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칠한 생애
“목사님! 할머니 따님, 오늘 화장터라 하네요.”
주일 강단에 오르기 전, 정 권사님의 문자였다.
오는 길에 대문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자 전화한 모양이다.
“자식들 고생 덜 시키고 떠난 게 낫겠어요”
한 말씀에 별세를 알리며 짠한 눈물을 훔치셨다.
세 자녀 앞세운 것 기막힐 노릇인데 큰딸마저 가슴에 묻었다.
하늘이 시든 국화 빛 얼굴로 덧칠함 같았다.
가을 어깨가 무거워 ‘마지막 잎새’를 그리고 싶었다.
‘소설 속 폐렴 걸린 소녀가 담쟁이 잎 다 떨어지면 죽을 것 같았다.
폭풍우 몰아치는 밤,
마지막 잎이 사라지지 않아 병세가 호전됐다.
폭우 속에 담쟁이 잎 벽화를 그려놓고 폐렴으로 떠난 노인 덕이었다.
노 화가의 헌신이 낙심한 소녀에게 소망을 안겼다.’
손자 숙제로 알게 된 시처럼 혼자가 아니길 원했다.
혼자가 아니야 –우승경-
‘싹둑,/ 잘려 나가/ 밑동만/ 남은 나무//
버섯이/ 촘촘하게/ 옷을 입혀 주는 중이다’
하지만 예배 시간 ‘나 어찌합니까’ 특송 가사 중
‘이 죄인을 용서해 주소서’ 가슴을 후볐다.
암 투병 중일 때 딸이 노모를 급하게 불려 두 번 모셨다.
구면이라 복음 전하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다.
보훈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는 날도 뵙고 싶었다.
그러나 본인 “몰골을 보이기 싫다”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벽을 뚫지 못하고 참 빛으로 인도하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손주들이 빵으로 때우며 딸 간병하는 측은함에 밥을 지어 날랐다.
그런 노모의 애씀을 뒤로하고 별로 하늘에 박혀 버렸다.
어떤 상황인지 궁금해 견디기 어려웠다.
현장으로 가려고 서둘렀다.
벌써 안장하고 식사 중이라는 전갈에 집으로 오시길 기다렸다.
지난주 정 권사님 전화였다.
“목사님 옛날 방앗간으로 시골에서 쌀 배달되면 가시게요.
그 집 쌀 좋아서 아는 사람만 가져가요.”
연락받고 가면서 박 권사님도 합세하여 일 년 치를 팔았다.
골목 할머니가 주문한 찹쌀까지 실었다.
인심 나는 곳이라 탱자만 한 귤 봉지! 생긴 건 물 짠데 맛은 괜찮았다.
도중에 “목사님! 식사하고 가시게요.”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애를 먹었지만 오랜만에 국밥집에 앉았다.
팔팔 끓는 뚝배기 콩나물!
새우젓을 넣었더니 감칠맛이 났다.
속 시원하고 부담 없는 값이라 좋았는데 다음 달 인상 가격표가 밟혔다.
할머니 도착할 즈음에 갔다.
초췌함으로 홀로 계셨다.
십시일반으로 거둔 조의금을 전할 때 입을 여셨다.
“목사님! 내가 먼저 죽어야 한디 독한가 봐라.
이런 꼴 보고도 산목숨인 것이요.
남동생이 세상에 누님 같은 분 없을 거라던데 딸은 편히 갔어요.
장례는 손자 직장 상조회에서 맡아 나흘 장으로 수월하게 치렀네요.
조문객이 겁나게 왔어요.
부조도 많이 들어오고요.
교회 안 나온 아이들이라 목사님께 연락 못 했네요.
아그들이 엄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몰라요.
엄마 향취 맡는다고 환자복까지 챙겼어요.”
딸 잃은 단장(斷腸)의 어머니와 예배를 드렸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찬송하고 말씀을 나눴다.
‘힘에 지나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고후 1:8)’
바울 고백처럼 하나님만 의지하길 원했다.
상처보다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길 바라며 손을 얹었다.
“할머니! 잎사귀 진 험악한 세월, 지킨 자리가 우리 힘이네요.
끝까지 살아 내세요. 가까운 목사 찾으면 어려운 일 도울게요.”
긴 장례에 상처 아물게 한숨 푹 주무시길 원했다.
다음 날 또 안부를 물었다.
“손주들과 묘지 다녀오는 길에 밥 먹었어요.
병원 들러 두 달 치 입원비 개렸고요.
수고한 간호사들과 눈물바다 이루고 왔네요.
손주들이 조석으로 전화하고 집에 와 살자 하네요.”
안타까움에 준비된 시설에 입소하여 보호받길 권했지만 생각이 없었다.
주택은 겨울나기 힘들기에 걱정이 기다렸다.
수요 예배 자리를 지켜 권사님들이 손을 잡고 위로하셨다.
“식사 잘하시라” 권하는 말도 들렸다.
이튿날 전화에 “목사님! 텃밭에서 무시 잎 싹 뜯고 있어요.
어제 아그들이랑 딸 묘지에 나무 열두 그루 심었어요.
풀 매고 물 주러 자주 가야겠어요.
돌아다닝께 밥은 묵어요.”
상실의 아픔에 독수공방하지 않아 맘이 놓였다.
최근 기독병원에서 전립선 수술한 지인이 계셨다.
근무 중인 등대교회 사모님께 알렸다.
위로하고 기도하며 “교회 열심히 나가시라”는 권면이 고마웠다.
그분 전번을 몰라 사모님께 물었다.
“간호사실 지나 끝 방이라”는 말대로 갔다.
공동 간병인을 쓴 입원실이었다. 김재능 이름표 앞에 섰다.
뜻밖의 방문을 다정다감하게 맞았다.
본 죽과 봉투를 내밀며 수술 결과를 물었다.
만족하지만 소변 줄을 제거한 상태라 자유롭지 못해 누워 계셨다.
빠른 쾌유 위해 기도하는데 아멘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목사님! 바쁜 시간 문병 감사합니다.
자주 뵙고 맛있는 것 대접하고 싶네요.”
속정을 드러내 놀랐다.
위로가 되는지 아들, 며느리에게 전하겠다는 거였다.
일주일 후 모르는 번호가 떴다.
그분 목소리였다.
화순 전문 재활 요양병원에서 치료하고 연락하겠단다.
“목사님과 식사하고 싶다”라고 재차 전하셨다.
한번 돌아본 일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밥상머리 교육이 몸에 밴 분으로 가까이 접하고 싶었다.
인사는 세상살이의 기본이다.
인간관계는 정확한 인사다.
삶의 중요한 부분이기에 두루뭉술하거나 유야무야하면 안 되는 법이다.
치과 동행한 권사님께서
“자상히 살펴 주셔서 말로 할 수 없다”는 문자를 보냈다.
“나이 먹은 내가 머라고 챙겨 줘서 고맙다”는 할머니 말에 되레 힘이 났다.
2024. 10. 26 서당골 생명샘 발행인 광주신광교회 이상래 목사 010 4793 0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