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받는 통이 불상 앞에!! 법정스님 《부처님 전상서”》-2
■황색의자(黃色椅子) 부처님! 세상에서는 「벽감투」란 말이 있습니다. 설명할 필요도 없이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갑자기 얻어 걸린 높은 벼슬을 말한 것입니다. ※벽감투-“벽에 걸어 놓은 감투”라는 뜻으로, 명예직이나 실질적인 권한이 없는 직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예를 들어, 명예직으로만 존재하고 실제로는 권한이 없는 직위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그것이 세속에서는 오욕(五慾)중에 하나라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속(世俗)을 여의었다는 당신의 제자들도 그 「높은 자리」에 앉아 버티기를 세속사람들 못지않게 좋아하는 것을 요즈음 흔히 봅니다. 마치 그런 감투나 뒤집어 쓰기위해 불문(佛門)에 들어온 것처럼-. 한번 그 자리를 차지하면 자기 분수도 돌아보지 않은 채 노랗게 탐착(貪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권을 탐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 의 무리들처럼, 말로라도 세상의 욕락(欲樂)을 떠나 출가수도(出家修道) 한다는 이름에게 무슨 「장(長)」이 그리도 많습니까?
그나마도 솔직하지 못한 것은, 그런 일이 전혀 자의(自意)아닌 타의(他意)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개중에는 개인의 수업을 온전히 희생하고 대중의 외호(外護)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보살(菩薩)의 화현(化現) 같은 이도 없지 않습니다.
또 오늘날의 사회구조로 보아 본의는 아니나마 그 긴 의자에 걸터앉아야 하고 사원(寺院)의 의무를 안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기왕 출가의 길에 들어섰으면 어디까지나 불제자된 분수와 출세간적(出世間的)인 입장에서 사심 없이 공정하게 집무해야 할 것임에도 삼보의 정재(三寶淨財)를 함부로 탕진하고 나아가서는 승려로서의 본분을 이탈한 채 사회적으로 불미스런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사례를 그동안 드물지 않게 보아오고 있습니다.
기본재산이 좀 여유 있거나 수림(樹林)이 우거진 절은 서로가 차지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날뛰는 꼴을 우리는 불행하게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 저의는 얼마 안가서 결과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희사함(喜捨函)을 치워라 부처님! 당신의 성상(聖像)이 모셔진 법당에 들어서면 맨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자비하신 당신의 <이미지>가 아니라, 입을 딱 벌린 채 버티고 있는 불전통(佛錢桶)이라는 괴물입니다.
이 괴물의 위치는 바로 당신의 코앞입니다. 시정(市井)이나 산중(山中)에 있는 절간을 가릴 것 없이 그것은 근래 사원의 무슨 악세서리처럼 굳어져 버렸습니다. 당신이 이것을 내려다보실 때마다 얼마나 난처해 하실까를 당신의 제자들은 눈이 어두워 못보고 있는 성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어떤 곳에서는 이런 <간판>까지 내걸고 있습니다. 「돈을 넣고 복을 비는 곳」이라고-.
49년간 당신의 설법(說法)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단 한번이라도 계셨습니까? 복덕(福德)이라는 게 화폐로써 척도(尺度)할 그런 성질의 것이겠습니까?
당신의 가르침이 사교(邪敎)가 아닌 무상(無上)한 정법임에도-. 누가보든지 낯 간지러운 이 괴물은 시급히 철거 되어야겠습니다. 적어도 당신의 상(像)이 모셔진 코앞을 비켜서만 이라도-. ▶극락행(極樂行) 여권(旅券) 부처님! 극락행여권(極樂行旅券)을 발급하고 있는 데가 있다면 세상에서는 무슨 잠꼬대냐고 웃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저 암흑(暗黑)의 계절 중세(中世)가 아니라, 오늘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일입니다.
그것도 푸닥거리나 일삼는 <무당집>에서가 아니라, 이 나라에서도 손꼽는 대찰(大刹)들에서 버젓이 백주(白晝)에 거래되고 있으니 어떻겠습니까? <다라니>라는 것을 찍어서 돈을 받고 팔고 있습니다. 야시장도 아닌데 이런 넔두리까지 겹쳐서 「극락으로 가는 차표를 사가시오」하고-. ※다라니(陀羅尼)-한량없는 뜻을 지니고 있어 모든 악한 법(法)을 버리고 한량없이 좋은 법을 지니게 한다는 불교 용어. 당신의 옷을 입고 당신이 말씀해 놓은 교리를 공부하는 이른바 당신의 제자라는 사람들이, 당신을 파는 이런 짓을 얼굴하나 구기지 않고 뻔뻔스리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교(邪敎)에서나 있음직한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소행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부처님!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런 샤머니즘(shamanism)이 횡행해야 되겠습니까? 한동안 마치 중세 구라파에서 한동안 치부에 여념이 없던 살찐 「카톨릭」의 성직자들이 「면죄부」라는 부적을 팔던 것과 너무나 흡사한 짓이 아닙니까?
