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67) 시의 언어 구조 - ⑤ 병치구조/ 문학박사, 동아대 명예교수 신진
시의 언어 구조
네이버블로그/ 병치, 이름만 어렵지 내용은 쉽다!
⑤ 병치구조
대부분의 시는 선조구조와 병치구조가 혼합, 교차, 반복, 융합되어 그 언어구조를 형성한다.
극단의 병치구조는 이론상으로나 존재할 수 있다.
병치구조 중심의 시는 언어가 순차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던져지듯 방치된다.
개별적인 이미지나 정황들이 표면적 연결고리 없이 내뒹굴면서 중심계기(Leitmotif)에 의해,
특정의 의미를 향해 합생(合生)하기 때문에 서로 길항하며 협동하고 타협해 나간다.
선조구조의 시에 비해 당연히 의미 해석이 순조롭지 않다.
읽기를 위해서는 개인적, 사회역사적 지표들에서 통일성을 찾아야 한다.
휠라이트가 병치비유란 병렬과 통합(systhesis)에 의해 새로운 존재를 창조한다고 한 경지를 향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우리가 생명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조화라기보다 ‘상보성(相補性)’이다.
생명체들은 고정된 모습으로 형성돼 있는 것이 아니라(선조구조처럼)
각각이 새로운 ‘다발’로 변화하며 새로운 종을 만들며 진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병치구조는 선조구조에 비해 보다 입체적으로 진화한 구조라 할 것이고,
최소한 선조구조와 함께 복합적 생명의 인식과 해명을 위한 요긴한
양대 축을 이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병치구조 역시 시문적 병치와 비문적 병치구조로 나눌 수 있다.
1) 시문적 병치구조
개인적인 통계에 의하면,
시문 병치구조는 독자의 호응도 면에서 성공률이 가장 높은 언어 구조라 할 수 있다.
언뜻 떠오르는 시들만 해도,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
김소월의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조지훈의 「승무」,
김동명의 「내 마음은」,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 등등 고전이 되다시피 한 시가 많다.
기반적 의미와 변용적 의미의 혼합에 의해 비교적 해석이 용이한 행과 연이 독자적으로 병치되고
이들이 내면에서 종합되는 과정에서 시적 긴장이 증폭되고 독자의 주의 환기가 일어나서일 것이다.
시의 병치구조라 해서 반드시 병치구조로만 일관하지는 않는다.
선조구조와 혼합되어 쓰이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다.
귀퉁이가 떨어져나간
반닫이 문짝을 열자
백 년도 채우지 못한 엄마가 쏟아진다
떨어진 뉴똥치마를 기워 만든
빛바랜 보자기 속에
돌돌 몸을 말고 누웠다 후두둑 잠을 깨는
빳빳한 몇 장의 지폐와
뚜껑도 열지 않은 박하분통
색실에 꽁꽁 묶인 민무늬 쌍가락지
오래된 것에서 새것 냄새가 난다
한 번도 차지 않은 손목시계는
어느 해, 좋은 날이었을까
나란히 포개진 바늘이 떨어질 줄 모른다
물오른 순간이 박제된 시진첩 속
수줍은 신랑과 각시는
드러내놓고 벽에 기대거나 경대 위에 앉은 적 없이
장롱 아늑한 곳에서
수십 년 신방만 차리고 있다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몸이 빠져나간
옷걸이에 고스란히 걸려 있다
한눈 판 적도 없이
고물이 되어버린 엄마가 겨울 햇살 같은
부드러운 맨살을 드러낸다
한 번도
바람 난 적 없는 엄마가
제대로 바람을 만나고 있다
―한보경, 「유품(遺品)」 전문
유품을 챙기는 과정이 여러 정황으로 병치되고 있다.
도입부 1, 2, 3행,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도입부와
그로 인한 유품 정리라는 점에서 선조적 출발을 보이는 듯하다가
4행부터는 망자의 유품을 통한 회상과 그리움이 하나하나 병치되고 있다.
보자기 속에 꼬깃꼬깃 저장되어 있는 몇 장의 지폐와 박하분통,
바람 쐴 여유를 갖지도 못한 쌍가락지와 손목시계,
그들이 망자의 알뜰한 가정 살림살이며 내밀한 부부애를 엿보게 한다.
사계절 옷이 옷걸이에 걸린 것처럼 집안의 지킴이가 되었던 어머니가 사후(死後)에야 나들이를 한다는,
동양적 사생관(死生觀)에 의한 심리적 정화과정이 차근차근 병렬되고 있다 하겠다.
2) 비문적 병치구조
병치구조는 흔히 비문과 어울린다.
비문은 으레 비논리적인 내용을 담기 마련이어서 독자로 하여금 의미 파악은 힘들게 하지만
내면의 분위기를 상징하기 용이하고,
시적 긴장과 휴지를 통한 침잠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용이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을 포함하는 전위 표방의 시인들이 즐겨 쓰는 구조이다.
우리 근대시사에서 이 계열의 원조 격인 시인을 찾는다면 조향 시인을 들어야 하리라.
그의 대표적인 시 「바다의 층계」, 「어느 날의 MENU」, 「검은 SERIES」, 「검은 신화」,
「하얀 전설들」, 「목요일의 하얀 조골(助骨)」, 「디멘쉬어프리콕스의 푸르른 산수」,
「샅으로 손을 내미는 소녀는 밤의 톱니바퀴에 걸려 있다」
등등 많은 시가 의미론적 비문 병치구조를 보이고 있다 할 수 있다.
그 후예들이 적지 않다.
