽제 피해 있잖아요..블루싸이공이란 뮤지컬을 본적있었는데..고엽제 피
해자의 모습을 그린 슬픈 내용이었죠..실제로 이 세상을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얘기라는 것도 가슴이 미어지죠. 이건 우리나라가 피해본 내용이지만 더 끔직한 피해를 당한건 베트남양민들이랍니다.전과를 보고하기위해 무고한 양민들을 죽였데요.우리가 미군의 양민학살에 분노하는 것만큼 그들에게도 상당히 가슴
아픈 과거이겠죠. 한국인 2세 문제도 있어요..우리나라가 겪은 것과 매우 흡사하죠..뭐라 할말이 없습니다. 앞으론 이런 일 만들지 않도록 모두의 노력이 필요할것같네요..저의 짧은 생각이었습니다.
mystory님//네. 부족한 글에 지적과 좋은 말씀을 덧붙여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