이것이 그쪽에서는 종교정책의 한 불씨가 되었다고 하지만, 오늘 이 고장에서는 이 비슷한 일이 하도 많기 때문에 감각이 마비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당신의 가르침이 이 나라에서는 가끔 억울하게도 미신(迷信)과 동일한 푸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실로 낯을 들 수 없는 일입니다. ■불사(佛事)의 정체(正體) 부처님! 불사(佛事)라는 행사가 요즘에는 왜 그리도 많습니까? 걸핏하면 「백일기도」 「만인동참기도」 「보살계삼림」 「가사불사」탑에 물방울 정도 튀기는 「세탑불사」
아이들 장난도 아닌데 위조지폐까지 발행해가면서 하는 도깨비놀음 같은 「예수재(豫修齋)」등등......
이밖에도 일찍이 보고 듣지도 못한 별의별 희한한 불사(佛事)들이 정말 비온 뒤의 죽순처럼 여기저기서 잇따라 거행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불국세계가 도래하는 게 아니냐 싶게-. 불사(佛事)라는 본래 뜻은 부처님의 교화를 가리킨 것으로서 개안(開眼).상당(上堂).입실(入室).안좌(安座).염향(拈香)등에 주로 쓰인 말인데, 요즘에는 흔히 승려들의 일용사(日用事)에로 추락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도 불사(佛事)의 본래 뜻에 합당한 불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이 가운데에는 흔히 불사(佛事)란 이름을 내걸고 실속은 엉뚱한데 있는 불사(佛事) 아닌 「불사(不事)」를 자행(恣行)하고 있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구도자(求道者)의 양심에 비추어 보아 떳떳할 수 있는 법다운 불사가 얼마나 될는지 지극히 의심스럽습니다.
「중이 돈이 아쉬우면 멀쩡한 축대라도 헌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결코 웃어넘길 수 만 없는 가슴을 찌르는 통절한 아이러니(irony)입니다.
그럴듯한 이름을 내건 <00불사>라는 모임이 있을 때면, 으레 그 끝은 두둑한 「권선책(勸善冊)」이 나돌기 마련입니다. 한꺼번에 몇 가지씩 결코 「희사(喜事)」일수가 없도록 반강요하는 눈초리를......
재화(財貨돈)를 다수 내놓으면 흔히 말하기를 「신심(信心)이 장하다」고 합니다. 재화(財貨)가 신심(信心)의 바로미터(barometer)일수가 있겠습니까?
불사(佛事)라는 미명(美名)하에 신도를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솔직히 말한다면 오늘날 한국불교의 순진한 신도들은 교화(敎化)를 입기보다는 경제적으로 출혈적인 혹심한 수탈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돈도 없는 사람은 절에도 나갈 수 없더라」는 비불교적인 서글픈 탄식이 나오는가 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전체 승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그 가운데서 수도(修道)에 전념하는 의젓한 구도자가 몇이나 되는지, 관계기관인 중앙총무원에서도 집계를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에 반해서 포교당(布敎堂)을 비롯해서 신도들을 자주 접촉하고 있는 절간에서는 신도의 축원카드가 어느 시청의 호적 사무 못지않게 질서 정연히 정비되어 있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극성스러운 곳에서는 카드에 금전출납의 기록란까지 만들어 놓아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도록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이런 짓을 포교(布敎)의 사명처럼 착각하고 있는 두꺼운 안면신경을 가진 당신의 제자들이 허다합니다. 불사(佛事)라고 당신의 이름을 팔아 자행되는 그 이면에는 얼마나 셈빠른 타산이 오르내리는지, 부처님도 아시게 되면 얼굴을 붉히시리다.
속이 유릿속처럼 빤히 들여다보이는데도 이 어설픈 수작들은 휴일이 없습니다. 부처님! 요즘 항간에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파라독스(parado)가 떠돕니다. <큰스님>의 체중이란 법력(法力)이나 도덕의 비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돈 많은 신도들을 얼마만큼 확보하고 있느냐에 달렸다고...... 당신의 가르침을 받기위해 귀의(歸依)한 순박한 신앙인들을 마치 하나의 재원(財源)으로 착각하고 있다니...... 부처님! 불사(佛事)라는 말을 이 이상 더럽혀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것이 불사(不事)이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정말로 시급하고 중요한 불사라면, 한시바삐 탐욕과 무지의 탈을 벗고 또한 벗겨주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부처님 전상서를 읽은 소감 필자 법정스님은 이 글을 마치는 끝에 가서 「지나치리만큼 무차별한 사격을 가한 것은 우리들이 당면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라는 뜻에서이고 또 하나는 그 누구도 아닌 제 자신의 아픈 곳을 향해 자학적인 사격을 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글을 쓰게 된 동기를 다시 밝히고 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질병을 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코 누구도 질병에 걸리지 않았다고는 단언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질병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길목까지 잃고 있다면..... 응당 우리는 내가 서 있는 발을 돌아보고 방향을 찾아야 할 것이며, 또 자기의 생명을 깍아내리는 병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부처님에게 드리는 아픈 참회와 함께 앞으로 나아갈 자신(모든 불자를 포함한)의 방향과 진단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편집자>
농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