노랑 안에서 새빨간 뱀 한 마리가 나의 침대를 차지하고
파랑 속에는 막 불타오르는 꽃나무들
새들은 빨강 안에서 건성으로 노래한다
검정 속에는 복면을 한 아버지가 누이의 스커트를 입은 채 잠이 들고
초록 안의 어둠 속에는 늙은 개와 비밀을 한 가지씩 털어놓을 때
노랑 속의 나의 눈은 멀고
파랑 안의 장미는 녹고
때를 기다리면 시간은 순간처럼 지나가서
꽃 한번 피워 보지 못하고 시들어버렸지만
44구경. 한때 그 험한 녀석을 내가 키웠지 화분이야 나는 화분이었어
늙은 개는 이렇게 말하다
새들은 불타는 숲에 모여 차가운 눈빛을 모으고
초록, 화분에 숨어 올려다보는 검정 속의 하늘
전진하는 눈(雪).
―황병승, 「겨울―홀로그램」 전문
열네 행이 대부분 규범 파괴적인 비문이다.
시인의 어떤 트라우마 또는 콤플렉스에 의하여 정상적인 시문을 이루거나
선조적인 차원에서 연결되지는 못한 것이다.
시인의 내면에 연상되는 선택적 자질들,
또는 언어감각에 의한 우연한 언어들이 생경하게 유희적으로 병치된 것으로 보인다.
말 안 되는 말을 말이 되는 양 나열한 비문들.
‘복면을 한 할아버지, 비밀, 새빨간 뱀 한 마리, 몰래 키운 44구경의 권총,
녹는 장미, 시들어 버린 꽃’―이들이 환상적 분위기를 풍기면서
각각 ‘침대를 차지하고, 불타오르는 꽃나무, 건성으로 하는 노래, 잠이 들고,
비밀을 털어놓고’ 등 비교적 현실적 이미지들과 우연적으로 뒤섞이며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생경한 의미, 새로운 충격을 시도한다.
화자는 가족 관계에서 입은 상흔, 억압된 자아, 아버지(상징계)에 대한 적의,
좌절된 욕망 등을 나열하고 있는 듯도 하다.
이런 시의 새로움이란 언어들이 상호 연계되기보다 상호 충돌할 뿐,
통일적인 맥락은 호의(好意)를 전제로 읽더라도,
추상적인 분위기에 의해 겨우겨우 지탱될 수 있을 뿐이다.
동호인들 내에서는 문화적 안목과 실험성을 인정받겠지만
독자의 마음에 감동을 전하기는 어렵다는 한계,
특정의 논리를 시로 표현한, 수단으로서의 시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따위가 따라다닐 수 있다.
아무튼 시문과 비문, 선조구조와 병치구조의 범주와 그 사이의 간극은 무수한 언어구조 생성의 근거가 된다.
시의 언어 표현은 시적 체험의 표현이다.
딜타이(Wilhelm Dilthey)는 그의 만년의 저작 『정신과학에서의 역사적 세계의 구성』의 제 3권 1부에서
‘체험―표현―이해’를 연속된 같은 쌍의 정신 양상으로 보았다.
표현이란 의식적인 의도에 의한 것만이 아니고
무의식적인 차원까지 포함하여 이루어짐으로써 작가의 개성을 드러낸다.
의식 속의 것만이 아니라 무의식적 체험마저 형상화하고 이해함으로써
이의 구조는 무수히 방만하고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비문병치구조에 가까우면서도 표현이 창의적으로 구사되는 경우에도,
비문인지 시문인지, 병치구조인지 선조구조인지, 봉합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울 수 있다.
눈이 마당을 쓴다
빗자루로 마당을 쓴다
마당이 마음을 쓴다
마음이 벌판을 쓴다
하얀 벌판이 허공을 쓴다
허공이 하늘을 쓴다
―신규호, 「마음·3」 전문
첫머리의 두 행까지는 그래도 정상의 시문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 뒤로 가면 의미론적인 비문에 이른다 할 밖에 없다.
혼합형이다.
언뜻 말이 되지 않는 듯하지만 특정의 내적 지경을 미학적으로 겨냥하고 있음을
행마다에서 알아차릴 수 있다.
눈이 내리는 날, 빗자루로 마당을 쓸 긴 쓸지만 눈은 여전 내린다.
쓸린 마당은 마음을 닦아내자 마음은 벌판을 쓸어낸다.
벌판이 눈에 덮이는 모습은 마음으로 쓸어낸 벌판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어서 하얀 벌판이 허공같은 무위(無爲)의 경지 또는 세속의 모든 일들이
허망한 지말무명(枝末無明)같은 것임을 각성하게 한다. 이렇게 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각각의 행은 각각의 이미지를 가진 일견 병치구조인 동시에 이미지의 도미노 현상을 읽듯
‘눈→빗자루→마당→마음→벌판→허공→하늘’ 등으로 연쇄된다.
재규정을 한다면 선조구조의 연쇄내지 비약구조라 할 수도 있겠고
병치의 연쇄구조라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시의 언어구조의 유형도 실제에 있어서는 규정을 뛰어넘을 만큼 다양하고 다채롭다.
실재란 원래 언어에 갇힐 수 없는 경지에 있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몇 가지 유형으로 모든 현상을 확정하고 구분할 수 없기도 하다 하겠다.
첨언하자면, 정상 시문의 변용적 의미와 비문의 차이는 동일성지향이냐,
차이성지향이냐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시문의 변용성은 비교와 치환을 통해 유사성의 범주에서 의미를 연상하게 하는 한편,
비문은 언어의 선택에서부터 의미론의 차이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수준을 벗어난,
생경하거나 단절적이거나 불합리한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 ‘차이 나는 시쓰기, 차유의 시론(신진, 시문학사, 2019.)’에서 옮겨 적음. (2024. 7.18.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67) 시의 언어 구조 - ⑤ 병치구조/ 문학박사, 동아대 명예교수 신진|작성자 화룡이